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를 실제 크기로 그려달라
2026년 9월 4일 뉴욕 유엔 총회에서 세계 지도에 관한 결의안이 채택됐다. 토고가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표하여 추진한 결의안으로 일명 ‘지도를 바로잡기’ 결의안이다.
“현재 널리 이용되는 세계 지도에서 아프리카는 실제 크기보다 훨씬 작게 그려진다. 수백 년간 이어진 세계 지도의 면적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를 촉구한다!”

토고 위치
©구글 지도
450년 넘게 세계 지도의 표준처럼 사용되어 온 ‘메르카토르 도법’은 적도에서 멀어질수록, 즉 고위도로 갈수록 실제보다 크게 표시되고, 적도에 가까울수록 실제 크기보다 작게 표시되어 실제 아프리카의 영토 크기보다 세계 지도에 훨씬 작게 표시되기 때문에 이제라도 바로 잡자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이 지도가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그려진 지도다.
©Adobe Stock
결의안은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찬성 164, 반대 1, 기권 6.
표결에 참여한 171개국 중 유일하게 반대한 나라가 어디일지 예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반대한 주인공은 나야 나~!
미국이었다.
미국이 아프리카의 면적을 왜곡하자고 주장하며 반대한 건 아니었다. 표결에서 갈린 것은 지구의 넓이가 아니라 ‘세계를 어떤 기준으로 그릴 것인가’였다.
지구는 둥글고 종이는 평평하다. 둥근 지구를 억지로 평평한 종이 위에 표시하다 보면, 어느 것 하나는 부정확하게 표시될 수밖에 없다. 면적, 각도, 거리를 모두 실제랑 똑같이 옮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여러 요소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정해서 더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건 어느 정도 부정확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메르카토르 도법이 16세기 당시 개발되어 널리 사용되도록 선택받은 건 그것이 안전한 항해에 유용했기 때문이다. 이 도법은 한 지점에서 만나는 선들의 각도를 보존하고, 나침반의 일정한 방위를 따라가는 항로를 직선으로 표시한다. 바다 위에서 길을 찾는 사람에게는 대륙의 크기를 비교하는 것보다 이런 성질이 중요했다.
대신 위도가 높아질수록 면적이 부풀려진다. 그린란드와 러시아 등이 커 보이고, 적도에 걸친 아프리카는 상대적으로 작아 보인다. 그 차이를 곧바로 아프리카를 얕잡아보려는 설계 의도의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 확대율을 정하는 것은 인종이 아니라 위도다.
2018년 개발된 ‘이퀄 어스(Equal Earth)’ 도법은 면적 비율을 보존하는 정적도법이다. 아프리카와 유럽, 그린란드의 상대적 크기를 비교하기에는 메르카토르보다 적합하다. 하지만, 각도와 형태 등에서는 다른 왜곡을 감수해야 한다.

메르카토르 도법과
이퀄 어스 도법의 차이
이런 이유로 인해, 이번 유엔총회 결의안은 거짓 지도를 버리고 진짜 지도를 채택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 세계 지도에서 무엇을 더 정확하게 보여줄 것인가를 묻는 이야기다.
이번 결의안이 통과됨에 따라 앞으로 모든 지도를 메르카토르 도법에서 이퀄 어스로 강제 교체하게 되는 건 아니다. 다만, 교육과 공공 정보에서는 면적을 충실하게 표현하는 도법을 장려하자는 정도다. 쉽게 말해, 일반 세계 지도를 볼 때와 항해할 때를 나눠서 지도의 용도 구분을 좀 더 명확히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 정도의 사안일 뿐인데, 이것이 유엔에서 이념 논쟁의 가운데 서게 됐다.
도대체 왜?
미국이 불편했던 것
아프리카 연합은 지도 교정을 ‘인지적 정의’와 역사적 회복의 일부로 제시했다. 이건 단지 지도에서 정확한 영토 크기를 표시해야 한다는 요구가 아니다. 남이 정한 세계 속 위치를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세계를 설명하는 기준을 정하는 데에도 참여하겠다는 요구다.
탈식민주의가 묻는 것은 그 권한이다.
“제국주의 시대에서 많은 국가가 독립하여 나라를 세웠다. 각 나라의 권력은 각 나라에게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영토가 독립되었다고 해서 세계를 분류하고 설명하는 권력까지 고르게 나뉘었는가?”

연설하는 토고 대표
아프리카 연합은 지도뿐 아니라 교육과정과 문화유산, 제도의 개혁을 함께 거론한다. 독립 이후에도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묻는 것이다.
미국은 바로 그 연결을 ‘더 크고 급진적인 이념적 사업’의 일부라고 비판했다. 미국이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이유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제안한 크기 중심 지도를 쓰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기준을 정할 권한을 나누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그 기준을 다시 묻는 것 자체를, 자신들이 거부하는 이념이 국제적 규범으로 확장되는 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낯선 장면이 아니다.
2025년 3월 ‘국제 희망의 날’ 결의안
찬성 161, 반대 1, 기권 4
2025년 4월 산림녹화·재조림을 위한 유엔 10년 결의안
찬성 155, 반대 1, 기권 0
1개의 반대표는 모두 미국이었다.
희망, 숲, 그리고 지도. 안건만 보면 미국은 마음에 드는 것이 별로 없는 나라처럼 보인다. 사안마다 반대의 명분은 달랐다. 희망의 날에서는 다양성·형평성·포용성이라는 DEI 표현을, 산림 결의에서는 지속가능발전 의제와 파리기후협정 등을 공격했다.
표결 결과와 반대 이유를 함께 보면, 미국이 긋는 선은 분명하다. 미국 국내에서 거부하는 가치가 국제기구의 공통 규범이 되는 일을 막겠다는 반글로벌리즘적 주권주의다. 이번 지도 사안 때문에 이념 전쟁이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벌어지던 이념 전쟁이 이번 지도 이슈까지 뻗은 것이다.
유럽은 어디까지 동의했나

지도 바로잡기 결의안 투표 내용
EU는 미국과 다른 선택을 했다. 대륙의 실제 면적을 더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교육적으로도 타당하다고 봤다. 다만, 지도 표현을 고치는 것과 국경이나 영토의 법적 지위를 다시 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유럽이 어느 정도의 변화까지 동의하는지는 다른 표결과 비교하면 더 잘 보인다.
2026년 3월 25일 유엔총회에서는 가나가 주도한 아프리카인 노예무역과 노예화 관련 결의안이 표결에 부쳐졌다. 노예화의 역사적 범죄를 인정하고 배상적 정의를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결과는 찬성 123, 반대 3, 기권 52
미국·이스라엘·아르헨티나가 반대했고, EU 27개국은 모두 기권했다. 이번 지도 결의에서는 아프리카 측과 함께한 유럽이 배상 문제에서는 갈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EU가 노예제의 참상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유럽이 문제 삼은 것은 역사적 책임을 오늘의 국제법상 의무와 배상으로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였다. ‘가장 중대한 반인도범죄’라는 표현이 범죄 사이에 위계를 만드는 문제, 국제법을 과거의 행위에 소급 적용할 수 있는지 등의 법적 쟁점을 제기했다.
그 주장이 설득력 있는지는 별도로 따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유럽이 어디까지는 받아들이고 어디서 멈췄느냐는 점이다.
지도와 배상은 서로 무관한 두 사건이 아니다. 아프리카 연합은 배상적 정의를 논의하면서 지도와 교육과정의 수정도 함께 요구했다. 잘못된 재현을 바로잡는 일과 식민주의가 남긴 역사적 피해를 회복하는 일을 하나의 과정으로 본 것이다.

연설하는 토고 대표
여기서 세 입장의 차이가 선명해진다.
1. 아프리카 연합은 지도에서 시작한 재현의 교정을 역사적 회복과 배상까지 연결한다.
2. EU는 지도처럼 과학적·교육적 기준을 바로잡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역사적 책임을 새로운 법적 의무와 배상으로 연결하는 데에는 신중하다.
3. 미국은 그보다 앞에서, 지도 교정에 역사적 정의라는 의미를 붙이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다.
유럽은 아프리카와 미국의 중간에 적당히 서 있는 것이 아니다. 국제적인 공동 기준은 필요하면 고칠 수 있지만, 그 변화는 기존 국제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 쪽이다. 유럽식 자유주의적 다자주의의 경계가 여기에서 보인다.
결국 세 입장의 차이는 ‘무엇을 바꿀 것인가’뿐 아니라 어디까지 바꿀 것인가에 있다. 정치적 위치는 찬성과 반대만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각자가 어디에서 “여기까지”라고 말하는지를 볼 때 더 선명해진다.
같은 찬성표에 담긴 다른 정치
러시아도 찬성했다. 러시아는 아프리카의 역사적 회복을 지지하면서 다극 세계 속 아프리카의 위상 강화를 강조했다. 아프리카의 주체성을 인정한다는 말이 서구 중심의 힘의 배치를 바꾸자는 구상과 만난 것이다.
다자주의와 다극주의는 구별해야 한다. 다자주의는 여러 나라가 공동 규칙으로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이고, 다극주의는 세계의 힘이 여러 중심으로 나뉘는 구상이다. 규칙을 함께 만드는 것과 힘의 중심을 늘리는 것은 다른 일이다. 양립할 수는 있어도 같은 약속은 아니다.
우크라이나는 면적 교정의 취지에 동의하면서도, 관련 지도에서 러시아 점령지역이 표시되는 방식을 문제 삼아 기권했다. 세르비아도 정치 지도의 영토 표현을 이유로 기권했다. 대륙을 제 크기로 그렸다고 그 안의 국경까지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모두 찬성하지 않았다고 같은 편인 것도 아니다. 미국은 결의의 가치에, 우크라이나는 영토 표현에 이의를 제기했다. 탈식민을 지지한 러시아의 찬성표와 러시아의 점령을 문제 삼은 우크라이나의 기권표가 함께 놓였다. 하나의 진영선으로 정리되지 않는 표결이다.

지금의 이념 지도는 두 색으로 칠할 수 없다
‘찬성 164 vs 반대 1’이라는 숫자는 압도적 합의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합의를 곧바로 서방과 비서방, 진보와 보수의 구도로 번역하면 오히려 오늘의 세계가 사라진다. 앞의 표결들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전선이 아니라, 서로 겹치면서도 일치하지 않는 여러 갈등선이다.
우선 서방 안에서도 국제규범을 대하는 태도가 갈라졌다.
-EU는 공동 규칙을 통해 불균형을 교정하려 한다.
-미국, 즉 트럼프 행정부는 그 규칙에 담긴 가치가 자국의 정치적 선택과 충돌하면 거부한다.
무엇이 보편적 기준인지에 관한 다툼이 이제 서방 내부에도 놓여있다. 국내의 문화전쟁과 국제질서 논쟁이 하나의 전선으로 이어진다.
-아프리카 연합은 더 이상 열강들이 정한 규칙을 따르기만 하는 수용자에 머물지 않으려 한다. 국제적 기준을 정할 때 함께 정하려고 한다.
미국과 유럽, 아프리카에 이어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등까지 입장과 협력의 조합은 쟁점에 따라 달라진다. 제각기 다른 방향성을 갖고 있다.
“무엇을 불평등으로 보고 고칠 것인가? 누가 고칠 권한을 가질 것인가? 어디까지 고칠 수 있는가?....”
이런 방향성의 차이가 모두 21세기에 새로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전에는 몇몇 열강이 원하는 방향성 외에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면, 지금은 여러 목소리가 표면화되며 다양한 조합으로 겹쳐지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번 지도 결의안 채택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난 건 “어떤 지도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였지만, 그 안에 숨겨진 건 “국가별로 어떤 세계를 바꾸고, 어떤 세계를 지키려 하는가”였다.
세계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표결은 정작 2026년 세계의 이념 지도를 가장 선명하게 그려낸 것이다.

편집: 임권산
마빡 디자인: 꾸물
기사: 임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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