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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소마 대한민국>에는 사이비의 이름을 나열하고, 교주들의 면면을 고발하는 내용이 담겼다. 스스로 재림 예수라 칭하고 신도들의 삶과 재산을 빼앗은 이가 있고, 성폭력을 종교의식으로 포장해 이를 구원에 이르는 과정이라 속인 자가 있으며, 정치권력과 손잡고 거대한 부를 쌓은 집단도 있다. 인간의 믿음과 절망을 이용해 자기 욕망을 채운 행위는 어떤 시대적 상황으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 역시 이해나 연민이라는 말로 희석될 수 없다.

 

교주들의 기괴한 주장과 탐욕보다 내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은, 그들을 믿은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이들은 왜 터무니없는 말을 믿고 자기 재산과 인생을 종교에 걸었을까. 조금만 의심하고 깊게 살펴보았다면 거짓임을 알아챘을 텐데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름조차 남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들여다볼수록 이러한 질문을 쉽게 던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늘의 안전한 이 자리에서 과거의 선택을 되짚어 보는 것과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구원을 약속하는 목소리를 듣는 건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을 바꿔보았다.

 

이들은 무엇이 그토록 절실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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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

 

사이비에 속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맹신한 것은 아니다. 특별히 어리석고 악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들의 꿈은 소박했다. 굶주림에서 벗어나기를, 무너진 삶이 다시 정상의 궤도로 올라오기를 바랐다. 지금 겪는 고통에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특정 종교가 아니라 살아갈 이유를 찾은 것이다.

 

사이비의 역사는 인간의 어리석음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거짓을 만들어낸 교주의 탐욕과 그것이라도 붙잡고 견뎌내고자 한 사람들의 눈물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드소마 대한민국>은 사이비 종교 단체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이들 말에 힘을 실어주며 비극을 되풀이한 시대와 사회를 함께 다뤄야 했다.

 

대한민국의 사이비는 우주에서 툭 떨어진 기이한 현상이 아니다. 우리가 지나온 시대의 상처, 욕망, 절망, 희망이 뒤엉켜 만들어낸 슬픈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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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대한민국

 

나라를 잃은 일제 강점기, 사람들은 정치적 자유뿐 아니라 존엄까지 빼앗겼다. 이들은 세상이 완전히 뒤집히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기를 바라는데, 이러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종교적 희망과 결합했다. 민족을 구원할 지도자, 하늘이 보낸 인물, 새로운 세상을 열 메시아. 현실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기 어려우니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구원을 기다렸다.

 

해방은 오래 기다린 구원의 순간처럼 반가웠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분단이 되고, 전쟁이 일어났다. 하루아침에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고향을 잃고, 삶의 기반이 무너졌다. 살아남은 것만으로 기적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가난과 질병, 굶주림은 오랫동안 일상을 지배했다.

 

그때 누군가 병을 고쳐주겠다거나, 생을 달리한 가족과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은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가난과 고통이 사라지고 머지않아 새 시대가 온다는 가르침은 이들에게 상상 이상의 힘을 실어주었다. 사람들이 믿은 건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가혹한 현실 너머에 다른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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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굿뉴스

 

식민지와 전쟁이 끝나고 산업화가 시작되었다. 국가는 빠르게 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었다.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고 도시로 몰린 사람들은 낯선 공간에 고립되었다. 공장과 시장이 일자리는 제공해도 소속감까지 주지는 못했다. 경제가 성장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과실을 누릴 수 있던 것도 아니었다. 종교는 인간이 느끼는 공허함을 파고든다.

 

사람들은 함께 웃고 울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은 종교 공동체 안에서 자신도 중요한 존재라는 감각을 느꼈고, 밥을 나누고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가족처럼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는 이들에게 무너진 삶을 다시 붙들어 주는 안전망이 되었다.

 

기독교의 성장과 함께 기독교를 모방하여 시작된 사이비도 함께 자라난다. 기독교 내부의 문제가 덧나고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여기저기서 주인공이 되려는 이들이 우후죽순 나타난다. 방법은 기독교와 같았다. 사회가 돌보지 못한 사람을 찾아가고, 현실에서 밀려난 사람에게 특별한 사명을 약속했다. 평생 가난과 소외 속에 살던 사람에게 "당신은 선택받았다", "곧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말은 진실 여부를 넘어서 큰 위로가 되었다.

 

인간의 약함을 파고든 사이비는 더 나은 삶을 바라는 희망까지 건드린다. 사람들의 간절함을 자기 권력으로 바꾼 이들은 상처를 치유하기보다 신도들의 상처에 의존하여 계속 자신이 필요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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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종교가 아닌 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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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역사적으로 종교는 가진 것을 나누고, 약자를 돌보며, 절망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어 많은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종교, 특히 기독교회는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운영하여 돌봄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름도 남기지 않고 자기 삶을 이웃에게 내어준 훌륭한 신앙인들도 있다. 오늘날 기독교회가 여러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간의 헌신과 희생의 역사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문제는 종교가 아닌 광신이다. 믿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지만, 광신은 인간을 지배하고 시선이 지도자를 향하게 한다. 광신의 경우 성경보다 교주의 말이, 양심보다 순종이 중요해진다. 질문은 약한 믿음의 증거이므로, 의문은 덮어두고 지도자를 향한 충성을 보여야 한다.

 

또한 사이비는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익숙한 언어를 사용한다. 사랑, 헌신, 순종을 말하고 성경을 인용한다. 일반적인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만, 믿음의 방향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어느 순간 사람을 향하고, 하나님께 돌리는 권위를 지도자가 갖는다.

 

사이비는 종교 실패의 역사가 아니라, 종교를 이용한 권력의 역사다.

 

욕망의 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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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들이 반복하는 말이 있다.

 

무병장수와 부.

당신은 특별한 사명을 받은 자.

 

사실 교주와 신도는 같은 꿈을 꾼다. 교주는 꿈을 권력으로 바꾸었고, 신도는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는 차이가 있다. 신도들의 마음에는 현실을 단숨에 바꾸고 싶은 조급함,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갈망이 함께 자리한다. 그렇다고 피해자에게 책임이 있는 걸까?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절망 앞에서 흔들린다. 사회가 그 절망을 품어주지 못할 때 사람들은 확신의 목소리를 찾아 떠난다. 사이비가 자라는 토양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절망이다. 그 절망이 해소되지 않으면, 시대가 바뀌고 교주가 교체되어도 또 다른 형태의 사이비는 반복해서 등장할 것이다.

 

사회가 건강하면 사이비는 쉽게 성장하지 못한다. 어려움을 함께 견디는 사회가 있고, 국가가 약자의 절망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거짓된 구원의 약속은 작동하지 않는다.

 

결국 사이비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 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다. 거짓된 희망을 붙잡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절망적인 사회가 아니라 소외된 자를 일으켜 세우고 위로하는 사회, 어떤 권위도 끊임없이 질문하고 검증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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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금성무스케잌

마빡 디자인 : 꾸물

기사 : B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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