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에 관한 원론적인 이야기 먼저 해보자.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이런 내용이다.
1항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항 :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2항의 내용을 구현해 낸 시스템이 투표다. 국민은 투표를 통해 자신의 선택을 드러내고, 권력을 위임한다.
그러나 그 국민의 선택이 진리는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국민의 선택은 존중되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존중받는다는 말과 언제나 옳다는 말은 전혀 다르다.
선거는 참과 거짓을 가르는 시험지가 아니다. 누가 나라와 도시의 권한을 맡을 것인가를 정하는 절차다. 그 선택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으며, 때로는 오래 돌아가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정치는 진리를 찾아내는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 기억, 욕망, 분노, 두려움이 부딪히는 가운데 공동체가 임시로 길을 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역사는 늘 곧장 앞으로만 가지 않는다.
국민은 위대한 선택을 할 수 있다. 동시에 어리석은 선택도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그 가능성을 모두 안고 가는 제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다. 국민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이 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국민도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한 뒤, 그 선택의 결과를 제도 안에서 감당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말은 국민이 늘 옳다는 뜻이 아니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말은 자기 선택의 결과 앞에서도 주인으로 서야 한다는 뜻이다. 주인은 선택만 하지 않는다. 선택 뒤에 남은 계산서도 자기 이름으로 받는다.
정치인은 행위에 책임진다. 권력을 남용하면 낙선하고, 수사를 받고, 탄핵되고, 처벌받을 수 있다. 그러나 유권자는 위임에 책임진다.
누구에게 권한을 줄지 결정한 사람이 그 권한의 결과에서 완전히 빠져나갈 수는 없다. 내가 뽑은 권력이 도시를 망치고, 헌법을 흔들고, 안전을 무너뜨리고, 미래를 갉아먹었다면 그 책임은 정치인에게만 남지 않는다. 그런 권력을 가능하게 한 표에도 책임이 묻는다.
출처-<대전일보>
투표는 면책권이 아니다. 표를 던졌으니 나는 할 일을 다 했고, 뒤처리는 정치권이 알아서 하라는 태도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주권자의 자세가 아니라 손님의 자세다.
주권자는 주문하는 사람이 아니다. 공동체의 미래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이다. 투표는 불만 접수 창구가 아니라, 내 삶과 내 사회의 방향을 함께 정하는 서명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주권자가 자기 삶과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권한을 분풀이처럼 쓸 때다. 선거가 판단이 아니라 화풀이가 되고, 책임 있는 선택이 아니라 상대를 골탕 먹이는 놀이가 될 때 민주주의는 속부터 썩기 시작한다.
투표장은 게임장이 아니다. 내 편이 이기고 네 편이 지는 장면을 구경하는 곳이 아니다. 그 표로 시장이 정해지고, 예산이 움직이고, 학교와 병원과 도로와 안전이 달라진다.
그런데도 어떤 유권자는 표를 복수의 도구처럼 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진영을 혼내주기 위해 찍고, 익숙한 정당에 대한 충성 때문에 찍고, 순간의 분노를 풀기 위해 찍는다. 그러고는 결과가 나쁘면 정치권이 책임지라고 말한다.
이것이 포퓰리즘의 전형적인 한 얼굴이다. 포퓰리즘은 선동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권자가 자신의 권한을 가볍게 쓰고, 그 권한이 만든 비용은 남에게 넘기려 할 때 포퓰리즘은 자란다.
“권리는 내가 행사하겠다. 책임은 네가 져라.”
“선택은 내가 하겠다. 뒷수습은 정부가 해라.”
이 태도는 주권자의 태도가 아니다. 손님의 태도다.
손님은 주문하고 불평한다. 주인은 결정하고 감당한다. 민주주의의 국민이 주인이라면, 국민은 주문만 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정치권은 물론 책임져야 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더 무겁게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권력을 누구에게 맡길지 결정한 유권자가 아무 책임도 없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책임 없는 주권은 민주주의의 이름을 쓰지만, 그 속은 포퓰리즘에 가깝다. 권한은 크게 누리고, 결과는 남에게 떠넘기고, 자기 선택이 만든 비용 앞에서는 피해자처럼 말하는 정치. 그것이 천박한 민주주의다.
더 위험한 것은 이런 태도가 반복될 때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은 실수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경고를 보고도 같은 권한을 다시 주고, 같은 결과가 나오면 또 남 탓을 한다면 그것은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책임을 거부하는 정치 습관이다.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순간은 국민이 주권자가 되는 순간이 아니다. 주권자가 자기 권한의 무게를 잊는 순간이다. 권한은 함부로 행사하고, 비용은 남에게 치우라고 요구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포퓰리즘 민주주의로 기운다.

플라톤 조각상
출처-<worldhistory.org>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불편하게 보았다. 그가 싫어한 것은 단지 많은 사람이 정치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더 깊은 걱정은 따로 있었다. 사람들이 자유를 책임 없이 쓰기 시작하면, 공동체가 욕망과 기분에 끌려갈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플라톤의 중우정치 비판을 국민 멸시로만 읽으면 곤란하다. 그 경고의 핵심은 다수가 많아서 위험하다는 말이 아니다. 다수가 자기 권한의 무게를 잊을 때 위험하다는 말이다.
민주주의에서 다수는 권력을 만든다. 그러나 다수가 만들었다고 해서 그 권력이 자동으로 옳아지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선택했다는 사실은 절차의 정당성을 줄 수 있지만, 그 선택의 도덕성과 역사적 책임까지 지워주지는 않는다.
오늘의 중우정치는 광장에서 고함치는 군중만을 뜻하지 않는다. 투표장에서 더 조용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 자기 삶의 미래를 장난처럼 결정하고, 그 결정이 만든 비용은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는 태도 속에서 나타난다.
그런 정치는 겉으로는 민주주의다. 투표도 있고, 다수도 있고, 승패도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책임이 사라지면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는다.
중우정치의 본질은 국민이 어리석다는 데 있지 않다. 주권이 책임을 잃는 데 있다. 권한을 가진 사람이 그 권한의 결과를 모른 척할 때, 다수의 선택은 공동체를 지키는 힘이 아니라 공동체를 흔드는 힘이 된다.
그래서 플라톤의 오래된 경고는 지금도 불편하게 살아 있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국민을 찬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국민도 자기 선택 앞에서 책임지는 시민이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성숙은 국민을 무조건 높이는 데서 오지 않는다. 국민을 진짜 주권자로 대하는 데서 온다. 진짜 주권자는 선택할 권리만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 선택이 만든 결과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다.
6.3 지방선거
이제 이 말을 2026년 지방선거 앞에 세워보자. 집중해야 할 것은 어느 지역이 어느 당을 찍었느냐는 것보다, 유권자가 무엇을 알고도 권한을 다시 맡겼느냐가 문제다.
서울, 대구, 경북, 경남의 선택은 서로 다르다. 표의 이유도 다르고, 후보의 흠결도 다르며, 지역의 사정도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이미 드러난 경고를 보고도 다시 권한을 준 선택이라는 점이다.
공직 후보에게 흠결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선거법 의혹, 정치자금 의혹, 행정 실패, 절차 논란은 어느 정당 후보에게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흠결이 같은 흠결은 아니다.
국기 문란, 반헌법적 범죄, 위헌적 계엄, 국회 기능 마비에 닿은 문제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개인의 도덕성 문제나 선거 과정의 잡음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서 있는 바닥 자체를 흔드는 문제다.
계엄을 승패의 언어로 바꾸는 정치가 있다. 내란이라는 말을 사법부 판단 뒤로 밀어놓는 정치가 있다. 헌정질서를 무너뜨린 중대한 혐의를 안은 인물에게 행정 책임을 다시 맡기는 선택도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보수 지지가 아니다. 보수라서 문제가 아니라, 헌법을 흔든 사안 앞에서도 정치적 감각이 멈춰버렸다는 것이 문제다. 민주주의의 최소선 앞에서조차 진영 계산이 먼저 나오는 사회는 이미 위험한 곳에 와 있다.
수도 행정의 문제도 가볍지 않다.

서울은 단순히 큰 도시가 아니다. 계엄이 현실화될 경우 헌법기관, 언론, 시민의 자유가 가장 먼저 겨냥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그런 서울에서 안전과 도시 행정의 경고가 이어졌다. GTX 철근 누락 논란, 서소문 고가 붕괴 사고, 종묘 인근 고층 개발 논란, 한강버스 의혹, 광화문 조형물 논란, 정치자금법 재판까지 겹쳤다. 하나하나가 모두 최종 책임으로 확정됐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수도의 유권자가 따져 물었어야 할 신호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수도 행정은 이미지로 운영되지 않는다. 시장의 일은 그럴듯한 구호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안전, 도시의 기억, 공공공간의 품격, 권력 주변의 투명성을 지키는 일이다. 그 기준이 흔들렸는데도 다시 권한을 준다면, 그 선택은 유권자의 책임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더 노골적인 장면도 있었다. 김부겸 대구시장 후보가 선거 유세를 하고 있을 때, 한 대구 유권자가 다가와 말했다.
“나 한 가지 궁금해 가.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당선이 될 때는 그 약속을 지키겠지만, 만약에 낙선을 했을 때 그 공약을 지킬 수 있느냐”
출처-<김부겸TV>
이 한마디는 한국 민주주의의 한 병든 문법을 그대로 드러낸다.
공약은 권한과 함께 움직인다. 표를 주어 권한을 맡긴 후보가 공약을 이행할 책임을 진다. 그런데 떨어뜨릴 생각은 하면서, 그 후보가 가진 여당과의 연결망은 지역을 위해 써달라고 요구한다면 말이 달라진다.
권한은 주지 않겠다. 그러나 혜택은 가져오라. 이것은 민주주의의 언어가 아니라 소비자의 언어다.
지역이 오래 침체하고, 청년이 떠나고, 핵심 사업이 막힌다면 유권자는 먼저 자신이 누구에게 권한을 반복해서 주었는지 물어야 한다. 권한은 익숙한 쪽에 주고, 결과가 나쁘면 중앙정부와 다른 정치 세력에 책임을 묻는 방식은 주권자의 태도가 아니다.
대구·경북 신공항을 둘러싼 책임 공방도 이 대목에서 읽힌다. 장관일 때는 지역 핵심 사업에 충분히 힘을 싣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던 인물이, 선거 때는 다시 지역의 미래를 책임지겠다고 말한다. 유권자가 해야 할 일은 박수치는 것이 아니라 따져 묻는 것이다.
이전의 권한 행사와 지금의 약속이 맞는가. 그동안 무엇을 했고, 무엇을 막았고, 무엇을 방치했는가. 선거란 원래 이런 질문을 던지는 시간이다.
그런데 질문이 사라지고 진영만 남으면 정치는 습관이 된다. 습관이 된 투표는 쉽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책임지지 않아도 되며, 결과가 나쁘면 늘 남 탓을 하면 된다.
서울에서는 안전과 행정의 경고가 가볍게 지나갔다. 어떤 곳에서는 계엄의 책임이 승패의 말로 낮아졌다. 어떤 곳에서는 내란이라는 정치적 판단이 재판 뒤로 밀렸다. 또 어떤 곳에서는 장기 침체에도 같은 위임이 반복됐다.
이 모든 장면을 하나로 묶는 것은 지역이 아니다. 정당도 아니다. 책임 감각의 마비다.
문제는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다. 주권자가 자기 선택의 무게를 알고 있는가다. 민주주의는 표를 세는 제도이지만, 표를 세고 난 뒤 그 표의 의미까지 사라지는 제도는 아니다.
유권자는 권한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권한을 준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씻을 수는 없다. 자기 선택으로 만든 정치가 자기 삶을 해칠 때, 그 책임은 투표장 밖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일은 한국에서만 벌어지지 않았다. 유권자는 어디서나 화가 나고, 지치고, 누군가를 혼내주고 싶어진다. 문제는 그 감정이 투표함을 지나 정책과 제도가 되는 순간이다.
표는 감정으로 던질 수 있다. 그러나 결과는 감정대로 피해 가지 않는다. 분노는 상대를 겨냥해 출발해도, 비용은 대개 자기 사회의 장부에 적힌다.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가 그랬다. 많은 유권자는 유럽연합만 보고 표를 던진 것이 아니었다. 런던 정치권에 대한 불신, 이민에 대한 불안, 세계화에 밀려났다는 감정, 낡은 지역의 분노가 한꺼번에 탈퇴 표로 몰렸다.
브렉시트 찬성 시위
출처-<로이터>
그 선택은 통쾌했을 수 있다. 그러나 탈퇴의 비용은 브뤼셀 관료에게만 가지 않았다. 무역은 복잡해졌고, 투자는 흔들렸고, 노동력 이동은 어려워졌고, 젊은 세대의 선택지는 줄어들었다.
브렉시트의 분노는 투표함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항구와 공장과 병원과 대학과 일자리로 돌아왔다. 남을 혼내겠다고 던진 표가 자기 나라의 미래 비용이 된 것이다.
2012년 미국 캔자스주의 감세 실험도 같은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세금은 줄이고 싶다. 그러나 학교는 제대로 돌아가야 하고, 도로는 고쳐져야 하며, 공공서비스는 유지되어야 한다. 듣기에는 모두 그럴듯하다.
하지만 공동체는 구호로 운영되지 않는다. 세금을 줄이면 재정이 줄고, 재정이 줄면 어딘가를 깎아야 한다. 그 비용은 결국 아이들의 교실, 지역의 도로, 주민이 의지하는 공공서비스로 돌아간다.
덜 내고 더 받겠다는 정치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처음에는 자유와 성장의 약속처럼 들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누군가 내야 할 계산서를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방식이었음이 드러난다.
2018년 튀르키예에서는 수백만 채의 불법·부실 건축물에 대한 이른바 ‘건축사면’이 시행됐다. 건축 규제는 귀찮고, 개발은 빠를수록 좋다는 여론이 있었고, 정치권은 그 요구에 응답했다. 기준에 못 미치는 건물을 합법화해 주는 정치는 당장에는 편의처럼 보였다.
그러나 2023년 대지진은 정치 구호를 듣지 않았다. 부실한 건물은 선거 결과를 존중하지 않았다. 수많은 건물이 무너졌고, 건축 사면과 부실시공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기준을 낮춘 사회는 결국 그 낮아진 기준 위에서 흔들린 것이다.
규제는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무너지는 건물은 불편한 것이 아니라 치명적인 것이다. 안전을 귀찮은 행정 절차쯤으로 여긴 선택은 결국 시민의 몸과 가족의 죽음으로 돌아왔다.
당시 튀르키예 동부 다른 도시들은
건물이 많이 붕괴하며 사망자가 많이 나온 반면,
에르진이라는 도시에서는 사망자가 0명이었으며.
건물도 무너지지 않았다.
융통성 없다는 욕을 먹어가면서도
불법 건출물을 절대 허용하지 않은
엘마소글루 시장 덕분이었다.
이 사례들의 공통점은 단순하다. 유권자는 분노로 선택할 수 있다. 단순한 구호에 끌릴 수도 있고, 누군가를 혼내주고 싶을 수도 있으며, 불편한 규제를 없애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상대 진영만 찾아가지 않는다. 잘못 휘두른 표는 자기 도시, 자기 학교, 자기 안전, 자기 자식의 미래를 친다.
그래서 투표는 복수가 아니다. 장난도 아니고, 게임도 아니며, 잠깐의 분풀이도 아니다. 투표는 자기 사회의 미래에 손을 대는 일이다.
그 손이 가벼우면 공동체가 다친다. 그 손이 책임을 모르면 민주주의가 천박해진다. 그리고 그 손이 만든 비용을 끝내 남에게 치우라고 말할 때,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의 얼굴을 하게 된다.

편집: 임권산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임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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