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보다 신뢰
2026 나토(NATO) 정상회의가 열리기 전, 한국(정확하게는 한화오션)은 오래 공들인 캐나다 잠수함 사업(약 60조 원 규모)에서 독일(독일 TKMS)에 밀렸다.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이재명 대통령은 경제 부분을 주된 협력으로 삼는 G7 정상회의와 달리 군사/안보 부분을 주로 다루는 NATO 정상회의에 참여하기 전 마음이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캐나다와 캐나다가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한 독일은 모두 오랜 NATO의 회원국이다.

이번 NATO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
어찌 보면 이번 잠수함 수주에서 한국은 독일에 보이는 ‘기술’이 아닌 보이지 않는 ‘신뢰’에서 뒤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재명 대통령은 무엇을 말했는가

이런 상황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NATO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튀르키예 앙카라로 떠났다. 그리고 NATO 순방 첫날인 7월 7일, NATO 방산포럼 제4세션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NATO 회원국들에게 NATO 회원국이 아닌 한국이 왜 참석했는지 분명히 밝혔다.
키워드는 ‘더 안전한 세계’였다.

“오늘 저는, 민주주의와 자유, 평화의 가치를 공유하는 대한민국과 NATO가 ‘더 안전한 세계’를 향해 함께 구축해 나갈 방산 협력의 비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세션에 기조연설자로 나선 이재명 대통령은 한국과 NATO가 ‘더 안전한 세계’를 만들기 위한 방산 협력의 비전을 말하기 위해 튀르키예에 왔음을 밝혔다. 더 안전한 세계라는 목표를 제시한 것은 현재 국제질서가 안전하지 않다는 진단에서 비롯되는데, 이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냉전 이후 지속되어 온 국제질서의 안정기를 지나, 지정학적 갈등이 상시화되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2차 대전 이후 국제사회의 질서를 담당해 온 미국과 유럽의 동맹, 즉 대서양 동맹이 만나는 NATO 정상회의에서 한국이 이제는 NATO만으로는 세계가 안전할 수 없다고 진단한 것이다. 이 진단의 핵심은 단순히 대서양 동맹의 바깥에 있는 중국과 러시아 때문이 아닌 가장 중요한 파트너이자 동맹국인 미국이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유럽 국가들의 인식과 마음을 대변한 것이다.
실제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앙카라에서 열린 NATO 정상회의의 핵심 문제의식은 ‘어떻게 미국 없이 싸울 것인가’였고, 유럽 방위의 핵심 문제는 미국의 신뢰성 약화와 유럽의 군사 역량 부족이라는 점을 지적했다(출처 링크).
이 대통령은 이어 발언했다.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인 대한민국의 안정적인 생산 역량과 검증된 기술력이 NATO의 오랜 노하우와 합쳐진다면 양측의 안보 역량은 지금보다 훨씬 강력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이 때문에 이 대통령은 군사 역량의 부족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는 NATO 회원국들 앞에서 한국의 보이는 기술력을 설파하기보다 한국이 NATO에 어떠한 파트너인지 강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한국은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라는 것이다. 심지어 이 대통령은 이렇게까지 강조했다.
“협력 진정한 힘을 발휘하려면 기술과 생산력만큼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신뢰입니다.”
결국, 이번 NATO 정상회의에 참석한 이 대통령의 핵심 의제이자 목적은 NATO 회원국들과의 방산 협력이지만,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내놓은 카드는 한국의 기술력이 아닌 신뢰였다.
한국과 NATO 관계의 전환점
한국과 NATO의 관계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 전쟁을 통해 유럽은 자신들에게 무기와 탄약, 생산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면 한국은 달랐다. 한반도라는 긴장선 위에서 살아온 한국은 전차, 자주포, 포탄을 빠르게 만들 수 있는 나라였다. 폴란드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한국산 무기를 대규모로 도입하기 시작한 건 단순한 수출 계약이 아니었다. 유럽의 안보 계산서에 한국이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폴란드 바르샤바 군사 퍼레이드에 등장한 K2 전차
출처-<글로벌이코노믹>
트럼프의 재등장, 중동 전쟁은 이 흐름을 더욱 빠르게 만들었다. 이런 흐름 위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앙카라에 간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한국과 NATO의 관계를 윤석열 정부식 ‘가치 동맹’의 언어로만 반복하지 않았다. 대신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 ‘안정적인 생산 역량’, ‘검증된 기술력’이라는 말로 다시 정리했다. 그리고 NATO가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방위산업과 생산능력을 제시하되 그것을 ‘신뢰’로 포장했다.
한국이 원하는 것, NATO가 원하는 것
그런데 외교란 결국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우리가 아무리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라고 말해도, 상대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반대로 NATO가 아무리 한국을 필요로 한다고 해도, 한국이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하면 그것 역시 협력이 아니라 부담이 된다. 정상외교는 악수하고 사진 찍는 행사가 아니다. 서로 웃으며 서 있지만, 그 안에서는 각자의 계산기가 치열하게 돌아간다.

2026 나토 정상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마르크 뤼터 NATO 사무총장
이번 한-NATO 정상회담도 그렇다. 한국이 앙카라에 가져간 카드는 분명했다. 이재명 정부는 윤석열 정부가 사용했던 ‘자유주의 가치동맹’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내세운 것은 방산, 조달, 공동생산, 공급망, 기술협력, 사이버였다. 말하자면, 한국-NATO 협력을 ‘이념의 언어’에서 ‘국익의 언어’로 바꾼 것이다.

NATO 방산포럼에서 발언하는 이재명 대통령
이번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정부가 원했던 것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지속성’이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한국의 대외정책이 하루아침에 뒤집히지 않는다는 신호. NATO와의 협력이 특정 정부의 취향이 아니라 한국 외교의 자산이 되었다는 신호. 이재명 대통령은 앙카라에서 바로 그 신호를 보냈다.
두 번째는 ‘실용’이다.
한국은 NATO 회원국이 아니다. 당연히 NATO식 집단방위 의무도 없다. 한국이 NATO에 들어가려는 것도 아니다. 한국이 원하는 것은 NATO라는 거대한 안보 플랫폼을 활용해 방산시장, 공동개발, 기술 표준, 사이버 협력, 드론과 AI 같은 미래전 네트워크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재명 대통령은 무기 거래를 넘어 공동 연구·생산·운용으로 가자는 ‘방산 파트너십 2.0’을 제안한 것이다.
세 번째는 ‘관리’다.
한국의 핵심 안보 사항은 한반도 평화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상대는 중국이다. 즉, 한국은 북한을 상대해야 하고, 중국과도 경제적으로 깊이 얽혀 있다. 여기에 러시아와의 관계도 완전히 끊고 살 수 없다. 그러니 이재명 정부 입장에서는 NATO와 가까워지되, 그것이 이들에게 부정적인 외교적 신호로 읽히는 것은 부담스럽다.
이런 배경에서 방산과 기술, 사이버와 공급망이라는 기능적 협력의 언어가 필요했다. 이것은 국내적으로도 설명 가능한 방식이다. 과거 윤석열 정부가 했던 것처럼 ‘NATO 편, 즉 자유주의 진영에 서겠다’는 식의 이념 외교가 아니라 ‘한국 기업과 한국 안보에 도움이 되는 협력을 하겠다’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발언하는 마크 루터 NATO 사무총장
출처-<한겨레>
그렇다면 NATO는 무엇을 원했을까.
NATO, 특히 NATO에 속한 유럽 회원국들의 고민은 더 절박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 국가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보여주었다. 유럽은 돈은 있지만 무기가 부족했고, 공장은 있지만 속도가 부족했고, 동맹은 있지만 미국에 너무 의존하고 있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가 이번 앙카라 정상회의의 문제의식을 ‘미국 없이 어떻게 싸울 것인가’라고 잡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럽 방위의 핵심 문제는 러시아만이 아니다. 미국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느냐, 그리고 미국이 빠졌을 때 유럽이 스스로 버틸 수 있느냐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앙카라 정상회의의 핵심은 방위비, 방위산업, 조달, 생산능력이었다. 유럽연합 관련 정책, 정치 전문 미디어인 유럽액티브(Euractiv)는 유럽 동맹국들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과 방위산업 협력, 우크라이나 지원에서 성과를 보여주려 했다고 분석했다.
실제 NATO 방위산업 포럼에서는 수백억 규모의 신규 조달과 방위생산·혁신 확대가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제목 : 유럽은 NATO 정상회의에서 트럼프에게 방위 성공 스토리를 어필할 준비를 하다
유럽이 현재 처한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유럽에게 매력적인 나라다. 한국은 전차, 자주포, 탄약, 함정, 항공기, 드론, 전자·조선·배터리·반도체를 동시에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다. 더 중요한 것은 빠르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2차 대전 이후 유럽이 미국의 방위력에 기대 방위산업의 근육을 줄여왔다면, 한국은 한반도라는 긴장선 위에서 지속적으로 방위산업의 근육을 키운 나라다. 이 때문에 프랑스의 르 몽드(Le Monde)가 유럽의 재무장 과정에서 한국과 튀르키예 같은 외부 방산 공급자에 대한 의존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해당 르 몽드 기사
하지만 한국을 향한 NATO의 속내가 마냥 순수한 호의일 리는 없다. 유럽은 한국을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한국을 경계한다. 한국산 무기는 성능도 좋고, 조달 능력은 유럽에 비하면 넘사벽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기존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방산업체들에게는 위협이다. 유럽 입장에서는 한국이 필요하지만, 너무 많이 들여오면 유럽 방산 자율성이 흔들린다. 그러니 한국을 환영하면서도, 공동생산과 기술이전, 현지화, 유럽 기업과의 컨소시엄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즉, 유럽의 악수는 따뜻하지만 계약서는 차가울 수 있는 것이다.

2026 NATO 정상회담에 참여한 전 세계 정상들
출처-<매일경제>
결론적으로, 양쪽의 이해는 겹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한국은 NATO를 통해 시장을 얻고 싶다. NATO는 한국을 통해 부족한 생산능력을 메우고 싶다. 한국은 방산 수출을 원한다. NATO는 조달 안정성과 상호 운용성을 원한다. 한국은 실용 협력을 말한다. NATO는 러시아, 중국, 북한이 연결되는 안보 지형 속에서 한국을 더 넓은 전략망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정상회담의 의미는 단순히 ‘한국이 NATO와 가까워졌다’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과 NATO가 서로의 필요를 확인한 자리였다. 한국은 유럽의 안보 위기를 방산과 기술의 기회로 바꾸려 했고, NATO는 한국의 생산능력과 기술력을 유럽 재무장의 부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내놓은 ‘신뢰’라는 단어는 바로 이 틈을 파고든 말이다. 기술은 이미 있다. 생산능력도 있다. 문제는 유럽이 한국을 장기 안보 파트너로 믿을 수 있느냐, 그리고 한국이 NATO와 가까워지면서도 한반도의 외교 공간을 잃지 않을 수 있느냐다. 이번 정상회담은 그 답을 완성한 자리가 아니라, 그 질문을 공식 테이블 위에 올린 자리였다.
추신.
이재명 정부가 어떤 그림으로 외교하고 있는지, 어떤 대한민국을 만들려 하는지 궁금한 독자께는 본지의 <이재명 정부 정상회담 시리즈>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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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 정상회담 연재물
12. 유럽 순방에서 벨기에를 첫 회담 국가로 택한 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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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임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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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kuy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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