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이슬람 전통에서는 7세기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의 몰락을 알라가 새로운 시대를 예비한 결과로 이해한다. 어떠한 기반도 없던 작은 종교 공동체가 불과 수십 년 만에 당대 세계 최강의 두 제국을 차례로 무너뜨렸으니,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기적 같은 사건이었을 것이다. 아라비아의 작은 공동체로 출발한 이들은 어떻게 수백 년 간 중동을 호령한 대제국들을 이길 수 있었을까. 단순히 이들의 군사력이 더 강했기 때문일까?

 

사실 움마 공동체가 역사에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중동 세계는 이미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그 시작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 '전염병'이 있었다.

 

흑사병 대유행

 

ggg.JPG

출처 - (링크)

 

541년, 오늘날 이집트 북동부의 항구 도시 펠루시움(Pelusium)에서 치명적인 페스트가 발생했다. 이 전염병은 곡물을 실은 상선과 대상의 이동 경로를 따라, 순식간에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당시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세계적으로 번성한 대도시 중 하나였기에, 인구 밀집도가 높았던 만큼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역사가 프로코피우스(Procopius)는 이 전염병이 절정에 달했을 때 하루 사망자가 5천 명에서 많게는 1만 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비잔틴 제국의 절대 권력자였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마저 감염될 정도였으니, 제국 전역이 마주한 충격과 공포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훗날 황제의 이름을 붙여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라고 부르게 된 이 전염병은, 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흑사병과 같은 페스트균이 일으킨 대유행이었다. 흑사병이 중세 유럽을 뒤흔들기 약 800년 전, 같은 질병이 이미 비잔틴과 사산조 페르시아를 덮쳤던 것이다.

 

참고로, 최근에는 고고학과 DNA 연구를 통해 유스티니아누스 페스트와 흑사병이 모두 동일한 페스트균에 의해 발생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과거에는 두 질병이 같은 것인지에 대해 논쟁이 있었지만, 현재는 대부분의 역사학자와 의학사 연구자들이 같은 병원균이 일으킨 서로 다른 시기의 세계적 대유행으로 이해한다.

 

yty.JPG

연구팀은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에 희생된 유골에서 6세기 페스트균의 유전자를 얻었다

출처 - (링크)

 

흑사병은 한 번의 대유행으로 끝나지 않았다. 200년에 걸쳐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유행했다. 한 도시가 겨우 회복될 만하면 다른 도시에 전염병이 돌았고, 줄어든 인구가 회복될 즈음이면 다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비잔틴과 페르시아는 전염병이 남긴 상처를 치유할 시간이 없었다.

 

전염병은 사람의 목숨을 앗았고, 국가를 지탱하던 구조도 무너뜨렸다. 농촌에 농민이 사라지면서 경작지가 방치되었다. 생산량이 감소하자 세금이 줄어 들었고, 국가는 병사들에게 지급할 급여와 군량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병력을 새로 모집하고 훈련시키는 일도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특히 비잔틴 제국의 가장 중요한 곡창지대였던 이집트의 타격은 치명적이었다. 이집트에서 생산되는 곡물은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동방의 여러 군단을 먹여 살리는 생명줄과 같았는데, 농업 생산이 흔들리자 제국 전체의 재정과 군사력이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페스트는 메소포타미아를 거쳐 페르시아로 확산되었고, 여러 차례 유행이 돌면서 왕실과 귀족층까지 피해를 입었다. 인구 감소는 곧 세수 감소로 이어졌고, 이미 오랜 전쟁으로 지쳐 있던 제국은 점점 더 회복력을 잃어갔다. 결국 7세기 초, 비잔틴과 사산조는 겉으로는 여전히 세계 최강의 두 제국이었지만, 그 내부는 전염병이 남긴 상처로 이미 깊이 병들어 있었다.

 

반면, 같은 시기 아라비아반도는 상대적으로 충격이 덜 했다. 사막이라 페스트균이 쉽게 퍼지지 않았다고 설명하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인구 밀집도의 차이였다. 비잔틴과 사산조에는 콘스탄티노플과 안디옥(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같은 거대한 도시들이 밀집해 있었던 반면, 아라비아반도는 대부분 유목 부족이 넓은 지역에 흩어져 생활했다. 메카와 메디나, 타이프 정도를 제외하면 도시 자체가 많지 않았다. 게다가 도시들조차 인구 밀도가 낮고, 사람들의 이동이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도시에서처럼 폭발적인 감염이 일어날 가능성도 상대적으로 낮았다.

 

물론 아라비아반도가 전염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잔틴과 페르시아처럼 국가의 존립을 흔들 정도의 반복적인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두 제국이 전염병으로 국력을 소진하는 사이, 아라비아에서는 새로운 공동체가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전쟁이 바꾼 길

 

ffdfd.jpg

 

 

당시 동방에서 생산된 비단과 향신료, 보석과 직물은 페르시아를 거쳐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를 지나 지중해로 운반되었다. 이 길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비단길'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교역망의 일부였으며, 수 세기 동안 동서 문명을 연결하는 중요한 경제 동맥이었다.

 

그러나 비잔틴과 사산조가 국경을 사이에 두고 26년 동안 총력전을 벌이면서 이 전통적인 육상 교역로는 점차 불안정해졌다. 국경은 끊임없이 바뀌었고, 도시들은 함락과 탈환을 반복했다. 대상들은 전쟁터 한가운데를 통과해야 했고, 약탈과 높은 통행세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했다. 국제 상인들은 자연스럽게 보다 안전한 길을 찾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커진 곳이 홍해를 이용한 해상 교역과 서부 아라비아를 지나는 대상로였다. 물론 메카가 하루아침에 국제 무역의 중심지가 된 것은 아니었다. 전쟁으로 기존 질서가 흔들리면서 메카는 홍해와 아라비아 내륙을 연결하는 중계 거점으로서 점차 더 큰 역할을 맡게 되었다. 남쪽 예멘에서 올라온 향료와 아프리카의 상품, 인도양을 건너온 물품들이 이곳을 거쳐 북쪽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으로 운반되었다. 여러 부족과 상인들이 이곳에 모였고,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종교가 자연스럽게 교류했다.

 

k.JPG

 

무함마드도 이러한 배경을 등에 업고 성장했다. 젊은 시절부터 대상을 이끌고 시리아 방면으로 무역을 다녔다. 사막에 고립된 유목민의 삶이 아니라 국제 교역망 속을 오가는 상인의 삶을 살았다. 무함마드는 상품 거래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상을 함께 만났다. 당시 시리아와 아라비아 북부에는 유대인 공동체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다양한 기독교 교파와 수도원도 존재했다. 페르시아의 영향 아래에서는 조로아스터교 역시 널리 퍼져 있었다. 무함마드는 이러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하는 세계를 직접 경험하며 성장했다.

 

30여 년간 두 거대 제국의 전쟁은 기존의 국제 질서를 흔들었다. 그 변화는 아라비아반도의 경제적 중요성을 이전보다 훨씬 높였다. 전염병과 전쟁이 두 제국을 약화시키고 있을 때, 아라비아는 오히려 새로운 교역의 중심지로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훗날 움마 공동체가 단순한 종교 운동을 넘어 하나의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경제적 변화도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비수가 되어 돌아온 두 제국의 선택

 

ohkl.png

출처 - (링크)

 

비잔틴과 페르시아는 모두 영토가 광대하여 자국 군대만으로 국경을 방어하기에는 재정적 부담이 너무 컸다. 이에 두 제국은 오래전부터 국경 지대의 아랍 부족들을 포섭해 동맹 세력으로 활용해 왔다.

 

비잔틴 제국은 시리아 남부와 요르단 일대에서 활동하던 기독교계 아랍 부족 연맹인 가산인(Ghassanids)을 후원했고, 페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중심으로 한 라흠인(Lakhmids)을 지원했다. 이들은 완충국의 역할을 수행하며, 두 초강대국 사이에서 국경을 방어하고 적의 침입을 최전선에서 저지했다.

 

비잔틴과 페르시아는 이들에게 무기와 군사 장비를 제공하고, 경제적 지원과 정치적 보호를 약속했다. 그 대가로 가산인과 라흠인은 국경을 순찰하고, 적의 동태를 감시했으며, 전쟁이 발발하면 제국군과 합세하여 전장에 나섰다. 이들은 단순한 용병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두 제국의 군사 체계 속에서 훈련된 전문 전사 집단이었다.

 

이 과정에서 아랍 부족들은 세계 최강국들의 군사 문화를 자연스럽게 흡수했다. 로마식 보병 전술과 기병 운용, 공성전 기술, 군대 조직 방식, 보급 체계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선진 군사 기술을 실전에서 체득한 것이다. 훗날 움마 공동체를 위해 싸우게 되는 많은 아랍 전사들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군사 교육을 현장에서 이수하고 있었던 셈이다.

 

ytyt.JPG

출처 - (링크)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비잔틴과 페르시아는 국경을 지키기 위해 아랍 부족들을 활용했으나, 결과적으로 자신들을 무너뜨릴 군사적 기반을 스스로 닦아준 꼴이 되었다.

 

물론 모든 가산인과 라흠인이 이슬람 세력에 합류한 것은 아니다. 일부는 끝까지 기존 제국의 편에 서서 싸웠고, 다른 일부는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따라 움마 공동체에 합류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초기 이슬람군이 느닷없이 등장한 군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주축은 이미 오랫동안 두 제국의 최전선에서 실전을 치러온 아랍 전사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신생 움마 공동체가 어떻게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비잔틴과 사산조를 상대로 연이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는지 설명해 준다. 이들은 종교적 열정만으로 무장한 군대가 아니었다. 전쟁의 메커니즘을 꿰뚫고 있었으며, 제국의 군대와 국경 방어 체계를 몸소 겪으며 익힌 노련한 군인들이었다.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아랍인들을 포섭했던 비잔틴과 사산조의 선택은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몰락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았다. 새로운 제국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낡은 제국이 스스로 다져놓은 토대 위에서 새로운 시대가 탄생하기도 한다.

 

<계속>

 

비정기 브라이언.jpg

 

편집 : 금성무스케잌

마빡 디자인 : 꾸물

기사 : BRYAN

 

제보 및 연재 문의

ddanzi.master@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