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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되고, 난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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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전 세계에 존재하는 자칭 메시아는 50여 명이다. 그중 40명 이상이 한국에서 탄생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성경 속 인물이 계시받았다는 이야기는 인정받지만, 오늘날 누군가 같은 주장을 하면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다수의 사이비가 기독교 교리와 성경의 내용을 공유한다. 그들이 근거로 삼는 성경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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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에스겔의 환상>

 

구약 성경의 에스겔서에는 에스겔이 어떻게 신의 계시를 받게 되었는지 적시하며 시작한다.

 

"여호와께서 바빌로니아 사람들의 땅 그발 강가에서 부시의 아들인 나 제사장 에스겔에게 말씀하셨고, 여호와의 능력이 내 위에 내렸다."

-에스겔 1장 3절

 

에스겔은 하나님의 예언자이고,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는 건 성경을 믿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야기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없는 이들은 궁금할 것이다. 에스겔은 어떻게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걸 알았을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근거로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을까.

 

불편한 질문 하나 더. 수천 년 전 살았던 누군가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한 것을 오늘날 많은 사람이 믿는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누군가 나타나 "어젯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를 의심하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거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거의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셨고,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는 더 이상 말씀하실 수 없는가.

 

이 질문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왜 많은 이들이 자신을 선지자, 메시아라 주장할 수 있었는지, 또 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말을 믿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짚어볼 만한 문제다.

 

성경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에스겔만이 아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임했고, 하나님이 자신을 모태에서 짓기 전부터 알아 태어나기 전부터 구별하여 "여러 나라의 예언자로 세웠다"고 기록한다. 이사야 6장에는 이사야가 하나님의 보좌를 보고 음성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물음에 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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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떨기나무(세바스티앵 부르동 작품)

 

모세 역시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이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라는 명령을 받는다. 물론, 이를 실제로 본 사람은 없다. 구전을 기록으로 남겨 전해진 이야기다.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은 자신의 종교적 사상이나 철학을 설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성경 서술 안에서 그들은 반복해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선언한다.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가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때 사람들은 예언자의 말에 반대할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의 종교적 계시를 거역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에스겔 2장으로 넘어가면 더 흥미롭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면서 그들은 반역하고 완고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에스겔의 말을 듣든 말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명령한다. 사람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란 걸 처음부터 알려주면서, 찔레와 가시 가운데 있고 전갈 가운데 거하는 것처럼 위험하더라도 그들의 말과 얼굴을 두려워 말라고 한다.

 

핵심은 분명하다. 사람들이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사명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부당하더라도 권력과 여론에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말하는 것이 예언자의 사명이다. 그러나 이 구조를 현대의 누군가가 자신의 권위에 그대로 적용하면 어떨까.

 

자신을 예언자라고 생각하는 이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는 것은 내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참된 예언자는 원래 거부당하는 법이라고. 교회가 나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 가족들이 나를 말리는 것, 언론이 나를 공격하는 것도 내가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진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비판을 자기 증명의 근거로 사용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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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진리

 

한국의 여러 사이비에서 반복해 나타난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다. 자신들을 향한 사회의 비판을 '세상의 핍박'으로 설명한다. 진리는 언제나 핍박받고, 예수도 배척당했으며, 선지자들도 자기 시대에는 인정받지 못했다는 강력한 방패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예수가 배척당했다는 사실이 배척당한 자를 모두 예수로 만들지 않는 것처럼, 에스겔이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한 사실 역시 거부당한 모든 사람을 예언자로 만들지 않는다. 이 논리적 비약을 놓치면 '핍박'이 진리의 증거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예언자 구조는 성경의 신약 성서에도 나타난다. 사도 바울이라고 불리는 이는 예수를 따라다녔던 제자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오히려 예수를 믿는 이들을 박해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다마스커스)으로 가는 길에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고 주장하면서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 받은 것도,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받은 것이라 말한다. 자기 메시지의 최종적 권위가 인간이 아닌 예수에게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오늘날 신약 성경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바울의 편지들이다. 바울이 예수를 만났다거나 회심을 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은 증인도, 증거도 없다. 본인의 경험담을 글로 남긴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더 직접적이다. 책의 첫머리부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소개한다. 하나님이 보여준 것을 요한이 기록했다고 한다. 환상을 보았고, 그 환상이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믿었다. 그의 기록은 신약 성경의 마지막 책이 되었다.

 

또한 성경은 계시와 예언을 과거에만 벌어진 사건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요엘서를 인용하면서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의 영이 모든 사람에게 부어지고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말한다. 즉, 성경 자체가 앞으로도 예언과 환상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남겨놓는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되고, 오늘날 누군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왜 의심하는가. 요한이 환상을 보고 기록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면, 왜 오늘날의 누군가 자신의 환상을 기록한 것은 새로운 성경이 될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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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을 쓰는 바울

 

자칭 메시아가 노린 틈

 

성경은 과거의 사건을 기록한 책일 뿐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약속도 담고 있다. 중요한 약속 중 하나가 메시아, 구원자 예수의 재림이다. 사도행전 1장 11절에서 예수가 하늘로 올라간 뒤, 천사들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요한계시록 1장 7절은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선언한다. 마지막 22장에서도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약속이 나온다. 그렇다면 재림을 실제 사건으로 믿는 기독교인에게 예수의 재림은 언젠가 현실에서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다. 바로 이 지점이 자칭 메시아들이 파고드는 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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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성경에서 예수가 다시 온다고 했으니, 언젠가는 와야 한다. 누군가 나타나 '그때가 바로 지금이다'라고 하거나, '성경이 기다리라 했던 사람이 바로 나'라고 주장한다면, 맞다 할 수도 없지만 또 무작정 아니라고만 할 수도 없다. 한국의 수많은 재림 예수들의 주장이 완전히 무(無)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는 아니다. 예언, 환상, 재림이라는 개념이 성경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 이야기의 시간, 장소, 주인공만 바꾸었을 뿐이다.

 

누군가 거리 한복판에서 아무 맥락 없이 자기가 신이라고 외친다면, 대부분은 도른자라고 생각하고 지나칠 거다. 그러나 그가 성경을 펼쳐 들고 구절을 하나씩 설명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나님은 과거부터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에게도, 이사야에게도, 또 마지막 날에는 사람들이 예언하고 환상을 본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는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런 식으로 말이다.

 

물론 마지막 단계에는 논리의 비약이 있다. 앞서 말했듯, 성경이 재림을 말한다고 해서 누군가 재림 예수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사이비의 설득 방식에서 중요한 것은, 그 비약이 언제나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믿고 있는 성경의 문장을 하나씩 연결하고, 익숙한 신앙의 언어를 따라가게 한 뒤 마지막에 지도자 자신의 이야기를 그 속에 집어넣는다.

 

신도에게 요구되는 건 성경을 버리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을 더 강하게 믿으라는 요구를 받는다. 다만 그 성경을 읽는 열쇠를 특정 지도자가 독점하는 것일 뿐이다.

 

누가 성경을 '성경'으로 정했을까

 

수많은 고대 문서 가운데 어떤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제외하여 편찬했다. 무엇을 어떻게 제외할 것인지, 누가 언제 어떤 기준으로 정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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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

 

성경은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쓰인 여러 문서가 오랜 시간에 걸쳐 정경으로 받아들여졌다. '정경'을 뜻하는 영어 canon의 어원인 그리스어 kanōn은 '길이를 재는 자'라는 뜻이다. 즉, 기준과 규범이다. 수많은 문서 중 어떤 것을 공동체가 특별한 권위를 가진 성스러운 문서로 받아들일 것인지 결정하는데, 이러한 특별한 과정을 '정경화'라고 하고, 정경이 되기 위해서는 정경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구약 성경은 어떤가. 유대교 경전은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되었다. 흔히 모세 오경이라 불리는 율법서인 토라는 비교적 일찍 특별한 권위를 갖고 있었지만, 그 이후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역사서나 예언서, 그 외의 다른 문서들은 한참 뒤에 성경의 범위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날 개신교가 구약이라 부르는 문서들은 유대교의 히브리 성경과 기본적으로 같은 문서를 공유한다. 하지만 배열과 구분 방식은 다르다. 천주교와 정교회의 구약 정경도 개신교와 차이가 있다. 우리가 흔히 '성경'이라 부르는 것조차 어느 기독교 전통에 속해 있는지에 따라 그 범위가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

 

신약 성경의 형성 과정은 더 중요하다. 예수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당연히 신약 성경이 존재하지 않았다. 예수가 직접 복음서를 쓴 적도 없다. 예수가 죽은 뒤 그의 가르침과 죽음,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공동체 안에서 전해졌고, 이후 여러 형태의 문서로 기록되었다. 바울의 편지도 마찬가지다. 바울이 직접 쓴 것도 있지만, 누군가가 대필한 기록도 있다. 그리고 그 기록들은 여러 교회에서 다양한 형태로 읽혔다.

 

오늘날의 27권만이 신약으로 존재했던 것도 아니다. 초기 기독교 세계에는 수많은 문서가 유통되었다. 오늘날 신약에 포함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외에도 여러 복음서와 문학 작품, 사도들의 이름을 내건 문서들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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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문서

©한국기독일보

 

반대로 오늘날에는 너무도 당연하게 신약 성경의 일부로 읽히는 문서 중에도 초기 교회에서 그 지위를 두고 오랫동안 논의가 이어진 책들이 있었다.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요한계시록 등은 모든 지역의 교회에서 처음부터 같은 정도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의 신약 성경은 이처럼 오랜 논의와 선별, 수용의 과정을 거쳐 형성된 정경화의 결과다.

 

1세기 팔레스타인 각 지역의 교회는 특정 문서들을 반복해 읽었다. 이들은 그 문서가 예수의 제자들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여러 지역 교회에서 얼마나 널리 사용되는지, 또 교회가 전통적으로 받아들여 온 신앙과 일치하는지를 살폈다. 어떤 문서는 권위 있는 글로 받아들여졌고, 어떤 문서는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 과정은 수 세기에 걸쳐 이어졌다.

 

2세기 후반의 무라토리 정경목록은 이미 상당수 신약 문서가 특별한 권위를 지닌 글로 읽혔음을 보여준다. 다만, 그 목록은 오늘날의 신약 27권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4세기에 이르면 정경의 윤곽은 한층 뚜렷해진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가 서기 367년에 보낸 제39차 부활절 서신에는 오늘날 사용되는 신약 27권과 정확히 일치는 목록이 등장한다. 이후 4세기 말 히포와 카르타고의 지역 교회 회의에서도 유사한 목록이 확인된다.

 

결국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알려진 것 중 사람들이 자주 읽고 사용한 문서들을 모아 회의를 통해 정해졌다. 그렇다면 성경은 특정한 권한을 가진 '인간'에 의해 결정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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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교회 회의가 성경 형성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교회 지도자들과 공동체는 어떤 문서를 권위 있는 글로 받아들일지 논의하고 확인했다. 그러나 어느 한 공의회가, 그전까지 성경으로 여겨지지 않던 문서를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상당수 문서는 이미 오랜 시간 여러 교회에서 읽히며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다. 교회 회의는 새 정경을 창조했다기보다,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교회의 합의를 확인하고 제도화하는 역할을 했다.

 

여기서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는 시각이 두 갈래로 나뉜다.

 

기독교 신앙의 내부에서 교회가 성경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서 영감받은 문서들이 이미 존재했고, 교회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인도 아래 그 문서들을 정경으로 '식별하고 인정했다'고 이해한다. 교회가 어떤 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말씀인 책을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반면 기독교 밖에서는 반대의 관점이 가능하다. 어떤 문서를 예배에서 읽을지, 어떤 문서에 사도적 권위를 부여할지, 또 어떤 문서를 정경 밖에 둘지를 판단하는 주체는 역사 속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특정한 시대와 문화 속에 살아간 주교, 신학자, 성직자, 그리고 신앙 공동체였다. 이들의 판단과 논쟁, 공동체 안에서의 오랜 사용과 합의가 축적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성경이라고 부르는 문서들의 경계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어느 쪽의 해석을 받아들일지는 결국 신앙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신앙인은 그 역사적 과정 뒤에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인도가 있었다고 믿는다. 역사학자는 그러한 초월적 개입을 역사적 방법으로 입증하거나 반증할 수 없다. 역사학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어떤 문서를 읽고 사용했는지, 어떤 문서를 두고 논의했는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특정한 목록이 권위를 얻게 되었는지까지다.

 

그럼, 정경화 과정은 어떻게 마무리되었을까. 그리고 그 과정은 끝이 났을까. 다음 편에서 이어 가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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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금성무스케잌

마빡 디자인 : 꾸물

기사 : B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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