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jhgjgh.JPG

출처 - (링크)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킹 오브 팝' 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건 마이클의 절친한 친구였던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소울 트레인 뮤직 어워드(1989)에서 시상을 위해 무대에 올랐을 때다. 그녀는 마이클을 이렇게 소개한다.

 

"The true king of pop, rock and soul"

 

이 표현은 전 세계 언론과 팬들 사이에 각인되었다. 그날부터 언제나 마이클 잭슨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였다. 마이클 역시 칭호가 마음에 들었다. 소속사 홍보팀에 자신을 언급할 때 팝의 황제라는 표현을 붙여달라고 요청했다. 타이틀에 걸맞은 '황제의 제복'을 제작해 의상의 격을 높였다. 마이클은 대중음악 아티스트로서 이러한 의상 선택이 대중에 어떤 효과를 보일지 이해하고 있었다.

 

크리스털이 박힌 장갑, 재킷 오른쪽 팔에 착용하여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완장, 반짝이는 스팽글 양말과 페도라. 이러한 컨셉은 멀리서도 그가 무대 위 주인공임을 한눈에 알게 했다. 물론, 그의 신체적 약점을 가리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지만.

 

마지막 커튼콜, This is it

 

gdgdf.JPG

2009년 6월24일, 마이클의 마지막 리허설

출처 - (링크)

 

생애 마지막 공연을 불과 18일 앞둔 시점.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불면증으로 인한 급성 프로포폴 중독. 수개월 동안 단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잠에 들지 못했다. 자지도 먹지도 못해 뼈밖에 남지 않은 몸으로 공연을 강행했다. 마이클의 유산을 둘러싼 주변인의 탐욕은, 엔터 산업으로 대표되는 자본의 착취로 이어졌다. 그렇게 마이클은 죽음에 이르렀다.

 

6살의 어린 나이에 무대에 올랐다. 이 특별한 아이는 청년이 되어 노래와 춤은 물론, 뛰어난 퍼포먼스 기획력으로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내며 블록버스터 MV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그의 특별함은 수많은 괴소문을 만들어 냈다. 흑인이기를 거부하며 박피를 감행했고, 불멸의 삶을 위해 산소 캡슐 통에 들어갔으며, 백인처럼 날렵한 얼굴을 갖기 위해 코가 무너질 때까지 성형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떠들어 댔다. 마이클이 싫어한 별명, 와코 잭슨(괴짜 잭슨)이라는 공격도 이때 시작되었다.

 

hrtyrt.JPG

출처 - (링크)

 

루머를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불우한 과거를 딛고 성공한 흑인 여성, 오프리 윈프리라면 잘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 카메라가 켜지는 순간 오프라는 그 기대를 한순간에 배신했다. 그녀에게도 마이클은 시청률 견인 수단에 불과했다. 이 인터뷰를 발판 삼아 오프라는 압도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고 커리어상 최고의 순간을 맞았다. 마이클의 주변엔 그의 덕을 보기 위해 맴도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토록 많은 공격 중에서도 가장 집요했던 건 아무래도 아동 성추행 의혹이다.

 

두 번의 성추행 의혹이 있었다. 이성과 연애하고 결혼해도 사람들은 은밀한 취향을 숨기기 위한 위장이라며 손가락질했다. 1993년과 2003년, 두 번의 고발이 있고 마이클은 빚더미에 앉는다. 수년간 지속된 소송으로 거액의 변호사 선임 비용이 필요했다. 1차 의혹 당시에는 피해자에게 2,500만 달러(한화로 약 350억)의 합의금을 지급했다.

 

다만, 이는 죄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의 이미지 타격을 막기 위해 내린 조치다. 두 번 다시 의혹을 제기하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로 약속한 것. 민사 소송에 대한 합의로, 형사 소송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 자체가 무산되었다. 2차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 2005년 재판에서 1차 사건의 정황까지 모두 재조사했지만, 검찰은 단 하나의 유죄 증거도 찾지 못했다.

 

hffhf.JPG

출처 - (링크)

 

아티스트를 향한 의혹 제기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중요하지 않다. 일단 의혹이 제기되고 나면 그 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 없을뿐더러 사람들은 수년 간의 다툼 끝에 밝혀진 결과에는 관심이 없다. 무죄가 나와도 비판했던 사람들은 반성하지 않는다. 그래서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든 이기는 게임이다. 아티스트는 스폰서가 끊기고 한동안 앨범을 내지 못하고, 투어를 돌지 못한다. 마이클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마이클은 언론의 조명을 피해 전 세계 호텔을 전전하는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쌓인 빚이 무려 5억 달러, 한화로 약 6~7,000억 원에 달한다. 서둘러 일을 시작해야 했다. 투어를 돌면 한 번에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디스 이즈 잇". 이것으로 끝. 이라는 의미의 콘서트를 열기로 한다.

 

마지막 공연은 가수로서의 재기보다 팬들에게 보답하는 마음과 재정적 고충에서 벗어나기 위함이 컸다.

 

MJ-Press-Conference-2-3-768x516.jpg

<디스 이즈 잇> 발표 기자회견

출처 - (링크)

 

소니는 가짜다, Sony is Phoney

 

hfhgfh.JPG

마이클 잭슨과 닥터 토메토메

출처 - (링크)

 

재정난에 허덕이던 마이클은 보유 중인 저작권 회사 지분을 담보로 대출을 받기에 이른다. 이때 돈 문제를 해결해 줄 인물로 '닥터 토메토메'를 소개받는다. 토메토메 덕분에 마이클은 당장의 빚을 정리하고 자산 압류를 가까스로 막아낸다. 마이클에게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마이클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은 토메토메는 마이클의 단독 총괄 매니저 자리를 꿰찬다. 훗날 토메토메는 마이클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정적인 단초가 된다.

 

마이클은 AEG 라이브와 <디스 이즈 잇> 공연 계약을 맺는다. 토메토메의 소개로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처음에 10회 공연을 조건으로 AEG로부터 선급금을 지불받지만, 이후 AEG는 선급금과 막대한 제작비를 빌미로 10회였던 공연을 50회로 늘려 버린다. 이때 마이클은 50회는커녕 10회도 감당하기 어려운 컨디션이었다. 여러 스캔들을 겪으며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바닥난 상태였다. 수면제를 먹어도 잠에 들지 못했다. 공연을 함께 준비하던 제작진이 보기에도 마이클의 상태는 우려스러울 만큼 위태로웠다.

 

hfghfg.JPG

출처 - (링크)

 

하지만 AEG 라이브의 관심은 오직 돈에 쏠려 있었다. 공연 취소에 따른 막대한 금전적 손해를 언급하며 마이클을 압박했다. 사실상 마이클을 돈 버는 기계로 취급하며, 음악을 향한 그의 열정을 볼모 삼아 이미 '을'의 위치에 있던 그를 철저히 착취했다. 심지어 CPR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돌팔이 의사 머레이를 시켜 '문제없다'는 소견을 냈다(마이클 사망 당일, 심정지 상태의 마이클을 뒤늦게 발견하고 푹신한 침대 위에서 한 손으로 CPR을 실시했다). 그리고 2009년 6월 25일, 마이클은 머레이가 투여한 프로포폴을 맞고 영원히 잠 들었다.

 

마이클이 떠나자 이들의 폭주를 막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AEG는 과거 오프라 윈프리가 그러했듯, 그의 비극조차 수익의 기회로 삼았다. 팬들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안했다. 티켓값을 돌려받을 것인지, 아니면 생전 마이클이 직접 제작에 참여한 기념 티켓을 받을 것인지. 마지막 유품이나 다름없는 기념 티켓을 두고 환불을 택할 팬은 만무하다. AEG는 이 점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환불해 주어야 했을 막대한 자금을 굿즈로 대체하며 자신들의 손실을 교묘히 메꿨다.

 

AEG의 또 다른 만행을 논하기에 앞서, 마이클과 소니 사이의 지독한 악연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trete.JPG

소니/ATV 합병 계약서에 서명 중인 마이클

출처 - (링크)

 

1995년, 마이클의 ATV와 소니는 저작권 합작 회사를 설립한다. 지분은 50대 50이었으나, 계약의 이면은 마이클에게 불리한 독소 조항으로 가득했다. 저작권 경영 통제권을 소니가 독점했으며, 특히 마이클이 파산할 경우 그의 저작권을 우선 매수한다는 조항은 훗날 비극의 복선이 되었다.

 

2001년 마이클의 새 앨범 invincible이 발매되었다. 대대적인 홍보가 필요한 시점이었음에도 소니는 불과 3개월 만에 돌연 홍보 중단을 선언했다. 마이클의 재정난을 유도해 저작권을 가로채려는 의도적인 계산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에미넴의 저급한 조롱에도 "훌륭한 아티스트는 동료 아티스트를 비난하지 않는다"며 품격있게 대처하던 마이클이었지만, 소니의 파렴치한 행보에는 참지 않았다. 그는 런던 대로 한복판에서 소내 대표 모톨라를 향해 "악마",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발언을 쏟아내며 규탄했다. 당시 마이클은 자신이 흑인이기 때문에 차별의 타깃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wrewr.JPG

출처 - (링크)

 

마이클이 세상을 떠나자, AEG는 그의 마지막 흔적을 매물로 내놓았다. 마이클의 숙적이나 다름없던 소니에 공연 리허설 영상을 6,000만 달러를 받고 팔아넘겼다. 마이클과 소니의 관계를 알면서도 비인도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들에게 마이클은 동료가 아닌 한낱 돈벌이 수단이었다. 정작 마이클은 극심한 압박 속에서도 공연을 통해 빚을 청산하고, 영화 제작자로서 제2의 인생을 꿈꾸며 재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소니는 AEG로부터 사들인 영상으로 영화 <디스 이즈 잇>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2억 6천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리며, 공연 실황 영화 중 최고 흥행작이 되었다. 소니의 기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10년 사후 앨범에 모창 가수의 목소리를 삽입하여 논란을 일으키는가 하면, 2024년에는 마이클 재단으로부터 남은 저작권 지분의 절반을 8천억 원에 사들인다. 마이클 생전부터 그토록 갈망하던 '절대 반지'를 손에 넣은 것이다. 소니는 마이클의 생전과 사후를 막론하고, 그의 유산을 착취하며 마지막 단물까지 빨아 먹는 존재로 남게 되었다.

 

거울 속의 남자, Man in the mirror

 

yrytyyt.JPG

1970년 공연 당시 잭슨 파이브

왼쪽부터 티토, 말론, 재키, 마이클, 저메인

 

마이클에겐 9명의 형제가 있다. 그중 맏형 재키 잭슨, 나이 차가 가장 적은 말론 잭슨 그리고 평생 음악적 동료로 함께한 자넷 잭슨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반면 마이클이 추문으로 고통받을 때, 오히려 불리한 발언을 하거나 열등감을 내비친 형제들도 있는데, 그 중심에 저메인 잭슨이 있다.

 

잭슨 파이브 시절부터 메인 보컬 자리를 두고 마이클과 경쟁했던 그는, 마이클이 솔로로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자 노골적인 자격지심을 드러냈다. 1991년에는 마이클을 비난하는 가사를 담은 곡 'word to the badd'를 발표하기도 했다.

 

"Reconstructed. Don't know who you are." (재건을 했네요.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어요.)

"You changed your shade. Was your color wrong?" (당신은 색조를 바꿨네요. 색이 잘못되었나요?)

 

그는 모타운 대표의 딸과 결혼하며 형제들이 에픽 레코드로 이적할 때 홀로 모타운에 남아 솔로 활동을 이어갔다. 형제 중 마이클 다음으로 성공한 가수였으나, 그 격차는 이미 알다시피 비교조차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3T - Why_ (Official Video) ft. Michael Jackson 2-0 screenshot.png

출처 - (링크)

 

흥미로운 점은 마이클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닥터 토메토메'를 소개한 인물이 바로 저메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번 전기 영화 <마이클>의 주연은 저메인의 아들 자파르 잭슨이 맡았다. 생전 마이클은 조카들을 끔찍이 아꼈다. 티토 잭슨의 아들 셋이 3T라는 그룹으로 데뷔할 때, 마이클은 자기 레이블(MJJ Music)을 통해 데뷔시켰다. 직접 피처링까지 해주었을 만큼 헌신적이었다.

 

영화 제작진이 자파르를 캐스팅한 이유로 "그의 영혼이 담긴 가족이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마이클 특유의 길쭉한 팔다리가 뻗어내는 춤동작을 완벽히 재현할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래서 그와 피를 나눈 가족이 가장 적합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 캐스팅이 마냥 편안하게 다가오지만은 않는다. 이면의 복잡한 가족사를 아는 이들에겐 말이다.

 

사실 캐스팅보다 더 큰 문제는 영화의 내용이다. 마이클은 조카의 성공을 기뻐했겠지만, 영화가 단순한 오락물에 그치며 그의 마지막 투쟁과 고통을 외면한 점은 아쉽다.

 

yrtytr.JPG

출처 - (링크)

 

2019년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 <리빙 네버랜드>는 어린 시절, 마이클에게 성 학대를 당했다는 두 남자의 일방적인 주장을 담아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들은 마이클의 공연과 광고 등을 통해 발탁된 소년들로, 어린 시절에는 마이클을 옹호하던 입장에서 성인이 된 이후 돌연 입장을 바꿔 피해를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모순투성이다. 사건 장소로 지목한 기차역은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어머니의 증언이 소년의 주장을 무력화하기도 한다. 이때 제기된 수많은 주장은 이미 거짓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무혐의로 결론 난 사안들이 다시 온라인을 통해 사실인 양 유포되고 있다. <리빙 네버랜드>를 보고 마이클의 혐의에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영화 <마이클>이 그의 억울함을 씻어줄 도구가 되길 바랐던 팬들이 많았다. <리빙 네버랜드> 이후 마이클을 단독으로 한 첫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가 짊어졌던 고통의 굴레를 끊어주어야 할 때다.

 

07433b1a-f4d7-4aff-9bfb-81388f766c84.jpg

출처 - <유니버설 픽쳐스>

 

당초 영화는 성추문을 포함한 인생 전반을 다룰 예정이었다. 하지만 합의 내용 관련 문제로 해당 부분을 통째로 들어내고 재촬영했다고 한다. 바이럴일 가능성이 높다. 유족이 제작에 참여한 상황에서 이러한 실수는 있을 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 예상컨대, 1편은 마이클 더 레전드, 2편은 마이클 기나긴 터널. 제작 과정의 실수라기보다 속편을 위한 떡밥으로 제작사가 의도한 홍보 전략으로 보인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제작진이 투입되었다.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머큐리가 상황을 이겨내는 장면을 극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사건의 시간대를 인위적으로 변경하면서, 고증이 부족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대신 실황 콘서트에 가까운 영상 퀄리티에 힘을 쏟았다. <마이클>도 그러할 거라는 예측이 많았고, 실제로 예측에 맞는 결과물이 나왔다. 인물 해석도 현실과 다르다. 마이클 사후 재단을 설립해 팬들과의 기대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재단을 운영한 존 브랑카(영화 제작자로 참여)의 역할이 영화에서 크게 투영되었고, 생전 관계가 좋지 않았던 인물들이 미화되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마이클의 영원한 멘토 다이애나 로스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도,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빼달라고 제작사에 요청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돈다.

 

무대 위 황제 마이클 잭슨은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홀로 맞서 싸워야 했다. 타고난 재능으로 돌파하려 했으나 끝내 자본의 비정함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마지막 투쟁을 지운 채, 오직 행복했던 모습으로만 박제하려는 영화의 연출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영화에 대한 평가는 관객의 몫이다. 비판적인 시각이 느껴진다면, 아마도 그만큼 마이클을 아끼는 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이 극장을 찾는 이들에게 마이클의 이면을 이해하고, 그를 한층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길 바란다.

 

 

비정기 금성무.jpg

 

 

기사 : 금성무스케잌

 

공지혜 기자 / jihyegong84@gmail.com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