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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들어선 잘못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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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즈

 

지난 1일, 영국 하원 본회의장을 찾은 영국 신임 총리 앤디 번햄이 발언대에 섰다. 취임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국정 운영 방향을 의원들 앞에서 내놓는 자리였다. 그는 미래의 청사진보다 과거를 진단하는 것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1980년대부터 이 나라는 여러 차례 잘못된 길로 들어섰습니다."

 

영국에서 총리가 의회가 시작되는 자리에서 과거를 꺼내는 일은 드물다. 보통 현재 마주한 난제들을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말한다. 하지만 번햄 총리는 과감히 과거의 잘못을 꺼내 들었다. 현재 영국이 처한 저성장의 주요 요인이 데처리즘과 브렉시트의 결과라는 걸 인정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번햄이 언급한 '잘못된 길', 대처리즘과 브렉시트는 영국에 어떤 상흔을 남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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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 times

 

번햄이 가장 먼저 짚은 건 민영화와 중앙집권체제였다. 정치권력이 중앙으로 집중되면서 런던은 세계화에 성공한 부자 도시로 거듭났지만, 정작 산업 혁명의 발판이 되었던 중부권 도시들, 가령 맨체스터나 리버풀, 리즈는 오히려 쇠퇴했다. 특히, 신자유주의를 거듭 강조한 덕에 다수의 국가 자원 및 경제 권력은 민간에 넘어가 탈산업화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공기업은 팔기는 쉽지만, 다시 사 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대중교통을 비롯해 수도, 전기, 가스 등 각종 에너지를 모두 팔아버렸으니 정작 국민의 생활비는 늘어날 수밖에 없고, 계속된 긴축재정은 정부 곳간을 비게 만들었다. 게다가 인프라까지 무너졌다. 자체적으로 산업을 일으킬 힘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가령 국내에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철도 운반이 필수인데, 대부분의 철도 회사가 민간 기업에 넘어가 있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기에 비용이 만만치 않고, 비싼 인건비 문제까지 더해져 기본적인 가격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에 놓였다.

 

물론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도로 교통을 정비해 화물 트럭 운송을 늘리고, 대륙과 연합해 원활한 물자 수송을 시도했지만, 급작스러운 브렉시트로 피해가 더 악화된 것이다. 저성장과 지역 재생의 정체 상태다. 그래서 영국 총리가 의회 연설에서 브렉시트를 성공한 독립 서사가 아니라 저성장을 심화시킨 선택으로 규정한 것은 브렉시트에 대한 영국 사회의 심각한 문제 인식을 보여준다.

 

또한 그 원인을 브렉시트 하나에만 돌리지 않고, 1980년대 이후 영국을 지배해 온 정치, 경제 모델 전체와 연결했다. 번햄은 '대처리즘'이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중앙집권화와 민영화, 탈산업화를 1980년대 이후의 잘못된 방향으로 지목했으니 사실상 마거릿 대처가 출발시킨 국가 운영 방식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할 만하다.

 

브렉시트, 지역 사회의 통제권을 빼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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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ive review

 

2016년, 브렉시트 국민 투표에서 탈퇴 진영이 내세운 유명한 구호가 있다. "Take back control". 통제권을 되찾자. EU에 넘겨준 법과 국경, 예산에 관한 결정권을 영국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약속이었다.

 

번햄 총리는 이 구호를 뒤집었다. 중앙 집권, 민영화, 긴축, 브렉시트가 결합한 결과는 통제권 회복이 아니라 지역 사회로부터 통제권을 빼앗아 간 것이라고 규정했다. 런던과 웨스트민스터, 거대 기업과 금융 자본에 권한이 집중되는 동안 쇠락한 공업 도시와 지방 상점가는 자기 운명을 결정할 힘을 잃었다.

 

여기서 번햄이 말하는 성장의 의미도 드러난다. 그의 성장은 단순히 국내 총생산 수치를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다. 지역이 자기 산업 정책과 교통, 주택, 공공 서비스를 결정할 힘을 가져야 투자와 일자리도 살아난다고 보았다. 그는 맨체스터 시장으로 일하며 추진했던 지방 분권 모델을 영국 전체로 확대할 계획이다.

 

앤디 번햄의 취임 이후, 그가 줄기차게 내놓고 있는 정책들 대부분이 이러한 방향을 향해 있다. 전기 요금의 부가가치세를 낮추고, 펍과 소셜클럽, 공연장의 사업세를 인하하여 문화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한다. 특히, 2027년 버스 요금 상한을 2파운드로 되돌리기로 했다. 거리에 따라 높게 측정되는 버스 요금에 제한을 두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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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v

 

도시는 집값, 월세가 비싸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외곽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이때 거리에 따라 측정되는 버스 요금은 이들의 교통비 부담을 더 가중한다고 보았고, 이러한 이중고를 막기 위한 방책이다.

 

장기적으로는 물, 주택, 에너지 같은 필수 영역에서 공공의 통제를 강화하고, 지방 도시권에 산업 전략과 투자 유치 권한을 더 주겠다는 구상이다. 물 산업을 두고는 민영화 모델의 실패를 보여주는 "물이 새는 기념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번햄 신임 총리의 이번 하원 연설의 핵심은, '권력과 소유권을 어디에 둘 것인가'이다. 지난 40여 년간 중앙과 시장으로 이동했던 권한을 지역 사회와 시민에게 돌려주겠다는 것. 브렉시트가 약속했지만, 실현하지 못한 통제권의 회복을 지방 분권과 공공성 강화로 다시 정의하려는 시도다.

 

물론 선언과 실행은 다르다. 번햄은 재정 규율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면서 동시에 공공 서비스와 국방, 사회 복지에 더 많은 투자를 예고했다. 첫 PMQ에서 보수당의 대표 베이드녹이 세금 인상인지, 차입 확대인지, 지출 삼각인지 명확히 밝히라고 압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10월 예산안은 번햄의 급진적 언어가 실제 정책으로 이어질지를 가늠하는 첫 시험대가 될 것이다.

 

Brexit(브렉시트) + Regret(후회) = Bregret(브리그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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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ian Express

 

신임 총리가 브렉시트를 '잘못된 길'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론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몇 년 전부터 브렉시트를 후회하는 정서를 가리켜 'Bregret'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브렉시트와 후회라는 단어를 합친 신조어다. 우리말로 '브렉시트를 후회한다' 정도가 된다.

 

브렉시트는 수많은 신조어를 남겼다. 잔류를 뜻하는 'Bremain', 탈퇴 지지자를 가리키는 'Brexiter', 브렉시트 이후를 말하는 'Brexodus' 등이 있다. 그중 가장 오래 살아남은 단어가 브리그렛이다. 국민 투표 직후부터 탈퇴 표를 던진 일부 유권자의 후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 몇 사람의 변심이 아닌 영국 사회 전체의 달라진 분위기를 설명하는 정치 언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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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Gov

 

국민 투표 10주년을 앞두고 올해 6월에 실시된 YouGov 조사에서 영국인의 57%가 'EU 탈퇴 결정은 잘못이었다'고 응답했다. 옳은 결정이었다는 응답은 30%에 그쳤다. 브렉시트가 성공보다는 실패였다고 보는 사람도 61%로, 성공했다는 응답 12%의 다섯 배를 넘었다. 2016년에 탈퇴에 표를 던졌던 유권자 중에서도 23%가 이제는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입장을 바꾸었다.

 

번햄의 연설 직후인 9월 2일 실시된 조사에서도 같은 흐름이 이어졌다. 응답자의 55%가 브렉시트를 영국의 '잘못된 방향'으로 평가했고, '올바른 방향'이었다는 응답은 21%에 그쳤다. 이제 브렉시트 비판은 일부 친EU 엘리트만의 주장이 아니게 되었다. 신임 총리가 의회 한복판에서 브렉시트를 저성장의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을 만큼 다수 여론에 가까워졌다.

 

대처 시대에 대한 평가는 브렉시트보다 훨씬 팽팽하다. 같은 조사에서 대처의 집권기가 영국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응답은 35%, 올바른 방향이었다는 응답은 28%로 집계되었다. 노동당 지지자에게 대처는 민영화, 불평등, 산업 공동화의 출발점이지만, 보수당과 개혁당 지지자에게는 여전히 경제를 되살리고 노조 권력을 제어한 지도자다. 번햄은 이번 연설에서 지금도 영국 사회를 갈라놓는 정치적 기억을 건드린 것이다.

 

후회하는 것과 다시 돌아가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브리그렛의 심리를 '영국인이 다시 EU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6월 조사에서 EU 재가입을 원칙적으로 지지한 응답자는 55%, 반대는 34%였다. 하지만 과거 영국이 누렸던 예외 조항을 되찾지 못하고 유로화나 솅겐 체제 참여까지 요구받을 수 있다는 조건을 붙이자, 재가입 지지는 35%로 떨어졌고, 반대는 43%로 올랐다. 당장 EU 재가입을 정부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응답도 39%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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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Gov

 

반면 정식 재가입은 하지 않더라도 EU와 더 가까운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에는 59%가 찬성했다. 여기에는 잔류 지지자뿐 아니라 탈퇴 투표자의 54%도 포함되었다. 즉, 현재 영국 여론의 핵심은 '내일 당장 브렉시트를 취소하자'고 하기보다 '지금 관계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에 가깝다.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브리그렛에는 적어도 세 부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브렉시트를 반대했던 사람, 탈퇴에 표를 던졌지만 결과를 보고 마음을 바꾼 사람, 여전히 EU 탈퇴 원칙은 지지하지만 보수당 정부가 협상과 이행을 망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을 모두 재가입론자로 묶으면 영국 사회의 진짜 고민을 놓치게 된다.

 

번햄은 이 복잡한 지형 위에 새로운 사령탑을 세웠다. 그는 브렉시트가 경제적 피해를 심화한 요인이라고 분명히 짚었고, EU 단일시장 재가입 가능성도 닫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국민 투표나 즉각적인 EU 복귀를 약속한 것은 아니다. 브렉시트를 다시 찬반 진영의 전쟁으로 만들기보다 실패를 인정하고, 유럽과의 실용적 관계를 회복하려는 입장으로 봐야 한다.

 

과거를 말하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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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연합뉴스

 

정치인은 대개 실패한 과거와 거리를 둔다. 자신이 속한 정당이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때, 과거를 더욱 모호하게 말한다. 노동당 역시 지난 수십 년간 중앙 집권과 민영화의 흐름을 완전히 거스르지 못했다. 브렉시트 이후에는 정치적 부담 때문에 그 결과를 정면으로 평가하기를 피해 왔다.

 

그런 점에서 번햄의 첫 연설이 눈길을 끈다. 그는 영국의 위기를 전쟁이나 세계 경제 같은 외부 요인만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영국이 스스로 선택해 온 정책과 정치 모델에도 분명한 책임을 물었다. 이번 연설의 핵심은 "변화는 정직함에서 시작된다"는 메시지였다.

 

과거를 인정한다고 해서 미래가 저절로 열리는 것은 아니다. 대처리즘 이후의 모델을 무엇으로 대체할지, 지역에 권한을 넘기면서도 책임성과 재정 건전성을 어떻게 확보할지, 유럽과의 관계를 어디까지 회복할지 등은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다. 브리그렛 역시 완성된 합의가 아니다. 후회의 정서는 넓게 퍼졌지만, 그다음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두고는 여전히 생각이 갈린다.

 

그럼에도 정치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먼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잘못된 선택을 성공이었다고 끝없이 우기는 사회에서는 새로운 시작이 불가능하다. 브렉시트 국민 투표 10년을 맞은 영국에서는 '탈퇴할 것인가'라는 질문보다 '우리는 무엇을 잃었고, 이제 무엇을 되찾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더 큰 힘을 얻고 있다.

 

브렉시트에 후회를 붙여 만든 말, 브리그렛. 후회를 정치적 수사로 소진하지 않는 것이 앞으로 번햄이 마주해야 하는 과제다. 후회를 성찰로, 성찰을 새로운 국가 운영 방식으로 바꿔냈을 때, 비로소 영국은 '잘못된 길'에서 방향을 틀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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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금성무스케잌

마빡 디자인 : 꾸물

기사 : B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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