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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 플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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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처음 찾는 사람들이 의외로 당황하는 부분이 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다. 호텔이나 쇼핑몰의 엘리베이터에 타면, 익숙하지 않은 버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G다.

 

우리에게 층수는 보통 1층, 2층, 3층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G, 1, 2, 3의 순서다. 지금이야 인터넷이 발달해 G가 Ground Floor, 즉 지면과 맞닿은 층을 뜻하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지만, 18년 전 처음 런던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꽤 헷갈렸다.

 

호텔 직원이 "Your room is on the first floor"라고 말하면,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아도 되는 층이라 생각했다. 한국식 감각으로는 1층이니까 말이다. 그러다 지면층을 한참 돌아다닌 적도 있다. "호텔 로비에서 보자"는 말을 듣고 습관처럼 1층 버튼을 눌렀던 기억도 난다. 우리에게 2층인 곳이 영국에서는 First Floor이고, 3층은 Second Floor다. 층을 이동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숫자 하나를 더해야 한다. 영어도 서툰데 건물 안에서 층수까지 계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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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영국인들이 왜 1층을 Ground라고 부르고, 그 위부터 숫자를 세는지 처음에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영국인 입장에서는 오히려 우리의 방식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땅과 같은 높이에 있는 곳은 말 그대로 Ground다. 그 위로 계단을 한 층 올라간 곳이 First Floor가 되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이런 방식은 영국만의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지면층을 rez-de-chaussée라고 부르고, 그 위를 premier étage, 즉 첫 번째 층이라고 한다. 스페인에서도 지면층은 planta baja, 즉 낮은 층 또는 지면층이라는 별도의 명칭으로 부른다. 그 위부터 primera planta, segunda planta라고 센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표현이 조금씩 다르지만, 지면층을 숫자 1로 세지 않고 별도의 이름으로 구분하는 전통을 발견할 수 있다.

 

처음에는 그저 언어와 관습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국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 그 안에는 생각보다 오래된 건축의 역사와 생활 문화가 스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숫자가 아니라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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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런던을 비롯한 영국의 도시들을 다니다 보면 한국의 주택가와는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수백 년의 시간을 견딘 벽돌 건물이 줄지어 서 있고, 층마다 창문의 크기와 모양도 조금씩 다르다. 하나의 건물인데 아래층과 위층이 똑같이 생기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영국의 집은 높이보다 기능에 따라 층이 나뉘어 층마다 맡은 역할이 다르다. 거리와 맞닿은 지면층은 사람과 물건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공간이었다. 상점이 들어서기도 했고, 창고나 작업장이 되기도 했다. 비교적 큰 집에서는 지하와 지면층이 하인의 공간, 업무가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거실과 침실 같은 주요 생활 공간은 그 위층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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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지안 시대의 집(예를 들어, 영국 저택 Thorndon Hall)을 보면 이런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입구로 들어가면 Ground Floor가 나오고, 그곳에는 방문객을 맞이하거나 집안일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자리한다. 계단을 따라 한 층 올라가면 비로소 집에서 가장 중요한 방이 나타난다. 높은 천장과 큰 창문을 갖춘 응접실, 가족이 모이는 공간은 대개 1층에 놓였다.

 

건축에서는 이를 piano nobile, 즉 '주요 층'이라고 부른다. 집에서 가장 품격 있는 공간으로, 좋은 채광과 전망을 얻을 수 있도록 설계된 층이다. 그래서 켄싱턴이나 첼시처럼 전통적인 부자 동네로 알려진 지역의 건물을 보면, 위층 창문이 아래층보다 더 크고, 천장이 높은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건축문화 속에서는 땅과 맞닿은 층을 단순히 첫 번째 층이라고 부르기보다, 아예 'Ground'라는 이름으로 따로 구분하는 편이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첫 번째 중요한 생활공간이 비로소 First Floor가 되었다. Ground와 First의 차이는 단순한 숫자 문제가 아니다.

 

0에 대한 이해

 

그렇다면 지면층에도 그냥 숫자 1을 붙일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Ground라는 별도의 이름을 남겨 두었을까. 여기서 떠오르는 숫자가 있다. 모든 숫자의 출발점이 되는 숫자, 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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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에게 0은 익숙하다. 휴대전화 번호와 은행 계좌에도 쓰이고, 컴퓨터는 0과 1의 조합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0은 비교적 늦게 등장한 개념이다.

 

이유는 어렵지 않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양과 소의 수를 세고, 물건의 개수를 기록해야 했다. 눈앞에 있는 것을 세는 일은 문명을 이루기 전부터 필요했다. 반면 '아무것도 없음'을 숫자로 표현해야 할 필요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가축이 한 마리도 없다는 사실을 굳이 숫자로 적어야 하는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고대 로마의 숫자 체계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로마인은 I, V, X, L, C 같은 숫자를 사용했지만, 로마 숫자에는 0이 없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너무나 쉽게 하는 계산도 훨씬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릿값의 개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0은 어디서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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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학자 브라마굽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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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흔히 '아라비아 숫자'라고 부르는 체계의 출발점은 인도다. 고대 인도의 수학자들은 빈자리를 표시하기 위한 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7세기 인도의 수학자 브라마굽타는 0을 독립적인 수로 다루는 계산 규칙을 체계화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0은 단순한 빈칸 표시를 넘어 하나의 숫자로 발전한다.

 

이 개념은 이슬람 세계의 학자들에게 전해졌다. 이들은 인도 수학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면서 이를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널리 확산시켰다. 이후 중세 유럽은 이슬람 세계를 통해 이 숫자 체계를 받아들였다.

 

특히 피보나치는 1202년경 저술한 <Liber Abaci(계산서)>를 통해 유럽에 인도-아라비아 숫자 체계를 소개하고 확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북아프리카의 베자이아에서 아랍 수학을 접했고, 유럽인들이 쓰던 복잡한 로마 숫자보다 새로운 숫자 체계가 계산과 상업에 훨씬 유용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 말은 곧 영국을 포함한 유럽인들에게도 0은 처음부터 당연한 숫자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영국 엘리베이터의 G 버튼을 보면 서구 사회가 원래부터 0이라는 개념에 익숙했을 거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역사는 정반대다. 0을 수학적으로 발전시킨 중심지는 인도였고, 그것을 발전시키고 전파한 중요한 통로는 이슬람 세계였다. 유럽은 비교적 늦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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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모두에게 낯선 발상이었을 것이다. '없는 것'을 어떻게 숫자라고 부를 수 있겠나. 하지만 0이 받아들여지면서 세상은 달라졌다. 가령 205라는 숫자를 생각해 보자. 가운데 0은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0이 없다면 205는 25가 된다. 0은 그 자체로 아무런 값을 가지지 않는 듯하지만, 다른 숫자의 위치와 의미를 결정한다.

 

현대 문명도 마찬가지다. 컴퓨터는 0과 1이라는 두 개의 숫자만으로 움직인다. 우리가 보는 사진과 듣는 음악, 영화와 지금 읽는 이 글까지도 결국은 수많은 0과 1의 조합으로 저장된다. 아무것도 없는 숫자처럼 보이는 0이 현대 문명의 중요한 기초가 된 셈이다.

 

그래서 0은 단순히 없음이라기보다 하나의 기준에 가깝다. 수학에서 0은 양수와 음수를 나누는 기준점이고, 다른 모든 숫자가 자신의 위치를 찾게 만드는 출발점이다.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이 시작되는 자리, 값은 없지만 다른 모든 값의 의미를 결정하는 자리. 0은 그런 점에서 모순적인 숫자다.

 

'없다'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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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을 생각해 보면 자연스럽게 '없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일상에서 돈이 없다, 시간이 없다는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없다'라는 말에는 여러 층위의 의미가 담겨 있다.

 

누군가 "커피 있나요?"라고 물었는데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해보자. 그것은 세상에 커피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이 공간에 커피가 없다는 의미일 뿐이다. 일상에서 '없다'라는 말은 절대적인 공백을 뜻하기보다, 특정한 시간과 장소, 혹은 기준 안에서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에는 기준이 되는 대상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특정한 대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일 수도 있다. 하나의 단어가 문화와 언어 속에서 다른 결을 갖는다. 그래서 외국어를 배울 때 어려운 점은 단어를 번역하는 일만이 아니다.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어떤 풍경을 떠올리고, 어떤 기준에서 말하는지 이해하는 일이 더 어렵다. 겉으로는 같은 뜻처럼 보여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조금씩 다른 세계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Ground Floor도 그런 단어 가운데 하나다. 처음 영국에 왔을 때 나는 그것을 한국의 1층을 다르게 부르는 표현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오래 살다 보니 Ground는 숫자를 바꿔 놓은 말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건물을 바라보는 오래된 관습과 지면을 기준으로 공간을 구분해 온 문화가 담겨 있었다.

 

여행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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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우리 주변에는 이런 약속이 많다. 시간을 세는 방법, 이름과 성을 부르는 순서, 주소를 적는 방식, 날짜를 표현하는 방식도 나라마다 다르다. 처음에는 불편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각 사회가 오랫동안 살아온 역사와 생활 방식이 남아 있다.

 

여행이 재미있는 이유는 새로운 풍경을 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 사실은 결코 당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역사책에서나 발견할 법한 문화의 차이는 사실 엘리베이터 버튼 하나에도, 건물의 층 이름 하나에도,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쓰는 단어 하나에도 오랜 삶의 방식이 스며 있다. 다른 나라를 이해한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을 하나 더 아는 일이 아니라, 너무 익숙해서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던 자신의 기준을 다시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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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금성무스케잌

마빡 디자인 : 꾸물

기사 : B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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