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정치라는 낡은 신상품
여의도에는 청년 정치라는 망령이 늘 떠돌고 있다. 언제부터 떠돈 것인지 모를 이 망령은 선거 때가 되면 목소리를 키운다. 새로운 청년위원회가 필요하다거나, 청년 비례대표를 공천해야 한다거나, 청년 최고위원이 필요하다며 여론 몰이를 하다 끝내 ‘어떤 젊은이’가 등장한다. 미디어는 그를 새로운 청년 정치의 상징처럼 띄운다. 하지만 이내 존재감은 서서히 옅어지고 어느 순간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청년’이 등장한다.
국회의 청년 정치는 이렇게 반복되고 있다. 30년이 지나도록.

1995년 8월 15일 경향신문
“권위를 거부하는 X세대 등장, 학력보다 아이디어 시대로. 권위 있는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신세대들의 소비지향성과 지나친 개인주의, 역사의식 없음이 비판받았다.”

1999년 3월 23일 조선일보(링크)
“386세대는 개성이 강하고 개인주의 성향이 짙다. 평등주의자들 같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목표 설정도 약한 것 같다. 그저 현상적 문제점을 부각시키는 데 급급한 게 아니냐 싶을 때가 많다.”

2023년 1월 3일 동아일보(링크)
“MZ세대는 칼퇴근에 회식은 기피하며 사생활만 중요하게 생각한다. 상사나 선배의 조언을 귀담아 듣지 않고 꼰대 취급한다. 말을 가리지 않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 세 기사에서 연도를 지운다면, 어느 시대의 청년 이야기인지 구분이 가능한가. 권위 거부. 개인주의. 자기주장이 강함. 기성세대가 보기에 이해하기 어려움. 언론이 청년을 묘사하는 방식은 30년 동안 늘 비슷했다. 이름만 바뀔 뿐 내용은 그대로다. 386세대에서 X세대로, 그리고 MZ세대까지. 미디어는 매번 새로운 세대가 나타났고 그 세대만의 특성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사를 나란히 놓고 보면 알 수 있다. 새로운 세대는 없었다. 그저 세대 담론이라는 상품이 있을 뿐이다.
청년은 원래 그렇다
기성세대가 청년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지금 시대의 특성이 아니다. 청년기라는 생애 주기적 단계가 지닌 보편적 역동성이라고 봐야 한다.
청년기의 인간은 기성 권위에 저항한다. 뚜렷한 개성을 추구하고 자율적인 목소리를 발산한다. 이것은 X세대의 특성도, MZ세대의 특성도 아니고 그저 청년 그 자체의 특성일 뿐이다. 지금 국회의사당 안에 있는 386세대 정치인들도 젊었을 때는 다 그랬다. 송영길이 젊었을 때 그랬고, 김민석이 젊었을 때 그랬고, 정청래가 젊었을 때 그랬다. 그 시절 언론 역시 그들을 “권위를 거부하는 신세대”,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세대”라고 묘사했을 법하다.
그런 그들이 기성세대가 되자 이제는 청년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언론은 다시 새로운 청년 세대가 등장했다며 “권위를 거부하고 개인주의적이며 자기주장이 강한 세대”라고 묘사한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런데도 왜 세대 담론은 계속 재생산되는가.

(서울경제, 링크)
세대 담론은 상품이다
세대 담론이 반복 생산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저널리즘의 게으름이다. 복잡한 사회 현상을 세대라는 카테고리로 뭉뚱그리는 것은 취재를 끝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개별 사례를 깊이 파고들지 않아도 “MZ세대의 특성”이라고 이름 붙이면 기사가 완성된다. 청년 정책의 실패를 다룰 때도 구조를 분석하는 대신 세대 특성으로 치부해 버리면 그만이다.
둘째, 상업적 이익이다. 언론은 대중의 ‘인지적 편의’ 욕구를 정교하게 파악해 상품화한다. MBTI나 별자리, 혈액형 유행이 그러하듯 대중은 타인을 손쉽게 규정할 수 있는 도구에 열광한다. 사람을 16개 유형으로 분류하는 방식이 얼마나 조악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조악함이 오히려 인기의 비결이다.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MZ세대’라는 마케팅 키워드도 마찬가지다. ‘MZ세대 신조어’, ‘MZ세대 직장 생활’, ‘MZ세대 소비 트렌드’ 같은 콘텐츠는 확실한 조회수를 보장한다.

미이즘(Meism) 세계관으로 바라본 ‘요즘 것들’ MZ세대와 MZ문화
(신동아, 링크)
셋째, 정치적 분할 통치의 도구가 된다. 세대 담론은 표심을 얻기 위한 정치공학적 도구로 정교하게 기획되기도 한다. 언론은 2030 세대를 특정 성향을 지닌 단일 표심 집단인 것처럼 규정하고, 정치권은 이에 발맞춰 가상의 청년 주체를 설정하고 그들의 표심을 얻기 위한 캠페인을 벌인다. 청년 내부가 지역, 성별, 학력, 소득, 고용 형태에 따라 극도로 파편화되어 있다는 실체는 세대 담론 속에서 철저히 지워진다.
세대 담론이 감추는 것
세대 담론의 가장 위험한 점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한다는 사실이다. 일자리 부족은 왜 발생하는가. 부동산값 폭등은 왜 벌어지는가. 복지 사각지대는 왜 방치되는가. 이 문제들은 변화하는 시대와 정부 정책의 실패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다.
그러나 언론은 이러한 문제를 특정 세대의 탐욕과 이기심 탓으로 너무 쉽게 치부해 버린다. 예컨대, “86세대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청년들이 설 자리가 없다”, “장노년층이 부동산을 사재기해서 청년들이 집을 못 산다” 같은 식이다. 이런 프레임은 편리하다. 시대적 모순과 정부 정책 실패의 책임을 ‘세대 갈등’이라는 프레임 뒤로 손쉽게 숨겨주기 때문이다.
세대 대립 구도는 세대 내 불평등까지 은폐한다. 서울 강남 3구 청년과 지방 소도시 청년의 삶은 결코 같지 않다. 대기업 정규직 청년과 플랫폼 노동자 청년의 삶 또한 천지 차이다. 이들 사이의 격차는 세대 간 격차보다 훨씬 크다. 하지만 ‘청년’이라는 단일한 카테고리로 묶어버리는 순간, 세대 내부의 양극화와 불평등은 지워지고 만다.

(시사저널, 링크)
여의도의 청년 장사
이런 세대 담론이 정치와 만나 완성되는 최종 상품이 바로 ‘청년 정치인’이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세대 담론에 여의도 정치가 실체라는 껍데기를 씌운다. “MZ세대의 목소리를 대변할 정치인이 필요하다”라는 언론의 프레임이 형성되면, 정당은 기다렸다는 듯 청년 정치인을 영입한다. 그리고 이들을 앞세워 청년 문제가 마치 일거에 해소될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청년 비례대표 공천, 청년 최고위원 신설, 청년 정책 위원회 발족까지. 이 모든 것이 청년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늉’이 되어 정치 시장에서 소비된다.
그런데 정작 그 청년 정치인이 대변한다는 ‘청년’은 누구인가. 이미 파편화되어 있는 청년층은 결코 하나의 목소리로 묶일 수 없다. 그런데도 청년 정치인은 자신이 청년 전체를 대표한다고 주장하고, 정당은 그 헛된 목소리를 알면서도 그대로 인정해 준다. 그것이 정당에게 이해관계에 완벽히 부합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청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정당”이라는 근사한 이미지가 만들어지지 않는가. 실제로 청년의 삶이 단 1%도 개선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미지만 만들어지면 표는 온다.
결국 청년 정치인은 청년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다. 정당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한 소모품으로 쓰일 뿐이고, 그 대가로 그들은 정치권 내에서 자리를 얻는다. 청년의 삶을 담보로 한, 철저히 서로의 이익에 부합하는 거래가 성립되는 셈이다.
뉴미디어가 만든 새로운 상품
최근 이 ‘청년 장사’에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 유튜브와 SNS로 대표되는 뉴미디어의 폭발적 성장이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유튜브 채널을 열고 매서운 소신 발언을 쏟아낸다. 조회수가 올라가고 팔로워가 모여든다. 미디어는 기다렸다는 듯 이 인물을 “청년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 인플루언서”라 부르고, 정당은 그 뒤를 든든하게 받쳐준다. 심지어 대통령이 직접 그의 이름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렇게 그는 한순간에 ‘대표 청년 정치인’의 자리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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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링크)
표면적으로 그는 뉴미디어를 통해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청년 정치인처럼 보인다. 유튜브에서 거침없는 발언을 하고, 청년층의 우경화를 걱정하고, “극우적 세계관에 납치된 청년들을 구하겠다”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청년의 이름으로 청년을 구원하겠다는 매력적인 서사다.
그러나 이는 전편에서 지적했던 “청년 정치인이라는 직업”의 전형적인 출세 경로를 그대로 답습한다. 유튜브라는 플랫폼에서 스스로 성장한 자연발생적 청년 정치인이 아니라, 여의도의 기존 시스템 속에서 길러진 청년 정치인을 유튜브라는 포장지로 감싼 것에 불과하다.
카메라 앞에서 용감하게 소신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여의도 2시 정치인’에 불과하다. 단지 그가 사용하는 매체가 유튜브로 바뀌었을 뿐이다. 매체만 새로울 뿐, 정치의 내용과 본질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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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링크)
새로운 세대는 등장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대 같은 것은 없다. 자연스러운 세대교체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그 당연한 흐름에 매번 새로운 이름을 붙여 상품화하는 언론이 있다. 그 상품에 편승해 청년 정치인을 영입하고, 마치 청년 문제가 해결되기라도 할 것처럼 장사를 벌이는 정치권이 있다. 나아가 그 장사판에 올라타 자기 정치 경력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젊은 정치인들이 있다.
이 기만적인 삼각구도가 지난 30년간 반복되어 왔다. 386세대의 이름으로, X세대의 이름으로, 그리고 이제는 MZ세대의 이름으로. 매체만 신문에서 유튜브로 바뀌었을 뿐이다.
진짜 청년의 삶을 개선하는 데 이 삼각구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방해가 된다. 청년의 목소리라는 자리가 이미 정당 내부의 출세 코스를 밟은 젊은 정치인들에게 점령됐기 때문에, 진짜 절박한 청년의 목소리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게다가 언론이 만들어 낸 세대 담론이 구조적 문제를 세대 문제로 왜곡하기 때문에, 문제의 진짜 원인을 짚어낼 논의가 시작될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한 명의 ‘신상’ 청년 정치인이 아니다. 청년이라는 카테고리 자체를 의심하고, 청년의 이름을 도용하는 정치를 경계하고, 구조적 문제를 세대 문제로 치부해 버리는 언론의 게으름을 거부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새로운 세대는 정말 등장했는가. 아니면 청년을 도용하는 ‘새로운 상품’이 등장했는가.

편집: 이현화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보좌관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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