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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재를 진행하면서, 아주 긴 내용을 차근차근 정리해 보려는 의도로 시작했다가, 너무 지루하고 복잡하게 흘러가는 듯 해서 시의성이 있는 최근 사건이나 주제를 활용해 보기도 하고, 되도록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구성을 적용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주제에 대해 깊이있게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글에서는 켄 윌버의 <의식의 스펙트럼>까지 언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의식'이란 주제 만큼은 도저히 정통으로 돌파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이번 편은 그냥 돌직구로 한번 파고들어 볼랍니다.

 

그래도 최소한 의식이라는 주제가 우리의 현실적 정치 활동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정도는 말씀드리고 시작해야겠습니다.

 

의식(意識, Consciousness)이란 말은 크게 2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첫 번째 의미는 개인적이면서 심리학적인 차원으로 '깨어있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인식하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고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고 할 때 그 의식입니다. 반대말은 무의식이 되겠죠. 이 개념은 마음챙김이나 철학과는 어울리지만 현실 정치와는 동떨어져 보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사회적인 차원에서 어떤 주제에 대해 지니는 의견이나 사상 같은 것입니다. 선민의식, 엘리트 의식 같은 말에 쓰입니다. 이 경우는 현실 정치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떤 집단이 공유하는 의식적 특징은 정치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죠.

 

언뜻 보면 첫 번째 의미와 두 번째 의미는 서로 다른 개념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사실 파고들어 보면 이 두 의미는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그 연결고리를 이해하는 것은 정치적 차원에서 큰 이점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편에서는 그 연결고리까지 한번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의식이라는 손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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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가장 확고한 사실은 '내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경험한 감각'이라고 지난 6편에서 말씀드렸던 바 있습니다. 그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의식>입니다. 의식은 어두운 방을 비추는 손전등과 비슷합니다. 수만 가지의 물건이 있는 큰 방에 불이 꺼져있다고 해보죠. 손전등을 켜면 그 빛이 닿은 부분의 물건들만 보일 겁니다. 손전등으로 비추지 않은 곳에는 분명 물건들이 그대로 있고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빛이 닿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호흡을 예로 들어보죠. 우리는 늘 숨을 쉽니다. 의식하려고 하면 공기가 들어오고 나가는 과정의 모든 감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공기가 흐르는 모든 경로의 세포들이 자극을 받아 신호를 뇌까지 전달한 것이죠. 그 세포들의 자극 신호는 우리가 호흡을 하루 2만 번이나 반복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예외 없이 전달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2만 번의 호흡을 일일이 의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호흡을 의식하려는 의도를 가질 때, 의식의 손전등은 호흡에 관련된 자극 신호를 비추어 그것을 알아차립니다. 일을 하거나, 휴대폰을 보거나, 밥을 먹을 때에는 그 행위와 관련된 신호들을 비추어야 하므로 부득이 호흡에는 손전등 빛이 닿지 않는 것이죠.

 

의식이 비추는 곳은 수시로 바뀌고는 합니다. 중요한 문서를 봐야할 때는 시각 신호를, 강연을 들을 때는 청각 신호를, 무언가 생각해야할 때는 그 생각을 비춥니다. 여러 정보들을 동시에 처리할 때 의식은 아주 빠르게 비추는 방향을 옮겨갑니다. 때로는 의식이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물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의식이 생각만을 비추고 다른 곳을 전혀 비추지 않는 것이죠. 이럴 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도 알아채지 못하거나,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의 모습을 알아채지 못하여 부딪히기도 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일관되게 유지되는 단 하나, 그것은 바로 그 손전등의 빛 자체, 즉 의식 그 자체입니다. 쉴 새 없이 다른 물건들을 비추는 과정에서 의식은 늘 거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늘 그 자리에서 무언가를 비추는 의식은 놀라운 특징을 하나 지니는데, 바로 스스로를 비출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의식 그 자체를 의식할 수 있는 것이죠.

 

스스로를 비출 수 있는 손전등, 의식의 이러한 특징은 많은 종교인과 영성가들이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입니다. 많은 스님들이 화두로 제시하는 '이뭣고'라든가, 참 나(true-self), 진아(眞我), 아트만(Atman) 같은 개념들의 시작점이죠.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자아의 내면을 연구해온 불교 철학에서는 이 의식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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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불교에서 말하는 의식의 스펙트럼

 

불교의 유식론(唯識論)은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현인들이 사람의 의식에 대해 쌓아온 고민과 지혜가 담겨있습니다. 유식론 안에서도 여러가지 견해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틱낫한 스님의 <마음>이라는 책에서 설명하는 8식(八識)을 기반으로 좀 더 단순화하여 말씀드리려 합니다.

 

8가지의 식(識) 중에서 5개는 흔히 말하는 오감과 같습니다. 눈으로 보는 시각, 귀로 듣는 청각, 코로 맡는 후각, 입으로 맛보는 미각, 몸으로 느끼는 촉각에 해당합니다. 이것을 '느낀다'는 것은 의식의 손전등에 한번 비춰졌다는 의미겠죠. 이를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이라 표현하여 5식이라고 합니다.

 

이 5가지 감각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손전등이 바로 의식(意識)입니다. 불교 유식론에서도 동일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의식과 같은 의미이죠. 5가지 감각을 모두 담아낼 뿐 아니라 그 것에 대한 생각과 감정까지도 담아내며 경험하는 작용입니다. 이렇게 8식 중에 6개가 쉽게 지나갑니다.

 

7번째 식(識)은 말나식(末那識)이라고 하는데, 자의식의 시작점입니다. 의식이라는 손전등이 스스로를 비출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그 자리에 의식이 존재한다고 느낄 수 있고, 이 느낌은 자아를 형성하여 내가 세상으로부터 분리돼 있는 개별적인 존재라고 인식하게 만드는 기반을 제공합니다. 내가 아닌 다른 것들로부터 나를 구분함으로써 자의식을 갖게 하는 작용, 그것이 바로 말나식입니다.

 

마지막 8번째 식(識)은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무의식에 해당합니다. 의식의 손전등이 비추지 않더라도 온몸의 수많은 감각세포들은 신경회로를 통해 신호를 보냅니다. 이 신호들은 의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떤 반응을 만들어내죠. 그런 반응들이 쌓이면 의식적인 행동에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넓고 넓은 밭에 비유합니다. 어떤 감각 신호는 하나의 씨앗이 되고, 그 씨앗이 무의식의 밭에 떨어지는 것이죠. 그 중 어떤 씨앗은 싹을 틔우고 우리의 마음이나 행동에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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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마다 조금씩 견해가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말나식과 아뢰야식을 '무의식'에 해당한다고 구분합니다. 5가지 감각과 그에 대한 의식은 일상적인 차원에서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고, 아뢰야식이라는 것도 말이 낯설기는 하지만 무의식의 개념과 유사한 편입니다.

 

하지만 말나식은 조금 어렵습니다. 몇가지 의문이 듭니다. 자의식의 시작점이라면 무의식으로 구분될 것이 아니라 의식으로 봐야하지 않나? 6식을 통해 의식 자체가 자아를 의식할 수 있으므로 말나식이라는 건 불필요한 개념 아닌가? 이 의문들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는 이론이 있습니다. 그 이론은 철학자나 영성가가 아닌, 신경심리학자의 책입니다. 그 내용을 통해 우리는 불교 유식론을 좀 더 실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식의 신경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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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심리학자 니콜라스 험프리는 2023년 <센티언스: 의식의 발명>이라는 책을 통해 5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연구한 내용을 바탕으로 '의식'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펼칩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의 의식은 형이상학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흔히 육체와 영혼을 구분한다고 할 때, 의식은 영혼의 영역에 가깝겠죠. 그래서 소설이나 영화에서 육체와 정신이 분리된 어떤 상태를 상상할 때, 육체는 그저 물리적인 움직임을 갖는 기계처럼 묘사하고, 판단과 사고와 감정은 영혼의 기능인 것으로 묘사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니콜라스 험프리는, 의식 또한 신경회로의 기능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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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xels, 링크)

 

모든 생물들은 생존을 위해 환경에 반응합니다. 가장 원시적 형태인 단세포 생물도 그렇죠. 빛을 필요로하는 생물은 빛이 비춰지는 곳을 향해 움직입니다. 이들은 빛이라는 신호를 감지하고 '저쪽으로 가야지 내가 살 수 있어'라는 판단을 통해 행동을 결정하는게 아닙니다. 그저 빛이라는 물리적 자극에 특정하게 반응할 뿐입니다. 그렇게 반응하지 않은 생물들은 모두 죽고, 그런 반응 회로를 지닌 생물들만 살아남은 것이죠.

 

좀 더 복잡한 생물들은 그만큼 복잡한 반응체계를 지닙니다. 빛과 중력 방향에 따라 자라나는 방향을 바꿉니다. 어떤 식물은 벌레를 먹기 위한 구조를 갖기도 하고, 번식을 위해 화려한 꽃, 바람에 날리는 씨앗 등 다양한 형태를 지니기도 합니다. 이 복잡한 반응들을 하나씩 떼어보면 특정한 물리적 자극에 대한 특정한 반응들로 구분됩니다. 예를 들어 식물이 중력 방향에 반응하는 굴지성(屈地性)은 옥신(auxin)이라는 물질이 만드는 반응 회로입니다. 중력에 따라 분포되는 이 물질이 생장 방향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옥신이라는 물질의 분포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면 식물이 자라나는 방향이 예외없이 조작됩니다. 특정 자극에 대한 특정한 반응을 도식화하면 이렇게 표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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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신경회로는 스위치를 누르면 불이 켜지는 전등 같은 단순하고 명확한 회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물들의 행동들 중에서도 이런 경우들이 있죠. 눈에 동공이 있는 동물들은 밝은 빛을 보면 동공이 작아지고 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반응은 반응회로가 명확해서 의사들이 환자의 눈에 빛을 비추는 검사를 통해 특정한 신경회로에 문제가 있는지 파악하는 데 활용합니다. 빛 자체를 의식할 수는 있지만, 그 의식과 무관하게 동공이 작아지므로 이러한 동공반응은 말 그대로 '무의식적 반응'입니다.

 

어떤 자극으로부터 회로가 작동하여 특정한 반응이 출력되는 회로가 '무의식적'이라면, 반대는 다양한 조건에 복합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이 될까요? 해양동물 중 지능이 높은 것으로 유명한 문어의 경우, 병뚜껑을 돌려서 열어낸다든가 코코넛 껍데기를 가져와서 은신처를 만드는 등의 복잡한 행동을 하곤 합니다. 여러 자극에서 다양함 감각을 종합하여 신체 여러 부위의 반응을 조합하는 것이죠. 이러한 통합 처리 능력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문어에게도 의식이 있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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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페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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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험프리는 그 의견에 반대합니다. 이렇게 복잡한 통합 처리 능력이 지적인 행동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의식을 논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말하는 의식은 '자기 몸의 감각을 자기 자신에게 다시 되돌려 경험할 수 있는 자기참조 루프(loop)'라고 표현합니다. 용어가 좀 어렵지만, 풀어서 설명하자면 '감각 경험을 다시 떠올릴 수 있는 순환 회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입에 넣고 씹는 동안 그 맛을 느낄 뿐 아니라,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그 맛과 향과 식감을 되뇔 수 있죠. 어린 아이가 팔꿈치를 부딪혀 아프다며 울 때, 팔꿈치를 부여잡고 몇분 동안 울곤 하는데 이 때 아이는 팔꿈치의 감각을 떠올리고 있죠.

 

입안의 음식이 이미 삼켜진 후, 팔꿈치를 부딪힌 지 몇 분이 지난 후에는 그 물리적 자극이 이미 사라졌고 감각신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느낌을 떠올림으로써 물리적 감각신호가 있었을 때의 느낌을 머릿속에서 재현할 수 있습니다. 맛있었던 음식을 떠올리면 입에 침이 고이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납니다. 팔꿈치의 통증은 사라졌지만 아이는 아프다는 느낌을 계속 떠올리며 서러운 감정을 이어갑니다. 어떤 감각에 대한 반응으로써 그 감각을 다시 떠올리고, 다시 떠올린 감각으로부터 다시 반응할 수 있다면 일종의 순환이 형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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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념이 바로 니콜라스 험프리가 말하는 자기참조 루프이며, 의식이라는 것의 신경회로적 특징입니다. 그는 문어의 다양한 행동이 아무리 높은 지능을 드러내더라도, 문어의 행동 측면에서나 신경회로의 해부학적 측면으로 볼 때 이러한 자기참조 루프를 지닌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합니다. 앞서 정리한 통합 처리 회로는 복잡하긴 하지만 단방향으로 이뤄져있죠. 반면 인간을 비롯한 포유류, 조류 등의 동물이 보이는 행동 특성과 대뇌 피질의 반응 방식을 볼 때, 이러한 자기참조 루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입니다.

 

어떤 자극들이 순환 회로로 진입하면 반복적인 자기참조를 통해 강화됩니다. 물리적인 자극 자체는 이미 사라져있더라도, 순환 회로를 통해 그 신호를 재현하게 됩니다. 재현할 수 있는 신호는 '느낌'을 형성합니다. 무언가에 손이 닿자마자 반사적으로 손을 떼고 나서, 방금 그 감각이 뜨거움이었는지 따가움이었는지를 구분하는 것은 이 순환 회로를 통해 재현된 느낌을 바탕으로 이뤄집니다. 이것이 니콜라스 험프리가 말하는 '의식' 작용인 것이죠.

 

자극을 통해 감각 신호가 발생하는 것은 외부 환경과 감각 세포의 상호작용이지만, 순환 회로를 통해 감각을 구분하고 이를 통해서 이 느낌을 재현하는 것은 환경과 무관하게 내부적으로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 '내부'는 나와 환경을 구분합니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느낌', 나아가 '개인적 경험'이 형성되는 것이죠. 이러한 개인적 경험이라는 것을 형성하는 것이 자기참조 루프인 순환 회로이므로, 순환 회로가 없다면 의식도 없다는 것이 그의 이론입니다.

 

자기참조 루프라는 순환 구조를 지닌 신경회로를 구성함으로써, 어떤 감각에 '내가 느끼는 느낌'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기반을 이룬다. 그렇다면 그 순환 회로 자체가 바로 말나식(末那識)이 아닐까요?

 

하루에 2만 번이나 반복되는 호흡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자극과 감각 신호들은 대부분 순환 회로를 거치지 않습니다. 감각과 반응이 수없이 반복되지만 순환 회로에 진입하지 않았기에 의식의 손전등이 비추지 않은 어두운 방 안에서 처리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신호들이 무시되거나 방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의식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자극과 그 감각 신호에 대한 반응 처리는 쌓이고 쌓여 의식적인 사고나 행동에 영향을 끼칩니다. 이 과정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의식의 손전등이 비춰지지 않는 어두운 방안에서 수없이 자극에 대한 반응을 만들고 이를 누적하는 아뢰야식, 그 중 어떤 신호를 순환 회로로 반복 재현할 수 있는 말나식, 이를 바탕으로 각각의 감각을 느끼고 그 느낌에 이름을 붙여 구분하는 의식, 그렇게 이름 붙여진 안/이/비/설/신 5가지 감각기관의 5식. 이런 관점을 따른다면 불교 인식론의 8식이 그냥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신경학적 실체에 기반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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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아뢰야식에서 융의 집단 무의식으로

 

아뢰야식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모든 작용들은 '나의 경험'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즉, 나와 상관 없는 일이죠. 이 관점은 우리의 일상에 널리 퍼져있습니다. 무의식적인 행동에 대해 '내가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죠. 심지어 법률적으로도 '심신상실'이라는 용어를 통해 무의식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다른 기준을 적용합니다. 마치 무의식은 내가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곤 합니다.

 

무의식이 내가 아니라면, 나의 무의식과 남의 무의식을 구분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어차피 '나의 경험'으로써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 구분이 의미가 있을까요? 나의 무의식 작용은 나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니까 남의 무의식과는 다른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내 무의식은 남에게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남의 무의식 작용도 나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죠. 이렇게 보면 꼭 사람이 아니라 유인원이나 강아지, 고양이의 무의식이 나의 무의식과 구분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져볼 수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보죠. 말나식의 신경학적 기반이 자기참조 루프의 순환 회로라면, 그러한 순환 회로가 없지만 어떤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물들도 아뢰야식을 갖는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니콜라스 험프리의 주장 대로라면 문어의 복잡한 행동은 순환 회로를 거치지 않은 작용이고, 그렇다면 아뢰야식을 통한 작용이 되겠죠. 이렇게 보자면 식물이 중력 방향으로 뿌리를 내리는 것도 아뢰야식의 작용일지 모릅니다.

 

아예 극단까지 가겠습니다. 물에 열을 가하는 자극을 주면 어느 시점에 수증기가 되는 증발 반응을 보입니다. 당연히 물이 증발할 때 의식은 없겠지만, 야뢰야식이라고 볼 수는 있을까요? 그렇다면 광자를 통해 전자가 들뜬 상태가 되는 입자물리학적 현상이나, 중력에 따라 공전운동을 하는 천문학적 현상도 아뢰야식의 작용일까요? 이러한 의문을 받아들이다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제법무아(諸法無我) 사상이 연결됩니다. 내가 주관적으로 경험하고 느끼고 의식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 분명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서로 이어져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겠죠. 하지만 이번 편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의식에 대한 얘기이므로 더 나아가는 건 그만두고, 다시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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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의식과 무의식을 흔히들 빙하에 비유합니다. 프로이트의 영향으로 우리는 의식보다 무의식이 더 깊고 심오한 세계를 갖고 있다는 견해를 어느정도 익숙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죠. 이는 신경학적으로도 일리가 있습니다. 뇌에는 860억개, 척수나 말초신경계에 약 10억개, 제2의 뇌라 불리는 장 신경계에도 수억개의 뉴런이 있다고 하죠. 고등적인 사고를 담당하는 대뇌피질 전반적으로 160억개의 뉴런이 있습니다. 이 160억개 모두가 인간의 의식을 형성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 비중은 20% 미만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80%의 무의식 회로들은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어떤 자극에 어떤 반응을 하는 것일까요?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전자일 겁니다. 태어나자마자 젖을 빠는 본능, 특정한 맛이나 냄새에 식욕을 발동시키는 것 같은 작용은 오랜 시간 유전자에 남아있죠. 이 유전자의 영향이 인간의 행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는 오랜 시간 밝혀져 왔고 최근에도 계속해서 새로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이런 본능은 흔히 '타고난다'고 표현하곤 합니다.

 

반면 유전자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는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새로운 무의식적 반응 작용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파블로프의 개 실험은 특정 조건과 반응을 반복함으로써 특정 반응 작용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반복 훈련을 하다 보면 그보다 더 복합적인 작용도 무의식의 차원에 자리잡게 할 수 있습니다. 스포츠 선수는 아주 복잡한 신체적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수행할 수 있고,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가나 작품을 만드는 미술가들도 의식의 손전등을 비추지 않고서 섬세한 활동을 수행합니다.

 

반복적 경험이 무의식 작용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비슷한 무의식 작용이 만들어지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더운 나라에서 선호하는 맛과 추운 나라에서 선호하는 맛이 서로 다른 것은 기후환경이 끼친 영향일 겁니다. 역사적 사건이 영향을 끼치기도 해서, 한국인들의 강인함이 오랜 시간 외세의 침략을 극복한 데에서 비롯됐다는 견해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형성된 무의식 작용에 대해 칼 융은 '집단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고안합니다.

 

불교 유식론적으로 표현하자면, 유전자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아뢰야식에 심어져있는 씨앗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반복 훈련은 아뢰야식에 후천적으로 심어서 가꾼 씨앗입니다. 타고난 것이 아니더라도 같은 환경에 처해진 사람들 사이에는 비슷한 씨앗이 심어질 것이고, 그 씨앗이 자라나 후대에도 비슷한 씨앗을 심게 된다면 이를 집단 무의식의 형성과 연결지어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아뢰야식이라는 밭에 심어지는 씨앗의 관점으로 본다면, 사실 어떤 특징이 유전자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어떤 특징이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아뢰야식이 완전히 따로 떨어진 밭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죠. 앞서 논의했던, 나의 무의식과 남의 무의식을 칼로 자르듯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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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은 각자 스스로를 '나'라고 느끼는 말나식의 순환 회로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주관적인 의식을 형성합니다. 하지만 이 말나식과 의식은 서로 연결된 아뢰야식과 상호작용합니다. 아뢰야식은 어차피 '나의 무의식'이라는 경계가 없고 유사한 환경에서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유사한 싹을 틔운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의식에 비해 무의식이 더 크고 깊다면, 뉴런 개수의 분포처럼 80%에 이르는 넓은 바탕을 가지고 있다면, 그와 상호작용하는 우리 개개인의 말나식과 의식이 따로 떨어져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진실이라고 말하는 건 편협해보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아뢰야식이 서로 연결되어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개인적 심리학적 차원의 의식과, 사회적 차원의 의식의 연결고리까지 파고들어 보았습니다. 연재의 마무리를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여세를 몰아서 다음 편에서는 더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볼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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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꾸물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춘심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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