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특히나 서구권에서 극우가 득세를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선, 그간 여러 이야기가 나왔다. 그중 가장 유력한 분석으로는 이런 내용이었다.
“과거보다 경제가 어려워지며 파이가 적어지니 사람들이 다른 이들과 같이 나누고 연대하며 살아갈 여유가 적어졌다. 그 결과, 나의 이익이 침범받는 것에 더 예민해졌다.”
“이런 경제적 결과를 만든 건 기존 정당들이다. 그 결과를 해결할 능력도 없어 보인다. 제대로 된 해법도 제시하지 못한다. 다른 대안이 필요하다. 이것이 극우가 득세하는 이유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까지는 조금만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대체로 아는 이야기다.

©AFP
본 기사에서는 여기서 한발 더 본질적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우선 약 일주일 전 있었던 독일 작센안할트주 선거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압승한 독일 극우 정당
독일 정치에 꽤 난감한 숫자가 하나 나왔다. 지난 9월 6일 작센안할트주 선거에서 극우 정당 AfD(독일을 위한 대안)가 43.8%의 득표를 얻었다. 바로 직전 선거였던 5년 전 20.8%의 득표를 받았던 것에서 두 배나 넘게 뛴 결과였다.

(참고로, 우리와 달리 지방선거가 전국적으로 동시에 진행되지 않는다. 지방선거, 즉 독일의 주 선거는 각 주마다 자체적인 선거 일정이 있다. 9월 6일 있었던 선거는 독일 중동부에 있는 작센안할트주의 주 의회 선거였다)
더 눈에 띄는 것은 기존 보수의 득표율이다. 독일 보수의 본가인 기독민주당 CDU는 17.2% 득표에 그쳤다. 극우가 크게 이긴 동시에, 그동안 국가의 질서와 안정을 대표해온 기존 보수가 처참하게 밀렸다.
여기서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기존 정당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기존에 지지하던 정당을 바꾸는 건 쉽지 않다. 보통 기존에 지지하던 정당에 이런저런 방향성을 더 요구하는 방식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좌파라면 경제가 어려운만큼 부와 부담을 더 공평하게 나눠서 사회 안정망을 더 갖추자고 주장할 수도 있고, 보수라면 이민과 치안 문제 등 기존 경제 및 질서를 위협한다고 느끼는 문제에 대해 기존 보수 정당에게 더 강하게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작센안할트주에서는 이런 방법을 제외하고, AfD를 택하는 방향이 압도적으로 나타났을까?
좌든 우든 기존 정당과 극우는 명백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독일(유럽 전체로 봐도 된다)의 좌우 정당은 지금 형성된 질서 위에서 변화를 주거나 지키는 방향으로 가고자 한다. 그런데 극우는 기존 질서를 누구보다 과격하게 ‘뜯어 고치겠다’고 나선다.
이것이 결정적 차이다.
좌와 우, 그리고 ‘극’은 어디에서 갈라지나
정치에서 ‘변화’라는 말에 너무 쉽게 현혹되면 안 된다. 진보도 이미 얻은 권리를 지키자고 하고, 보수도 필요하면 법과 제도를 크게 바꾼다. 극우는 때로 기존 정치보다 훨씬 과격한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니 바꾸느냐 지키느냐만으로 좌우를 나누면 금방 꼬인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삼고, 그 변화가 어디를 향하느냐다.
사람들의 삶이 달라지면 기존의 규칙과 현실 사이에 틈이 생긴다. 그 틈을 메우기 위한 사회의 원리적 방향은 두 갈래로 갈린다. 하나는 달라진 현실과 사람들의 관계에 맞춰 규칙과 질서도 다시 정당화할 수 있다는 방향이다. 진보의 원리에 해당한다.

독일 보수의 본가이자
현재 독일 집권당 CDU(기독민주당).
대표는 메르츠 독일 총리다.
©로이터
보수의 원리는 다르다. 역사를 거쳐 만들어지고 이어져온 규칙과 질서에는 그 자체로 지켜야 할 정당성이 있다고 본다. 새로운 현실이 나타났다고 해서 기존 질서의 가치가 곧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쪽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보와 보수는 “나는 진보다”, “나는 보수다”라고 할 때의 정치적 정체성과는 다르다. 원리의 차원에서는 둘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지만, 현실의 인간과 정당은 여러 원리와 이해관계가 뒤섞인 복합체다. 현실 정치에서 붙는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은 그 복합체가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를 나타내는 정치적 이름에 가깝다.
그러면 ‘극’은 어디에서 생기는가.
극좌는 단순히 좌파보다 더 많은 재분배를 요구하는 정치가 아니다. 현재의 불평등이 몇몇 정책의 잘못이 아니라 소유와 지배관계의 토대 자체에서 나온다고 보고, 그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구성하려 한다.
극우도 단순히 보수보다 국경을 더 세게 지키자는 정치로 보면 부족하다. 극우는 현재의 질서 자체가 이미 ‘본래 있어야 할 질서’에서 벗어났다고 본다. 누가 이 공동체의 주인인지, 누구에게 우선권이 있는지, 어디까지가 안이고 밖인지가 흐려졌기 때문에 사회가 잘못됐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극우는 현재의 제도를 누구보다 과격하게 뜯어고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변화가 향하는 곳은 아직 없는 새로운 질서라기보다, 이미 존재했거나 존재했다고 믿는 ‘정상적 질서’의 복원이다. 수단은 혁명적이어도 목적은 복원적일 수 있다.
극좌의 급진성이 현재의 관계를 넘어 새로운 질서를 구성하려는 데 있다면, 극우의 급진성은 현재를 넘어 과거의 어느 지점을 정당한 기준으로 세우고 그곳으로 돌아가려는 데 있다. 변화의 크기보다 변화가 향하는 방향이 다른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가 조금 더 선명해진다. 사람들이 단순히 덜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과,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밀려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같은 불만이 아니다.

영국의 극우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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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몫’이 적은 것과 내 ‘자리’가 없어지는 것은 다르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생각해보자. 회사는 돈을 잘 버는데 내 월급만 오르지 않는다. 내가 만든 가치에 비해 돌아오는 것이 적다고 느낀다. 이것은 몫의 문제다.
그런데 어느 날 상황이 달라진다. 회사가 공장을 다른 나라로 옮기겠다고 한다. 내가 하던 일 가운데 상당 부분은 기계나 인공지능이 대신하기 시작한다. 이제 불만은 월급 액수에서 끝나지 않는다. 내가 하던 일 자체가 앞으로도 필요한지 묻게 된다.

©지멘스
착취와 대체의 차이가 여기 있다. 착취는 적어도 나를 필요로 한다. 대체는 ‘너 없이도 된다’고 말한다. 착취가 덜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가 “왜 내가 만든 것보다 적게 받는가”의 문제라면, 다른 하나는 “앞으로도 내가 필요한가”의 문제라는 뜻이다.
자리란 직업 하나만을 뜻하지 않는다. 내가 사는 지역에도 앞으로 사람이 살 이유가 있는지, 내가 평생 익힌 기술과 경험이 여전히 가치 있는지, 내 목소리가 사회의 중요한 결정에서 들리고 있는지도 자리의 문제다. 돈을 이전해준다고 이 질문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치학자 토마스 쿠러가 2020년 논문 「쇠퇴하는 중간층: 직업 변화와 사회적 지위, 포퓰리즘 우파」(The Declining Middle)에서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런 지점이다. 그는 급진우파 지지를 가장 가난한 사람들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산업과 직업구조가 바뀌면서 자신이 사회적 사다리에서 상대적으로 내려가고 있다고 느끼는 층의 불안도 중요하게 나타난다. 문제는 현재 가진 돈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위치라는 것이다.
여기서 같은 경제적 어려움도 서로 다른 정치적 질문을 낳는다. 내 몫이 줄었다고 느끼면 “누가 너무 많이 가져가는가”를 묻게 된다. 임금, 세금, 복지, 노동자의 권리가 자연스럽게 정치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내 자리가 사라진다고 느끼면 질문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누가 내 자리에 들어오는가. 국가는 누구를 먼저 보호하는가. 나는 아직 이 사회에서 중요한 구성원인가. 얼마를 나눌 것인가의 문제가 누가 안에 속하고 누구에게 우선권이 있는가의 문제로 옮겨간다.
바로 여기에서 경제적 불안이 반드시 좌파로 가지 않는 이유가 보인다. ‘내 몫이 줄었다’고 느끼면 더 공정하게 나누자는 정치가 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본래 있던 자리에서 밀려난다’고 느끼면, 더 많이 나누자는 말보다 내 자리를 되찾아주겠다는 말이 더 직접적으로 들릴 수 있다. 분배의 문제가 귀속의 문제로 바뀌는 순간이다.
보존으로는 부족할 때
우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파는 기존의 질서를 지키려고 한다. 물론 우파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지키면서 고치자”다.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할 때 자신이 밀려난 이유가 바로 지금의 질서에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파도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일자리를 지키지 못했고, 국경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으며, 자기 지역은 쇠퇴하도록 내버려뒀다고 느낀다. 그런 사람에게 지금의 질서를 지키자는 말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이 그 질서인데, 대체 뭘 지키자는 건가!”
그 순간 보수의 강점이 약점으로 바뀐다. 오랫동안 국가를 운영하고 제도를 관리해왔다는 경력이 더 이상 안정감의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사태를 만들거나 적어도 막지 못한 책임의 증거가 된다. 질서의 수호자가 어느새 실패한 질서의 관리자가 되는 것이다.

2000~2025년까지 연도별 독일로 유입된 이민자수
(단위 : 1,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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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간다. 기존 보수가 문제를 막지 못했다고만 하지 않는다. 막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막지 않았다고 말한다. 국민보다 브뤼셀(EU)을 택했고, 자기 국민보다 외부인을 먼저 생각했으며, 보수라는 사람들이 결국 진보와 다를 바 없어졌다는 식이다. 무능의 이야기가 배신의 이야기로 바뀐다.
이 설명을 받아들인 보수 유권자가 좌파로 갈 이유는 별로 없다. 기존 보수정당에 실망했다고 국가와 질서, 공동체와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까지 버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가치를 여전히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더 분명하게 되찾겠다는 정당으로 옮겨갈 수 있다.
우파 정당을 버렸다고 우파적 가치를 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가치를 되찾기 위해 기존 우파부터 버릴 수 있다. 이번 작센안할트 선거에서 AfD가 크게 올라선 반면 CDU가 크게 밀린 장면도 이런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CDU에서 빠진 표가 모두 AfD로 그대로 옮겨갔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보수의 대표 자리를 놓고 두 정당이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전통적 보수와 극우의 차이가 선명해진다. 보수는 현재까지 이어져온 질서에서 지킬 것을 찾는다. 극우는 현재의 질서 자체가 이미 잘못된 결과라고 보고, 그 이전에 있었다고 믿는 ‘정상 상태’를 되찾으려 한다.
지킬 것이 있다고 믿을 때는 보수가 강하다. 이미 빼앗겼다고 믿을 때는 극우가 강해진다.
그래서 극우의 약속은 단순한 보존이 아니다. 복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돌려주겠다는 ‘잃어버린 것’은 대체 무엇인가.
더 나은 미래보다 ‘과거 내 것’을 보장하라

트럼프의 구호 ‘Make America Great Again’을 다시 보자. 흔히 ‘위대한 미국’에 눈이 가지만, 정치적으로 더 중요한 단어는 어쩌면 ‘Again’이다. 위대한 나라를 새로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한때 위대했던 나라를 다시 되찾겠다는 약속이다.

©뉴시스
브렉시트의 대표 구호 ‘Take Back Control’도 구조가 같다. 통제권을 새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빼앗긴 통제권을 되찾자는 말이다. 둘의 공통된 동사는 ‘만들기’보다 ‘되찾기’에 가깝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새로운 것을 얻으려면 왜 그것이 필요한지 설명하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새로운 규칙에도 적응해야 한다. 반면 원래 내 것이었다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훨씬 간단해진다. 내가 새로 자격을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빼앗긴 것을 돌려받으면 된다.
극우가 자주 사용하는 정치적 서사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뒤처진 것이 아니다. 당신에게 돌아와야 할 자리가 다른 곳으로 갔다. 당신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정치가 당신이 알던 정상적인 세상을 망가뜨렸다는 것이다.
이런 말은 미래가 불안할수록 더 강해진다. 인공지능이 직업을 어떻게 바꿀지 알 수 없고, 산업은 빠르게 재편되며, 인구는 줄고 기후위기와 전쟁은 새로운 부담을 가져온다. 미래가 더 나은 세상의 이름이 아니라 또 하나의 불확실성으로 다가오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에게 “새 시대에 적응해야 한다”는 말은 희망보다 시험처럼 들릴 수 있다. 계속 배우고, 바꾸고, 양보하고, 새 질서 속에서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당신이 틀린 것이 아니다. 세상이 잘못된 것이다”라는 말은 훨씬 편안하다. 문제의 원인이 나에게서 세상으로 옮겨간다.
여기서 앞서 구별한 정치의 방향이 다시 드러난다. 진보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더 정당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전통적 보수는 지금까지 이어져온 질서에서 지킬 가치를 찾는다. 극우는 현재의 질서가 이미 잘못됐다고 보고, 상실됐다고 믿는 정상적인 과거를 다시 세우려 한다.
그래서 극우는 누구보다 과격하게 현재를 뜯어고치면서도 스스로를 복원자로 내세울 수 있다. 수단은 급진적인데 목적지는 과거다. 바꾸려는 것이 많다고 해서 그 변화가 미래를 향하는 것은 아니다.
극우의 힘은 더 좋은 것을 약속하는 데만 있지 않다. 잃지 않아도 됐던 것을 되찾아주겠다고 말하는 데 있다. 더 나은 미래를 경쟁해서 얻으라는 것이 아니라, 원래 내 것이었던 자리를 돌려주겠다는 약속이다.
다만 “나도 이 사회에서 자리를 보장받아야 한다”와 “그러니 저 사람보다 내가 먼저여야 한다”는 같은 말이 아니다. 극우는 자주 앞의 불안을 뒤의 요구로 바꾼다. 내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자리를 줄여야 하고, 내 나라를 되찾으려면 누군가는 밖으로 밀려나야 한다는 식이다.
경제적 불안이 자리의 불안으로, 자리의 불안이 복원의 욕망으로 바뀌는 순간 극우가 들어설 공간이 생긴다. 그러나 그 공간이 생겼다고 곧바로 권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울리히 지크문트 작센알할트 AfD 주지사 후보와
티노 크루팔라 AfD 공동대표가
손을 맞잡고 있다.
©AFP
작센안할트에서 AfD가 얻은 43.8%는 압도적인 승리였지만 여전히 과반은 아니다. 그런데도 AfD는 이제 실제 권력을 넘보고 있다. 극우에 사람이 모이는 것과, 그 사람들이 나라를 움직이는 힘을 얻는 것 사이에는 또 하나의 과정이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진다.

편집: 임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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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임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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