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3박 5일 일정으로 프랑스를 국빈 방문했다. 지난 8월 초, 남미 국가들(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과의 정상회담 이후 오랜만에 이어진 정상외교다.

프랑스 엘리제궁에 도착한 이재명 대통령과
마크롱 대통령
한국의 전략과 의도
정상회담 발표문에 반도체와 원자로가 등장한다. 여기까지는 익숙하다. 그런데 조금 더 읽으면 항공편과 워킹홀리데이가 나오고, 프랑스에 오래 사는 한국인의 체류증 문제까지 등장한다.

한-프랑스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
대통령이 파리까지 가서 체류증 이야기를 했다고?
그렇다. 그리고 이 대목은 한국 정부가 이번 정상회담을 어떻게 설명하고 싶은지 보여준다.
“국가 간 관계가 좋아진다면, 기업의 사업과 국민의 생활에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이재명 대통령은 회담 결과를 여섯 분야로 설명했다.
1. 안보
2. 경제
3. 첨단기술
4. 인적교류
5. 문화
6. 국제 문제
그중 한국의 계산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 있다.
“양국 협력의 핵심축인 첨단산업과 과학기술을 산업과 시장으로 연결하기 위한 협력을 구체화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공동언론발표문을 발표하는
이재명 대통령과 마크롱 대통령
기술협력을 한다는 말은 흔하다. 연구기관끼리 협약을 맺고, 연구자들이 오가고, 공동연구를 추진한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이 다음 단계를 강조했다. 연구실에서 만난 기술이 공장으로 들어가고, 제품이 되어 시장에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다.
기업인들이 모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을 보면, 이 말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린다.
삼성전자와 네이버는 미스트랄 AI(프랑스의 AI 회사)와의 협력을, LS와 효성은 프랑스 전력망 현대화 사업과의 접점을 논의했다. 로레알(프랑스 화장품 회사)과 코스맥스(한국 화장품 회사)의 협력도 등장한다. 프랑스의 브랜드와 한국의 제품 개발 역량을 결합하자는 것이다. 첨단기술부터 화장품까지, 협력의 대상은 다르지만, 계산법은 비슷하다.
“서로 가진 것을 합쳐 사업을 만들 수 있냐. 있다면 만들어보자!”
라는 것이다.

정상회담 결과를 브리핑하는 위성락 안보실장
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사례는 삼성전자와 미스트랄 AI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투자 협약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노하우를 보호할 수 있는 삼성전자 전용 AI 모델을 개발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삼성전자와 미스트랄 AI가 협력하여 지금보다 좋은 AI모델을 만들고 이를 이용하여 반도체 기술도 더 지키겠다는 것이다. 위성락 안보실장의 말에서 강조된 건 프랑스 AI 기업과 손잡았다는 사실보다, 한국 기업의 기술을 보호하면서 AI를 활용할 방법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다만, 개발하기로 했다는 발표와 실제로 쓸 만한 모델이 완성됐다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은
우라늄 농축 분야의 장기 협력을 위한
협력의향서(LOI)를 체결했다.
원자력 협력에서는 계산이 더 복잡하다.
한국과 프랑스는 원전을 함께 연구할 수 있는 나라지만, 해외 수주 현장에서는 경쟁자이기도 하다. 한국 정부도 브리핑에서 “원전 수출 등 분야에서 일정 부분 경쟁 관계”라고 인정했다. 그럼에도 한수원과 오라노의 협력을 통해 농축우라늄 공급선을 넓힐 가능성을 성과로 제시했다.
원전을 파는 시장에서는 경쟁하되, 원전을 돌리는 연료에서는 협력한다. 경쟁한다고 모든 거래를 끊을 이유도 없고, 협력한다고 경쟁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한국이 기대한 것은 프랑스라는 친구 한 명보다 연료를 확보할 선택지 하나가 더 생기는 효과에 가깝다.
그런데 이 회담을 경제 이야기로만 읽으면, 놓치는 부분이 있다. 대통령이 가장 먼저 설명한 분야는 국방·안보였다.
군사비밀정보 보호체계를 정비하고, 합동훈련과 해군의 상호 기항을 추진한다. 기술과 생산능력을 결합하는 방산 협력도 넓힌다. 한국 정부는 산업 협력과 함께 실제 군사협력의 기반도 강화하려 했다. 다만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 개정의정서는 서명됐지만, 상호군수지원협정은 아직 협상 중이었다. 발표문에 나란히 실려 있다고 같은 단계의 성과는 아니다.
호르무즈 문제에서도 문장의 범위를 살펴야 한다.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기여 의지”를 언급하고, 항행의 자유와 공급망 회복을 위한 공조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발표문에는 병력을 얼마나, 언제, 어떤 임무로 보낼지 적혀 있지 않다. 협력 의사를 곧바로 파병 결정으로 읽을 수는 없다. 산업협력의 이익을 설명하는 것과 국제 안보상의 부담을 확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프랑스 하원의장 면담한 이재명 대통령
다시 체류증으로 돌아가 보자.
한국 정부는 항공협정 개정, 청년 교류 확대, 장기 체류 국민을 위한 영사협력까지 성과에 포함했다. 프랑스 하원의장을 만난 자리에서도 협력이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결과로 이어지도록 의회의 관심을 요청했다. 정상 간 합의를 기업과 연구 기관, 의회와 국민의 생활로 옮기려는 설명 방식이다.
한국 정부의 발표를 종합하면, 목표는 비교적 선명하다.
프랑스의 기술과 시장에 접근하고, 공급선을 넓히며, 안보 협력과 국민 교류의 제도적 기반을 다지겠다는 것이다. 물론 협약은 매출이 아니고, 공급선 다변화 가능성은 공급 안정의 보증서도 아니다. 무엇을 추진하기로 했는지와 무엇을 실제로 얻었는지는 앞으로 나눠 계산해야 한다.
그렇다면 프랑스도 같은 계산서를 들고 있었을까. 같은 회담을 마친 마크롱 대통령은 왜 기업의 사업 기회를 넘어 ‘독립 국가들의 연대’를 이야기했을까. 테이블은 하나였지만, 그 위에 올려놓은 미래까지 같았던 것은 아닐 수 있다.
프랑스의 전략과 의도
마크롱의 발표문에는 정상회담에서 좀처럼 듣기 어려운 단어가 등장한다.
‘종속’

이번 정상회담 결과를 공식 발표한 프랑스 대통령실
©프랑스 대통령실
그는 양국의 협력이 “어느 강대국에도 종속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프랑스 관계를 “독립 국가들의 연대”를 보여주는 사례로 설명했다. 한국 대통령이 기업의 사업과 국민의 생활을 이야기했다면, 프랑스 대통령은 그 협력에 국제질서의 문제를 얹었다.
프랑스는 이미 독립 국가 아닌가. 무엇으로부터 더 독립하겠다는 것일까.
나라의 국기를 갖는 것과 필요한 것을 스스로 결정할 능력을 갖는 것은 다르다. 산업을 돌릴 기술과 연료, 나라를 지킬 무기, 자국의 이야기를 유통할 통로를 외부에 크게 의존한다면 선택의 폭은 좁아진다.
마크롱이 말하는 전략적 자율성은 이런 문제다. 혼자 모든 것을 만들겠다는 뜻으로 읽기는 어렵다. 믿을 만한 상대와 협력해 특정 강대국에만 기대지 않을 능력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에 가깝다.
여기서 한국의 반도체와 프랑스의 AI가 만난다. 한국 측은 삼성전자의 기술을 보호하며 AI를 활용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마크롱은 같은 협정을 양국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산업 협력으로 제시했다. 한국 기업에는 생산과 연구 개발의 문제이고, 프랑스 정부에는 자국 AI 기업의 성장과 기술적 선택권의 문제인 셈이다.

마크롱과 트럼프
©AP
그렇다면 한국을 미국에서 떼어내겠다는 이야기일까.
최근 프랑스의 다른 정상외교를 보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지난 6월 프랑스·영국·독일·우크라이나 정상의 공동성명에는 미국과 “가장 긴밀한 협력” 아래 노력을 진행해야 한다는 문구가 들어 있다. 동시에 유럽의 안보에 관한 합의에는 유럽의 이해가 반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협력하되, 유럽의 문제를 유럽이 빠진 자리에서 결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9월 초, 영국을 방문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실
한국과의 회담 직전 영국을 방문했을 때도 비슷했다. 영국을 방문한 마크롱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동 미사일 지원과 NATO를 언급했다. 그러면서 양국이 공유하는 원칙으로 “스스로 결정할 자유”를 내세웠다. 동맹과 자율성은 그의 설명 속에서 함께 등장한다.
다만, 상대에 따라 협력의 무게는 다르다. 영국과는 이미 제공한 무기를 이야기하고, 우크라이나 관련 공동성명에서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안전보장과 다국적군 배치를 다룬다. 한국과의 발표에는 그런 수준의 약속이 없다. ‘독립 국가들의 연대’라는 표현만으로 새로운 군사동맹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없는 이유다.
호르무즈에서도 이 구분은 필요하다. 마크롱은 영국과 함께 추진해 온 국제 임무의 조율 과정에 한국이 참여했다는 점을 부각했다. 그러나 다국적 임무는 합의가 이뤄진 뒤를 전제로 설명했다. 프랑스는 한국을 국제적 협력 구상 안에 놓았지만, 이것이 한국의 파병 확정을 뜻하지는 않는다.

뤼미에르 정상회의에서 발언하는 이재명 대통령
문화에서는 프랑스의 계산이 더 선명해진다.
뤼미에르 정상회의에서 마크롱은 영화 이야기로 시작해 AI와 플랫폼, 저작권으로 넘어갔다. 작품이 아무리 많아져도 관객에게 발견되지 못하면 소용없다. 누가 추천 알고리즘을 운영하고, 창작자가 어떤 보상을 받으며, 독립 영화관이 살아남을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영화제를 하나 더 열자는 수준을 넘어 영상 산업이 돌아가는 조건을 함께 다루자는 제안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프랑스 영상산업의 매출과 촬영이 지역경제에 남기는 효과도 설명했다. 문화 주권이라는 큰 말 아래에는 제작사와 창작자, 숙박업소와 식당의 수입이 있다. 프랑스 역시 국민에게 설명할 경제적 성과가 필요하다.
이렇게 보면 프랑스가 한국에 내민 것은 협력사업 목록과 그 사업을 묶는 정치적 구상이었다. 기술과 산업을 함께 키우면서 국제 문제에서도 함께 목소리를 내자는 것이다. 한국의 제조업과 문화산업은 그 구상에 실질적인 무게를 더할 수 있다.
그러나 마크롱이 한국을 자신의 구상 안에서 설명했다는 사실과 한국이 그 구상 전체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다르다. 협력할 사업이 있다는 데에는 뜻이 맞았다. 어디까지 함께 움직이고 얼마만큼 부담할지는 여전히 별도의 협상이다.
같은 악수, 다른 기대
그렇다면, 외신들은 이 만남에서 무엇을 봤을까.

르 몽드는 이재명 대통령이 프랑스 방문을 앞둔 시점 마크롱 대통령의 ‘독립 국가들의 연대’ 구상에 관해 물었다. 이 대통령의 답은 공동의 가치를 가진 국가들의 협력을 강조하면서도, 기존 국제질서를 보완하고 기존 동맹을 심화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인터뷰를 르몽드의 지지나 평가로 읽어서는 안 된다. 다만 프랑스의 구상을 설명하는 질문에 한국 대통령이 어떤 경계선을 그었는지는 드러난다. 협력의 폭은 넓히되, 기존 동맹을 대체하는 구상으로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

디플로매트는 기사 제목에서 두 정상의 ‘안보 관계 심화 약속’을 앞세웠다. 한국이 설명한 다양한 생활·산업 의제 가운데, 국제 독자에게는 양국의 안보협력 확대가 주요 뉴스가 된 셈이다.

로이터는 그 협력의 범위를 더 좁혀 물었다. 호르무즈에서 한국은 무엇을 하기로 했는가. 보도에 따르면,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기여 방안을 검토 중이며 결정된 것은 없다”고 설명했다.
동시에 로이터는 한국의 군사적 참여를 경계하는 이란의 반응도 전했다. 서울과 파리가 평화적 협력이라고 설명하더라도, 다른 당사자가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이 보도들을 함께 읽으면 이번 회담을 산업 협력의 성과만으로도, 새로운 안보 연대의 출범만으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한국은 기술과 시장, 공급선의 선택지를 넓히려 했다. 프랑스는 그 협력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국제적 연대에 연결하려 했다. 서로 필요한 부분은 겹쳤지만, 함께 감당할 부담까지 정해진 것은 아니다.
이제 확인할 것은 협력 이후 한국에 무엇이 남고, 어떤 책임이 따라오는가다. 기업에는 기술과 사업이, 국민에게는 생활의 변화가 남아야 한다. 안보 협력에는 목적과 범위에 대한 설명이 따라야 한다. 체류증에서 시작한 정상회담은 호르무즈까지 이어졌다. 생활의 편의와 국제적 책임이 한 발표문에 담긴 만큼, 정부는 성과와 비용을 모두 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추신.
이재명 정부가 어떤 그림으로 외교하고 있는지, 어떤 대한민국을 만들려 하는지 궁금한 독자께는 본지의 <이재명 정부 정상회담 시리즈>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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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 정상회담 연재물
12. 유럽 순방에서 벨기에를 첫 회담 국가로 택한 이유 :
확고한 ‘종합 선진국’이 되다 국제 사회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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