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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표현과 비물리적 폭력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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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연합뉴스> 링크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오는 9월 유엔총회를 계기로 ‘표현의 자유’ 공동선언을 추진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아직 공개되거나 확정된 선언문은 아니다. 여러 나라에 회람 중인 것으로 알려진 미공개 초안에는 ‘허위 정보’와 ‘혐오 표현’을 이유로 발언을 제재해서는 안 되며, 직접적으로 폭력을 선동하는 경우에만 예외를 인정한다는 취지가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 2026년 7월 21일 화요일 [호사카 유지, 주식아가방, 주진우X황희두X오혁진X윤건영, 김희교X박구용X이진경, 겸손공장] 10-35 screenshot.png

 

7월 21일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에서 김어준 총수는 이 소식을 전하며 이병태 전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의 발언을 떠올렸다. 

 

이 전 부위원장은 배재고 야구부의 5·18 조롱성 응원에 대한 징계를 비판하면서, 혐오 발언이라도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법이나 제도로 징계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김 총수는 두 주장의 닮은꼴을 두고 각국 극우세력이 비슷한 언어로 보조를 맞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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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한겨레> 링크

 

트럼프 행정부와 이병태를 하나의 조직이나 정확히 동일한 사상으로 묶을 수는 없다. 이 전 부위원장도 언어가 폭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런 말에 대한 책임을 법적·제도적 징계가 아니라 사회적 규탄과 반론, 사과의 영역에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서로 다른 두 주장 사이에는 유난히 눈에 밟히는 말이 있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여기서 말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주먹을 휘두르고 불을 지르며 사람의 몸을 다치게 하는 것만 행동인가. 

 

누군가를 기생충이나 침입자, 비국민으로 부르고,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며, 사람들 사이에서 밀어내는 일은 아직 아무 행동도 아닌가. 몸을 때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에게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폭력은 맞지만 책임은 아니다?

 

이병태의 논리는 언뜻 신중해 보인다. 그는 언어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존엄을 훼손하는 ‘언어적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혐오적인 말은 저급하며 사회적으로 비판받아야 하고, 화자에게 성찰과 사과의 책임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책임을 묻는 방식에 이르면 선을 긋는다. 말로 인한 해악은 반론과 사회적 비판, 평판과 사과에 맡겨야 하며, 국가나 학교, 협회가 출전정지나 징계 같은 강제적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언어폭력은 인정하지만, 제도는 움직이지 말라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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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AP>

 

트럼프 행정부의 공식 논리도 출발점에서는 비슷한 안전장치를 갖고 있다. 말이 무해하다고 주장하는 대신, 정부가 무엇이 허위이고 무엇이 혐오인지를 판정하기 시작하면, 정권에 불편한 의견이나 소수의 목소리까지 억압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들의 주장을 가장 강한 형태로 정리하면 이렇다. 

 

“혐오적인 말도 해로울 수 있다. 그러나 그 경계를 권력이 결정하는 순간 검열이 시작된다. 명백한 위협이나 사기, 임박한 불법행위의 선동이 아니라면 나쁜 말에는 처벌보다 더 많은 말과 공개적인 비판으로 맞서는 편이 자유 사회에 어울린다.” 

 

“검열의 위험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 기분이 상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을 처벌할 수는 없다. 모든 거친 비판과 조롱을 폭력으로 부를 수도 없다. 무엇이 혐오이고 허위인지를 권력이 자의적으로 정하면 표현의 자유가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도 현실적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한쪽 위험만 공적인 문제로 만든다. 화자의 입을 막을 위험은 국가와 사회가 막아야 할 자유의 문제가 된다. 반면, 그 말로 인해 다른 사람이 입은 손상은 피해자가 반론하고 견디며 회복해야 할 개인의 문제가 된다.

 

왜 몸에 가해진 폭력에는 제도적 책임을 묻고, 말과 관계가 만든 손상에는 사회적 비판만 허용해야 하는가. 

 

검열을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이, 몸에 상처를 남기지 않는 폭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보호되는 말은 무해한 말이 아니다

 

이 논쟁에서는 세 문장을 반드시 갈라놓아야 한다. 

 

1. 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

 

2. 아무 행동도 아니다.

 

3. 아무런 해악도 만들지 않았다.

 

위 세 문장은 서로 같은 뜻이 아니다. 첫 번째가 맞더라도 나머지 두 문장까지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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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태의 논리에는 심각한 단순화가 있다. 그가 근거로 든 미국의 브란덴부르크 판결도 실제 폭력이 벌어진 뒤에야 처벌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다. 그 판결에서는 해당 발언이 임박한 불법행위를 일으키려는 방향을 갖고 있는지,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기준은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불법행위’다. 이병태가 근거로 든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미국법도 말과 행동을 완전히 갈라놓지 않는다. 위협과 협박, 사기와 명예훼손은 대부분 말과 글로 이루어진다. 말이라서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표현을 처벌하려면 엄격한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말도 행동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말을 처벌할 수는 없다. 말이 현실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과 국가가 그 말에 형벌을 부과할 수 있다는 결론은 전혀 다른 문제다.

 

어떤 말이 실제로 사람의 삶을 해쳤는지를 판단하는 일과, 그 해악에 어떤 책임을 물을 것인지는 따로 따져야 한다. 반론과 사과로 충분한 경우도 있고, 교육적 조치나 내부 징계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구체적인 손해가 생겼다면 민사책임을 물을 수 있고, 위협이나 선동이 엄격한 요건을 충족할 때에야 형사처벌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물리적 폭력은 왜 사회적 비판으로 끝내지 않고 처벌하는가. 

 

단지 주먹이 몸에 닿았기 때문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안전과 자유, 삶을 스스로 꾸려갈 권리를 중대하게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 기준을 받아들인다면, 비물리적 행위도 처음부터 책임의 범위 밖으로 밀어낼 수는 없다. 반복적인 위협과 집단적 괴롭힘이 한 사람을 학교와 직장에서 몰아내고, 말할 권리와 사람들 사이의 자리를 실질적으로 빼앗았다면 몸에 멍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보호되는 표현과 무해한 표현은 같은 말이 아니다. 법이 처벌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말이 현실에서 한 일까지 지워버릴 수는 없다.

 

 

사람은 몸만 다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도 동물처럼 감각하고 움직이고 욕망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감각과 운동, 생존과 충동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말로 세계를 분류하고, 도구로 행동의 범위를 넓히며, 관계 속에서 역할과 소속을 만들고, 규범을 통해 무엇이 허용되고 금지되는지를 정한다. 인간은 몸을 가진 생물이지만, 동시에 의미와 기술, 관계와 규범 속에서 존재하는 문화적 존재다.

 

따라서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신체 손상으로만 정의할 수는 없다. 몸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분명 폭력이다. 그러나 인간을 오직 몸으로만 보면, 그 사람의 발언권과 행동 능력, 사회적 지위와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파괴하는 폭력은 보이지 않게 된다.

 

언어행위론이 오래전부터 밝혀온 것처럼, 말은 현실을 단순히 묘사하지 않는다. 우리는 말로 약속하고 명령하며, 임명하고 해고하고, 위협하고 추방한다. 발화는 일정한 조건에서 관계와 권리, 의무와 지위를 실제로 바꾸는 행위다.

 

누군가를 ‘기생충’, ‘침입자’, ‘비국민’이라고 반복해서 부르는 것도 단순한 욕설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사람과 집단을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이 아니라 경계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분류한다. 그들의 말은 처음부터 의심받고, 그들이 겪는 고통은 덜 중요한 것으로 취급된다.

 

어떤 사람의 입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가 말할 때마다 제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이미 믿을 수 없는 사람,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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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은 이런 폭력의 범위를 더욱 넓힌다. 신상 털기와 좌표 찍기, 딥페이크와 자동화된 집단 공격은 단순한 전달 수단이 아니다. 공격의 규모와 속도, 반복성과 지속성을 바꾸고, 피해자가 피하거나 반론할 가능성까지 줄인다. 한 사람의 적대가 기술을 만나면 수천 명의 감시와 공격처럼 작동할 수 있다.

 

왕따는 비물리적 폭력의 성격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한 사람을 대화에서 제외하고, 식사와 모임에서 배제하며, 다른 사람도 그와 관계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은 단순히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학교나 직장에 몸은 남아 있어도, 사람들 사이에서 맡을 역할과 관계, 발언할 자리를 없애는 행위다.

 

인간을 물리적으로 때리지 않고 사회적으로 삭제하는 것도 폭력이다.

 

정치철학자 제러미 월드런은 혐오 표현의 핵심 해악을 불쾌감보다 시민적 지위의 훼손에서 찾았다. 문제는 피해자가 기분이 나빴는지가 아니다. 그 사람이 이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동등한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공적 보장이 흔들리는가에 있다.

 

규범 역시 폭력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 행동은 잘못됐다”는 판단과 “너는 잘못된 존재다”라는 판단은 전혀 다르다. 누군가를 죄인이나 배신자, 오염원으로 고정하고, 그가 배제되고 고통받는 일을 마땅한 결과로 만드는 순간 비판은 행위를 넘어 존재 자체를 겨냥한다.

 

현실에서는 이러한 폭력이 각각 따로 작동하지 않는다. 정치인이 한 집단을 ‘침입자’라고 부르면, 말이 그들에게 이름을 붙인다. 방송과 플랫폼은 그 이름을 반복해 퍼뜨린다. 사람들은 그들을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고, 차별과 추방은 합리적이고 정당한 대응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모든 불쾌한 말과 관계의 거절, 기술적 제한과 도덕적 비판을 폭력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폭력이라고 판단하려면 힘의 차이, 반복성과 조직성, 피해자가 피하거나 반론하기 어려운 조건, 그리고 말하고 행동하고 참여할 가능성이 실제로 줄어드는 결과가 확인돼야 한다.

 

그러나 그 문턱을 넘은 언어폭력과 왕따를 물리적 폭력의 예비 단계로만 보는 것도 잘못이다. 그것들은 주먹질로 발전해야 비로소 완성되는 미숙한 폭력이 아니다. 사람의 의미와 행동 능력, 사회적 지위와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직접 공격하는, 그 자체로 완결된 문화적 폭력이다.

 

 

형사 처벌이 아니면 책임도 없나

 

문화적 폭력이라고 해서 곧바로 범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말이 사람의 삶을 해쳤더라도 국가가 형벌을 부과하려면 엄격한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금지되는 행위가 명확해야 하고, 화자의 의도와 해악의 위험, 행위와 결과의 관련성도 입증돼야 한다.

 

그러나 형사처벌에 신중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학교나 직장, 협회가 제도적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국가의 형벌권과 공동체의 교육적·조직적 책임은 성격부터 다르다.

 

학교에는 학생이 모욕과 괴롭힘 없이 교육받을 환경을 만들 책임이 있다. 직장은 차별과 조직적 괴롭힘을 막아야 한다. 스포츠협회는 경기장에서 상대 선수와 학교의 존엄을 집단적으로 훼손하는 행위를 규율해야 한다. 플랫폼에도 조직적인 공격을 방치하지 않을 책임이 있다.

 

이런 제도적 책임을 국가의 형벌권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면, 형법이 움직일 정도가 되기 전에는 공동체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감옥에 보낼 수 없는 말이면 학교도 가르칠 수 없고, 직장도 제재할 수 없으며, 경기장도 질서를 요구할 수 없게 된다.

 

형사법은 국가가 시민을 처벌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정한다. 그것을 사회가 허용해야 할 행동의 최대 범위로 바꿀 수는 없다. 범죄가 아니라는 것과 학교·직장·경기장의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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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JTBC> 링크

 

배재고 야구부에 내려진 최초의 출전정지 6개월은 재심에서 1개월로 줄었다. 학생들의 사과와 상대 학교의 선처 요청이 감경 사유로 반영됐다. 그러나 사과와 용서는 행위의 책임을 없애는 사유가 아니다. 사과는 책임을 인정하는 출발점이고, 용서는 피해자가 선택할 수 있는 대응이다.

 

더구나 이 사건은 한 학생이 순간적으로 내뱉은 막말이 아니었다. 5·18민주화운동과 특정 학교를 겨냥한 조롱성 응원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문제는 몇몇 학생이 불쾌한 말을 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역사적 희생을 조롱의 소재로 삼고, 그 기억을 계승한 학교의 학생들을 집단적으로 모욕했다는 데 있다.

 

피해 학교가 용서했다고 해서 경기장과 학교가 져야 할 공적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용서는 피해자의 권리지만, 어떤 행위를 공동체가 용납하지 않을 것인지 정하는 일은 교육과 경기 질서의 문제다. 사적 화해가 공적 기준을 대신할 수는 없다.

 

한 달의 출전정지가 사건의 집단성과 역사적 의미를 충분히 반영한 제재인지는 설득력 있게 설명되지 않았다. 빠른 경기 복귀만이 학생을 위한 교육은 아니다. 어떤 행위가 왜 허용될 수 없는지 분명히 확인하고, 그 책임을 공동체가 기억하게 하는 것 역시 교육이다.

 

제도적 징계에도 명확한 기준과 사실 확인, 당사자의 해명 기회와 재심 절차는 필요하다. 그러나 절차적 통제를 요구하는 것과 제도적 책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다르다. 징계가 남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징계가 필요한 경우까지 없앨 수는 없다.

 

폭력은 물리적 손상에 한정되지 않고, 책임도 형사처벌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병태식 논리는 국가 형벌의 높은 문턱을 모든 제도적 책임의 면제선으로 확장한다. 그 결과 화자의 자유는 공적으로 보호되지만, 그 말로 훼손된 교육환경과 공동체의 존엄은 피해자가 견뎌야 할 몫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이 남는다. 

 

왜 말하는 사람이 방해받지 않을 자유는 국가와 사회가 지켜야 할 권리가 되고, 그 말의 힘 아래에서 다른 사람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자유는 각자가 알아서 지켜야 할 문제가 되는가.

 

 

주먹이 올라가기 전에도 폭력은 시작된다

 

검열의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은 옳다. 국가가 무엇이 혐오이고 허위인지를 자의적으로 정하기 시작하면 표현의 자유는 쉽게 권력의 허가제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국가 형벌의 높은 문턱은 표현의 해악을 부정하기 위한 기준이 아니다. 처벌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으로 바꿔서는 안 된다.

 

인간은 몸에 상처를 입을 때만 파괴되는 존재가 아니다. 말할 자리를 잃고, 행동할 수단을 빼앗기며, 사람들 사이에서 밀려나고, 동등한 인간으로 보호받을 자격까지 의심받을 때도 삶은 무너진다.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몸의 손상으로만 한정하면, 인간에게 가장 인간적인 상처는 폭력의 이름조차 얻지 못한다.

 

주먹이 올라가기 전까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 아니다. 말은 이미 사람의 자리를 흔들고, 관계는 그를 밀어내며, 규범은 그 배제를 정당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누구나 방해받지 않고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정말 모두 자유로운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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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임권산

마빡 디자인: 임권산

기사: 임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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