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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마지막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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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전 세계적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놀란의 <오디세이>를 런던에서 봤다. 런던에서 오디세이를 본 것은 나의 의지 때문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그 시간 런던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운명이라고나 할까…

 

영화를 본 그 밤은 런던의 마지막 밤이었다. 영화를 공부하는 아들과 함께 런던의 마지막 밤은 무엇을 하며 보내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다 영화를 보기로 했다. 마침 런던도 여기저기 오디세이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는 런던 마지막 밤을 장식하는 추억의 단초로 삼기에 좋은 이벤트였다. 하지만 이 또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오디세이마냥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우선 아이맥스 관람은 불가능했다. 런던 BFI의 아이맥스 상영관은 이미 종영까지 예매가 끝났다. 아들에 따르면 영화 개봉 1년 전부터 예매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침에 늦잠 자는 게으른 갈매기는 굶어야 하는 법. 전 세계에 41개밖에 없다는 1.43:1의 원래 비율의 15/70 필름 아이맥스 관람은 팔자에 없었다. 천성대로 고민하기보다 빨리 포기하고 대체제를 찾았다.

 

명필이 붓을 가리지 않듯 명작이라면 포맷과 상관없이 감동적일 것으로 생각했다. 어디든 상관없지 않을까. 아이맥스 화면의 위아래가 잘려 나간 시네마스코프라도 명작의 감동은 여전히 쓰나미처럼 덮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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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맥스를 포기하고 고른 곳은 런던의 바비칸 센터에 있는 극장. 35mm 필름 상영관이었다. 바비칸 센터에 있는 극장을 고른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 바비칸 센터의 건축 양식 때문이었다. 바비칸 센터는 런던 씨티(City of London)에서 20세기 석유산업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브루탈리즘 양식의 건축물이다.

 

전후 사회 재건의 요구와 생산성과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에 두었던 석유산업 자본주의의 정신을, 브루탈리즘은 건축물의 기능성에 초점을 맞춰 구현했다. 그래서 장식적 아름다움보다 구조적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건축물이다. 구조를 가능하면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잘 설계된 브루탈리즘 건축물에서는 상당한 절제미도 느낄 수 있다. 거대한 물질문명에 반기를 들며 비움을 통해 충만함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의 역설적 미학과도 제법 잘 어울린다.

 

바비칸 센터를 찾은 두 번째 이유는 이곳에 있는 극장이 디지털 상영관이 나오기 전 표준이었던 35mm 필름 상영관이기 때문이었다. 나의 20대까지 영화 편람은 당연히 35mm 영화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성냥 씹던 주윤발을 만났던 아날로그 감성의 따뜻한 향수를 오래간만에 느껴보고 싶었다.

 

참고로 서울에서 운영되는 35mm 필름 상영관은 한국영상자료원이나 사단법인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운영하는 시네마아트, 그리고 부산 영화의전당 등이 있다. 그곳에 가면 세대교체를 위해 뒷방 늙은이로 자리를 옮겨야 하는 나 같은 386 고인물은 시시때때로 상영하는 35mm 필름 상영 영화를 감상하며 향수에 빠질 수 있다.

 

매사가 늘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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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가 그렇듯 이 결정은 만족과 불만족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브루탈리즘 건축물 견학이라는 목적은 달성했으니 만족했지만 정작 향수에 젖은 영화 감상이라는 바람은 충족할 수 없었다.

 

65mm 필름으로 촬영한 영상을 더 작은 사이즈의 상영용 35mm 필름에 프린트하면 어쩔 수 없이 화면의 디테일을 손해 보게 된다. 디지털 영상 파일을 압축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이 점을 간과했다.

 

거기다 요새 한국의 멀티플렉스 극장은 모두 디지털 상영관이다. 어느새 내 시신경은 4K 쨍한 화질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의 35mm 필름 화질이 더 무디게 느껴졌다. 화질까지 손해 본 데다 내 감각까지 더 민감해진 탓에 영화 보는 내내 고구마를 먹듯 답답했다. 게다가 놀란 감독의 영화가 대개 그렇듯 오디세이도 전반적으로 어두운 영화였다.

 

보는 것도 답답했는데 놀란 감독의 고질적 문제, 음향도 영화 감상을 상당히 방해했다. 놀란 감독의 고집 때문에 그의 영화는 음향 문제가 늘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한다. 거대한 화면과 어우러진 좋은 음향과 음악을 통해 관객들이 온몸으로 전율을 느끼며 영화에 몰입하게 만들고 싶은 감독의 욕심은 십분 이해하지만, 나 같은 이에게 놀란의 음향은 속옷에 수직으로 낀 머리카락처럼 꽤나 성가시다. 이번에도 배우들의 대화가 둥둥- 웅웅- 거리는 효과음 속에서 허우적댔다.

 

사실 이런 물리적 조건들은 아이맥스 상영관에 가서 보면 쏟아지는 화면과 돌비 특수 음향 기술로 압도되어 전혀 거슬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영화의 물리적 조건보다 더 감상을 방해하는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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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나온 놀란 감독의 영화는 거의 다 봤다. 입봉작인 <미행(Following)>은 아직 보지 못해 엄지척하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본 그의 영화에는 늘 엄지척을 선사했다. 하지만 <오디세이>에는 그러지 못했다. 내 기억이 만드는 잡음이 영화 몰입을 끝까지 방해했고, '왜, 이 영화를 만들었지?'하는 질문을 남겨 두고 극장을 나섰다. 아이맥스에 가면 엄지를 치켜세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안의 논란, 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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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내내 원작의 오디세우스와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가졌던 위풍당당함을 맷 데이먼과 톰 홀란드에게서 찾으려는 통에 정신만 사나워지고 영화에 몰입하기 어려웠다. 힘과 지략을 갖추고 불멸의 존재 신과 맞설 만큼 호쾌하고 담대한 남자 오디세우스 대신 죄책감에 찌든 오디세우스가 세 시간 내내 내 눈을 어지럽혔다.

 

놀란이 왜 이렇게 해석했는지는 영화를 보면서 대충 짐작했고, 인터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해석되지 않는 고전이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일까 하는 그의 문제의식도 충분히 공감한다. 영화의 해석은 각색이라는 과정을 통해 특유의 설득력을 갖게 된다. 줄거리와 형식은 그대로 둔 채 주인공을 조정하여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도 있고, 아주 오래 전 사건을 현재에 동일한 사건으로 재현하여 오늘의 관점에서 그 사건을 새롭게 해석할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놀란의 오디세이는 사건을 여전히 3,000여년 전에 둔 채 그 주인공을 오디세우스에서 맷 데이먼으로 바꾼 것처럼 느껴졌다. 맷 데이먼이 연기하는 오디세우스의 얼굴에서 자꾸 나이 먹은 제이슨 본의 얼굴이 보였다.

 

아마 내가 영화를 보기 전에 원전을 아예 읽지 않았다면 훨씬 영화에 몰입하는 것이 쉬웠을 것이다. 문제는 내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권으로 공부했던 적이 있다는 데 있었다. 무지 재미없는 고대의 텍스트를 앞에 놓고 주리를 틀며 공부하긴 했지만, 원전의 줄거리와 느낌은 여전히 내 기억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그러니 놀란의 해석이 매 순간 걸렸다. 아무리 놀란을 좋아하지만, 그의 해석은 어쩔 수 없이 발밑에 뿌려 놓은 압정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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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시작한 고전 문학 공부는 지금도 시시때때로 하고 있다. 고대인들의 입맛에 맞게 쓰인 텍스트는 여전히 재미없지만 새롭게 발견되는 당시의 고고학적 증거와 현대 연구자들의 연구는 텍스트를 새롭게 해석할 여지를 주며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면, 한때 기세등등했던 해석이 하루아침에 폐기되기도 한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일 또한 여간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지금은 거의 상식적인 이해가 되었지만, 과거처럼 호메로스를 1인 창작자로 여기는 견해는 더 이상 없다. 지금은 호메로스를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구비 전승 가운데 가장 독보적이거나 유명했던 구비 전승 그룹 혹은 '노래하는 자(아오이도스; Ἀοιδός)들의 그룹'으로 보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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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현대 작가처럼 책상머리에 앉아 두 이야기를 창작하는 호메로스는 없는 셈이다. 지금 전해지는 원전에는 성경이나 다른 고대 문헌처럼 여러 다른 전승의 집합체로 여길 만한 다양한 문체가 발견되는데, 이는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 중 하나다.

 

'날개 달린 말(이때 말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는 표현이나 '장밋빛 손가락의 아침' 같은 표현은 특정 개인의 독특한 표현이 아니라 서사시를 완벽하게 기억하고 대중 앞에서 노래해야 했던 구전 시인들이 기억을 위해 사용한 일종의 장치로 이해한다. 즉, 이런 표현은 그냥 기억하기에는 쉽지 않은 원형의 이야기를 정확히 기억하고 오래 전수하기 위해, 여러 구비 전승자들이 시대를 거치며 첨삭한 일종의 기억 공식이라는 것이다.

 

고전을 공부한 탓에 원작을 각색한 영화를 보며 계속 딴생각을 한다. 특히 이번 오디세이처럼 역사적 배경과 원작의 틀을 그대로 남겨 둔 채 인물 해석만 현대적으로 하는 작업에는 어지간해서는 설득되지 않는 못된 버릇이 생긴다(나는 이걸 '지적 면역력'이라 부른다. 재수 없는 자뻑 용어다). 좋게 말하면 소위 비판적 사고를 하는 건데, 이 때문에 놀란의 오디세이에 몰입하지 못했다.

 

헬레네가 흑인이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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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타 뇽오가 연기했던 헬레네를 두고 좀 튀어 보려는 유튜브 비평가들은 정치적 올바름(PC)을 들먹이기도 한다. 완전한 흑인이 아닐지라도 그렇다고 헬레네가 금발의 완전한 백인일 것 같지도 않다. 이런 논쟁은 별로 재미도 없고 그러지 않아도 놀란 감독의 해석 때문에 정신 사나운데 더 정신없게 만든다.

 

헬레네는 작품에서 표면적으로 트로이 전쟁을 일으킨 직접적 원인이다. 정해진 운명에 따라 파리스에게 헬레네가 사랑을 느끼고 눈이 맞은 파리스가 헬레네를 트로이로 데리고 간 것이 발단이었다.

 

영화에서 맷 데이먼은 자신이 제우스의 법, 크세니아(ξενία)를 깼고 그 결과 세상이 무법 세상이 되었다고 한탄한다. 크세니아란, 유목민처럼 이동성이 강한 공동체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손님 환대법이다. 그리스 반도 뿐 아니라 근동 지역이나 소아시아에서 공유하는 생존 원칙이라 볼 수 있다. 당연히 환대를 받는 사람도 환대에 걸맞게 예의를 갖춰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원전에 따르면, 이 법을 먼저 깬 것은 운명에 따라 헬레네를 데리고 사라진 트로이의 파리스다. 오디세우스가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를 정벌한 일은 크세니아를 깬 것이 아니다. 트로이의 파리스가 헬레네를 취하며 먼저 크세니아를 깬 행위를 그대로 돌려줌으로써 오히려 망가진 크세니아를 복원한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영웅적 면모를 단순히 울끈불끈한 근육이나 꾀돌이 지략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호메로스는 오디세우스를 통해 모두의 공존과 공영을 위해 제우스의 법, 크세니아를 지키는 인간상을 복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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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는 크세니아와 더불어, 당시 보편적 원칙이었던 탈리오니스 법칙(Lex Talionis), 즉 '받은 대로 갚는다'는 원리를 근간으로 짜인 이야기다.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설명되는 탈리오니스 법칙은 인류가 지금까지도 버리지 못한, 가장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공정의 기준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죄를 지은 만큼 그대로 갚아 주는 것이 너무 잔인한 일로 받아들여지는 탓에 처벌은 지은 죄에 대한 인신구속과 물질적 배상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모든 법체계 역시 그 근간은 탈리오니스 법칙에 있다. 단테 '신곡'의 골격인 콘트라파소(contrapasso), 지은 죄에 상응하는 벌이라는 개념도 탈리오니스 법칙에서 파생된 중세의 기독교적 번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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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의 놀라운 점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탈리오니스 법칙과 결합된 크세니아가 공동체 차원과 개인 차원에서 이중으로 적용되어 교차한다는 점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트로이와 그리스 집단 차원에서 한 번,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돌아와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에게 복수를 하는 개인 차원에서 한번. 이야기 얼개를 이중으로 구성한다.

 

이러한 이중 구조 때문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고대 그리스 서사시권의 모범이 되었다. 이후 그리스-로마 시대를 거쳐 르네상스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정신 문화사에 있어 화수분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으며 많은 예술문학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현대의 첨단 기술과 예술을 영화라는 장르에서 가장 잘 융합한다는 평을 받는 놀란 감독도 그중 한 명인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놀란 감독이 원작이 가진 이 아름다운 이중 구조를 해체하고 아주 평이하고 단조로운 이야기, 어느 사내의 액션 복수극이자 자기 성찰의 순례기로 만들어 버렸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영화가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 없다. 화면 속 오디세우스 대신 타임머신을 타고 가정까지 꾸린 제이슨 본이, 세 시간 내내 불쑥불쑥 튀어나온 거다. 그래서 런던에서의 마지막 밤에 본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에는 끝내 엄지를 치켜세우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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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금성무스케잌

마빡 디자인 : 꾸물

기사 : 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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