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안의 세상
현장 밖의 세상에 대해 길게 쓴 이유가 뭐겠는가. 사회적 대우가 이런 집단이, 뭘 한들 주목받을 수는 있었을지 물어보고 싶어서다. 그리고 내란범 집권 첫해에 강원도에서 양회동 열사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을 때, 그가 느꼈을 모욕감이 어떤 것이었을지 조금이라도 설명하고 싶어서였다.

양회동 열사가 분신하기까지: 정부와 언론이 노동자를 악마로 만드는 과정
(딴지일보, 링크)
철근공이 되기 위해 공부하고, 건설 현장에서 성실함과 능력을 인정받아 팀장이 되고, 팀원들이 항상 일할 수 있도록 정신없이 뛰어다녔던 지대장이었다. 그런 그가 정권에 의해 ‘건폭’으로 몰렸을 때 얼마만큼의 모멸감을 느꼈을지 상상이 가는가. 게다가 강원 지역은 사람 바닥이 좁아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이다. 건설회사 부장과 노조 지대장이 어릴 때부터 서로 형님 아우 하던 사이라, 이 지역에서는 딱히 전투적으로 부딪힌 적도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경찰이 조폭, 공갈범 취급했을 때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철근은 어마어마하게 무겁다. 여름에는 손을 델 만큼 뜨겁고, 겨울엔 뼛속까지 시릴 만큼 차갑다. 그렇게 험한 일을 하던 사람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이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모멸감이었다.
열사가 돌아가신 이후, 우리가 받아온 대접에 항의하기 위해 전국에서 건설노조 동지들이 모였다. 그때 중앙 일간지들이 보도한 내용은 ‘건설 노가다들이 전국에서 모여 서울에 술판을 벌였다’ 정도로 정리된다. 그동안 얼마나 개 같은 일들이 벌어졌는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뭐라고 항의라도 하면 “늙다리들이 징징거리는 거 시끄럽다”라는 소리는 꽤 들었던 것 같다. 조선일보는 심지어 지대장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인 것을 건설노조 간부가 방조했다는, 희대의 개소리를 ‘기사’랍시고 내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건폭몰이를 당하는 동안, 나는 이런 꼴을 당했다.
몇 달 전, 지금 일하는 현장에서 조출(새벽 5시 출근)하고 오후 1시에 끝나는 스케줄을 받았다. 식당에 들어갔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식당 사장님에게 “점심 먹어도 되는 거죠?”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사장님이 나를 몹시 측은한 눈빛으로 보며 이렇게 말씀하시더라.
“반장님, 전에 N사에서 일했죠? 건설 일 하는데 하루 밥 두 끼는 계약서에 쓸 필요도 없이 당연한 거예요. 세상천지에 공사판에서 밥 한 끼밖에 안 주는 새끼들은 그놈들밖에 없어요. 왜 그런 놈들이랑 싸울 생각도 안 했어요?”
“현장도 얼마 없는데, 조건이 싫으면 나가라고, 너네 말고도 일할 사람 쌔고 쌨다는데 늦게 장가가서 처자식 건사하려면 알아서 기어야죠”
난 이렇게 답하곤 조용히 밥을 먹었다.
그렇다. 작년에 용인 하이닉스 현장에서 N사에 입사해 일할 때, 새벽 5시에 시작해 오후 1시에 퇴근하는데 밥은 한 끼밖에 못 먹었다. 그것도 한동안은 아침 식사 시간이라고 딱 30분을 줬다. 거기다 식당까지 오가는 데만 빠른 걸음으로(노가다 짬이 차면 발걸음이 대부분 빠르다) 20분이 걸렸다. 그러니까 10분 동안 줄 서고, 식판에 음식 담고, 뱃속에 밀어 넣어야 했다는 뜻이다. 우리 팀 대부분은 몇 번 해보곤 못 해 먹겠다고 계란을 쪄 왔다. 나 역시 빵과 음료수로 대충 해결했다.
그나마 나는 팀장이 괜찮은 편(?)이었다. 일부 팀장들은 ‘팀비’라는 명목으로 한 명당 매달 15만 원씩 상납받기도 했는데, 우리 팀장은 고맙게도(?) “자기 연장은 자기 돈으로 사서 쓰라”는 정도였으니까. 일당도 계속 깎였다. 정부 공시 임금은 하루 25만 원, 서울·경기 전문 건설업체들과의 임단협 안이 23만 원이 넘었는데, 4월에 처음 들어갈 때 받은 게 21만 원이었고 여름이 되자, 거기서 또 만 원이 깎였다.
이게 내란범 집권 기간이 아니라 탄핵된 그 해의 일이었다.

내란범은 쫓겨났지만, 노조 일자리들은 여전히 한 달에 보름을 채우기 힘들었다. 반면 밥도 제대로 못 먹는 현장은 한 달에 35공수가 보장됐다. 공수는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가 1공수이고, 이후 2시간마다 0.5공수씩을 더한다. 그러니까 저녁 7시까지 주중 내내 일해야 이 정도 공수가 나오고, 여기에 일당을 곱한 뒤 4대 보험과 3.3%를 떼면 한 달에 받는 돈이 나온다.
내 경우 아버지는 혈액암을 앓고 계시고, 외국인인 마나님의 한국어 교육비(한국어학당은 두 달에 대략 150만 원 정도인데, 사이버대 한국어교육학과까지 다니시는 바람에 지출이 꽤 컸다)에,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흔히 겪는 언어 발달 장애 때문에 소아정신과 병원비와 발달센터 비용까지 있었다. 한 달에 최소 450만 원은 벌어야 가족들이 삼겹살 한 번 먹을 수 있는 처지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불러줬으니 감사하다며 일해야 했던 판이었다.
아니, 사실 나는 상황이 아주 좋았던 편이었다. 왜인지는 이 사진부터 보고 이야기하자.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를 대표하는 사진이다.

이 분은 우리 지부 조합원이다. 4~5미터 높이에서 콘판넬과 합판 조각을 붙여나가는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공(숙련공)이라는 증명이다. 여름엔 저 위가 얼마나 더운지, 겨울엔 얼마나 추운지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겠다. 지금도 ‘건폭’이 어쩌고 떠드는 ‘언폭’ 조선일보 기자 나부랭이들을 저 두 계절 중 아무 때나 올려보내면 반나절 안에 기절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아직도 건폭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 딸아이 앞에서 굳은 표정을 감추려고 명상을 하고 별짓을 다 하는데도, 치미는 살의를 참기가 힘들다.
유독 내란범 집권 기간에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딱히 검색하는 것도 아닌데 자꾸 눈앞에 튀어나오더라.
저분들은 저런 작업만 잘했던 게 아니다. 저분이 밟고 올라가 있는 슬라브 밑은 강관형 동바리로 지지하는데, 현장에서는 ‘삿뽀도’(Supporter의 일본식 발음)라고 부른다. V4 규격이면 최대 4미터 조금 안 되는 높이까지 늘릴 수 있고, 무게는 14~15kg쯤 된다. 나는 이게 무거워서 두 개씩만 메고 다녔는데, 여성 조합원들은 “여자라고 얕보이면 안 된다”라며 세 개에서 네 개씩 메고 다니는 분들이 수두룩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인터넷에 써 갈기던 것들은, 한 여름에 그만큼을 메고 다닐 수나 있을지, 아니 저걸 세울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분조차도 내란범 집권 기간에는 망치를 들 수 없었다. 외부 시선이 어떻든 건설 현장 안에서는 확실한 기술자로 인정받던 분들인데, ‘노조원’이라는 내란범식 딱지가 붙어 일을 하지 못했다. 내란범이 쫓겨난 지금은 그나마 고용되고 있지만, 기공이면서도 준기공 일당을 받아야 한다. 심지어 내가 정말 존경하는 우리 지부 누님 한 분은 건설기술 경진 대회 우승자였는데, 내란범 집권 기간에 연령 제한을 넘겼다는 이유로 이제는 건설 현장에서 받아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 지부에서만 거의 70여 명이 이런 꼴을 당했다. 사실상의 가장들이 일을 못 하게 됐다는 건 가족 전체의 생계가 위협받았다는 뜻이다. 어떻게든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니 익숙하지 않은 일도 마다할 수 없었다. 원래 받던 일당의 절반만 받으면서, 그마저 제대로 못 한다고 구박받는 생활을 견뎌야 했다.
그럼 여자들을 몰아낸 현장에서 남자들은 잘 지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2023년 한 해에만 같이 일했던 동료들의 부고를 세 번 받아야 했다.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쫓겨난 현장엔, 아파트 세대 알루미늄 거푸집 조립하던 남아시아 출신들이 못 주머니를 차고 ‘목수’로 들어왔다. 그 광경을 본 동료 한 명은 형틀 목수를 바로 그만두고 전기 설비 설치로 옮겼는데, 얼마 뒤에 고소 작업대에서 작업 중 떨어져 죽었다. 반장급이었던 두 분은 할당량 못 채운다는 말도 안 되는 인격 모독을 당했다. 멘탈이 꽤 무너진 상태에서 사기까지 당했고, 결국 스스로 목을 맸다.
헌법재판소에서 내란범 파면을 선고하던 날, 퇴근 후 집에 있는 네팔식 제단에 소주 석 잔을 올렸다. 고소 작업 중 떨어져 죽은 친구는 30대 후반으로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이었다. 그의 아내는 아직도 그의 명의로 된 전화기를 갖고 있다. 매년 카카오톡이 “생일인 사람”이라고 알려주는데, 부고장에 실려 있던 그 녀석의 환한 웃음을 다시 보게 된다. 매년 볼 때마다 눈물이 난다.
정말 견디기 힘들었던 건, 단체협약에 ‘성과급제’가 들어가면서 바뀐 현장 분위기였다. 내란범 집권 기간 내내, 일정 이상의 물량을 처리하면 성과급을 준다는 조항이 단체협약에 들어갔다. 일하는 양이 늘어나는 것 자체는 괜찮았다. 문제는 그것 때문에 현장이 어떻게 바뀌었느냐다.
물량을 쳐내야 하니, 작업 속도가 느린 이들부터 밀려났다. 노조팀에서 “일 못한다”라며 쫓아내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고, 여성 조합원 배치도 꺼리게 됐다. 기능학교를 졸업하고 배치되던 초보자들도 사라졌다.
건설노조의 많은 지부는 자체 건설 기능학교를 운영해 왔다. 국토교통부 산하 법인인 건설근로자공제회가 재정 일부를 지원하고, 교육은 조합이 책임지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내란범 정부가 이 학교 지원 예산을 잘라먹었다. 그 결과 많은 기능학교들이 문을 닫아야 했다. 이런 곳들은 한 번 문을 닫으면 다시 열기 어렵다.
성과급을 챙겨야 하는 팀장들에게 기능학교 출신은 애물단지나 다름없었다. 내가 배울 때만 해도 20명이 학교에서 배우고 현장에 배치됐는데, 6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남은 건 일곱 명 정도다. 그만큼 초보가 많다 보니 여름마다 절반이 그만뒀다. 사고만 안 치면 다행인 신참이 한둘씩 붙어 있으면, 그만큼 기공들이 물량을 더 쳐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조직 입장에서 보면 재생산 루트 하나가 막히는 셈이었다. 안 그래도 중늙은이들이 대부분인데 말이다.
내란범의 건폭몰이에 지친 일부는 아예 투항해버렸다. 지부장 선거에 “정치 활동을 하지 말자”라며 입후보한 사람도 있었다. 내란범의 건폭몰이 자체가 정치 행위인데, 정치투쟁을 하지 않으면 처지가 나아질 거라 믿는 것도 어이없었지만, 그런 이들을 따라간 사람도 꽤 됐다. 일부 팀장들은 노조팀에서 현장을 받느니 차라리 일반팀으로 옮기기도 했다.
그런 팀에서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공제 항목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매달 15만 원씩 ‘팀비’를 걷어가던 팀장조차 자기가 노조원이었을 때 얼마나 잘나갔는지를 걸핏하면 자랑하던 사람이었다. 이들이 이런 식으로 팀원을 착취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도 되니까.
내란범이 쫓겨난 뒤로 일할 수 있는 현장이 조금씩 생기고는 있지만, 한 달에 절반은 일이 없는 곳이 여전히 많았다. 그러니 한 달 35공수를 채울 수 있는 현장에는 말 그대로 대기자가 줄을 섰다.
이 무렵 조합은 내란범에게 당한 탄압의 여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가석방 됐던 지도부가 남은 형기를 채우기 위해 다시 옥살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조건에서 일했는데도, 결국 8월 말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팀이 해체됐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말이 안 되는 일을 해야 했던 경우는 늘 N사와 관련이 있었다는 것만 적어둔다. 이 이상 이야기하면 특정될 수 있어 내 밥벌이에 매우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
아빠는 바다야
꽤나 더웠던 21년 여름엔, 집에 와도 에어컨 밑에 드러누워야 피부가 진정될 정도였다. 그만큼 뜨거웠다. 그래서 요즘도 가끔 철근 밑을 기어다닐 일이 있으면, 해 뜨기 전에 끝내려고 발버둥을 친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동정 어린 시선으로 보거나, 어떤 사람은 사기 친다고 하더라.
내가 살아온 인생이 워낙 버라이어티해서 건설 현장도 버라이어티한 곳만 가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비행기 엔진에 불이 난 채로 긴급 착륙을 해본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서남아시아 깡촌에서 일하다가 바로 옆 동네에서 콜레라가 터지는 경험을 한 한국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10여 년 만에 처갓집에 갔는데, 출국한 다음 날 정변이 일어나 나라가 뒤집히는 걸 겪은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양성공으로 배치됐던 팀의 팀장이 한국노총으로 도망간 주동자라, 목수 일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사수가 사라지는 경우도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2023년,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속절없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갓 태어난 아기가 있는 처지라 술도 마실 수 없었다.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다닐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밥을 먹다가 우연히 〈쇼생크 탈출〉을 봤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한 곡이 교도소 전체에 울려 퍼지고, 죄수들이 하나같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 선율을 듣는 장면이었다.
레드가 “이탈리아의 여인들이 뭐라고 노래하는지 끝내 알 수 없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 오히려 가슴이 아팠다”라고 회고하던 장면. 그 장면을 보고 집 근처 수원 SK 아트리움을 찾기 시작했다. 삭막하고 희망 없는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인간의 존엄과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일깨워줬던 그 순간이, 나에게도 필요했던 것이다. 시간이 많지 않아 오페라 전체를 보진 못했지만, 클래식 소품으로 채워진 1~2시간의 공연은 감로수 같았다.
그리고 24년에 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에 편입했다. 인문학을 다시 공부해야, 내란범과 그를 지지하는 자들, 무엇보다 건설 현장을 엉망으로 만드는 이들로부터 쌓인 인간에 대한 염증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형틀 목수가 육아에 손을 보태면서, 마나님의 한국어교육학과 공부까지 도와가며 내 공부도 하려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환장할 지경이었기에 멘탈 관리가 됐다. 인간들이 벌이는 악취 나는 행동들을 그저 지나가는 배경으로 삼을 수 있게 되면서, 일에도 집중하기 좋아졌다.

무엇보다 일하고 육아하고 공부하기 바빴으니, 이런 거 볼 틈이 없었다.
올해 2월 평점 3.5로 졸업한 뒤, 바로 숭실사이버대학교 건설 시스템공학과 3학년으로 편입했다. 재학생 유지율과 졸업률이 15~20%에 불과한 학교를 꽤 괜찮은 평점으로 졸업했다는 게 나름 자신감을 줬다. 다만 ‘한국장학재단’이라는 곳이 있고, 평점 3.0을 계속 넘기면 국가장학금으로 계속 공부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목수 일을 시작하자마자 여기부터 지원했을 것 같다. 아버지가 혈액암 진단을 받은 시점이 하필 내가 목수가 된 즈음이라서 사이버대의 학비조차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학교 편입한 건 관리자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다. 나이가 있고 딸이 42개월이다 보니, 계속 일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얼마 전엔 건설안전기사 시험도 쳤다.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힘들지 않냐고 묻는다. 아이가 자고 있는 출근 직전에나 겨우 집중해서 공부할 수 있으니, 수면 시간이 항상 모자라지 않느냐고. 힘들다. 그런데 작년 말쯤 보던 웹소설에 가슴에 박힌 구절이 있었다. 이주노동자에게 사장이 안 힘드냐고 묻자, 그 이주노동자가 했던 말.
“아빠, 바다야. 바다, 비에 젖지 않아.”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아빠들 대부분은 이 말을 보면 빙긋 웃지 않을까.

편집: 이현화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SamuelS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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