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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 출신이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 최고의 선물투자가가 된 인물, 반복창.
그는 조선 최초의 선물거래소이자 증권시장의 모태가 되기도 하는 쌀/콩의 선물거래소인 ‘미두취인소’를 이용해 엄청난 부자가 된 인물이다.

당시 인천 미두취인소 매매 모습
출처-<서울경제>
그의 투자는 처음부터 성공했을까? 아니면 여타의 다른 개미투자자처럼 실패를 반복하다 어느 순간 대박을 터트렸을까?
반복창의 성공
당시 신문 기사를 통해 그 결과를 알아보자. (참고로, 당시 조선인들 평균 월급이 40원이었다)
‘월급이 5~6원에 불과하던 급사가 단 1년 만에 40만 원의 졸부가 되었으니 조선 천지가 반복창의 이야기로 꽃피웠다.’
-동아일보 기사-
‘알 수 없는 것이 신의 조화라 반복창은 이상하게 팔아도 먹고, 사도 먹고 거짓말같이 시세를 잘 맞혔다. 그가 출입하는 조선 상업은행과 조선은행 인천지점에는 각각 20만 원의 거금이 예금되었으며, 그를 따르는 이들이 매일 30~40명에 달해 그를 미두 신으로 추대했다.’
-매일신보 기사-

출처-<천일야사>
반복창은 투자금 500원으로 첫 번째 투자에서 18만 원을 벌었다. 행운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반복창은 이후에도 미두(쌀과 콩) 시세를 정확히 예측하여 현재 한화 가치 400억 원에 달하는 40만 원의 현금 부자가 되었다.
반복창이 미두장에 나오는 날과 안 나오는 날의 시세가 달랐으며, 그에 의해 오사카 시세까지 요동칠 정도였다.
"아이고! 참말로 천지개벽을 했네. 고아나 다름없던 양반이 스무 살을 갓 넘긴 나이에 조선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부자가 되었으니, 역시 우리가 살길도 미두뿐이야! 어서 가자고.“
"그래! 인생 한 방이야! 어차피 고관대작들은 이미 일본에 착 달라붙어서 잘 먹고 잘 사는데, 독립운동은 먼 놈의 독립운동. 미두장만이 살길이다."

미두취인소 중매점(현재의 증권회사 지점 격)은
20여 개에 달했는데,
한국인 중매점은 4개에 불과했다.
한국인 정미업자 유군성과
개성부자 강익하의 중매점 광고
출처-<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자료>
반복창의 성공 신화는 한껏 달아오른 미두판에 기름을 들어부었고, 반복창은 초호화 결혼식으로 전설의 정점을 스스로 찍었다.
"어서 오십시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반 사장님 축하드립니다. 경성 최고의 엘리트이자 절세미인을 부인으로 맞이하셨으니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가실 작정입니까?"
"아직 멀었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인천 앞바다가 보이는 곳에 영국 왕이 쓰는 가구와 대리석이 깔린 대(大)저택을 지을 예정입니다. 공사가 완공되면 집들이에 초대할 테니 꼭 놀러 오십시오. 장관님."
"캬! 역시 사장님의 배포는 대단하십니다. 저 잊지말고 꼭 불러 주십시오."
반복창은 불과 2년 전이라면 말도 붙이기 힘들었던 경성 여고부를 졸업한 모던(modern)걸 김후동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김후동
"부인! 그 많은 명문가 집안 남자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나와 결혼해 줘서 고맙소이다."
"무슨 말씀을요. 어서 집이 완공되었으면 좋겠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미 부지 구입은 마쳤고, 설계사까지 준비되었으니, 조만간 우리는 왕과 왕비처럼 살게 될 거요. 돈이면 안 될 일이 없소이다. 나라가 없으면 어떻소? 내가 미두의 신인데. 하하하하하."
반복창은 결혼과 동시에 약 20억 원의 예산으로 서양식 대저택을 짓기 위한 첫 삽을 떴다.
"여보! 결혼식이랑 집 짓는데 너무 많은 돈을 쓴 거 아니에요?"
"많이 쓰긴 했지만, 미두판에서 또 벌면 되오. 나 반복창이외다. 하하하하"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짧은 기간에 조선 최고 갑부 대열에 올라선 반복창은 결혼 후 더욱 공격적인 투자에 나섰다.

출처-<천일야사>
"자! 이제 슬슬 다시 돈을 끌어 모아 볼까?"
반복창의 몰락
그러나 반복창이 운으로 얻은 신화는 정직한 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라? 요거 봐라? 어디 다음에도 내 예측이 틀리나 보자. 따블로 묻고 가."
반복창은 아라키의 실수를 반면교사 삼은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반복하는 최악의 실수를 범한다.
"뭐야? 그동안 날린 돈이 도대체 얼마야? 안 되겠다. 내일은..."
"사장님! 증거금으로 낼 돈이 이제 없습니다."
"그래? 그럼.... 그.... 저택 공사를 멈추고 땅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반복창이 단 한 해 동안 입은 손실액은 무려 10만 원(현재 가치 100억 원)에 달하게 된다. 이듬해부터는 반복창의 성공과 함께 우상향을 그리던 쌀 가격이 곤두박질치며 그의 재산도 그 궤를 같이한다.
"반복창 소문 들었어? 그 많던 돈을 삼 년 만에 다 날리고 이혼까지 당했다던데?"
"어? 아니 어떻게 하면 그 많은 돈을 그 짧은 시간에 다 날릴 수 있나?"
"미두장이 문제야. 말로는 쌀 가격을 공개적으로 정하는 데 의의를 둔다 어쩐다 하지만, 사실 그게 도박장이나 다름 없지, 뭐. 반복창이 일 년 만에 돈을 그리 많이 번 거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인간이란 게 한 번 돈맛을 보면 그 돈을 유용하게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인생을 허비하는 족속 아닌가! 그러니 돈 귀신이 들면 평생 돈만 좇다 죽을 때는 무일푼으로 가는 거 아닌가.“

주식 시세판을 연상시키는 미두취인소 내부
반복창의 성공 비결은 그저 기적 같은 행운이 반복된 것뿐이었다. 전 재산을 날린 그는 서른 살에 중풍을 맞고 미두장 앞에서 ‘합백’을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합백’이란 미두에 걸 돈은 없지만 미두 투기에 인생을 건 사람들이 미두취인소 인근에서 푼돈을 걸고 시세를 맞추는 사설 도박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이번에는 반드시 ‘오른다’에 걸어야 해. 내 말이 틀리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소."
"에이! 진짜 재수가 없으려니 너 저리 안 가? 어디서 미두로 돈 날려 먹고 이혼까지 당한 주제에 훈장질이야!"
"뭐라고? 너 말 다했냐?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나 미두신 반복창이라고."

흐릿하게 남아 있는 반복창의 사진
출처-<매일신보 1921년 1월 16일 기사>
미두 투기로 인한 병폐
당시 반복창 외에도 미두 투기에 미친 사람들은 굉장히 많았다.
당시 조선에서 땅문서는 동양척식주식회사로, 현금은 인천의 미두취인소로 간다는 말이 있었다. 미두장에 전 재산을 봉헌하고 바다에 투신하는 자들은 물론이고, 가문의 땅을 몰래 팔아 미두취인소로 향하다 가족들의 신고로 경찰에 덜미가 잡히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는 미두 투기에 미쳐 친모를 살해하는 패륜도 일어났다.
조선인들이 미두취인소에서 거금을 잃은 데에는 일차적으로 구조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접근방식 자체가 잘못되었다. 주식 시장도 아닌 선물 시장에서 조선인들은 점을 통해 시세를 예측하고 투자했다.
"이보시오. 내일 내가 전 재산을 걸려고 하는데, 쌀값이 오를지 내릴지 알려주시오. 내 여기 복채는 든든히 드리겠소이다."
"가만있자. 내일이라.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를 여기 적으시오. 그럼 내가 음양오행의 법칙에 따라 쌀값의 시세 변화를 알려드리리다."
"좋소이다. 내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소."
미두취인소에서 쌀값의 시세를 무당과 점에 의지한다는 것은 신문에 날 정도로 성행했던 방법이었다. 오늘날 옆자리 동료에게 들은 정보로 주식을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이 미두취인소를 유지한 이유
1927년, 충남의 대부호가 미두 실패로 군산 앞바다에 투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왜 군산 앞바다로 갔을까?

쌀을 쌓은 군산항 모습(1920년대)
출처-<동국사>
인천 미두취인소가 성행하자 전국의 쌀 집산지인 군산, 대구, 부산 등에 불법 미두취인소가 개설되었다. 조선의 수많은 중소 지주가 미두취인소로 향했고, 알거지가 되어서야 그곳을 벗어났다. 그들이 미두 투기로 날린 돈은 당연하게도 일본인 지주 손으로 흘러 들어갔다.

일제강점기 조선은행 군산지점과
미두장 건물
출처-<군산시>
"야마모토 상! 이번에 서산 쪽에 땅이 급매로 나왔습니다."
"설마 또 미두에 미친 자가 나온 것이요? 하하하하. 이거 조선 땅 사는 것이 땅 짚고 헤엄치는 것보다 쉽구려. 하여튼 군인들은 무식하다니까! 뭐 하러 피를 흘리며 총칼을 쓰는지. 머리를 써야지 머리를. 낄낄낄."
여기서 조선총독부가 심각한 병폐가 만연했던 미두취인소를 재개장한 진짜 이유를 알 수 있다. 일본은 애초에 조선 쌀의 수탈을 목적으로 미두취인소를 개설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은 쌀 부족에 시달렸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소?"
"조선 쌀은 우리 국민 입맛에도 맞고 가격도 저렴해서 딱입니다. 하지만 객주회나, 신상협회 등 조선 상인들이 쌀 유통 시장을 꽉 잡고 있어서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요? 그럼 미두취인소를 설립하시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것이오."
1920년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출된 쌀은 전체의 14%였으나, 1929년에는 그 수치가 40%까지 올라간다. 이 수치 변화는 미두취인소의 설립과 정확히 일치한다.
일본은 쌀만 수탈한 것이 아니라 조선인 지주들과 제2의 반복창을 꿈꾸는 개미투자자들과 조선인 지주들의 돈까지 착혈 해갔다.

미두취인소의 폐해를 다룬
채만식 소설 『탁류』초판본
출처-<문화체육관광부>
일본은 어떻게 미두취인소를 통해 쌀과 자본을 수탈해 갈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일본은 조선 최초로 설립된 인천 미두취인소보다 무려 166년 전인 1730년에 쌀의 선물거래를 도입했었다.
"조선인이나 우리 일본인이나 많이 다를 것 같소? 군인들은 우리가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지만, 그 속성은 다 마찬가지요. 우리는 이미 쌀 선물거래의 병폐를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소. 조선인들도 우리 선조들과 마찬가지일 것이오."
에도시대 오사카의 쌀 선물거래 시장은 천 명 이상의 미도꾼이 거리에서 거래를 했고, 하루 2시간씩 2차례 열리던 장이 끝나도 사람들이 떠나지 않아 물을 뿌려 쫓아낼 정도였다. 일본은 쌀 선물거래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전염병보다 빠르고 치명적인 투기 시장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걸 알고 일부러 조선 땅에 연 것이다.
"어쩌다 운이 좋아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조선인이 나오겠지. 하지만 오사카의 쌀 시세가 기준이고, 선물 거래에 대한 노하우가 있고 총독부의 지원까지 받는 우리 일본으로 쌀과 돈이 썰물처럼 밀려들 것이오."
반복창은 마흔의 나이에 허름한 단칸방에서 홀로 사망했고, 한 달 후에는 조선에서 미두취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출처-<천일야사>
추신.
필자가 신간을 출간했다.
잘 알려진 사건을 반복 설명하는 대신, 기록 속에서 잊히거나 의도적으로 지워진 이야기, 지금까지도 논쟁이 이어지는 사건, 역사와 전설의 경계에 놓인 이야기를 치밀하게 추적하는 책이라고!
본 기사도 책 내용 중 일부다.
우리가 알고 있던 전혀 다른 한국사의 얼굴을 마주해보고 싶은 독자께 권한다.
아, 참! 슈퍼팩토리공장장이 꼭 좀 전해달라 했다.
"형님, 누님, 동생 여러분, 책 한 권 사주십쇼...!"


마빡 디자인 : 꾸물
기사 : 슈퍼팩토리공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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