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억 기부금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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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국 정가를 뒤흔든 뉴스가 있다. 영국 개혁당(Reform UK)의 대표이자 브렉시트의 상징적 인물인 나이젤 파라지가 500만 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90억 원이 넘는 거액을 개인적으로 받은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500만 파운드라는 금액도 그렇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돈의 액수보다 그 돈의 성격이다. 정부 보조금도, 정당 후원금도 아닌, 억만장자 사업가이자 암호화폐 투자자로 알려진 크리스토퍼 하본이 파라지 개인에게 건넨 돈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하본은 오래전부터 브렉시트 진영과 Reform UK를 후원해 온 대표적인 후원자다.
파라지는 뇌물이나 대가성 후원금 성격의 돈이 아님을 강하게 부인하면서도, 의원직을 사퇴한 뒤 다시 유권자의 선택을 받겠다고 밝혔다.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은 언론이나 정치권이 아니라 국민이 판단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만약 이게 한국의 상황이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국회의원이 90억 원이 넘는 돈을 개인적으로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아마도 검찰 수사와 특검 요구, 여야의 공방, 언론의 집중 보도까지 정치권 전체가 크게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나이젤 파라지는 의원직을 사퇴하고 다시 재보궐선거에 나오겠다고 한다. 물론, 재출마 선언은 논란의 시작일 뿐, 사건의 핵심은 법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을 어떻게 물을 것인가이다.
영국 역시 이 사건을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언론은 돈의 성격과 시점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정치권에서도 윤리성과 투명성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다시 유권자의 판단을 받겠다"는 파라지의 주장 자체를 민주주의 절차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시각도 적지 않다. 한국과 영국의 정치 문화의 차이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영국 정치를 바꾼 아웃사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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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젤 파라지는 전형적인 영국 정치인이 아니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를 거쳐 정당 보좌관 생활을 하다가 국회의원이 된 엘리트 정치인의 길을 걷지 않았고, 지역에서 지역구 의원으로 활동하며 지역사회에 이바지한 사람도 아니다. 런던 남부 지역에 위치한 사립학교 둘리치(Dulwich)를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하지 않고 런던의 금융 중심가인 시티(City of London)에서 금속 상품 중개인으로 성공한 뒤 정치에 뛰어든 인물이다.
젊은 시절부터 그는 유럽 통합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연합(EU)이 점점 더 많은 권한을 브뤼셀로 가져가면서 영국 의회와 국민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줄어든다고 생각했다. 당시 영국의 주류 정치권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다소 시대착오적이거나 주변적인 의견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러나 파라지는 오히려 그 문제를 자신의 정치적 출발점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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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보수당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1990년대 초, 보수당을 떠나 영국독립당(UKIP)의 창당에 참여했다. 당시만 해도 UKIP는 의석도 거의 없고 언론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작은 정당이었다. 하지만 파라지는 포기하지 않았고 수년 동안 거리에서, 술집에서, 토론회에서 그리고 텔레비전 스튜디오에서 끊임없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
"영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사람은 영국 국민인가, 아니면 브뤼셀의 관료들인가?"
당시에는 그의 주장이 현실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적 불안이 커지고, 유럽 난민 문제와 이민 논쟁이 본격화되면서 그의 메시지는 점차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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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는 영국 현대 정치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었다. 국민투표를 실시한 사람은 당시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이었지만, 그 투표가 현실이 되도록 가장 오랫동안 여론을 만들고 압박했던 정치인은 파라지였다. 유력한 정치인도 아니었지만 총리의 결정을 움직였고, 정부를 이끌지는 않았지만 정부가 외면할 수 없는 의제를 만들어 낸 것이다.
브렉시트 이후에도 그의 정치는 끝나지 않았다. 그는 브렉시트당(Brexit Party)을 거쳐 오늘의 Reform UK를 이끌며 다시 영국 정치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Reform UK는 전통적인 양당인 보수당과 노동당을 위협할 정도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영국 정치의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파라지는 정당의 대표라는 존재감을 넘어 지지자에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해 주는 정치인으로 각인되고 있다. 물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영국 사회의 분열을 부추긴 대표적인 포퓰리스트다. 이처럼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리지만, 이제 영국 정치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가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이유는 화제를 모으는 데만 있지 않았다. 정치인이라면 보통 의회에 자주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다수의 영국인이 파라지를 만나는 곳은 국회가 아닌 뉴스 스튜디오다.
정치인이 뉴스를 진행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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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정치인이 직접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라디오 뉴스를 진행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이 장면이 그리 특이하지 않다.
물론 영국의 공영방송 BBC에서는 현역 정치인이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BBC는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은 BBC 외에도 다양한 방송 환경에 놓여 있다. 영국의 신문과 방송은 각기 다른 역사와 문화 속에서 다양한 정치적 성향을 형성해 왔으며, 최근에는 새로운 형태의 뉴스 채널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21년 개국한 GB News다. 이 방송은 기존 언론이 충분히 대변하지 못했던 목소리를 전달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우며 등장했다. 미국의 폭스뉴스(Fox News)와 자주 비교되지만, 영국의 정치 미디어 환경은 미국과 다르기 때문에 두 방송을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다만 기존 주류 언론에 비판적인 시청자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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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지는 GB News의 대표 진행자였다. 정치 현안을 해설하고, 다른 정치인과 인터뷰하며, 자신의 견해를 거침없이 밝히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높은 시청률과 화제성을 바탕으로 방송국의 얼굴이 되었고, 의회 밖에서도 대중과 꾸준히 소통하는 정치인으로 자리 잡았다. 많은 영국인이 그를 국회의원이라기보다 먼저 텔레비전에서 만나는 인물로 기억할 정도다.
나이젤 파라지는 방송을 단순 부업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방송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계속 전달했고, 정치 밖에서 대중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방송 활동은 정치의 연장이었다.
500만 파운드는 무엇을 위한 돈이었을까

나이젤 파라지와 크리스토퍼 하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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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도대체 왜 억만장자 사업가는 정치인 개인에게 500만 파운드라는 거액을 건넸을까.
이 돈을 준 크리스토퍼 하본은 암호 화폐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업가다. 그는 파라지 개인에게 500만 파운드를 전달했다. 더욱이 이 돈은 파라지가 2024년 총선 출마를 선언하기 직전에 지급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여러 의문이 제기됐다.
파라지의 설명은 분명하다. 이 돈이 정치 활동의 대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조건 없는 개인적 선물이었다고 주장한다. 브렉시트를 위해 오랫동안 활동해 온 것에 대한 보상과 지속적으로 위협을 받아 온 자신을 위한 평생의 경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지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 받은 개인적 증여였기 때문에 정치자금으로 신고할 의무도 없었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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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비판하는 사람들의 시각은 다르다. 하본은 이미 Reform UK의 최대 후원자 가운데 한 명이었고, 거액이 지급된 시점도 파라지가 정치 일선으로 복귀하기 직전이었다. 그래서 이 돈이 실제로는 정치 활동과 무관한 순수한 개인적 선물인지, 아니면 사실상 정치적 역할과 연결된 경제적 지원인지를 명확히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의회 윤리 기준과 관련한 조사와 세금 문제에 대한 검토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영국 사회는 파라지의 유무죄를 떠나서, 정치인과 거액 후원자 사이의 관계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개인적 선물과 정치적 후원의 경계는 어디에서 그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는 특정 정치인 한 사람을 넘어 영국 민주주의의 투명성과 정치 윤리에 관한 논의로 이어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이젤 파라지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파라지를 지지하는가. 그 답은 파라지 개인이 아니라, 그가 이끌고 있는 정당인 Reform UK를 이해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Reform UK는 정말 극우 정당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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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orm UK를 소개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은 '극우 정당'이다. 실제로 해외 뉴스를 접하다 보면 'far-right party'라는 표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Reform UK는 정말 극우 정당일까. 이 질문에 단답형 대답을 내놓기 쉽지 않다.
일부 정치학자들은 Reform UK를 유럽 여러 나라에서 성장한 '포퓰리스트 급진 우파(populist radical right)' 정당의 하나로 분류한다. 이들은 Reform UK가 강한 반이민 정책, 국가 정체성의 강조, 기존 정치 엘리트에 대한 비판, 포퓰리즘적 화법 등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학자들 가운데는 포퓰리스트 급진 우파를 넓은 의미의 'far right' 범주 안에 포함시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다른 견해도 있다. 대표적인 영국 정치학자 팀 베일은 Reform UK를 단순히 '극우'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정치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거나 폭력을 용인하는 '극단적 극우(extreme right)'와 민주주의 제도 안에서 선거를 통해 경쟁하는 '포퓰리스트 급진 우파'는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Reform UK를 둘러싼 논쟁도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실제로 Reform UK 역시 자신들을 극우 정당이라고 규정하는 데 강하게 반발해 왔다. 나이젤 파라지는 자신들의 정당을 '새로운 중도우파(new centre-right)' 혹은 '보수당이 잃어버린 보수주의를 회복하려는 정당'이라고 설명한다. 2024년에는 BBC가 Reform UK를 'far-right'라고 표현했다가 이를 정정하고 사과하면서 영국 사회에서 이 용어를 어디까지 사용할 수 있는지를 둘러싼 논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처럼 용어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는 이유는, Reform UK가 특정 이념만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정당은 반이민 정책과 국경 통제를 강하게 주장하는 동시에 세금 감면, 작은 정부, 규제 완화와 같은 전통적인 보수주의 정책도 함께 내세운다. 브렉시트 이후에는 영국의 주권 회복, 정치 개혁, 공공서비스의 비효율성, 생활비 문제 등 다양한 의제를 결합하며 기존 양당 정치에 대한 불만을 흡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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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조사에서도 Reform UK 지지자들은 브렉시트 성향뿐 아니라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과 국가 운영에 대한 불만을 폭넓게 공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Reform UK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이름표를 붙이는 일보다, 왜 이처럼 많은 영국 유권자가 기존 보수당과 노동당을 떠나 Reform UK를 선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영국인들이 Reform UK를 지지하는 이유 역시 하나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민과 국경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생활비와 공공서비스에 불만을 가진 사람도 있으며, 기존 정치가 자신의 목소리를 충분히 대변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서로 다른 이유를 가진 유권자들이 하나의 정당으로 모이는 현상은 오늘날 영국 정치가 직면한 현실을 보여준다.
Reform UK의 등장은 민주주의의 위기이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이기도 하다. 기존 정당이 담아내지 못한 요구가 새로운 정치 세력을 통해 제도권 안으로 들어오고, 다시 유권자의 선택을 받는 과정은 영국 정치사에서 반복되어 온 모습이다. 물론 그 결과가 언제나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영국 사회는 그 논쟁 자체를 민주주의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며 치열하게 토론하고 있다.
<계속>

편집 : 금성무스케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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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 B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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