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편(링크)에 이어 계속됩니다.

이해찬을 만나다
윤: 그래서 저는 이해찬 대표를 정치인으로서 존경할 만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참 좋아합니다. 제가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이해찬 대표가 민주당의 당대표였어요. 검찰에서 저를 8월 13일에 소환 조사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8월 14일이 제가 국회의원이 되고 맞는 첫 기림일이었어요.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께서 기자회견을 통해 최초로 본인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공개했어요. 그날을 세계 여성들이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로 선정하고 활동해 오고 있죠. 그래서 제가 국회에 작가들을 초청해서 전시회도 열고, 토론회를 열기로 되어 있었어요. 딱 13일에 조사를 통보하는데, 제가 기림일 때문에 안 된다고 하면 그 사실을 또 언론에 흘릴 것이 분명하고, 없는 말을 만들어 낼까봐 조사에 응하겠다고 했어요. 숨은 쉬고 있었지만, 심신은 다 망가진 상태였어요. 작가들에게도 피치 못할 피해를 입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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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검사들이 하는 질문을 들어 보니 제가 어떻게 대답하든 상관이 없겠더라고요. 아~ 얘네들은 조사와 관계없이 이미 기소 항목을 정해놨다는 판단이 섰어요. 16일 정도 되는 것 같아요. 모든 회계 자료를 분석해서 이해찬 대표에게 가지고 갔어요. 책상에 자료를 펼쳐 놓고, "대표님, 검찰에서 이미 기소 항목을 정해 놓은 것 같습니다. 검찰 조사를 다녀왔는데, 조만간 기소할 것 같습니다"라고요. 대표님은 "뭐 뭐 할 것 같아요?"라고 물으셨죠. "보조금을 횡령한 것으로 틀을 짜놓은 것 같다" 했더니, 대표님이 "그랬어요?"라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강하게 부정했죠. "아니요. 우리 실무자가 받은 보조금에서 자기 인건비 받은 것 중에 일부 혹은 전부를 정대협에 기부한 걸 문제 삼아서 보조금 사기라고 하고 있어요" 그랬더니 "에이 나쁜 놈들, 이거 걱정하지 마! 그거 무죄예요" 하셨어요. 다른 내용들도 쫙 펼쳐서 설명해 드리려고 하니,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난 이미 다 알아요. 나한테 보일 거 없어요. 윤 의원은 끝까지 버텨야 합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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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이해찬 대표의 부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선거라는 중차대한 국면에서도 진영의 승리보다 각자의 정치적 계산으로 아군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이 있었다. 만약 이번 선거에 이해찬 대표가 있었다면, 이런 자들을 향해 누구보다 매서운 일침을 가했을 것이다.
윤: 제가 그 자료를 가지고 방을 나오는데,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운지. 이야 끄떡없겠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그다음, 이낙연 당대표가 됐어요. 제가 기소되자마자 사무총장이 전화가 왔어요. 그때 사무총장이 누구였죠? 그 박...
금: 박광온?
윤: 아, 박광온 사무총장인가 보다. 전화가 왔어요. 당원권 박탈을 전하려고 말이죠. 아~ 이 사람들은 내가 검찰에 기소되길 바랐구나. 그걸 기다리고 있었구나 했죠. 사실 제가 어떻게 될지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네, 당에서 그것이 유리할 것 같다면 제가 당원권 박탈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당원권을 박탈당했고, 다시 이해찬 대표를 찾아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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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표의 체포 동의안이 가결되던 날, 단식 투쟁으로 병원에 있던 이재명 대표를 찾은 자가 박광온이다. 이재명 대표는 시간이 지나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해 6월, 민주당에서 유력한 누군가 나를 찾아와 당 대표직을 내려놓기를 요구했다'. 박광온은 이낙연 사람이다.
금: 이해찬 대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윤: 이렇게 됐습니다 하니, "참... 잘 싸웁시다." 하셨어요. 그리고 <윤미향과 나비의 꿈>이 발간되었을 때, 다시 뵈러 갔어요. "우리 윤미향 선생 내가 들었는데, 잘하고 있더만. 농해수위(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거기에서도 잘 활동하고 있다고 내가 의원들에게 보고 들었어요." 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외통위 못 갔다고 서러워하지 마세요. 또 그 몫이 있는 거니까." 그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대표님이 민주평통 수석 부의장이 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야~ 적임자다. 했어요.
금: 고통스러운 시간이 길었을 텐데, 무죄 나올 때부터 마음이 조금 편해지셨나요?
윤: 그렇죠. 무죄 나오고, 민주당 의원들, 또 이재명 대표의 반응을 보면서 아, 나 이제 조금 날개를 펼쳐도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죠.
인권 운동가 김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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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지금 문래동에서 활동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국회로 돌아가실 계획이나 또 다른 계획이 있으신가요?
윤: 저는 시민운동으로 돌아왔고, 이곳에서의 작은 소망은, 지난 5년간 검찰과 언론에 의해서 훼손되고 폄훼된 우리의 운동이 원상 복귀되는 것. 그때까지는 제가 기여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어요. 지금은 <김복동의 희망>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할머니 덕분에 제가 다시 살아난 것이기도 해요. 김복동의 삶을 몰랐다면, 제 삶을 포기하기가 더 쉬웠을 테니까요.
14살에 '위안부'로 끌려가 22살의 나이에 해방이 되었죠. 할머니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콩고, 우간다 여성들에게 나의 엄마, 영웅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할머니가 전파하는 에너지와 활동력은 대단했어요. 일본, 미국, 독일, 노르웨이까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닐 때, 할머니와 저는 숙소에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어서 침대에 누워요. 그리고 할머니는 조용히 담배 한 갑을 꺼내시죠.
인터뷰를 하게 되면, 속이 너무 상해서 줄담배를 피세요. 다시 과거를 끄집어내야 되니까. 그런데도 일본 정부나 미 국무부나 언론사 기자들을 만나면, 할머니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어요. 조금의 흠결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성을 추구하는 운동가였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할머니가 살았던 삶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는 작은 사명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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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선 김복동 할머니는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하는 용감한 인권 운동가였다. 그러나 홀로 남겨진 시간 속에선 세월의 상흔을 온전히 감당해야 했던 외로운 노인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단순 기호품인 담배가, 할머니에게는 고통스러운 기억과 오늘을 잇는 유일한 매개였다. 잠시 마음을 추스를 때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김복동 할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올해가 100세예요. 그래서 올해만큼은 김복동 할머니의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더 많이 주고 싶어요. 2019년에 한국의 시민단체 활동가 중 대학생 자녀 25명에게 할머니 조의금에서 남은 것과 김복동의 희망 장학기금을 합쳐 200만 원씩 장학금을 수여했어요. 그다음에는 재일 조선 학교 아이들, 중고등학교 아이들 10명을 선정해서 매년 1인당 250만 원씩 지원하고 있어요. 그리고 한글 연구 장학 지원 사업도 하고 있는데, 재일 대학생 10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고요. 그런데 저희 재정이 약해서 한국의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대학생 자녀에게 '김복동 장학금'을 지원하는 것은 2023년을 마지막으로 못 했거든요. 그래서 올해는 다시 김복동 이름을 조금 더 많이 알리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싶어요.

윤: 그리고 이번 노벨 평화상 누가 받았는지 알잖아요. 노벨평화상조차도 미국의 관점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평화 중심으로 수상자가 선정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 노벨 평화상은 가짜 평화다 라고 이야기해요. 김복동 피스어워드, 김복동 평화상을 만들어서, 지금도 여전히 전쟁의 참화 속에 있거나 그 피해로 인한 고통 속에서도 용기 잃지 않고 싸우고 계신 분쟁 지역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이 있어요. 물론, 노벨상금에 견주어 비교할 수도 없는 적은 금액일 수 있지만요.
2025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는 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 마차도다. 군부 독재 마두로 정권에 맞섰다는 명분이지만, 사실상 트럼프의 대리 수상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처럼 정치 역학에 잠식된 평화상의 상징성은, 더 이상 예전만큼의 무게를 가지지 못한다.
윤: 그래도 김복동이라는 이름이 갖는 힘에 버금가는 상금을 어느 정도 모으고 싶어요. 세계 분쟁 지역의 평화를 위해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꼭 여성이 아니어도 그런 분들에게 주는 진짜 평화상 말이죠. 김복동 100세이자 김복동의 희망 10주년에 맞춰서. 그리고 큰 소망은 그러한 활동 속에서도, 어떤 역할이든 제가 할 수 있는 일, 제게 맡겨지는 일들을 최선을 다해 해나갈 생각이에요.
원하는 대답이 나올 것 같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번 인터뷰는 윤미향의 명예 회복과 정치적 부활을 위해 진행되었다.
정치인 윤미향
금: 정치할 기회가 있으면 다시 하시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윤: 음... 제가 4년 동안 국회의원 하면서 약속한 게 참 많아요. 형제 복지원 피해자들에게 했던 약속, 5.18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끌려가 성폭력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한 약속, 베트남전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 등등 내가 꼭 하겠다고 약속드린 것들이 있어요. 그때 베트남 참전 전우회에서 제 모형을 만들어 화형식을 하기도 했는데요. 그건 저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큰 기쁨을 줬어요. 내가 제대로 살고 있구나, 의정 활동을 잘하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도 들었고요.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대기 오염 피해자들.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피해에 대해서 소홀한 것이 사실이에요. 공기가 굉장히 좋은 시골 지역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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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여수 광양만
윤: 네, 그 인근 지역, 남해 하동 같은 곳에서 갑자기 암 환자가 많이 생기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런 부분에 대해서 국가의 보상이나 의료 지원이 거의 없어요. 법안도 발의해 봤지만, 폐기되었죠. 통과가 안 되었어요. 이런 미완의 숙제가 많아요. 22대 국회의원 하시는 분들 중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나 못다 한 일을 이어서 해줄 수 있도록, 내용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긴 합니다만... 정치를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시민운동을 하면서 동시에 이러한 방법으로도 정치를 할 수 있어요. 내 동지를 국회에 둔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니까.
아니면 인권, 평화, 외교와 관련한 나름대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긴다면, 그 일을 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국회의원이 아니더라도, 정치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죠. 저는 영역에 제한은 두지 않고 앞으로 날갯짓할 생각입니다.

금: 방금 의원님 이야기를 듣고 든 생각인데, 저는 이상의 등불을 들고 현실의 길을 걸어간다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윤: 네, 제가 그렇습니다.
금: 의원님이 다시 정치를 하시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해요. 현실적으로는 조국혁신당에 들어가서 의원직이든, 보궐이든, 아니면 배지를 안 다시더라도 그곳에서 역할을 하시면 여러 가지로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윤: 한 번도 생각을 안 해봤는데.
금: 개인적인 바람이었습니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통해 만난 윤미향은 누구보다 단단한 사람이었다. 극한의 고통을 겪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느낌이 있었다. 사람이 밝고 해맑다. 그러한 천성이 있었기에 보통 사람이라면 속수무책으로 스러졌을 이 싸움에서 버티고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사람은 원래 내가 힘든 것보다 내 가족, 내 지인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걸 더 못 견딘다. 나만 없으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거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윤미향에게 드는 감정은 고마움이다. 지금까지 그녀가 이뤄낸 것들보다 고마운 건 끝까지 버텨주어서다. 일단 살고 봐야 다음이 있다.
<끝>
사진 촬영: 김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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