
2편(링크)에 이어 계속됩니다.

활동가 윤미향
금성무스케잌(이하 '금'): 정대협 활동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가 뭔가요?
윤미향은 '위안부' 운동의 역사 그 자체다. 윤미향이 어떤 길을 거쳐왔는지 짚어보는 건 중대한 의미가 있다. 또한 친일 수구세력이 어떻게 윤미향을 공격했는지도 알아보려 한다.
윤미향(이하 '윤'): 80년대만 해도 일본 남자들이 한국에 기생 관광을 많이 왔어요. 한국교회 여성연합회를 중심으로 여성들이 김포공항에 나가 피케팅도 했죠. 기생관광 반대 운동은 박정희 때부터 계속 되었는데, 유신정권의 서슬 퍼런 탄압 때문에 잠시 수면 아래로 들어갔죠. 그리고 전두환 정권 들어 기생관광 반대 운동은 다시 적극적으로 시작되었어요. 1988년도에 제가 자료 하나를 만들었어요. 기생관광의 피해자가 된 사례집이었죠. 제 고향 친구들과 사례가 너무 비슷했어요. 제 친구들도 시골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로 돈 벌러 갔거든요. 기생관광 피해자들의 사례를 보니, 그렇게 시골에서 도시로 돈 벌러 간 여성들이 ‘돈 더 벌게 해줄게’ 라는 말을 듣고 갔더니 일본 사람을 상대로 하는 성매매 관광이었다는 이야기를 그때 접하게 되었죠. 행사장을 쫓아다니기도하고 그렇게 기생관광 반대 활동에 함께 하면서 청년 시절을 길진 않지만 함께 했어요.

출처 - (링크)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국가 차원에서 매춘을 외화벌이의 수단으로 활용했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4~50년 전 일이다. 그러니 '위안부'도 으레 있을 수 있는 그런 일 정도로 취급 당했다.
윤: 일제 때는 우리가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본에 강제로 끌려갔다 하지만, 이제는 해방이 되었는데 어떻게 자국의 국민을, 여성을, 딸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 관광객의 성 착취물로 국가가 내어줄 수가 있는가? 에 분노했어요. 그런 나라여서 부끄럽기도 하고요.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내 친구 같은 아이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돈 벌러 왔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자책감 같은 감정이 저를 이 일로 뛰어 들게 만들었어요.
근데 중간에 그만두고 싶을 때가 참 많았죠.
이런 이유로 윤미향의 '위안부' 운동이 시작되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성착취. 과연 이래도 되는가, 이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윤미향의 인생을 결정지었다.

1992년, 정대협 간사로 활동하던 20대 윤미향
출처 - <윤미향 의원>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다
금: 그때가 언제인가요?
윤: 할머니들한테 도둑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예를 들면, 할머니가 빨간 빗을 갖고 있어서 할머니 빨간 빗 참 예쁘다. 그러면 쟤가 내 빗을 탐내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섭섭하기도 했지만, 세상을 믿지 못하게 만든 우리의 책임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책임은 가해자에게 있는 것이 분명한데. 왜 윤미향이, 왜 우리가 잘못했다고 생각할까. 죄가 나쁜 것이 아니라 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이 나쁜 것이다. 분명하게 선을 긋지 않으면 가해자들은 교묘하게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식으로 몰며 물타기 하려 든다. 단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단죄가 이뤄지지 않으면 제2의 제3의 가해자가 나온다. 누가 가해자인지는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윤: 피해자들이 저거 도둑년 아냐? 했을 때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은 무너지죠. 그게 힘들었어요. 아까 그 얘기 잠시 했잖아요. 98년에 할머니들이 저를 사기 횡령으로 고소했다고. 그때 제가 무너졌죠. 검찰 가서 조사를 받았어요. 그때 고발 내용은, 대표 윤정옥이 조카 윤미향을 간사로 데려다 앉혀놓고 우리 이름을 팔아서 돈을 모금하고, 용산역 앞 4층 빌딩을 조카에게 사줬다는 것이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이들이 꺼내 든 건 부동산 의혹
여론 형성에 가장 적합한 재료다
출처 - (링크)
일단 윤정옥과 윤미향은 조카 관계도 아니고, 윤 씨 본도 달라요. 저는 파평 윤이고 윤정옥 선생님은 칠원 윤인가 그렇대요. 그러니까 아무 관계가 없어요. 제가 정대협 간사로 오기 전에는 윤정옥 대표를 만난 적도 없어요. 더군다나 저는 이대 대학원 기독교학과와 사회복지학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윤정옥 선생님은 영문학과 교수님이어서 만난 적도 없어요. 할머니들에겐 '위안부'가 우리 이름이라 생각하신 것 같아요. 우리 이름 팔아서 돈을 모아 조카에게 줬다는 거죠.
초기에는 정대협에 후원이 거의 없었어요. 정대협 실행위원들이 한 달에 만 원씩 돈을 내가면서 일을 했어요. 함께하는 단체들이 1년에 10만 원씩 내는 회비가 수입의 전부였고, 제가 총여학생회 초청받아 강연을 하면 강연료 20만 원, 30만 원을 받아서 수입으로 책정했죠. 저희 대표들도 강연료 20~30만원도 다 후원으로 기부를 했으니까요. 그렇게 모인 수입에서 제가 월급을 받았던 것이니까 참 귀한 것으로 여겨졌죠. 대표님들은 돈까지 내가면서 일 하는데, 나는 돈을 받으면서 일을 한다는 것이 죄송하기도 했구요. 제가 월급을 1992년도에는 30만 원, 몇 년 후에는 4~50만원, 1998년도에 70만 원을 받았던 것 같아요.
금: 생활은 어떻게 하셨어요? 그 정도 수입으로는 생활이 어려우셨을 텐데.
윤: 돈 10만 원 받으면 5만 원은 저금했어요.
금: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윤: 교통비만 쓰면 되니까. 엄마 아버지 집에서 살았으니까.
금: 아~ 식비가 해결이 되니까.
윤: 네. 도시락 싸다니니까 식비도 방값도 안 들죠. 전철 타고 다니는 교통비만 들면 됐죠. 또 가족이 있으니까요. 저는 이 운동하면서 급여가 적어서 궁핍했다 생각은 안 해요. 오히려 늘 선생님들께 죄송한 마음이었죠.

궁핍하지 않았을 리 없다. 새삼 분노가 치미는 건, 이런 사람일수록 돈 문제를 건드리면 견디기 어렵다. 돈 관련된 공격이 대중에 가장 잘 먹히니까 비난의 목소리가 커진다. 그런 사실을 알고 돈 문제로 공격한 거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윤미향이 뭘 해먹긴 해먹었나보다 생각한다.
금: 처음 공격 당하셨을 때, 남편분과 따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윤: 같이 당했어요. 제 딸이.
금: 원망하셨을 수도 있고, 혹은 괜찮다고 말 하셨을 수도 있고.
윤: 제가 죽어가는데 어떻게 저를 원망했겠습니까? 제 딸도 늘 제 걱정이었죠. 엄마가 어떻게 살았는지 가장 잘 아니까.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여기던 엄마가 고통받는 걸 보는 건 딸에게 너무 힘든 일이었던 것 같아요. 저희 남편은 제가 혹시나 여기에서 떨어져 내릴까 봐 감시하러 다녔어요. 자기 생업 놔두고 제 옆에 꼭 붙어 다녔어요.
금: 조국 대표님과 윤 의원님께 마음 속 깊이 감사한 마음이 있어요. 보통 이런 일이 벌어지면 다 때려 치고 싶잖아요. 인간이라는 게. 그래서 생을 끊는 분도 계시고. 어쨌든 저는 두 분이 끝까지 버티고 버텨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부분에서 되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진심이다. 그래서 오늘 인터뷰도 준비한거다.
김복동의 희망
윤: 밤에 잠자려고 눈 감고 누워 있으면, 내일 아침이 안 왔으면 좋겠다. 사실은 누구든지 잠을 자면서 내일을 기대하잖아요. 근데 내일 없이 그냥 이대로 잠들면 참 편안하겠다는 유혹이 계속 있었어요. 국회의원 회관에 양쪽 벽이 없이 독립되어 있는 철 계단이 있어요. 제가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안 타고 그 계단으로 자주 다녔거든요. 그런데 계단을 오르다 밑을 보면 떨어져서 죽기 딱 좋아요 거기가. 정말로. 그런 유혹. 어느날 5층에서 내려야 되는데, 저도 모르게 위로 계속 올라가고 있구나 그런 걸 깨닫기도 하고요. 사무실이 5층이었는데, 작은 유리창을 열고 그 아래로 떨어져 내릴 방법을 매일매일 생각하고 있고. 그때마다 섬찟섬찟 놀라서 아, 내가 여기서 죽으면 개죽음이다.
금: 인간이 제일 못 견디는 게 억울한 거랑 섭섭한 거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남들 억울하게 많이 만든 인간들이 지들 조금만 뭐 해도 억울해가지고. 얼마 전 청문회에서 검사들이 국회 나와서 얼마나 억울하다 말해요. 아무 죄 없는 사람한테 조작해서 죄 뒤집어 씌워 놓고 지들은 그렇게 억울해 해요. 그런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견디셨어요? 견디는 방법 말이죠.
버텨줘서, 견뎌줘서 참 고맙다.

출처 - (링크)
윤: 제 성향 자체가 어릴 때부터 좀 강하게 컸어요. 농부의 딸로 태어나서 부모님 논일 가면 동생들을 보면서 살아왔어요. 담대한 사람으로 자란 측면도 있는 것 같고. 또 다른 하나는 제 개인적인 신앙. 제가 원래 목사가 되려고 했던 사람인데, 민중 해방을 위해서 십자가를 졌던 예수가 제 인생의 멘토였죠. 나도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그런 심정으로 살았고요.
다른 하나는 사실 우리 김복동 할머니. 할머니 돌아가실 때 저한테 그랬어요. 미안하다. 대표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맡기고 가서 미안하다. 할머니는 당신 가시고 나면 굉장히 힘들 거라는 걸 아셨던 것 같아요. 그때 꼭 이건 해달라고 당부했던 것들이 있어요. 조선학교 아이들 장학금 지원 문제, 아이들에게 이 할머니가 돕겠다 약속했던 것이 눈 감을 때에도 걸렸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일본 정부에게 사죄, 배상 받는 거. 본인이 하고자 했던 일을 대표가 나를 대신해서 꼭 해달라고 하셨어요. 그게 저한테 하나의 사명감처럼 계속 남아 있었고요.
내가 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물러선다면, 결국 지난 30년 동안 할머니들과 함께 살아온 내 삶도 짓이겨진다 그리고 피해자들이 명예와 존엄을 위해서 노력해 온 그 삶도 함께 무너지는 것이다 생각했어요. 혼자만 생각하면 사실 죽는 게 제일 편했죠. 내 개인만 생각하면. 근데 개인에 대한 공격을 통해서 우리 운동을 무너뜨리려는 공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살아남아야 이기는 것이라고 되뇌었죠. 그렇게 저는 아직 버티고 있는 거고. 그리고 제 의지만으로 살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때마다 옆에서 저와 함께 서 주었던 사람들이 많았어요. 물론,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 좀 적극적으로 같이 싸워주면 좋겠는데 그러지 않고 혼자 고립되어 이를 악물고 싸워야만 하니 서운한 측면도 있었어요.
모든 게 잘려나간 상태에서 혀까지 잘려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내 삶을 아는 사람이 옆에서 함께 싸워주면 좋겠는데. 검찰의 기소로 4년이 넘는 시간동안 재판이 진행되었고, 변호사단을 구성해서 대응을 했지만, 모든 것을 제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죠. 그 재판 외에도 고소, 고발 사건들도 수없이 많은데, 변호사비가 많이 드니까 다른 사안들은 홀로 소송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제 남편은 나홀로 소송 전문가가 다 되었어요. 개인이 혼자서 언론을 상대로 싸우는 건 너무 힘들어요. 또 우리나라는 명예훼손 대부분 집니다. 그러면 저쪽 변호인 비용까지 내야 해요. 그래서 남편이 또 돈 벌어서 변호사 비용까지 대야 하고, 나는 혼자 소송하는 것이지만 남편은 패소비용까지 대느라고 지난 5년 동안 어마어마하게 고생했죠. 남편 ‘조작간첩’ 무죄판결로 받은 형사 보상금 다 털어 넣고, 우리는 그래도 집이 있으니까 괜찮잖아 이러면서. 통장에 잔고는 없지만 수입이 없지만 이 정도면 괜찮잖아 웃으려고 했죠.
1심 판결 이후에 저의 첫 부활은 이재명 대표의 사과문이었어요. 사실 이재명 대표님한테 제가 서운한 적이 있었거든요.
얼마나 고생 했을까. 뭐라고 위로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옆에 서 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건 그렇고 이재명 대통령과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독자 여러분의 궁금증을 유발하기 위해 이번 편은 여기서 끊도록 하겠다. 다음 회 더욱 기대 많이 해주시라.
<계속>
사진 촬영: 김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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