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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5일, 최욱의 매불쇼에 출연한 유시민 작가의 발언에 공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 표현 수위가 ‘저주’, ‘악담’, ‘패악질’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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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챙기고 정치 12: 분석과 에세이, 유시민과 허지웅 사이

(딴지일보, 링크)

 

지난 12편에서 언급했듯, 유시민 작가의 정치적 비평은 분석의 형식을 따릅니다.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틀을 제시하고, 그 틀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과거의 사례나 관련된 이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합니다. 이번 매불쇼에서 발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널리 알려진 ‘건축학개론’ 비유는, 검찰 보완수사권 문제나 청와대 인사, 지방선거 공천과 국회의장 선출 과정 그리고 민주당 전당대회에 이르기까지 행정부 밖에서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에도 같은 틀로 적용됩니다. 그 틀이 맞다면, 결국 실패로 이어질 것이라는 게 이번 발언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견해를 밝히는 과정에서, 유시민 작가는 아래와 같은 말을 수차례 반복했습니다.

 

“인간 이재명의 삶에 대해서는 늘 응원하는 마음이 있고 잘되기를 바란다.”

 

“내 생각이 틀렸으면 좋겠다.”

 

“대통령의 구상과 대통령의 생각이 옳고, 옳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이해를 받고, 그렇게 현실에서 성공하면 좋겠다.”

 

본인의 발언이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현재 벌어지는 현상에 대한 해석을 시민들에게 전달하려는 것이라는 점도 거듭 밝혔습니다. 진행자인 최욱 앵커와 함께 출연한 황희두 이사, 홍사훈 기자 역시 발언이 의도와 다르게 해석될 여지를 미리 짚으며 오해를 줄이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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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훗날 인간 이재명에게 미안할까 봐…”

(매불쇼, 링크)

 

정치권력을 위임받은 정부 및 여당 일부 지도층에 문제의식을 느낀 지지자가 그 뜻을 밝히는 방식으로는 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더 적절한 형식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럼에도 연휴 내내 많은 매체가 이 점은 외면한 채 조롱과 인격모독 수준의 공격을 높여가고 있습니다. 다만 그런 수준 이하의 공격 외에, 나름대로 진지하게 유시민 작가의 발언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의견들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친노’라는 단어에 대한 시각

 

유시민 작가를 공격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노무현 대통령 재직 당시 한미 FTA를 비판했던 강준만 교수를 언급합니다. 이재명을 지지하다 출범 초기부터 비판하는 지금 모습이 당시 강준만 교수의 모습과 닮았고, 유시민 작가 본인이 그때 강준만 교수를 강하게 비판했던 전적까지 있으니, 모순이라는 겁니다.

 

표면적인 구도만 보면 그 연상이 이해되는 면은 있습니다. 강준만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후 행보와 열린우리당 분당을 강하게 비판했고, 그가 주장했던 열린우리당 필패론(인물과사상, 『오버하는 사회』 2003)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유시민 작가의 ‘건축학개론’을 떠올릴 만합니다. 하지만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수위 차이가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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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 링크)

 

강준만 교수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승리 이데올로기, 원조 이데올로기 중독자다’, ‘노무현의 기만 또는 연기가 문제’, ‘소수자 희생을 가볍게 생각하는 국가주의’ 같은 표현을 썼습니다(한겨레21, 『코리안드림의 화신 노무현』 2007.04.19). 유시민 의원에 대해서도 ‘멸사봉공 정신 중독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유시민 작가가 현 정권에 대한 선의를 거듭 밝힌 것과는 전혀 다른 수위입니다. 서두에서 언급한 ‘저주’와 ‘악담’이라는 표현은 이런 발언에 어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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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링크)

 

이는 단순히 ‘강준만의 수위가 더 높았다’라는 비교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그의 부정적 태도는 노무현 대통령의 퇴임과 서거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노무현 지지자들에게 ‘친노’라는 딱지를 붙여 타자화하고, 맹목적 팬덤이라느니 포퓰리즘에 기반한 폭력적 집단이라며 비판했습니다. 그 논리의 바탕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호남 지역정당이라는 민주당의 기존 정체성을 축소하고 기존 진보세력의 상징성을 계승하지 않았다는 실망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한 대중들이 실제로 공감한 것은 강준만의 비판 논리가 아니라, 민주당의 정체성을 지역정당 이상으로 확장하고 정치적 논의를 이념 구도에서 실용적 구도로 넓힌 그 가치였습니다. 이 지지층은 노무현 정권 당시에는 미처 형성되지 못했다가, 이명박 정권을 거치며 노무현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그가 펼치고자 했던 가치에 대한 열망이 모이며 단단해졌습니다. 강준만 교수는 이런 흐름과 무관하게 여전히 ‘친노 팬덤’이라는 과거의 시각에 머물렀습니다.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으로서 노무현을 지지한다는 것은, 그가 정치인이자 대통령으로서 제시한 가치를 지지한다는 뜻입니다. 당시에는 저평가됐지만 나중에 옳았다고 드러난 선택들, 기존 정치 구도를 벗어나려던 시도, 뒤늦게 조명된 행정적 성과, 언론과 검찰이라는 권력을 견제하려던 노력 등이 노무현이라는 이름의 상징이 되었죠.

 

하지만 편협한 정치 논객과 언론은 ‘친노’를 그저 계파의 하나, 또는 노무현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감정적 지지 정도로 해석합니다. 이는 단순한 해석 차이가 아니라, 대중이 실제로 지닌 사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오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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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모, 사랑이 정치와 만났던 사건

(한겨레21, 링크)

 

강준만 교수의 이러한 오류는 이후 안철수 지지, 박근혜에 대한 과대평가, 김건희 비판을 향한 조롱 같은 헛발질로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정치인과 정치평론가, 언론은 ‘친노’에 대해 같은 오류를 반복합니다.

 

 

오류에서 시작된 세계관

 

‘친노’에 대한 오류는 소위 ‘문조털래유’를 공격하는 이들의 시각에도 이어집니다. 그들의 세계관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노무현 지지자들은 정치적 합리성이 결여된 팬덤이었고, 그 팬덤이 문재인을 대선후보로 만들었으며, 그 팬덤에 편승한 정치인들이 친노-친문 세력을 이뤄 민주당의 패권을 장악했고, 이후 조국을 차기로 띄우려다 윤석열에게 정권을 뺏겼기 때문에 계엄 사태에 근본적 책임이 있다.

 

이러한 친노-친문은 여전히 그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재명 정부를 흔들고 있으며, 부정적인 여론을 무시한 채 무리하게 조국을 계속 띄우려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에 타격을 줬고, 그 패권주의 일원으로 정청래는 당내에서, 유시민은 재야에서, 김어준은 나팔수로 함께 움직인다.”

 

글로 쓰고 나니 새삼 더 황당한 이 시각은 ‘팬덤’과 ‘패권’이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합니다. 언론이 보기에 비판받아 마땅한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을 이상하게도 계속 지지하는 다수가 있다면 그들은 ‘팬덤’입니다. 또 정치평론가가 문재인을 계속 비판하는데도 지지자가 많다면 그 역시 ‘팬덤’입니다. 하지만 같은 평론가가 안철수를 지지하면, 그 지지자들에게는 팬덤이란 말을 쓰지 않죠.

 

패권이라는 개념도 비슷합니다. 문재인이 ‘팬덤’의 지지로 당대표가 된 후 뜻이 같은 정치인들이 요직에 오르면 ‘친문패권주의’가 됩니다. 그 전후로 다른 당대표가 더 노골적인 행동을 해도 ‘패권’이라는 단어는 붙지 않습니다. 유독 친노, 친문에만 따라붙는 단어인 것이죠.

 

실제 현상은 이렇습니다. 이명박근혜 정권을 겪으며 시민들의 정치 참여도는 높아졌고, 노무현을 지키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지지층이 민주당으로 모였습니다. 문재인, 윤석열을 거쳐 이재명 대통령 집권 2년 차인 현재 민주당의 당원은 500만 명으로 2009년 이후 3배 이상 증가했고, 권리당원은 2009년 6만 명에서 현재 120만 명 이상으로 20배 넘게 증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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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링크)

 

공산권 1당 체제 국가나 인도처럼 인구수 자체가 압도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세계 10위권에 드는 규모의 정당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는 것을 ‘팬덤’, 거기서 선출된 이들을 ‘패권주의’라 부르는 건 언급할 가치가 없습니다.

 

팬덤과 패권주의가 여전히 작동한다는 세계관대로라면, 더 강경한 노선을 추구하는 세력은 그 패권 바깥의 소수에 그쳐야 앞뒤가 맞습니다. 하지만 22대 총선에서 조국혁신당은 전체 득표의 24.25%를 얻어 비례대표 12석을 차지했습니다. 설명되지 않는 대이변입니다. 게다가 평택을 재보궐선거에서 조국 후보는 3위로 낙선했지만, 득표율은 27%를 넘었습니다. 어느 쪽으로 보나 무시할 만한 규모의 숫자라 보기 어렵습니다.

 

정치 관련 유튜브 채널 중 공중파와 종편을 제외하면, 구독자 200만이 넘는 채널은 ‘최욱의 매불쇼’와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뿐입니다. 노무현재단의 구독자 수도 168만에 이릅니다. 이들을 공격하는 채널은 많지만, 그중 어느 채널도 이만한 구독자를 지니지 못합니다.

 

위 현상들을 보면 두 가지 가설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채널별 구독자 분포로 볼 때, 민주당 지지자 중 노무현의 가치를 여전히 지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다는 것. 그리고 조국혁신당의 득표율을 볼 때, 현재 민주당의 당론보다 강경한 검찰 개혁을 원하는 이들이 전체 유권자의 25%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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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side, 링크)

 

이 전제라면, 최근 보완수사권 문제나 민주당 전당대회를 둘러싼 하나의 흐름이 이 두터운 지지층의 지향과 어긋남을 우려하는 것도, 청와대가 이 지지층과 다른 결의 인물에게 힘을 싣는 것을 경계하는 것도 지극히 타당합니다.

 

그런데도 한쪽에서는 여전히 ‘친노 팬덤과 패권주의’라는 세계관을 펼치고 있습니다. 전체 유권자의 25%에 이르고, 당내 과반을 넘나들며, 단일 채널로 압도적 구독자 수를 지녔더라도, 그저 ‘팬덤’이라고 치부합니다. 그렇게 다수의 지지로 선출된 인물과 당 밖의 인물들을 억지로 엮어 ‘패권주의’라 이름 붙이죠.

 

그 해석의 틀이 정말 타당하다면, 그에 걸맞은 현상이 벌어져야 합니다. 부합하지 않는 현상이 계속되는데도 무리하게 그 틀을 고수하다 보니, 이런 억지 논리가 반복되는 것이죠.

 

그 세계관이 맞다면 이런 현상이 나타나야 합니다. 노무현의 가치를 확대하거나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가 제시되고, 그 가치에 동의하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새 흐름에 올라타지 못한 딴지와 매불쇼는 뒤처지고, 그 흐름을 부정적으로 전망한 유시민 작가의 예측은 빗나가야 합니다. 새 흐름에 동참하는 여론은 더 커지고, 딴지와 매불쇼와 유시민 작가는 도태됩니다. 이런 현상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그때는 이 세계관도 타당하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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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링크)

 

 

집착, 그리고 질문

 

불교 경전에서는 스스로가 만든 고통의 원인을 ‘집착’이라고 설명합니다. 무언가를 반드시 이뤄야 한다고 여기는 집착은 그것이 이뤄지지 않은 모든 상황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어찌저찌 이뤄냈다고 해도, 다시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또 다른 괴로움으로 이어집니다.

 

일상적인 차원에서 이런 집착은 오히려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흔히 말하는 ‘완벽주의’는 세부 사항 하나하나가 일정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는 집착이라 할 수 있고, 그 덕에 좋은 성과로 이어지기도 하죠. 그럼에도 불교에서 집착을 놓으라 권하는 것은, 세상에 ‘반드시’라는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집착한다고 이뤄지는 것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이뤄지지 않는 것도 아니니까요.

 

어떤 학생이 마음을 일으켜 최선을 다하면 좋은 성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전교 1등을 하겠다’라거나 ‘반드시 100점을 맞겠다’라는 건 내 통제 밖의 일입니다. 그럴만한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나오는 결과를 의지와 노력만으로 반드시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굳이 전교 1등이나 100점이 아니어도, 좋은 성적이라면 충분히 바랄 만한 결과입니다.

 

이런 마음 챙김의 관점을 추구하는 저로서는 종종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에 스스로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이죠. 언론개혁과 검찰 개혁은 간절히 바라지만, 거기 집착하지 않는 경계를 지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 저에게 유시민 작가의 ‘내 생각이 틀렸으면 좋겠다. 다만 내가 해석하는 바를 시민들에게 전달하려는 것’이라는 말이, 의도하신 건 아니었겠지만 하나의 기준이 되어주었습니다.

 

한 명의 시민이자 민주당의 당원으로서 제가 바라는 것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 바람과는 다른 일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가 오히려 좋을 수도 있겠죠.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저는 지금 보이는 현상을 통해 판단했을 뿐이고, 더 나은 방안이 있었다는 걸 새로 배우면 됩니다. 이렇게 집착하지 않되 마음을 일으켜갈 수 있다면, 정치 참여의 과정에서 느끼는 고뇌도 조금은 줄어들 듯합니다.

 

그런 면에서, 나날이 어김없이 유시민 작가를, 딴지를, 최욱과 정청래를 공격하는 이들에게, 아직도 친노, 친문, 팬덤, 패권을 입에 담는 이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집착하는, 또는 집착하진 않더라도 간절히 바라는 그 가치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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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이현화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춘심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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