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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6. 01. 월요일

춘심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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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 피레네의 성

 

 

 

무거움은 가벼움을 이길 수 없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말이다.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확대해석을 해보자. 무언가를 졸라 심각하고 무겁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엿 먹이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그것을 가볍게 만들어버리는 거다. 시점을 바꿔서 말하자면, 나에게 무거운 일을 누군가가 한없이 가볍게 여길 때 우리는 '심히 빡이 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민족정론지 딴지일보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큰 축 중 하나는 바로 권력에 대한 풍자적 자세다. '국민들과 함께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가지고, 그런 마음으로 에너지의 분산을 해내고...' 그렇게 먼말인지도 모를 말들을 토해내는 사람들이 목에 힘주고, 어깨를 휘두르며 조중동과 공중파를 주무르고 있을 때, 그 모든 걸 그냥 ‘훗'하고 개그화 시켜버리는 자세. 권력을 가진 자들의 진지한 가식을 가벼이 웃어넘기는 태도. 이렇게 강자의 무거움을 약자가 가볍게 만들 때 우리는 이걸 보통 '풍자'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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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냥 느껴봐.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일반인들에게 한없이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를, 권력자들이 그 권력을 바탕으로 한없이 가볍게 여기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조현아가 땅콩에 빡쳐서 수백 명의 승객을 태운 비행기를 쇼핑카트 마냥 돌려버리거나, 재벌이자 정치인의 아들이 일반인들의 진지한 비판과 분노 표출에 대해 미개하다고 가볍게 써재껴 버리는 것과 같이 약자의 무거움을 강자가 가볍게 여기는 것을 우린 '조롱'이라 부를 수 있겠다.


즉, 조롱과 풍자는 행위의 본질이 같다. 남의 무거움을 가볍게 여기는 것. 다만 그 행위를 하는 자와 당하는 자의 관계와 방향에 따라 조롱 혹은 풍자로 갈리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풍자는 긍정적으로, 조롱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그도 그럴 것이, '강자 : 약자'라는 관계 자체는 강자가 약자에게 휘두를 수 있는 무언가가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강자는 약자에 비해 이미 가진 것도 많은데, 약자를 엿 먹이는 조롱이라는 아이템까지 거침없이 휘두르게 되면 힘의 균형이 지나치게 강자 쪽으로 쏠리게 된다. 하지만 약자의 풍자는 약자를 향한 억압을 조금이나마 줄어들게 만든다. 그래서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근대적 시민의식은 조롱을 금기하려는 경향을 지닌다.


여기서 강자와 약자는 상대적이다. 누군가에 대한 약자는 다른 누군가에 대해 강자이기도 하다. 또 강자처럼 보이는 이가 스스로를 약자라고 여길 수도,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아니면 강자였던 자가 약자가 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벌어질 수도 있다. 또는 애초에 특별히 강자도 약자도 아닌, 애매모호한 관계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상황에 따라 '강자 : 약자'의 정의가 서로 달라질 수도 있다. 슬슬 두통이 올 만큼 문제가 복잡해지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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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엡 버트렘의 만평


지난 샤를리 엡도 사건은 이 복잡성의 극단적인 발현이다. 서남아시아의 이슬람 사회 중 일부는, 이슬람 문화권 전체가 근현대 서구 문화권 전체로부터 침탈당해왔다는 역사관을 지닌다. 이 역사관에 기반해 이들이 바라보는 구도는 <서구=강자, 이슬람권=약자>'가 된다. 이 때문에 샤를리 엡도의 표현이 '조롱'이 되고, 동시에 그들이 반복하고 있는 살상행위가 '정당함'이 된다.


한편 샤를리 엡도의 관점에서는 <이슬람의 테러리스트 집단=강자, 무차별한 테러의 위험으로 부터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약자>가 된다. 해서 그들의 노골적인 만평은 이슬람 극렬파에 대한 풍자로 정의된다.


이 둘은 서로 자신과 상대방에 대한 정의부터 다르고, 그로 인해 강자와 약자 구도에 대한 정의도 달라진다. 어느 쪽의 정의에 공감하느냐에 따라서, 위의 만평을 보고 '잔인한 조롱을 일삼는 유럽인'이라는 생각을 갖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또 '폭력에 대응하는 통쾌한 풍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당장 딴지스덜 안에서도 사건 당시 샤를리 엡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분위기뿐만 아니라, 샤를리 엡도가 이슬람 입장에서 빡칠만한 만평을 막 올리긴 했다는 의견도 혼재되어 있었다.


물론 시비를 따진다면 어떤 이유에서건 이러한 살상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보는 게 옳다. 빡침의 정도가 하늘을 찌른다는 이유로 살인을 정당화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빡치면 사람을 죽이는 비이성적인 놈'이 주변에 있는 상태에서 본인이 하는 행동이 그놈을 빡치게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니가 빡치면 안되지'라고 설득하려고 하는 건 현실적, 실리적으로 볼 때, 무모하다.


그나 샤를리 엡도 사건처럼 시시비비가 명백한 상황이 아니라면, 그래서 어느 쪽의 행위가 더 폭력적이고 더 비도덕적인지를 판단하기가 어렵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그렇게 모호한 상황은 현실에서 훨씬 더 자주 벌어진다. 그러다보니 풍자와 조롱의 정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정의, 무모함과 비도덕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연일 배틀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 복잡한 우리의 현실에 대입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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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기자회견 모습


얼마 전, 옹달샘의 여성혐오 발언 및 삼풍백화점 사고 피해자 비하 발언이 이슈가 된 바 있다. 이로 인해 발언의 직접적 주인공인 장동민은 몇몇 프로그램에서 하차했고 함께 방송한 유세윤은 방송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상태. 이 전반적인 사태에 대해 '과도한 마녀사냥'이라는 반응이 있는가 하면, ‘유세윤은 왜 계속 방송을 하냐!'는 비난여론도 있다. 이 과정에서 옹달샘 멤버들과 그들을 옹호하는 여론이 놓치고 있는 건, 그들을 비판하는 대중들이'왜 빡쳤는가' 이다.


그들이 진행하는 '옹꾸라' 방송에서의 발언은, 그들이 그 방송을 공적 미디어컨텐츠가 아닌 사적 대화공간으로 인식하면서 발생한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들의 당시 사과문을 보면, 그들 스스로는 이러한 인식의 문제가 해당 발언의 원인이었다고 보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들의 인식 내에서는 사적 공간에서의 그러한 발언에 있어 대상과의 권력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 입장에서는 '조롱할 의도가 없었으나 그 발언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조롱처럼 될 수 있음을 미리 생각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이상한 논지의 사과를 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까진 뭐 그렇다 치자.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들은 1차 기자회견에서 당시 출연 중이던 방송에서 자진 하차할 계획은 없음을 밝히고, 이후 방송을 계속했다. 이렇게 되면 전혀 다른 구도가 발생한다. 대중매체에 계속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건 소수의 사람들뿐이며, 그러한 매체상의 노출은 일방적이다. 즉, 방송에 나오는 그들이 강자, 그걸 원치 않는 사람들은 약자가 된다. 그리고 그 대중들에게 있어서, 옹달샘이 방송에 계속 얼굴을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과거의 비하발언 정도는 사과 한번으로 퉁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결국, 옹달샘에게 비판적인 대중들에게 있어서 '과거의 비하발언'은 매우 무거운 것인데, 옹달샘 멤버들은 이것을 상대적으로 훨씬 가볍게 여긴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인식 차이를 드러내는 행위(방송 출연)는 매우 일방적이라는 점. 이 두 가지가 결합하면서 옹달샘 멤버들이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그들의 방송출연 자체는 비판적 대중들에게 '조롱'으로 인식된다.


이 구조를 놓친 상태에서 그들의 발언이 미국식 스탠드업 코메디 기준에서는 별 것 아니라는 식의 반론을 내놓는 것은 설득력은 둘째 치고 효과성이 매우 떨어진다. 비판여론의 핵심은 '비하발언에 대한 진지한 인식'이다. 그들에게 '그건 그렇게 진지한 게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건, 사실여부를 떠나서, 별로 소용이 없다.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니 그게 진지한 게 아니라니까?’라고 늘어놓는 건 그냥 상대를 더 빡치게 할 뿐이다.


이런 구도로 발생한 갈등은, 결국 그냥 힘겨루기가 된다. 그 힘겨루기의 결과, 현재스코어 장동민은 몇몇 방송에서 하차하고 유세윤은 계속 방송에 나오는 정도로 마무리됐다. 딱 그 정도로 양쪽의 힘이 균형점을 이루고 있는 게 지금 이 시대 대중문화의 결론인 셈.




한편 여기, 13년 만에 돌아와 그 힘겨루기를 '쫑' 내보려는 한 아저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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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붕유, 그가 돌아왔을 때 대중들은 다시 한 번 혼란을 겪는다. '조또 씨발 절대 안 된다'는 여론이 있는가 하면, '나도 싫긴 하지만 형평성을 고려할 때 더 심한 병역기피자들도 그럭저럭 살고 있는데 굳이 유씨만 끝까지 안된다는 건 너무하지 않냐'는 여론도 소수 존재했다. 발치몽으로 불려지는 MC몽의 복귀도 그렇고, 사실상 거의 비슷한 수순을 밟았던 다른 연예인들도 결국 십 수 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그럭저럭 활동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병역문제는 한국 대중들에게 졸라게 진지한 주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병역문제를 인맥이나 돈으로 퉁치는 행위, 즉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이 무거운 주제를 졸라 가볍게 넘겨 버리는 행위는 대중들을 졸라 빡치게 한다. 13년 전 당시 스티붕유는 인기, 돈, 미국시민권을 고루 갖춘 상태에서 유래 없이 대중들을 빡치게 한 바 있다.


한편 그에 대한 소수 동정여론의 인식구조는 이렇다. 거대한 대중들의 비난여론은 그 거대함에서 기인한 힘을 지닌다. 그러므로 스티붕유 개인은 상대적인 약자이며, 그런 그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군대에 가려고 하는, 나름 진지한 접근을 그저 쇼라고 치부해버리는 건 대중들의 한 개인에 대한 조롱이라는 인식하는 것이다.


이 관점으로 볼 때 그가 매체를 통해 자신이 과거의 병역기피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밝히고, 아프리카TV를 통한 사과방송을 기획한 것 까지는 성패여부는 둘째 치고 그럭저럭 괜찮은 접근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다른 핑계 없이 '후회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군대에 가고 싶다'는 접근은 먹히든 말든 간에 정공법이긴 했다.


하지만 지난 27일에 있었던 방송사고는, 그 접근이 정공법이었던 만큼, 졸라게 정통으로 대중들을 슈퍼 빡치게 하고야 말았다. 방송종료 직후, 미처 꺼지지 않은 마이크를 통해 방송된 대화 내용은 마치 사과방송 자체를 하나의 쇼로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상대의 무거움을 가볍게 넘겼던 과거. 그 과거에 대해 무거웠어야 할인식. 하지만 그 인식 자체가 한없이 가벼워져버린 상황. 병역문제에 대한 역대급 조롱이 탄생한 것이다.


아마도 스티붕유가 한국인들을 가장 빡치게 할 수 있는 단하나의 행동이 있다면, 바로 27일에 있었던 방송사고가 아니었을까 싶다. 13년만의 복귀는 1주일도 안 되어 이렇게 끝이 났다.




끝으로 여기, 대중이 왜 빡쳤는지 잘 모르는 것 같은 사내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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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치 하나로 최고의 이슈를 맹글어낸 맹기용. 대세는 그에 대한 비판여론이지만 제작진에게 섭외 받아서 음식 하나 망친 게 뭐 그리 욕 처먹을 일이냐는 여론도 소수 있다. 아마도 맹씨 본인이 놓치고 있을지도 모르는 비판여론의 핵심은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남들의 무거움에 대한 가벼운 태도에 있다.


약간 생뚱맞지만, 신드롬을 일으킨 웹툰이자 드라마로 제작된 ‘미생'을 잠깐 언급해보자. 미생의 인기비결을 이 글의 맥락에서 요약하자면 ‘먹고사니즘에 대한 무거움의 공감'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대의 20대, 30대, 40대는 각각 힘든 사투를 벌이고 있다. 20대들은 학자금 융자와 취업난의 콤비네이션, 30대는 부족한 실질임금과 기형적 부동산시장의 콤비네이션, 40대는 치솟는 양육비와 고용불안정성의 콤비네이션. 이 거대한 세대 전체의 무거움에 대해 장년층은 '열정과 패기가 부족한 세대'라며 가볍게 쳐내버리고, 꿍쳐둔 부동산이 떨어질 새라 새누리당에 표를 던지는 이 상황. 결국 '미생'은 분명 모두가 공감하지만 누구도 공감해주지 않는 이 무거움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거대한 지지를 얻게 된 것이다.


즉, 이 사회를 지탱한다 할 수 있는 20~40대 세대에게 있어 일할 자리를 얻고, 꾸준히 노력해서 역량을 쌓고, 그 역량을 펼쳐 먹고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건 한없이 무거운 주제다. 그리고 그 무거움과 사투를 벌이며 하루하루를 산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무거움을 짓밟는 행위가 발견될 때 그에 대한 반발감은 폭발한다. 최근 소위 '갑질'이 한국 대중들이 가장 금기시하는 행위가 된 것 역시 그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으며, 글 앞부분에 언급된 조현아 땅콩회항이나 철없는 정씨의 발언에 대한 분노도 같은 이유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십 수 년 이상 외길을 걸으며 역량을 쌓아 올린 이들이 초대받아 그 역량을 압축적으로 뽐내는 자리에 4년차 청년이 불쑥 나타나 마음껏 서투름을 드러낸 모습은 이 세대의 무거움을 한없이 가볍게 만들어버린 셈이다. 시청자들은 그 모습에서 마치 밑바닥부터 시작해 자수성가를 이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철없는 재벌 3세가 앉아있는 걸 보는 듯 한 느낌을 받는다. '수십 년의 노력'이라는 무거움이 '부모가 물려준 은수저'의 가벼움과 만날 때의 느낌이 '셰프'라는 호칭과 맹씨의 서투름과 부딪히는 모습으로 오버랩되며 그 빡침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그 무엇이 된다. 실제 역량이 있는지 없는지, 예의가 바른지 아닌지와는 무관하게 빡침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풍은 왜 있냐?'는 질문, '홍석천 가게 음식은 맛이 없다'는 반론, '딱히 맹씨가 잘못한 건 없다'는 옹호, '제작진이 섭외한 결과일 뿐'이라는 반박은 이 빡침의 핵심에서 벗어난다. 하물며 요리 천재가 나타나 4년 만에 셰프 호칭을 붙였다 해도 빡칠 수 있는 이 마당에, 서툴러 보이는 한 사람이 셰프라는 이름을 달고, 그 호칭을 인정해주는 듯 한 방송을 하고 있으니 그 방송이 이 시대의 '무거움'에 대해 공감하고 있다는 근거를 완전히 잃는 건 어쩜 당연한 수순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셰프'라는 말이 응당 지녀야할 무거움은 단지 두글자 자막이 되어 가벼이 나풀나풀 날릴 뿐이다.


맹씨, 제작진, 혹은 그의 옹호론자들이 이 구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그 방송은 그렇게 무겁게 볼 게 아니다'라는 주장을 반복한다면, 결국 이 갈등은 또 다른 힘겨루기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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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최근 한국 인터넷 또는 SNS 상의 여론이 너무 극단적이라는 우려도 있다. 혐오나 비하에 대한 민감도가 너무 높아졌다는 우려가 바로 그것이다. 그 우려는 ‘마녀사냥'이라는 팻말을 들고 드러나곤 한다. 이 모든 건 결국 상대적이다. 내가 그 무거움에 공감을 하느냐 혹은 가벼움에 공감을 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가볍게 여기는 이들이 힘을 지니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말이다.


순전히 개인적 주관으로만 보자면, 옹달생의 방송 출연 강행이 정말 도덕적으로 잘못됐다든가, 스티붕유가 절대로 군대에 갈 수 없는 것이 절대적인 정의라든가, 맹씨가 방송에서 하차해야만 옳다는 식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니까 이러한 것들이 도덕적 선이고 사회적 정의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다만 나는 빡쳐하는 대중들의 그 무거움에 공감한다. 빡쳐하는 대중이 많다는 얘기는, 그것이 그렇게나 무겁다는 얘기고, 그것을 무겁게 느끼는 이들이 그렇게나 많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여론이 민감하고 극단적으로 분노를 표출한다는 현상은 이 사회의 표면이 점점 그 심연의 무거움을 공감하지도 반영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 사회의 표면의 역할을 하는 미디어권력, 정치권력, 경제권력 등은 그 심연에 해당하는 대중들을 필요로 한다. 심연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표면이 그 심연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상황. 그 상황에서 대중들에게 '이 가벼운 걸 뭘 그리 무겁게 생각해'라고 반복하는 모습. 이 과정에서 무거움은 그 무게를 더해가고, 그러다보면 대중들 내부에서도 각자 다른 무거움을 바탕으로 서로에 대한 조롱과 풍자의 경계선 논쟁이 계속된다.


그저 그 무거움을 공감하는 것에서 시작하면 될 문제, 사회의 표면이 심연의 무거움을 반영하면 될 문제가 졸라게 멀게만 느껴진다. 그럴수록 그 무거움은 졸라게 점점 무거워진다.


씨바 이러다 깔려 죽겠다.


잘 좀 해라.





춘심애비

트위터: @miiruu


편집 : 딴지일보 너클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