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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 2회에서는 사라진 고대왕국 백제의 실체에 대해서 정설과 함께 주관적인 시각을 섞어 재해석했었다. 이번 편은 국내 사학계의 정설과 크게 어긋난 추정이 많으므로 반드시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니 재미삼아 읽기를 권한다.



<삼국사기>, 과연 절대적 진실인가?


한반도 상고사는 미스테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인종 때인 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가 상고사에 대해 남아있는 사실상 가장 오래된 국내 사료이며, <삼국사기>조차도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지 무려 500년이 더 지나서 편찬되었기에 정확성을 가늠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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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나 백제는 멸망하면서 자체 사서를 남기지 않아 당시에 대한 사료는 주로 주변국들(중국, 일본)의 사서에만 남아있다.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도 국내 자체 사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주변국들의 사서를 참조하여 재해석하는 방법뿐이었는데, 그나마 <삼국사기>가 제대로 된 첫 번째 국내 발간 역사서였기 때문에 진위여부에 상관없이 현재까지도 가장 권위 있는 한반도 상고사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국내 사학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상고사 사서임에도 태생적 한계로 인해 몇 가지 서술에 대해서는 해석을 달리할 수 있다. 많은 고대 사서들이 주로 승자의 시각에서 자국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쓰여지는 것을 감안하면, <삼국사기>는 국내 상고사를 다루면서도 주변국의 시각을 빌려온 측면이 크다. 특히 중국과의 전쟁으로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사건 자체를 다루는 데 있어 중국 측 사서가 대거 인용되면서, 패자의 입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더해서 그간의 고고학적 발굴(각종 능, 유적지 등에서 발견된 비문과 같은 단편적인 기록)과 대조해 볼 때, <삼국사기>에서 서술된 내용 몇 가지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것도 있다. 거기다 <삼국사기>가 인용하고 있는 외서 중 상당수가 현재 소실되어 <삼국사기>의 내용 자체를 검증하기 어렵다.


그래도 정확성 여부와 상관없이, <삼국사기>가 가장 오래된 국내 사서이기 때문에 신빙성을 떠나서 우리나라 사학의 출발점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1281년에 승려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 역시 <삼국사기>와 함께 가장 오래된 상고사 사료로 인용되고 있다. 하지만 서동요 전설과 선화공주 설화가 미륵사지에서의 고고학적 발굴로 거짓임이 밝혀졌듯 <삼국유사>는 단순히 민간 설화 등을 재편집해 부정확한 측면이 있다.



1. 660년, 백제는 어떻게 멸망했을까?


<삼국사기>에서 따르면, 백제는 의자왕이 향락에 빠져서 충신들을 옥에 가두고 간신들과 어울리다가 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스토리는 <삼국사기>에 항상 나오는 망국(亡國)의 컨셉이다. 즉, 김부식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유교적 교훈을 주는 주관일 가능성이 크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나라들 중엔 전성기에, 근면성실한 왕이 통치했음에도 전쟁이나 기근, 자연재해 등으로 멸망한 나라가 훨씬 많다.


전편에서 백제 멸망 직전의 경제력과 인구, 군사력과 국력의 원천에 대해서 간단히 추정했었다. 백제는 항시 2~3만 명의 정예군(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왕이 직접 통제하는 광활한 직할지에서 얻은 경제력으로 지방 호족 등의 도움 없이도 어느 정도 큰 규모의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있었다.


또한 서기 600년부터 660년까지 무왕, 의자왕을 거치면서 선대의 복수를 위해 신라에 맹공을 퍼부어 수많은 전쟁을 치루고 있던 상태였다. 신라 역시 대응하였으나 뚜렷하게 백제에 대해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소모전 양상을 띠었다. 만약 의자왕의 실정 등으로 백제의 국력이 크게 기울어졌다면 신라가 당나라의 대군을 섭외했을까. 실제 백제는 멸망 직전까지도 국력이 크게 기울지 않았으며, 정치적으로도 꽤 안정된 상태였다는 향토사학적 시각이 있다.


당나라 대군이 들이닥치는 순간 군사적 균형이 무너졌고, 불리한 상황에서 군사전략적인 실수까지 겹쳐서 멸망한 것은 아닐까? 혹은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숨겨진 진실이 있는 것은 아닐지 본격적으로 추정해보겠다.



2. 백제 멸망의 날, 당나라군과 신라군은?


<삼국사기>에는 ‘당나라 수군 13만 명, 신라군 5만 명이 백제의 도읍인 사비성을 전격기동전으로 공격해 피할 틈도 없이 왕을 사로잡았다’고 나와 있다. 이는 고대 군사학적인 관점에서 반론의 여지가 많다.


먼저 중국의 군 편제에 대해서는 수나라 시대부터 자세한 기록들이 많으니 인용하자면, 육군 1개 군이 대체적으로 기병 4천, 보병 8천, 보급부대 8천을 합쳐서 2만 명인데 반해, 수군은 배를 움직여야 하기에 노꾼 등의 인원이 필요해서 전체 병력에서 실제 전투원의 비중이 낮다.


수나라의 고구려 정벌 당시에 대동강 하구에 도달했던 수나라 수군은 4~7만 명 규모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배를 조작하거나 보급부대 등을 제외한 순수한 전투원 숫자라고 추정된다. 당시 수나라는 실제로 100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했다는 게 정설임에도 대규모 전면전에서 동원한 수군의 숫자가 저 정도였다. 그런데 당나라 황제가 참전하지 않는, 주적이 아닌 소국을 정벌하는데 무려 13만의 전투병을 파병했을까? 전투병 13만 명을 운반하려면 수군이 20만 명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당나라의 군사는 수나라에 비해 더 고도로 전문화된 소수정예군이다.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군사적으로 영토를 크게 늘린 강력한 나라였다. 그런데 강성한 주변국들을 정벌할 때 사서에도 병력의 숫자가 20만을 넘는 예가 거의 없다. 강제로 징집한 수십만의 농민군 보다는 직업군인들을 활용한 편이었다.


아마도 <삼국사기>가 인용했던 중국사서의 13만 파병 기록이 맞다면, 전체 인원수가 13만이고 실제 전투 병력은 3~4만에 불과했을 것이다. 또한 중국의 대 함대는 서해를 가로질러 백마강에 바로 도달하지 못하고 산둥반도를 건너 최단거리인 황해도 즈음에 도착한 다음, 연안을 따라 남하했을 것이다.


미지의 해안에서 장기간 작전해야 하는 수군은 만약 충분한 추가보급이 없다면 유사시 모두 굶어죽을 수 있다. 그래서 당나라 수군은 신라의 보급부대와 반드시 접선해야 했고, 이러한 것은 양국의 신뢰가 없으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신라왕은 상주까지 나와, 지금의 경기도 지방에서 남하하는 김유신 휘하의 대규모 신라군이 옥천 방면을 거쳐서 대전-논산(황산벌)으로 진군하는 것을 지켜봤다고 한다. 그 때 신라군의 규모가 5만 명이라는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무려 5만의 대군이 경기도-천안-공주-부여로 향하는 직행로를 벗어나서 크게 우회하여 상주-보은-옥천-대전으로 향한다.


아마 신라군은 약 1~2만의 정예군과 함께, 당나라군의 보급부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각지의 지방 병력까지 긁어모았을 것이다. 약 5만 명 규모의 거대한 보급부대가 되었으리라 짐작한다. 한마디로 거대한 보급부대의 행렬이다.


백제는 당나라와 신라의 협공 이전에 어느 정도 눈치 챘을 것이다. 북쪽에서 해안을 따라 대규모 당나라 수군이 남하하고 있고, 신라 역시 비정상적인 거대한 물자보급병단을 꾸려서 대전 방면을 넘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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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신라군이 대부분 정예병 위주였다고 해도 천안 방면에서 남하하기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전편에도 설명했듯, 그 지역은 고구려와 오랜 전쟁 시절부터 요새화되어 각지의 산성 등으로 거점 방어가 철저하여 쾌속진격이 어렵다. 반면 대전-논산을 통과하는 루트는 일단 협곡을 빠져나오면 넓은 평원지대가 펼쳐져서 산성 등으로 거점방어가 어렵다. 대신에 황산벌은 백제군의 최대 군사기지이며, 본진이다. 신라군의 숫자가 많다고 해도, 태반이 보급물자를 수송하고, 1~2만의 정예병이 호위한다고 해도, 황산벌에 그대로 들어가면 백제 2~3만 정예병의 밥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설령 양군의 전투병 숫자가 비슷하더라도, 본진에서 방어하는 쪽이 훨씬 유리한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백 장군은 고작 5천명의 병력으로 백제군 본영에서 5만 명의 신라군에 대적했다.


계백 장군의 직급은 ‘담솔’이다. 담솔은 지금으로 치면 장차관급에 해당하는 고위직으로, 최대 5천 명의 병력을 통솔할 수 있다. 담솔 위로 좌평(부총리급?)이란 직책이 있긴 하지만, 군사적인 직무를 수행할 때 담솔은 지역 사령관에 해당하는 급수다.


백제군은 백마강(금강)을 따라서 사비성으로 곧장 진군하는 당나라 수군 3~4만 명을 주적으로 상정하고 황산벌에 상주하던 주력병력의 다수를 백마강 입구 쪽으로 이동시켰을 것이다. 그렇다고 신라군 혼성부대가 들이닥칠 본영을 비울 수도 없으니 5천의 병력만 남긴 것은 아닐까? 일단 백제군 주력이 당나라 수군을 물리치면 회군하여 신라군도 몰아내려는 작전은 아니었을까?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약 1만 명의 병력으로 13만 명의 당나라군을 금강 입구에서 막으려다가 패배하고 사비성으로 쫓겨 갔다고 한다. 황산벌을 지키던 5천의 결사대보다 더 많은 병력이다. 정예병이었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미스테리는 고구려에게 위례성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도망쳐서 웅진에 도읍을 삼았던 과거 전력이 있는데, 의자왕과 왕족들이 부여성을 버리고 남쪽이나 충청도 내륙의 요새지대로 피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당나라군의 쾌속진군에 도망치지도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의자왕은 사비성이 함락될 때 피신하여 웅진의 공산성에 은거하다가 결국 추격군에게 항복한다. 공산성에서 도망치지 못한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의자왕이 당나라군과 신라군에게 백제 전역을 점령당해 항복했을 거라고 한다. 네버~ 사비성 함락 이후 무려 3년간 백제의 부흥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알면 그런 말을 못한다. 당나라군은 고작 사비성 일대, 신라는 대전 일대만 겨우 차지하고 있었다. 나머지 백제 전역은 부흥군이 점거한다.


이러한 역사의 미스테리를 풀어줄 결정적인 추론을 해보자. 레고의 빠진 한 조각을 찾은 것처럼 모든 것이 술술 풀린다.



3. 역사에 숨겨진 그 이름, 백제 멸망의 최대 공로자 흑치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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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 ‘흑치상지’라는 이름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정사(<삼국사기>, <당서>)에 흑치상지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많은 편인데, 대충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흑치상지는 계백 장군과 같은 담솔의 직위에 오른 매우 전도유망한 청년 장군으로, 백제가 멸망하던 660년엔 고작 30살이었다. 흑치상지 집안은 대를 이어 담솔에 오른 귀족이었고, 담솔에겐 5,000명에 이르는 병력을 통솔할 권한이 있었다.


당나라군과 신라군의 급습으로 사비성이 함락되고 왕과 왕족들이 모두 당나라로 끌려간 뒤, 흑치상지는 점령군의 횡포에 저항하다 임존성(지금의 충남 예산 지역 추정)으로 피신했고, 그를 따라 열흘 만에 3만 명의 병사가 모인다. 주류성(지금의 전북 부안 지역 추정)에서 의자왕의 사촌이었던 복신이 승려 도침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을 시작한다. 이후 백제 부흥운동은 임존성과 주류성이 주축이 되어 무려 200여 개의 성을 수복하는 맹위를 떨친다.


복신은 왜국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부여씨는 왕족의 성씨)을 불러와서 백제왕으로 옹립하고 정통성을 계승하였으나, 이후 욕심이 생겨서 도침을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자 이번에 부여풍이 복신을 살해한다. 내분이 생긴 부흥군 지도부의 혼란으로 결국 백강(금강) 입구에서 당나라군이 왜국의 대규모 수군을 격파하고 승리했다. 주류성이 함락되자 백제 부흥운동은 내리막길에 접어든다.


주류성의 백제부흥군이 와해된 후 흑치상지는 3년간 이어진 무의미한 전쟁을 지속하는 것이 백성들에게 고난이라 여겨 당나라의 회유에 임존성을 함락시킨다. 이후 흑치상지는 당나라로 건너가서 장군으로 승승장구하여 돌궐과 토번(티베트) 등의 전쟁에서 큰 전공을 세워 이민족 장수로는 이례적으로 종 1품인 연국공에 오른다. 하지만 정쟁에서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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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백제 유민 흑치상지가 대국인 당나라에서 입지전적인 공훈을 세워 대장군이 된다는 뻔한 스토리다. 그런데 이 내용이 완벽한 날조라면 어떨까? 필자는 백제 지역의 향토사학자인 A씨로부터 백제 멸망에 대해 정설과 다른 새로운 시각을 접했고, 오히려 그쪽을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였다. 향토사학자 A씨의 설을 간략히 정리해 본다.


백제 무왕과 의자왕은 오랜 기간 동안 신라에 대한 대규모 군사행동을 취했기에 지방의 호족들과 백성들의 고통은 매우 컸다. 강력한 중앙집권 왕권 하에서 호족 출신의 귀족들보다 새롭게 관료로 발탁된 신진 귀족들의 영향력이 더 컸으며, 흑치상지는 신진 귀족들의 중심에 서게 된 인물이다.


당나라군과 신라군이 공격해오자 의자왕은 자신이 직접 통솔하는 정예군 이외에 각지의 군사령관들에게 모집령을 내렸으나,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흑치상지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고 백제 왕족들이 당나라에 잡혀갔으나 여전히 흑치상지는 자신의 근거지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되레 버티기에 들어갔다. 당나라군이 물러간 이후에 자신만의 백제를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속셈이었던 것 같다.


왜국에 있던 부여풍이 왜국의 대규모 지원군과 귀국하여 자신의 부하들(복신과 도침을 지칭하는 듯)과 함께 주류성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부흥운동을 벌였으나 흑치상지가 부여풍의 부하들을 살해한다. 부흥운동의 마지막 격전이었던 백강 전투에서 왜국의 마지막 지원부대가 도착하였으나 강변을 장악한 흑치상지 세력 때문에 상륙하지 못하고 배회하다가 결국 당나라 수군에게 격멸되고 만다.


왜국의 지원군엔 백제 귀족들과 혈연관계 등으로 얽혀있던 왜국의 각지 귀족들이 참전했다. 661년부터 3년간 매년 파병된, 1~2만 명 규모의 대병력이었다. 만약 왜병이 육지에 상륙할 수 있었으면 주류성 등의 백제부흥군과 합류하여 백제를 부흥시킬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흑치상지는 결정적 순간마다 초를 쳤고, 막판에는 아예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부흥군의 씨를 말린다.“


대략적인 가설(정설이 아니므로)이다. 정통 사학계에서 기절초풍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기존의 정설보다는 이 가설이 훨씬 앞뒤가 잘 맞는다. 흑치상지는 당나라로 간 사람이니 <당서> 등이 흑치상지를 미화하지 않았을까? <당서> 등은 멸망한 백제를 분열과 향락 등으로 망한, 한심한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향토사학자 A씨의 가설을 적용하면 백제가 멸망 당시에 왜 무모한 군사적 선택을 했는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백제 중앙군의 본영인 황산벌에 있던 2만 명이 넘는 정예군은 먼저 당나라 수군의 백강 진입을 격퇴하면 퇴각할 것이라는 계산 하에 그쪽으로 향한다. 다만 신라군이 배후를 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 소수 정예병을 남겨놓았으며, 인솔자는 계백 장군이다. 그들에겐 명확하게 버텨야 할 이유가 있었다.


10만이 넘는 수군과 배에 탑승한 수만 명의 당나라 전투병을 막기 위해선 왕 직속의 병력으로도 부족했으므로 충청도 내륙의 동북방면 사령관인 흑치상지에게 휘하 병력을 이끌고 백강 어귀로 합류하도록 명령한다. 흑치상지는 정사에서도 3만 명에 이르는 대병력을 열흘 만에 모은 인물이다. 아마도 흑치상지에겐 5천 명의 정예병과, 인근 지역의 병력까지 합치면 적어도 1~2만 명을 움직일 영향력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흑치상지는 이 순간에 움직이지 않았다.


(가설에도 ‘흑치상지가 왜 움직이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혹이 있는데, 하나는 ‘의자왕의 무리한 군사행동으로 귀족들의 반발이 컸기에 의자왕을 아예 당나라의 손으로 제거하려던 움직임’이 있었을 것이란 가정과 ‘의자왕이 제거되면 자신의 세력만으로 쉽게 백제를 장악하여 왕이 될 수 있을 거란 야심이 컸다’는 가정으로 나뉜다. 어쨌든 향토사학자 A씨는 흑치상지가 백제 멸망의 순간에 움직이지 않았던 것을 가장 큰 패전의 요인으로 꼽았다)


백강 어귀에서 황산벌에서 이동한 1~2만 명, 흑치상지를 비롯한 북방의 요새지대에서 남하한 1~2만 명이 합세하여 당나라 수군을 몰아내고 방향을 돌려 김유신의 신라 보급부대를 박살내려던 계획이 처음부터 틀어졌다.


계백의 오천 결사대 역시 적은 병력으로도 잘 버텼다. 그만큼 정예병이었다는 반증이며, 주어진 군사적 전략 목표를 확고히 완수했다. 하지만 백강 어귀에서 흑치상지의 배신으로 인한 주력군의 허무한 패전 소식을 전해 듣고 사비성 사수 작전을 위해 서둘러 후퇴한다. 정사에서도 백강, 황산벌 전투의 패잔병들이 사비성으로 모여서 최후의 방어전을 치렀으나 수천의 전사자를 남기고 결국 함락됐다고 전한다.


의자왕은 사비성을 빠져나와서 웅진으로 향한다. 웅진의 공산성은 매우 뛰어난 방어요새라서 버틸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미 믿었던 북쪽의 주력부대가 말을 듣지 않으니 버텨봐야 원군이 없는 상태로는 승산이 없었기에 포기하고 항복한 것이다.


이후 당나라는 백제의 왕족과 주요 귀족들을 모조리 압송하여 백제 정치세력의 씨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왜국에 가있던 왕자 부여풍이 왜국 귀족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 무려 2만에 가까운 대군을 이끌고 귀국하여 주류성을 중심으로 호남 쪽의 잔존 지지세력을 규합해 부흥운동을 펼친다.


당나라는 흑치상지가 점거한 충남 쪽의 세력은 견제만 하면서 호남 방면의 부여풍 휘하 부흥 세력과 격전을 치른다. 한마디로 백제가 남북으로 갈라진 셈이며, 중심부인 사비성 지역은 당나라가 점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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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운동은 무려 3년 동안이나 이어졌고, 663년 경 드디어 흑치상지가 움직였다. 흑치상지의 대규모 병력은 백강 어귀를 점령하고 왜국에서 오던 1만 명 이상의 3차 지원군이 내륙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그 틈에 당나라 수군이 배후를 급습해 왜군이 전멸하며 백제 부흥운동은 막을 내린다. 부여풍의 부하들은 이미 흑치상지에게 죽임을 당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후 호남 지역에 흩어져 있던 왜국의 1, 2차 지원군 잔존세력과 함께 백제의 나머지 귀족, 정치세력들이 모두 왜국으로 망명해 백제는 완전히 멸망한다.



조금 긴 썰이지만 어떻게 들리는가? 필자는 그간 백제 멸망에 대한 정설들을 들으면서 항상 의문이 많았는데, 왜 가설이 더 정설처럼 들리는지 모르겠다. 상식에 부합하는 가설에 비해 뻔한 스토리의 정설이 더 어색하게 느껴진다.


백제가 사비성 함락 당시에 왜 군사적인 선택에서 최악의 수를 뒀는지 가설에서는 답을 주고 있다. 계백 장군과 그의 병사들이 왜 승산 없는 전쟁에서 버티다 죽었는지에 대한 답이 될지 모른다. 흑치상지가 최소한 5천 이상의 정예병을 통솔하는 고위직 장수임에도 사비성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임존성으로 들어가 3만의 대군을 모았는지도 쉽게 수긍이 간다. 대규모 왜군의 지원을 받은 백제 부흥군이 3년간 잘 싸우다가 한순간에 허물어진 이유와 흑치상지가 당나라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뛰어난 장수임에도 사비성 함락과 부흥운동 당시의 활약에 대한 별반 기록이 없는지도 설명이 된다.


흑치상지가 당나라에서 세운 가장 큰 혁혁한 전공은 바로 백제라는 단단한 나라를 완벽하게 역사에서 지워버린 것이 아닐까? 소정방의 13만 대군으로 일시적으로 사비성을 점령할 수 있었겠지만, 흑치상지의 방관은 백제 왕족과 정치세력의 확실한 몰락을 가져왔다. 막판에는 잔존 정치세력마저 제거하여 백제를 송두리째 당나라 황제에게 바쳤으니 그 공은 실로 30만 대군을 호령한 대장군에 못지않다.


하지만 백제를 거저먹은 당나라는 점령지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 했다. 정치 지배세력이 모두 숙청된 백제 각지의 백성들과 지방 세력들은 당나라의 폭정에 시달렸던 듯하다. 이윽고 신라가 끼어들어 파격적인 회유책으로 백제 유민들을 포섭한다. 결국 당나라 웅진도독부는 신라와 백제 유민들의 양면 공격에 물러난다.


통일신라에 이르러서 한반도의 중심지가 금성(현재 경주)이 되었으므로 백제 지역에선 과거와 같은 찬란한 문화와 유적은 더 이상 발견될 수가 없게 되었다. 고대의 민초들은 그저 정치 지배세력의 먹잇감과 같은 처지였기에 부여씨가 왕이 되던, 김씨가 왕이 되던 그저 일상이 조금이라도 편한 쪽이 더 좋았을지도.



석 줄 요약
1) 계백의 오천 결사대는 주력군이 당나라군을 격파하는 동안 시간을 끌기 위한 지연 부대
2) 흑치상지가 이끄는 세력이 결전을 회피하여 반쪽이 된 백제군은 당나라군에 참패
3) 이후 흑치상지는 묘한 행보를 보이다가 막판에 백제 부흥군이 몰락하는데 결정적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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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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