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4일 같은 날, 두 개의 국가 의례가 있었다. 워싱턴에서는 미국 독립 25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고, 테헤란에서는 하메네이 전 최고지도자의 장례식이 열렸다. 한쪽은 탄생을 기념했고, 다른 한쪽은 죽음을 애도했다.


출처-<AFP>
워싱턴에서는 전투기가 낮게 날았고, 군악대가 연주했고, 밤에는 불꽃놀이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성조기를 몸에 두르거나 독립전쟁 시기의 복장을 하고 모였다.

출처-<연합뉴스>
테헤란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추모객들이 관 앞에 모였고, 애도와 함께 미국과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구호가 이어졌다.
감정의 방향은 달랐다. 미국은 독립의 기억을 국가적 자부심으로 바꾸었고, 이란은 지도자의 죽음을 공동체의 분노와 결속으로 바꾸었다. 두 장면은 모두 국가가 기억을 감정으로 만들고, 그 감정을 다시 정치적 결속으로 조직하는 방식과 관련돼 있었다. 국가의 이름으로 조직된 감정 속에서 시민은 주권자인가, 아니면 국가 감정의 수행자인가.
이 대비가 흥미로운 것은 두 나라가 서로 다른 언어로 시민을 불러냈다는 점이다. 미국은 자유와 독립을 말했고, 이란은 저항과 희생을 말했다. 그러나 두 언어는 모두 국가의 이름 아래 다시 배열됐다. 미국에서는 자유의 기억이 국가적 자부심과 군사적 승리의 언어가 됐고, 이란에서는 저항의 기억이 국가적 희생과 복수의 언어가 됐다.
왕을 벗어난 나라의 오래된 그림자
미국 독립은 근대 정치사에서 강한 해방의 언어를 남겼다. 식민지 주민들은 영국 왕권과 제국 통치에 맞서 대표 없는 과세와 정치적 간섭에 반발했다. 세금은 걷어가면서도 그 결정을 내리는 의회에는 식민지의 대표가 없었다.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자신들이 참여하지 않은 권력이 내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문제의식이었다. 정치의 근거는 왕의 명령이 아니라 시민의 동의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 중심에 있었다.

미국 독립 전쟁의 불씨를 일으킨
대표적 사건인 ‘보스턴 차 사건’
이 점에서 미국 독립은 단순한 분리 독립이 아니었다. 왕이 아니라 시민이 정치 공동체의 주체라는 선언이었다. 공화국, 대표 정부, 권리, 자유라는 말들은 이 사건을 통해 강력한 상징을 얻었다. 적어도 원리의 차원에서 미국 독립은 권력의 출처를 왕에게서 시민에게 옮겨놓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이 상징보다 복잡했다. 영국이 곧 억압의 전부였고, 미국 독립파가 곧 자유의 전부였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 안에서도 식민지 강경책을 비판한 정치인들이 있었다.

영국의 전 총리인 윌리엄 피트(좌)와
영국 국회의원이자 철학자였던 에드먼드 버크(우).
둘 다 당시 영국의 진보 정당이었던
휘그당 소속이다.
윌리엄 피트, 곧 채텀 백작은 식민지 과세에 반대했고, 에드먼드 버크는 1775년 미국과의 화해를 주장했다. 찰스 제임스 폭스 같은 휘그(당) 정치인도 조지 3세와 노스 내각의 전쟁 정책을 비판했다. 이는 당시의 갈등이 단순히 미국과 영국이라는 국가 대 국가의 싸움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영국 내부에도 왕권과 제국 정책을 비판하는 정치적 흐름이 있었다.
반대로 미국 독립파도 모두 보편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들에게 독립은 영국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문제였고, 동시에 자치권, 재산, 무역, 토지, 정치적 이해관계를 지키는 문제이기도 했다.
공화주의는 최종 목적이라기보다 수단이었다. 왕의 지배를 거부한다는 말은 시민의 자유를 말하는 언어였지만, 그 자유는 처음부터 모든 인간에게 똑같이 열린 자유가 아니었다. 독립파가 원한 것은 지배 없는 세계라기보다, 자신들이 지배받지 않는 세계에 가까웠다.
독립 이후의 현실은 그 모순을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노예제는 유지됐고, 원주민은 서부 팽창의 과정에서 밀려났으며, 자유의 공화국은 모두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았다. 미국이 말한 개척은 빈 땅을 향한 전진이 아니었다. 이미 살고 있던 사람들의 땅을 국가의 영토로 바꾸는 과정이었다.
캐나다 역시 원주민 억압과 식민주의에서 자유롭지 않지만, 미국은 독립과 공화국의 언어를 통해 대륙 팽창을 더 강한 국가적 사명으로 만들었다. 미국 독립은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이었지만, 제국주의 자체와의 결별은 아니었다.
혁명을 말한 나라, 자유를 빼앗은 체제

1979년 이란 혁명
이란 이슬람 혁명도 처음부터 억압의 이름으로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1979년 혁명은 팔레비 왕정의 권위주의, 서방 의존, 불평등한 근대화, 정치 탄압에 대한 대중적 반발 속에서 나왔다. 왕정은 근대화를 말했지만, 그 근대화는 위에서 내려온 것이었고 반대의 목소리는 억눌렸다.
팔레비 왕정의 근대화는 학교, 산업, 도시, 여성 교육 같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것이 곧 정치적 자유를 뜻하지는 않았다. 반대파는 비밀경찰과 국가권력의 감시 아래 놓였다. 사회는 빠르게 바뀌었지만, 그 변화를 누가 결정하는가의 문제는 닫혀 있었다. 혁명은 바로 그 틈에서 힘을 얻었다.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도 하나의 집단이 아니었다. 성직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학생, 좌파,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 바자르(시장) 상인, 종교 세력이 함께 있었다. 이들이 공유한 것은 왕정과 외세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감각이었다. “독립, 자유,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구호에는 적어도 처음에는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명분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혁명은 오래지 않아 권력 독점으로 이동했다.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한 신정 권위가 제도화됐고, 혁명 이후의 이란은 다양한 혁명 세력의 공존이 아니라 성직자 권력 중심의 국가로 재편됐다. 왕정의 억압을 무너뜨린 자리에 시민의 자유가 아니라 종교 국가의 통제가 들어섰다.

하메네이
하메네이는 그 체제의 계승자였다. 그는 혁명 세대의 성직자이자 정치인으로 출발해 대통령을 거쳐 최고지도자가 됐다. 그러나 그가 상징한 것은 단순한 국가 통합이 아니었다. 시민사회, 여성, 반대파, 언론, 생활의 자유를 국가와 종교의 이름으로 통제해 온 체제의 정점이었다.
이란 혁명은 외세와 왕정에서 벗어나겠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명분은 국민 주권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혁명은 해방의 언어를 가졌지만, 그 언어는 곧 국가권력에 의해 독점됐다. 왕정에서 벗어난 국민은 다시 종교 국가와 국가안보의 이름 아래 제한됐다.
불꽃과 관, 국가주의의 두 얼굴
이런 역사 위에서 트럼프의 독립절은 더 불편한 장면이 된다. 독립절은 왕권을 벗어난 날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그날 강한 지도자, 군사력, 승리, 충성의 언어를 전면에 세웠다. 왕을 거부한 날, 왕의 귀환을 꿈꾸는 듯한 정치가 펼쳐진 셈이다.
트럼프는 미국의 예외가 아니다. 그는 미국 독립의 언어 안에 오래 남아 있던 배제와 팽창의 그림자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인물에 가깝다. 자유를 말하면서 배제를 강화하고, 국민을 말하면서 충성을 요구한다. 트럼프는 미국이 감추고 싶어 했던 미국이다.


하메네이의 장례식도 같은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 하메네이는 단순한 국가 통합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는 시민의 자유를 통제해 온 체제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장례식에서 국가의 희생으로 재구성됐다. 미국과 이스라엘이라는 외부의 적이 전면에 놓이면서, 내부 억압의 기억은 뒤로 밀렸다.
죽음은 정치가 다루기 쉬운 감정이다. 살아 있는 권력자는 평가와 비판의 대상이지만, 죽은 지도자는 애도의 대상으로 다시 배열될 수 있다. 특히 외부의 적이 분명할 때, 죽음은 책임을 묻는 사건이 아니라 결속을 요구하는 사건으로 바뀐다. 하메네이의 장례식에서 그 전환이 일어났다.
이란은 지난 2월 28일 침공당한 전쟁에서는 피해국이지만, 이란 내부 정치를 보면, 이란 지도층을 피해자 서사로만 볼 순 없다. 장례식은 애도였지만 동시에 체제 결속의 의례였다. 지도자의 죽음은 시민의 슬픔과 분노를 국가주의의 언어로 묶는 계기가 됐다. 압제자의 죽음은 희생의 얼굴을 얻었고, 시민은 다시 국가의 분노를 수행하는 자리로 불려 나왔다.
워싱턴에서는 탄생이 국가주의의 자원이 되었고, 테헤란에서는 죽음이 국가주의의 자원이 되었다. 하나는 불꽃이었고, 다른 하나는 관이었다. 그러나 둘 다 국가는 기억과 감정을 정치적 결속으로 바꾸었다. 그 안에서 시민은 주권자라기보다 국가 감정의 수행자로 놓였다.
국가는 국민이 아니다
국가주의의 가장 깊은 환각은 국가가 곧 국민이라고 믿게 만드는 데 있다. 국가가 상처 입으면 국민도 상처 입어야 하고, 국가가 적을 지목하면 시민도 같은 대상을 미워해야 한다는 감각이다. 이때 국가의 적은 곧 시민의 적이 되고, 국가의 기억은 곧 시민의 기억이 된다.
그러나 국가는 국민 그 자체가 아니다. 국가는 국민의 이름을 빌려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있다. 미국은 자유와 독립의 이름으로 시민을 결집시켰고, 이란은 희생과 복수의 이름으로 시민을 결집시켰다. 표현은 달랐지만, 두 경우 모두 시민의 감정은 국가의 언어 안에서 다시 배열됐다.
독립은 외부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독립의 기억이 국가주의에 붙잡히면 시민은 다시 국가의 부품이 된다. 혁명도 마찬가지다. 혁명은 왕정을 무너뜨릴 수 있지만, 그 자리에 새 국가권력이 들어서면 자유는 다시 제한될 수 있다. 왕이 사라진 자리에 국가가 왕처럼 서는 순간이다.
그래서 시민이 물어야 할 것은 국가가 누구를 적으로 부르는가만이 아니다. 그 적의 이름으로 누가 침묵을 요구하는가. 누가 충성을 요구하는가. 누가 자유를 미루라고 말하는가. 국가가 외부의 적을 크게 말할수록, 시민은 내부의 권력도 함께 보아야 한다.


같은 날,
불꽃놀이를 보며 즐기는 미국인들과
하메네이의 장례를 치르며 슬퍼하는 이란인들.
출처-<pbsnc/뉴스1>
워싱턴의 불꽃과 테헤란의 관은 서로 다른 장면이었다. 그러나 두 장면은 국가가 탄생과 죽음, 자유와 희생을 어떻게 정치의 언어로 바꾸는지 보여준다. 문제는 미국이냐 이란이냐가 아니다. 문제는 국가가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삼키는 순간이다.

편집: 임권산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임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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