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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진보 세력의 현 상황을 보여준 사건

 

최근 미국 진보의 현 상황과 미래를 예상해 볼 수 있는 사건이 벌어졌다.

 

지난 11일, 누가 민주당 후보로 다가올 11월 선거에서 위스콘신주 주지사 후보로 나갈 것인가를 결정할 ‘민주당 내부 경선’이 열렸다. 이 선거에서 스스로를 ‘민주사회주의자’로 칭하는 인물이 39%를 넘는 표를 얻으며 굉장한 경쟁력을 보여줬다.

 

그 주인공은 ‘프란체스카 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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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 홍

©연합뉴스

 

이건 놀라운 결과다. 왜냐. 

 

미국의 진보 세력 내에서 민주사회주의자는 그간 크게 경쟁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미국의 진보 세력 내에서 그보다는 더 오른쪽에 있어야 주류 정치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민주당 내부 경선에서, 그것도 대표적인 경합주(민주당 vs 공화당)인 위스콘신주에서 민주사회주의자가 40%에 가까운 득표를 올리며 민주당 주지사 후보가 될 뻔했다. 뉴욕이라든가 캘리포니아처럼 도시 자체가 진보적인 곳에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면, 충격은 덜 했을 것이다. 도시 분위기 자체가 진보적이라면, 거기서 좀 더 진보적인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더 높긴 하니까. 그런데 이번 결과는 그곳보다 보수적인 동네에서 나온 것이다. 

 

홍은 상대가 공격하려고 ‘사회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인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 ‘민주사회주의자’라고 부르고,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의 정치 단체인 ‘미국민주사회주의자들(DSA)’에도 가입해 있다.

 

홍이 민주당 내부 경선에서 승리하진 못했다. 위스콘신주의 최대 도시 ‘밀워키 카운티’의 행정관(구청장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으로 있었던 ‘데이비드 크롤리’가 위스콘신주 민주당 후보로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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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내부 경선에서 

토론하는 크롤리와 홍

 

그러나 승부는 아슬아슬했다.

 

프란체스카 홍 : 39.4%

데이비드 크롤리 : 39.8% 

 

단 0.4% 포인트 차이였다.

 

그렇다고 위스콘신이 사회주의로 돌아섰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결과는 현재 미국의 진보 세력의 상황을 들여다보기에 중요한 사건이다.

 

홍이 이겼느냐 졌느냐보다 더 집중해야 할 건, 

 

“지금 미국 민주당에서 무엇이 바뀌고 있는가.”

 

더 나아가,

 

“지금 서구의 진보 정치 자체가 어떤 갈림길에 서 있는가.”

 

이다.

 

이것을 알아보려 한다.

 

 

프란체스카 홍과 민주사회주의

 

홍은 1988년생 싱글맘이다. 그는 원래 정치인이 아니었다. 위스콘신 매디슨에서 한국계 이민자 부모의 딸로 자랐고, 대학을 졸업한 뒤 식당에서 일했다. 23세에 총괄 셰프가 됐고 직접 라멘집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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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그의 정치에는 이 경력이 그대로 묻어난다. 홍이 말하는 노동자는 공장 노동자만이 아니다. 식당 종업원과 돌봄 노동자,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부모, 작은 가게를 꾸려가는 사람들도 모두 ‘일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보편적 보육, 유급휴가, 의료보장, 노동조합, 공교육을 강조하는 것도 그래서다. 홍이 자주 쓰는 ‘돌봄의 인프라’라는 말은 그의 정치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도로나 전력망만 사회의 기반이 아니라 아이를 맡길 곳, 병원비를 감당할 수 있는 제도, 제대로 작동하는 학교도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기반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민주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차이도 드러난다.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인정하면서 복지와 노동권, 공공서비스를 통해 시장이 만든 불평등을 교정하려 한다면, 민주사회주의는 질문을 한 단계 더 밀고 간다.

 

왜 경제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권력이 자본을 가진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어야 하는가. 정치에서는 한 사람에게 한 표를 말하면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일터와 사람의 생존을 좌우하는 경제에서는 왜 소유권이 곧 결정권이 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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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경선 기간 당시

지지자들에게 연설하는

프란체스카 홍

©연합뉴스

 

그래서 민주사회주의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의회와 선거에서 끝나지 않는다. 노동자의 경영 참여와 협동조합, 공공 소유를 중시하는 것도 경제적 권력까지 민주주의의 대상으로 보려 하기 때문이다.

 

위스콘신에는 낯설지 않은 전통도 있다. 한 세기 전 밀워키의 이른바 ‘하수도 사회주의’는 혁명보다 깨끗한 물과 하수도, 공원과 도서관을 정치의 문제로 만들었다. 홍의 보육과 의료, 주거의 정치가 그것의 단순한 계승은 아니지만 질문은 닮아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을 어디까지 시장에 맡길 것인가.

 

 

온건 좌우의 시대가 흔들리고 있다

 

홍의 약진을 미국 청년층의 좌경화만으로 설명하면 더 큰 변화를 놓치게 된다. 지금 흔들리는 것은 민주당의 이념적 위치만이 아니다. 오랫동안 서구 정치를 지탱해 온 온건 좌우의 경쟁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전후 서구 정치는 대체로 보수와 사회민주주의, 미국식으로 말하면 공화당과 민주당이 서로 다른 정책을 내세우면서도 하나의 제도적 질서 안에서 정권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특히 냉전 이후에는 시장경제와 자유무역, 전문관료제와 국제질서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도 넓어졌다.

 

좌파 역시 변했다. 20세기 초 자본과 노동의 관계 자체를 바꾸겠다고 말했던 좌파의 상당수는 점차 복지국가를 관리하고 시장의 부작용을 교정하는 세력이 됐다. 1990년대 이후에는 중도좌파 정당들까지 시장 친화적 개혁을 상당 부분 받아들였다.

 

이것을 단순한 배신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 과정에서 복지와 노동권, 시민적 권리가 실제로 확대됐고, 국가를 운영할 능력도 증명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역설이 생겼다. 기존 질서에 대한 불만이 커질수록 그 질서를 오랫동안 운영한 온건 좌파 역시 기성세력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때 좌파의 역사적 정체성은 기존 질서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요구를 정치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많은 유권자의 눈에는 그 질서를 바꾸는 세력보다 관리하는 세력에 가까워졌다.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적 성공이 역설적으로 새로운 정치적 약점이 된 셈이다.

 

 

우파가 먼저 ‘정치적인 것’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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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트럼프의 성공은 바로 이 지점에서 봐야 한다. 그는 단순히 보수 정책을 더 강하게 밀어붙인 정치인이 아니었다. 정치의 전선 자체를 바꿨다.

 

정치는 권력을 누가 차지하느냐만의 문제가 아니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무엇을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갈등으로 만들고, 누구를 ‘우리’로 묶으며, 누구를 그 반대편에 놓느냐의 문제다. 그람시가 헤게모니라고 불렀던 것도 결국 누가 한 시대의 상식과 갈등의 지도를 그리느냐의 문제였다.

 

트럼프는 민주당 대 공화당이라는 오래된 전선을 ‘국민 대 기득권’으로 바꿨다. 국민 몫은 트럼프가 차지한 건 말 안 해도 알고 있을 것이다. 트럼프는 반대편의 기득권층에 민주당만 밀어 넣지 않았다. 필요하면 공화당 지도부도, 워싱턴 관료도, 주류 언론과 대학도 그쪽에 밀어 넣었다.

 

이렇게 되자 전통적인 온건 우파의 독자적 공간부터 크게 좁아졌다. 트럼프와 싸우면 기득권으로 몰리고, 트럼프를 따라가면 스스로 존재 이유를 잃었다. 미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극우는 전통적 보수 정당까지 낡은 엘리트로 공격하면서 세력을 넓혀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파가 단순히 더 오른쪽으로 갔다는 사실이 아니다. ‘누가 세상을 바꾸려 하는가’라는 자리, ‘누가 기득권과 싸우는가’라는 자리를 극우가 먼저 차지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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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를 지지자 중에는

백인 서민의 비중이 상당하다.

 

 

좌파가 잃어버린 자리

 

문제는 바로 그 순간 온건 좌파의 위치였다. 트럼프와 극우가 “이 체제를 바꾸겠다”고 말할 때, 민주당 주류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주의와 제도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게 됐다.

 

물론 민주주의와 법치, 제도를 지키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정치에는 내용뿐 아니라 위치도 있다. 사람들이 현재의 삶과 제도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을 때 한쪽이 변화의 언어를 독점하고 다른 쪽이 수호의 언어만 사용하면, 후자는 아무리 진보적인 정책을 내놓아도 현상 유지 세력처럼 보일 수 있다.

 

최근 서구 진보의 위기는 여기 있다. 우파는 급진적인 반기득권 정치로 재편됐는데, 좌파는 자신이 만들어온 제도를 지키는 과정에서 오히려 기득권의 일부로 밀려났다.

 

그래서 민주당의 문제를 단순히 “더 왼쪽으로 갈 것인가, 중도로 갈 것인가”라는 선거 전략의 문제로 보면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몇 퍼센트의 표를 어디에서 더 얻느냐보다 근본적인 문제다.

 

좌파가 다시 자신을 세계를 바꾸는 세력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흩어져 있는 불만을 새로운 사회의 방향과 연결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좌파가 ‘정치적인 것’을 되찾을 수 있느냐의 문제다.

 

 

민주사회주의가 되찾으려는 것

 

바로 여기에서 최근 미국 민주사회주의의 의미가 생긴다. 이들의 새로움은 복지를 조금 더 많이 약속한다는 데 있지 않다. 민주주의와 평등의 문제를 다시 경제적 권력의 문제로 연결하고, 좌파가 다시 반기득권의 위치에 설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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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민주사회주의자로 규정하는

프란체스카 홍

 

트럼프와 민주사회주의는 내용으로 보면 정반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같은 자리를 놓고 싸운다. 누가 진짜로 기득권에 맞서는가라는 자리다.

 

트럼프가 워싱턴과 언론, 대학, 자유주의 엘리트를 ‘그들’로 만든다면, 민주사회주의는 억만장자와 대기업, 부동산 권력과 경제적 과두 세력을 그 자리에 놓는다. 하나가 문화와 국가정체성을 중심으로 분노를 묶는다면, 다른 하나는 주거, 의료, 노동과 경제 권력을 중심으로 흩어진 불만을 묶으려 한다.

 

정치란 이미 존재하는 집단의 요구를 단순히 더 하는 일만은 아니다. 서로 다른 처지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제가 사실은 연결되어 있다고 이해하게 만들고, 그들을 하나의 ‘우리’로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홍이 ‘일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민주사회주의 언어를 쓰는 것이 중요하다. 세입자와 서비스 노동자, 교사와 간호사,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문제가 서로 다른 정책 목록으로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경제적 질서 속에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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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뉴욕시장 조란 맘다니

©연합뉴스

 

조란 맘다니가 뉴욕에서 보여준 것도 이것이었다. 민주사회주의를 거대한 체제론으로 말하기보다 월세와 버스비, 보육비처럼 사람들이 매일 부딪히는 문제로 번역했다. 트럼프에 반대하지만, 트럼프 이전의 질서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다른 선택지를 제시한 것이다.

 

맘다니가 뉴욕에서 이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면, 홍은 훨씬 까다로운 질문을 던졌다. 이런 정치가 뉴욕을 넘어 미국의 대표적인 경합주에서도 통할 수 있는가.

 

 

39.4%가 보여준 것

 

결과는 절반의 대답이었다. 홍은 젊고 매우 진보적인 민주당원에게 강했지만 나이가 많아질수록 지지가 떨어졌다. 막판에는 크롤리에게 민주당 주류 및 공화당과 본선에서 붙을 때의 경쟁력을 중시하는 유권자가 결집했다.

 

홍은 자신의 정치에 강하게 동의하는 집단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것을 위스콘신 민주당 전체의 다수로 넓히지는 못했다. 39.4%를 사실상의 승리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다.

 

그렇다고 민주당원이 민주사회주의를 거부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공개적인 민주사회주의자가 대표적인 경합주에서 40% 가까운 표를 얻었다는 것 자체가 몇 년 전과는 다른 정치적 공간이 생겼음을 보여준다.

 

올해 다른 지역의 민주당 경선에서도 진보 후보의 약진이 나타나지만, 모든 변화가 좌경화인 것은 아니다. 오래된 진보 현역까지 젊은 도전자에게 밀리는 경우가 있다. 지금 (미국) 민주당 안에서는 좌경화와 반기득권 정서, 세대교체가 서로 겹치면서 움직이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그래서 미국 진보의 미래가 민주사회주의로 간다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우파에서는 트럼프가 이미 공화당을 바꿨지만, 민주사회주의는 아직 민주당을 바꾸지 못했다.

 

그러나 질문은 달라졌다. 

 

민주사회주의자가 미국 정치에서 살아남을 수 있느냐가 아니라, 이들이 젊은 진보층을 넘어 더 넓은 노동자와 중도층까지 하나의 정치적 주체로 묶을 수 있느냐가 됐다.

 

프란체스카 홍은 졌다. 39.4%는 승리의 숫자가 아니다. 하지만 변두리의 숫자도 아니다.

 

우파가 먼저 기존 질서를 깨고 새로운 정치적 전선을 만든 시대에, 진보도 다시 세계를 바꾸겠다고 말할 수 있는가. 홍의 39.4%는 미국 민주당에서 이제 그 질문이 실제 정치의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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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임권산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임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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