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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4일, 미국은 독립선언 250주년을 맞는다. 미국은 이날을 ‘자유의 기념일’로 부른다. 이날을 기념하는 공식 언어도 그렇다. 

 

독립, 건국, 공화국, 시민, 성조기, 그리고 자유. 

 

미국이 자신을 설명할 때 가장 즐겨 쓰는 말들이 다시 무대 위로 올라온다.

 

그런데 자유라는 말은 생각보다 자명하지 않다. 미국이 자유를 기념한다면 물어야 할 질문은 “자유를 기념하는가”가 아니다. 진짜 질문은 “어떤 자유를 기념하는가”다.

 

미국은 왕을 거부하며 태어났다. 그러나 250년이 지난 지금, 그 나라는 자신이 거부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물어야 하는 순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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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SBS> 링크

 

 

두 얼굴의 자유

 

자유는 근대 미국이 발명한 말이 아니다. 유럽의 공화주의 정치사에서 자유는 오래전부터 ‘주인이 없는 상태’를 뜻했다. 고대 그리스의 시민은 페르시아 제국의 신민과 자신을 구별했고, 로마 공화정의 시민은 왕이나 주인의 뜻에 예속되지 않는 상태를 자유라고 불렀다. 자유란 단지 방해받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누구의 자의적 의지에도 종속되지 않는 상태였다.

 

이 생각은 근대 정치사상으로 이어진다. 마키아벨리는 자유로운 삶을 공화정과 연결했고, 몽테스키외는 권력이 권력을 견제해야 자유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자유는 혼자 내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시민이 어떤 권력도 마음대로 커지지 못하게 만드는 정치적 조건이다.

 

그런데 근대 사회가 시장, 사유재산, 개인의 권리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자유의 중심은 조금씩 이동했다. 자유는 점차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 상태”라기보다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상태”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금지하지 말라, 막지 말라, 규제하지 말라, 내 선택에 끼어들지 말라. 

 

이 자유도 물론 중요하다. 문제는 그것이 자유의 전부가 될 때다.

 

현대의 정치철학자들은 이 차이를 다시 구분했다. 퀜틴 스키너와 필립 페팃이 말하는 공화주의적 자유의 핵심은 ‘비지배’다. 자유로운 사람은 오늘 우연히 방해받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가 마음만 먹으면 나를 좌우할 수 있는 상태에 놓이지 않은 사람이다.

 

‘간섭받지 않을 자유’와 ‘지배받지 않을 자유’는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간섭은 누군가가 실제로 내 선택에 끼어드는 일이다. 법으로 금지하고, 세금을 걷고, 규제를 만들고, 허가를 요구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개입이다. 그래서 간섭받지 않을 자유는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자유에 가깝다.

 

지배는 더 깊은 문제다. 누군가가 지금 당장 내 선택에 끼어들지 않더라도, 언제든 내 삶을 좌우할 힘을 가지고 있다면 이미 지배의 관계는 존재한다. 그래서 지배받지 않을 자유는 “누가 나를 막았는가”보다 “누가 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 점에서 지배받지 않을 자유는 공화주의적 자유에 가깝다. 자유로운 시민은 좋은 주인을 만난 사람이 아니라, 아예 주인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자유는 더 평등한 자유다. 누군가에게 더 큰 힘을 주는 자유가 아니라, 누구도 다른 사람을 자기 힘 아래 두지 못하게 하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 힘은 국가만 갖는 것이 아니다. 고용주도 가질 수 있고, 자본도 가질 수 있고, 플랫폼도 가질 수 있고, 지역 권력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지배받지 않을 자유는 국가뿐 아니라 사람을 종속시킬 수 있는 모든 권력을 경계한다.

 

예를 들어 사장이 오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노동자가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사장이 내일 마음대로 자를 수 있고, 노동자가 그 가능성 때문에 알아서 침묵한다면 이미 지배는 작동하고 있다. 직접 명령은 없었다. 그러나 자유도 없었다. 자유는 누가 나를 당장 건드리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누구도 나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태다.

 

 

왕을 거부한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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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미국 독립 선언 모습을 담은 그림

 

미국 독립도 원래는 그 자유의 사건이었다. 미국 독립은 단순히 “세금이 싫다”는 반발이 아니었다. 영국 왕과 제국의 자의적 지배를 거부한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출발점의 미국 자유도 공화주의적 자유의 언어와 연결돼 있었다.

 

독립선언의 자유는 반왕정적 자유였다. 한 사람의 의지에 공동체 전체가 매달리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왕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질서에서 벗어나, 시민이 스스로 통치하는 공화국을 만들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 자유에는 처음부터 위험한 비대칭이 있었다. 내가 지배받지 않을 자유는 절실했지만, 타인이 지배받지 않을 자유까지 같은 원리로 확장되지는 않았다. 왕의 지배를 노예상태에 비유한 이들이 실제 노예제를 유지했다. 원주민이 살던 땅을 ‘새 땅’으로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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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남부 목화 플랜테이션에 예속된 흑인 노예들.

열악한 상황에서 강제노동을 하다 탈출한

흑인 노예의 아이들은

천연두 예방접종을 위한 백신 생산 도구로 쓰였다.

출처-<황소자리>

 

따라서 미국의 자유는 처음부터 위대함과 결함을 동시에 가졌다. 왕의 자의적 지배를 거부한 자유였으나, 모두의 비지배를 보장한 자유는 아니었던 것이다. 나의 자유는 절실했지만, 남의 자유는 아직 원칙이 되지 못했다. 미국은 왕의 지배를 거부했지만, 지배 자체를 끝까지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시민의 자유에서 강자의 자유로

 

미국식 자유는 실패한 모델이 아니었다. 오히려 크게 성공했다. 이주, 개척, 시장, 사유재산, 자기책임, 작은 정부의 윤리는 미국을 움직이는 힘이 됐다. 미국은 그 자유로 성장했고, 그 자유를 하나의 세계 모델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성공 속에서 자유의 중심은 조금씩 달라졌다. 자유의 역사를 연구한 정치사학자 아넬리언 더 데인은 서구에서 자유라는 개념이 오랫동안 “국가에게 내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통치받는 방식에 대한 통제”로 이해됐다고 본다. 

 

오늘날 자유를 주로 국가의 제한이라는 틀만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오랫동안 유지된 ‘자유’의 개념과는 맞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이런 현상이 더 강하게 굳어졌다. 새 땅, 시장, 사유재산, 작은 정부, 자기책임의 신화가 자유의 언어와 결합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누구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시민의 자유가, 누구나 자기 힘으로 밀고 나가라는 강자의 자유로 기울기 시작했다.

 

정부는 물러나라. 세금은 낮춰라. 규제는 풀어라. 시장은 내버려두라. 

 

자유는 권력을 통제하는 문제라기보다, 국가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문제로 좁아졌다.

 

이 자유는 겉으로는 모두에게 공평해 보인다. 누구나 뛰어라. 누구나 벌어라. 누구나 책임져라. 그러나 정글도 모두에게 열려 있다. 문제는 정글에서 실제로 자유로운 쪽이 대개 힘 있는 자들이라는 데 있다. 약한 사람에게 정글은 자유의 공간이 아니라 방치의 공간이다.

 

이것이 “간섭하지 말라”는 말이 사실상 강자의 언어인 이유다. 세금도 규제도 복지도 노동보호도 줄이라는 자유는, 힘없는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버틸 책임만 남긴다. 시장의 자유는 필요하지만, 시장만으로는 모두의 자유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미국식 자유의 축소다. 미국은 자유를 버린 것이 아니다. 정치적 자유를 경제적 자유로, 비지배의 자유를 비간섭의 자유로, 시민의 자유를 강자의 자유로 좁혀왔다. 간섭받지 않을 자유는 국가를 견제하지만, 지배받지 않을 자유는 국가 바깥의 권력까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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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출처-<로이터>

 

 

지배는 얼굴을 바꾼다

 

작은 정부가 곧 큰 자유는 아니다. 국가가 물러난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는 시장, 고용주, 보험, 부채, 플랫폼, 지역 권력, 총기 문화, 인종 질서가 들어올 수 있다. 공적 권력이 약해졌다고 해서 사적 권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국가가 의료를 책임지지 않는다고 시민이 더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병원비 앞에서 삶이 무너질 수 있다면, 그는 간섭받지 않는 사람일 수는 있어도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정부가 손을 떼는 순간에도 다른 지배는 작동한다.

 

기업이 직접 명령하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생계가 한 회사, 한 플랫폼, 한 보험, 한 대출에 매달려 있다면 사람은 쉽게 침묵한다. 아무도 명령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몸을 낮춘다. 비간섭은 때로 지배를 보이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미국식 자유의 병리는 단순히 국가가 작다는 데 있지 않다. 국가가 물러난 자리를 누가 차지했는지를 보지 못한다는 데 있다. 자유를 “간섭하지 말라”로만 이해하면, 시장의 힘과 돈의 힘과 사회적 위계가 만드는 지배를 자유의 문제로 보지 못한다.

 

왕이 사라졌다고 지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배는 얼굴을 바꾼다. 왕의 이름으로 오던 지배가 시장의 이름으로 오고, 법의 이름으로 오던 지배가 계약의 이름으로 오고, 명령의 이름으로 오던 지배가 선택의 이름으로 온다.

 

 

방임된 자유는 지배자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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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간섭받지 않을 자유가 곧바로 트럼프를 만든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 지나친 단순화다. 그러나 그 자유가 방임과 불안을 낳았을 때, 트럼프식 정치는 그 불안을 먹고 자랐다.

 

혼자 내버려진 사람은 자유로운 개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보호받지 못한 개인일 수 있다. 보호받지 못한 개인은 자유보다 힘을 먼저 찾게 된다. 에리히 프롬이 말한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바로 이런 순간에 시작된다.

 

트럼프는 이들에게 지배자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당신 대신 싸워주겠다”고 말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워싱턴, 관료, 언론, 대학, 이민자, 진보 엘리트, 국제기구, 약자를 위한 제도. 그가 공격하는 대상들은 지지자들에게 자신을 억누르는 거대한 힘으로 보인다. 그래서 트럼프의 힘은 모순적으로 자유의 언어를 입는다.

 

미국 독립 250주년의 장면은 이 역설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로이터는 이번 미국 독립 250주년 기념 프로젝트 중 하나를 비판했다.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라 할 수 있겠다. 

 

“트럼프 진영이 내세운 250주년 기념 프로젝트 가운데 ‘Freedom Trucks’가 미국 250주년을 기념하며 역사 창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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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dom Truck은 

트럭 안에 박물관을 만들어

이동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안에는 미국 역사에 대한

전시가 되어 있다

출처-<워싱턴포스트>

 

미국 역사에서 벌어진 갖가지 사건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해석하는 식으로 아예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건국을 “신이 특별히 선택하고 축복한 사건”으로 표현한다든가, 미국의 정치적·군사적 우위를 신적 섭리와 연결시킨다. 미국의 갈등과 전쟁, 노예제·인종차별 같은 어두운 측면은 상대적으로 축소되거나, 신의 계획 속 ‘시험’으로 해석한다.

 

사실상의 역사 왜곡에 당연히 많은 미국민이 비판하고 있다. 자유의 이름으로 미국사를 다시 쓰는 일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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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로이터 기사

출처-<로이터> 링크

 

250주년 자체가 한 사람의 정치적 무대로 기울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파이낸셜 타임스도 미국의 250번째 생일이 민주적 이상의 축제라기보다 트럼프식 정치 브랜딩과 개인화된 권력의 그림자 아래 놓였다고 비판했다. 시민의 생일이어야 할 날이 한 지도자의 이미지와 겹칠 때, 공화국의 기념은 권력자의 무대가 된다.

 

왕을 거부한 나라가 다시 왕의 그림자를 본다. 물론 미국에 실제 왕이 돌아온 것은 아니다. 선거도 있고 의회도 있고 법원도 있다. 그러나 공화국은 제도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시민이 한 사람의 얼굴에 국가를 맡기고 싶어질 때, 공화국은 제도보다 먼저 상상력에서 흔들린다.

 

독립 250년의 미국이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다. 간섭받지 않는 사람은 정말 자유로운가. 지배받고 있어도 간섭받지 않는다면, 그것을 자유라 부를 수 있는가. 미국은 왕을 거부하며 태어났다. 그러나 왕을 거부한 자유가 곧 지배를 끝낸 자유는 아니었다. 그래서 250번째 생일의 무대에, 다시 왕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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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로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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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임권산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임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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