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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한국을 낯설게 보지 않았다.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자동차를 만들고, 반도체를 팔고, 배를 짓는 나라. 전쟁과 가난을 지나 산업화를 이룬 나라. 권위주의를 넘어 선거와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세운 나라. 어느 순간 드라마와 음악까지 세계 시장에 올려놓은 나라.’

 

그 시선에는 인정이 있었다. 한국은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해냈고, 유럽이 보기에 그 과정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 압축 성장의 사례였다. 제조업은 강했고, 시민 사회는 성숙하고 끈질겼으며, 문화 산업은 예상보다 멀리 갔다. 한반도 평화 문제까지 더해지면, 한국은 작지 않은 이야기를 가진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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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The Arg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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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국면에서 빛의 혁명

출처-<KBS>

 

다만, 그 인정은 오래도록 따로 움직였다. 

 

통상에서는 자유무역협정의 상대였고, 안보에서는 미국 동맹망 안에 있는 아시아 민주주의 국가였고, 평화 문제에서는 북한과 마주한 당사자였다. 문화 쪽에서는 케이팝과 드라마를 앞세운 흥미로운 나라로 읽혔다. 유럽은 한국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다만 여러 칸으로 나누어 알고 있었다.

 

 

한 장의 표 위로 올라온 한국

 

이번 이재명 대통령 유럽 순방 동선은 벨기에에서 시작해 EU, 이탈리아, 교황청을 거쳐 G7 정상회담이 열린 프랑스 에비앙으로 이어졌다. 국가 수로만 세면 벨기에, 이탈리아, 교황청, 프랑스 네 곳이다. 그러나 외교의 실제 무게로 보면, 브뤼셀의 EU(유럽연합)까지 포함해야 한다. 이번 순방은 네 나라를 돈 일정이면서, 동시에 유럽의 다섯 얼굴을 차례로 통과한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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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과 벨기에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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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과 손을 맞잡은 

토니우 코스타 유럽연합 정상회의 상임의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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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과 이탈리아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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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과 교황 레오 14세

출처-<Vatican 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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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7 정상회의

 

브뤼셀에서는 규칙과 제도가 앞에 나왔다. 로마에서는 제조와 기술, 산업과 문화가 한 테이블에 올랐다. 바티칸에서는 평화와 청년, 종교와 기술 윤리의 언어가 등장했다. 에비앙에서는 한국, 인도, 브라질 등 G7 외 나라들을 불러 국제 질서의 좁아진 대표성을 보완하려는 프랑스의 계산이 보였다.

 

같은 유럽이었지만, 장면마다 얼굴은 달랐다. 

 

EU는 한국을 디지털 규범과 경제 안보의 파트너로 불렀고, 이탈리아는 제조와 기술을 함께 엮을 상대로 보았다. 벨기에는 연구와 소재, 스타트업의 실무 접점을 열었고, 교황청은 한반도 평화와 세계청년대회의 상징성을 보았다. 프랑스는 한국을 G7 바깥 세계와 서방 회의체 사이를 잇는 파트너군 안에 놓았다.

 

그래서 이번 순방에서 볼 것은 환영식의 크기보다 의제의 배열이다. 

 

어느 나라가 얼마나 박수를 쳤는가보다, 한국이 어떤 회의 이름 안에 들어갔고 어떤 문서의 문장 속에 놓였는지가 더 중요하다. 외교에서 자리는 말보다 오래 남는다. 그 자리가 반복되면 관계가 되고, 관계가 제도화되면 전략이 된다.

 

이번 순방에서 달라진 것은 흩어져 있던 한국의 여러 얼굴이 한 장의 표 위로 올라왔다는 점이다. 제조업, 민주주의, 문화, 평화, 기술, 안보가 별도 항목으로만 놓이지 않고, 유럽이 당장 마주한 공급망, 기술 규범, 방위, AI, 평화외교의 빈칸과 함께 읽히기 시작했다. 한국은 유럽 밖에서 잘된 나라를 넘어, 유럽의 문제를 함께 다룰 수 있는 복합 파트너로 놓이고 있다.

 

 

물건보다 규칙을 함께 짜는 관계

 

가장 단단한 증거는 EU 구간에서 나왔다. 

 

한-EU 정상회담에서는 디지털 통상협정, 경쟁력 파트너십, 고위급 경제 대화, 경제 안보, 공급망 다변화, 안보와 방위 협력, 보안정보협정 협상 추진, 승객 예약 자료 협상 타결이 한꺼번에 묶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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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 결과를 하나씩 뜯어보면, 이번 만남이 단순한 통상 행사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 드러난다.

 

디지털통상협정만 봐도 그렇다. 

 

이름은 통상협정이지만, 내용은 물건을 사고파는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데이터가 국경을 넘어 어떻게 오가고, 전자계약과 전자서명을 어떻게 인정하고, 온라인 소비자 보호를 어떤 기준으로 맞출 것인가의 문제다. 한국 기업이 유럽 시장에 들어가는 통로를 넓히는 동시에, 디지털 세계의 규칙을 누구와 함께 만들 것인가를 정하는 일이다.

 

경제 안보와 공급망 협력은 더 노골적이다. 

 

코로나19 이후 세계는 물건이 싸게 만들어지는 곳보다, 끊기지 않고 들어오는 길을 더 중요하게 보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에너지와 방위의 취약성을 드러냈고, 미·중 갈등은 반도체와 배터리 같은 핵심 산업을 외교의 중심으로 밀어 올렸다. EU가 한국과 공급망을 말한다는 것은, 한국을 단순한 수출국이 아니라 위험을 함께 줄일 상대로 본다는 뜻이다.

 

안보와 방위 협력, 보안정보협정 협상 추진도 같은 흐름 위에 있다. 

 

방산 협력은 무기 몇 대를 사고파는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다. 기밀정보를 어디까지 주고받을 수 있는지, 공동 개발과 조달이 가능한지, 사이버와 하이브리드 위협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가 함께 붙는다. 통상과 안보가 같은 문서 안에 들어오는 순간, 관계의 성격은 달라진다.

 

EU가 지금 처한 자리도 봐야 한다. 

 

미국은 동맹이지만 언제든 관세와 산업정책으로 유럽을 압박할 수 있다. 중국은 거대한 시장이지만 공급망, 기술, 안보의 부담을 함께 가져온다. 유럽은 자기 규칙을 지키면서도 산업 기반을 놓치지 않을 파트너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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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이에서 한국은 꽤 특이한 조합을 제공한다.

 

한국은 반도체와 배터리를 만들고, 조선과 방산을 갖고 있으며, 디지털 산업과 문화산업도 키워왔다. 동시에 민주주의와 법치의 언어로 EU와 대화할 수 있다. 중국처럼 체제 리스크가 크지도 않고, 미국처럼 압도적 상하관계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일본과 닮은 점은 있지만, 아직 새로 넓힐 협력 공간도 많다.

 

그래서 EU가 이번에 본 한국은 잘 팔리는 물건을 만드는 나라에서 조금 더 멀리 간다. 디지털 규칙, 경제 안보, 공급망, 방위 협력을 함께 논의할 수 있는 나라로 이동한다. 이번 순방에서 한국이 유럽의 계산표에 올라갔다는 말을 가장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장면이 바로 브뤼셀에 있었다.

 

 

같이 만들 나라, 같이 연구할 나라

 

이번 순방 중 양자 관계에서 가장 성과가 두꺼웠던 건 이탈리아였다. 국빈 방문 형식이었고, 양국 관계는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올라갔다. 여기에 2026년부터 2030년까지의 행동계획, 4건의 정부 간 양해각서,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이 이어졌다. 의전과 문서, 기업 접촉이 한꺼번에 붙은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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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의 하얀 머리의 남성은 

이탈리아 대통령이다.

 

이탈리아가 본 한국은 단순한 아시아 시장이 아니었다. 논의는 항공우주, AI, 반도체, 친환경 연료, 바이오, 뷰티, 푸드까지 넓어졌다. 물건을 더 팔자는 수준을 넘어, 같이 만들고, 같이 기술을 붙이고, 같이 제3시장으로 나갈 수 있는 상대를 찾는 모습에 가까웠다.

 

이탈리아와 한국은 닮은 듯 다르다. 이탈리아는 기계, 디자인, 우주, 에너지, 고급 소비재, 중소기업 생태계가 강하다. 한국은 반도체, 배터리, 전자, 조선, 방산, 대량생산과 디지털 전환 능력이 강하다.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완전히 포개지지는 않는다. 바로 그 틈에서 협력의 공간이 생긴다.

 

유럽의 제조업은 지금 압박을 받고 있다. 에너지는 비싸졌고, 중국은 거대하고, 미국은 산업정책으로 자기 기업을 끌어당긴다. 이탈리아 입장에서 한국은 그 압박 속에서 같이 버틸 수 있는 파트너다. 한국 역시 이탈리아를 통해 유럽 제조업, 디자인, 문화산업, 에너지 전환의 다른 통로를 얻는다.

 

벨기에는 이탈리아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국빈 방문의 큰 장면보다 조용한 실무 단어들이 앞에 나왔다. IMEC, 반도체 연구, 배터리 소재, 에너지, 스타트업, 직항 재개. 하나하나만 보면 작아 보이지만, 실제 산업 협력에서는 이런 단어들이 오래 간다.

 

벨기에는 작은 나라처럼 보이지만, 유럽 기술 생태계에서는 결코 작지 않다. 특히 IMEC는 반도체 연구에서 세계적 거점이다. 한국에게 벨기에는 유럽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고, 벨기에에게 한국은 기술, 투자, 연구 인력, 아시아 네트워크를 가져오는 상대다. 정상회담 사진보다 연구소와 소재 기업, 스타트업 사이의 연결이 더 오래 남을 수 있다. (벨기에와의 자세한 정상회담 이야기는 딴지 기사 <유럽 순방에서 벨기에를 첫 회담 국가로 택한 이유 : 규칙을 만드는 국가가 되어가는 한국>(링크)를 참고하시라)

 

이탈리아와 벨기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변화를 보여준다. 이탈리아는 한국을 같이 만들 나라로 보았고, 벨기에는 같이 연구하고 연결할 나라로 보았다. 한국은 유럽 밖의 성공한 제조업 국가라는 칸을 넘어, 유럽 제조업과 연구 생태계 안으로 들어와 빈틈을 메울 수 있는 파트너로 읽히고 있다.

 

 

산업 밖에서도 불린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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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Vatican Media>

 

이재명 대통령이 교황청을 방문했을 때는 경제 문서나 투자 패키지가 앞에 서지 않았다. 핵심은 한반도 평화,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 한국 가톨릭의 사회적 기여, 지역 정세와 국제 현안이었다. 정상 외교의 언어가 로마와 브뤼셀에서 산업과 규칙으로 움직였다면, 바티칸에서는 평화와 청년, 보편 가치의 언어로 바뀌었다.

 

이 차이는 작지 않다. 한국이 유럽에 필요한 이유가 반도체와 배터리, 조선과 방산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교황청이 본 한국은 분단의 당사자이면서 민주주의를 회복한 나라, 고도 기술 국가이면서 전쟁 위험을 안고 사는 나라였다. 산업 국가의 얼굴과 평화 국가의 얼굴이 한 나라 안에 겹쳐 있었다.

 

한국은 평화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없는 나라다. 전쟁을 겪었고, 휴전 상태를 살고 있으며, 북한 핵 문제를 매일의 현실로 안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조건 때문에 한국이 말하는 평화는 추상적 구호로만 들리지 않는다. 교황청이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다시 언급한 것은, 한국이 세계 질서의 한쪽 끝에서 여전히 도덕적 언어를 제공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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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MBC> 링크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 행사가 아니다. 청년, 평화, 사회적 연대, 기술윤리의 언어가 한국이라는 장소에 모이는 행사다. 한국은 여기서 산업과 기술의 나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다음 세대, 전쟁의 기억, 민주주의의 경험, 기술 시대의 인간 문제를 함께 보여주는 무대가 된다.

 

G7 정상회의가 열렸던 프랑스 에비앙에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한국의 위치를 드러냈다. G7 정상회의에 초청국이 함께하는 일은 새 일이 아니다. 의장국은 해마다 자기 의제에 맞춰 파트너국과 국제기구를 부른다. 어떤 해에는 아프리카가 중심에 놓였고, 어떤 해에는 주요 신흥국과 개발 의제가 앞에 섰다. 초청 명단은 단순한 손님 명단이 아니라, 의장국이 그해 세계를 어떻게 읽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은 지도다.

 

이번 프랑스의 지도 안에는 한국, 인도, 브라질, 이집트, 케냐가 들어갔다. 이 조합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브라질과 인도는 거대한 신흥국이고, 이집트와 케냐는 아프리카와 중동, 개발금융과 지역 안정을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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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그 사이에서 조금 다른 자리에 놓인다. 선진국에 가까운 산업 역량을 갖고 있지만,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공여국이 된 나라다. 미국의 동맹국이지만, 유럽이 보기에 모든 의제를 미국의 언어로만 말하는 나라도 아니다.

 

프랑스가 이 조합을 만든 배경에는 G7의 좁아진 대표성 문제가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불안, 경제 불균형, AI, 개발금융, 에너지, 감염병 같은 의제는 G7 회원국끼리만 논의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서방 선진국들이 결론을 내린 뒤 바깥 세계에 설명하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힘이 부족하다. 의장국 프랑스가 초청국을 넓힌 것은 바로 그 현실을 반영한다.

 

그 명단 안에 한국이 들어갔다는 점은 과장해서 볼 일도, 낮춰 볼 일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한국이 어떤 나라들과 함께 놓였는가다. 

 

한국은 식민제국의 역사를 가진 유럽 선진국과 다르고, 전통적 개발도상국도 아니며, 미국과 안보 동맹을 맺고 있지만, 독자적 산업과 문화 역량을 가진 나라다. 산업 국가이면서 문화 국가이고, 개발 경험을 가진 공여국이며, 한반도 평화 문제를 안고 있는 안보 당사자다. 그래서 한국은 G7 안과 밖, 서방과 비서방, 산업과 개발의 경계에 걸쳐 있는 나라로 쓰일 수 있다.

 

교황청과 프랑스/G7은 서로 전혀 다른 무대였다. 하나는 평화와 청년의 언어를 다뤘고, 다른 하나는 좁아진 선진국 회의체가 세계 바깥과 어떻게 연결될지를 보여줬다. 

 

두 장면은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한국의 쓸모가 산업과 안보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럽의 눈에 한국은 공장과 시장으로만 보이지 않고, 평화의 언어와 국제 연결의 장치로도 읽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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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7 정상회의 

 

 

유럽의 불안, 한국의 축적

 

유럽이 한국을 다르게 읽기 시작한 배경에는 유럽 자신의 불안이 있다. 미국은 여전히 동맹이지만, 예측 가능한 동맹이라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중국은 거대한 시장이지만, 의존이 깊어질수록 공급망과 안보의 부담도 커진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의 방위, 에너지, 산업 질서를 한꺼번에 흔들었다.

 

여기에 중동 불안, AI, 디지털 주권 문제가 겹친다. 에너지 수송로가 흔들리면 유럽 경제는 곧바로 영향을 받고, 데이터와 반도체, 플랫폼 규칙은 경제 문제를 넘어 권력 문제가 되었다. 유럽은 자기 규칙을 지키면서도 산업과 안보의 빈칸을 메워줄 파트너를 찾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런 동시다발적 복잡한 위기가 한국을 종합적으로 평가받게 만들었다. 전술했듯, 그동안 한국의 강점은 따로따로 평가받았다. 그런데 지금 유럽이 마주한 위기는 그 칸들을 따로 두지 않는다. 공급망은 곧 안보이고, 디지털 규칙은 곧 민주주의의 문제이며, AI는 산업이면서 동시에 인간과 권리의 문제다.

 

문화도 더 이상 시장의 바깥에만 있지 않다. 드라마와 음악, 영화와 음식은 상품이면서 동시에 신뢰와 호감의 통로가 된다. 평화 의제도 한반도에만 갇히지 않는다. 에너지, 방위, 개발 협력, 국제 연대가 서로 얽히는 시대에는 한 나라가 어떤 안보 경험을 갖고 있는지도 외교적 자산이 된다. 그래서 한국의 축적은 단순한 목록이 아니라 조합으로 의미를 갖는다. 

 

이번 순방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지점은 이 지점이다. 유럽이 한국의 기존 능력들을 서로 연결된 해답의 재료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도 유럽을 다시 읽어야 한다

 

한국도 이 변화를 제대로 읽어야 한다. 유럽은 미국의 대체재가 아니다. 대미 외교가 막힐 때 잠시 들르는 우회로도 아니다. 유럽은 미국보다 경제 규모가 작은 또 하나의 선진권이 아니라, 세계를 보는 다른 방식을 오래 쌓아온 대륙이다.

 

미국이 힘과 시장, 혁신과 패권의 언어로 세계를 움직여왔다면, 유럽은 조금 다른 길을 걸어왔다. 유럽도 이익을 계산하고, 때로는 원칙을 접고, 식민주의의 과거와 난민 문제 앞에서 자주 흔들린다. 그래도 유럽은 시장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내버려두지 않으려는 제도적 습관을 오래 쌓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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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YTN>

 

그 차이는 속도에서 드러난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빠르게 만들고, 빠르게 팔고, 빠르게 이기는 쪽으로 움직인다. 유럽은 자주 느리고, 복잡하고, 답답하다. 그러나 그 느림 속에는 인권, 노동, 환경, 개인정보, 지역 공동체, 다음 세대의 삶을 함께 따져보려는 버릇이 남아 있다.

 

물론 그 버릇이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유럽의 규제는 때로 과하고, 의사 결정은 늦고, 내부 갈등은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지체와 혼란까지 포함해 유럽은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조직하려는 실험을 계속해 왔다. 한국이 유럽을 단순한 선진국 시장으로만 보면, 바로 그 느린 실험의 가치를 놓치게 된다.

 

이번 순방에서도 그 차이는 드러났다. EU는 디지털 규칙과 경제 안보를 말했고, 이탈리아는 제조와 문화, 기술의 결합을 말했으며, 교황청은 평화와 청년, 인간의 존엄을 말했다. 프랑스는 G7이라는 좁아진 서방 회의체를 바깥 세계와 연결하려 했다. 유럽은 하나의 얼굴을 가진 대륙이 아니지만, 적어도 미국식 힘의 언어만으로 세계를 읽지는 않는다.

 

그래서 한국의 대유럽 전략은 더 넓어야 한다. 공급망과 방위 산업만으로 유럽을 보면 절반을 놓친다. 기술 규범, 문화, 인권, 개발 협력, 평화외교, 청년 의제까지 함께 다룰 때 한국은 유럽과 더 깊게 만날 수 있다. 유럽은 한국이 미국만 바라보지 않기 위해 필요한 두 번째 전략 공간이면서, 동시에 한국이 자기 외교의 언어를 넓힐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이다.

 

미국과의 동맹은 한국 외교의 중심축으로 남아야 한다. 그러나 모든 문제를 워싱턴을 거쳐 풀려는 습관은 줄여야 한다. 중국과의 관계도 단순한 배제나 의존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유럽은 그 사이에서 한국의 선택지를 넓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

 

이번 순방의 성과도 그 기준에서 봐야 한다. 정상 사진과 환영 만찬은 외교의 장면일 뿐이다. 디지털 통상협정, 고위급 경제 대화, 보안정보협정 협상, 이탈리아 행동계획, IMEC 협력, 세계청년대회, G7 후속 의제가 실제 회의와 예산, 기업 프로젝트로 이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이번 순방의 진짜 성적표는 지금의 평가보다 앞으로 남을 문서와 숫자와 후속 사업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추신.

 

이재명 정부가 어떤 그림으로 외교하고 있는지, 어떤 대한민국을 만들려 하는지 궁금한 독자께는 본지의 <이재명 정부 정상회담 시리즈>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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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한일 정상회담’에서 밝혀진 일본의 본심 :

한국을 이용해 미국에 구애하다

 

12. 유럽 순방에서 벨기에를 첫 회담 국가로 택한 이유 :

규칙을 만드는 국가가 되어가는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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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임권산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임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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