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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ntum Jump란 말이 있다. Quantum Leap이라고도 한다. (이하 퀀텀 점프) 본래 의미는 양자역학에서 원자 등 양자가 에너지를 흡수해 상태가 변화할 때, 서서히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수준에서 전자의 궤도가 상승하면서 급속도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미에서 확장되어 어떤 것이 기존의 변화 양상의 흐름을 끊고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 된다. 비약적 발전, 도약, 약진 등으로 번역되곤 한다.


양자역학의 세계가 아닌 우리네 사회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종종 벌어진다. 인터넷 전용회선이 처음 보급됐을 때라든가 아이폰과 안드로이드가 출현했을 때, 세상은 그 전과 그 후가 극명히 구분되는, 비연속적 차이를 겪게 된다. 물론 이렇게 사회 전체를 바꾸지 않더라도, 어떤 분야 내에 급작스레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다. 느닷없이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면서 한국 가요 판은 순식간에 바뀌었고, 냅스터가 나오면서 음악을 소비하는 형태 역시 갑작스레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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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퀀텀 점프가 분홍빛 미래를 항상 보장하는 건 아니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은 분명 수많은 산업의 지평을 열었지만, 때때로 오히려 이러한 퀀텀 점프는 파괴로 이어지기도 한다. 앞서 예를 든 ‘냅스터(Napster)’는 너무도 순식간에 모든 걸 바꿔버린 나머지 기존의 음반산업 수익모델을 붕괴시켜버렸고, 냅스터라는 서비스 자신도 사라져버렸다.


즉, 퀀텀 점프라 불릴만한 급작스러운 변화는 두 가지 가능성을 품는다. 새로운 것들이 창조될 기반이 되거나, 기존의 것들과 자기 자신을 파괴하거나. 창조와 파괴라는 양극단의 가능성 말이다.


지금, VR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이 당면한 과제는 바로 이 양극단의 가능성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창조와 파괴 중 창조의 길을 걸어야 할 것. 그것을 강요받는 중이다. 파괴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창조의 가능성만을 펼쳐내야 할 것. 아직 소비자용 제품이 제대로 보급도 안 돼 있는 시장에 대한 때 이르면서도 과중한 숙제다.


이번 편은 이 숙제의 전후좌우를 디벼보자.




1. 배경: 숙제를 강요하는 자


일단 숙제의 내용에 앞서 누가 숙제를 내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학교에서라면 선생님이, 회사라면 상사가 숙제를 내기 마련. VR 시장에 숙제를 내는 주체는 바로 자본이다.


2010년 전후로 스마트폰의 시대가 열리면서 우리는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를 친숙하게 마주하게 된다. 좋은 아이디어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기술을 바탕으로 서너 명이 창업을 해서 몇 년 만에 수백 수천억의 가치를 만들어낸 신화들이 쏟아져나온다. 그 배경에는 창업 인프라의 확대, 기술적 매쉬업 트렌드, 스마트폰으로 인한 플랫폼의 양적 확대 등등 머리 아픈 개념들이 한가득하지만, 그런 건 일단 넘어가자. 여기서 중요한 건, 그런 스타트업 신화들이 쏟아져나오면서, 투자자들도 수십 수백 배의 수익률을 만끽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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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자. 수십 배의 수익률을 만끽한 투자자들은 그냥 수십 배라는 숫자를 즐긴 게 아니다. 그 ‘수십 배’의 결과물인 천문학적인 자금이 누적돼있다는 얘기다. 그 누적된 자금은 다시 투자된다. 최초 투자자본이 100억이었고, 수익률이 10배였다면 1,000억이 됐을게다. 그 자금으로 다시 한 번 10배의 수익률을 달성한다면, 이번엔 1조가 된다.


그러므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자금을 들고 있는 이 투자자본은, 스마트폰 열풍 어느 정도 잠잠해진 지금 이 시기가 빨리 지나가고 다시 한 번 또 다른 바람이 불어오길 학수고대하는 중이겠다. 기대했던 스마트 와치와 웨어러블도 별다른 바람 없이 스쳐 지나간 이 상황. 더이상 사람들이 새로운 스마트폰 앱을 받지 않고, 쓰던 앱마저 지우는 시장 분위기. 그들에겐 스마트폰처럼 세상을 들썩이게 할 뭔가가 필요하다.


이러한 그들에게 있어서, 처음 경험해본 누구든 입이 떡 벌어지게 되는 VR의 등장은 훈련병에게 주어진 한 떨기 초코파이 같은 존재가 된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돌풍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에겐 묵묵히 노래하다가 어느덧 전설이 되는 슈가맨이 아니라, 등장부터 눈부시게 화려한 팝스타가 필요한 것이고, 쇼를 화려하게 만드는건 그들의 전문분야다. 전 세계 미디어가 이들의 화려한 장단에 맞춰 VR 열풍을 지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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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장의 한편에는 이 VR에 대해 비관적 전망을 비추는 전문가들이 많다. 보통 이 비관적인 전망은 보통 ‘3D TV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 표현된다. 여러 가지 그럴싸한 논리로 뒷받침되는 이 비관론은 결국 VR 산업에 대한 기대치를 낮게 만들고 이는 결국 ‘더 낮은 투자 수익률’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가수가 데뷔하기도 전에 안티팬이 형성된 형국이다. 투자자 입장에선 이러한 전망이 없거나 틀리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VR 업계는 특이하게도, 아직 제대로 시장에 진출하기도 전인 상태에서 마치 성숙한 시장인 것처럼 장기적인 R&D와 지원사업에 돈을 쏟아붓는다. 시장에는 VR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으며, 심지어 그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조사마져도 제대로 된 게 없을 정도로 미성숙한 상태이지만,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큰 자금을 투입하고, IT업계를 선도하는 대기업들이 연구지원 자금을 아끼지 않는 것. 이건 마치, 요란한 학부모가 자식이 학교 입학하기도 전에 숙제와 시험공부부터 시키는 꼴이다. 커질 대로 커진 투자자본은 요란한 학부모가 되어, 시장에 이제 막 발을 딛으려는 VR 업계를 몰아세운다.


이렇게까지 숙제풀이를 강요하는 이유는, 이 시장이 ‘실패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은 이미 포화 상태다. 하드웨어도, 서비스도 이제는 새로운 것이 이전 것의 시장 점유율을 빼앗아올 뿐 새로이 개척할 여지가 거의 없어졌다. 이 와중에 웨어러블과 IoT라는 구실 좋던 떡밥은 힘없이 사그러들어 버렸다. 보다 미래지향적으로 로봇이나 기계학습, 인공지능, 새로운 통신규격 등을 노려보기에는 아직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당장 지금부터 꽃피우기 시작해서 5년 이내에 만개할 무언가, 수천억을 쏟아부어 수십조를 만들어낼 그 무언가가 가 반드시 필요한데 지금으로써는 그 역할을 해줄 먹거리가 현재로써는 오로지 VR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VR은 이전의 다른 퀀텀 점프와 같이 기술이 선보여지고 시장의 논리에 의해 자연스레 창조냐 파괴냐의 숙명을 맞이할 수 있는 속 편한 팔자가 아니다. VR은 시장이 그 숙명을 결정하기 전에, 파괴라는 가능성을 봉쇄하고 반드시 창조의 길이 펼쳐지도록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과중한 숙제를 맞이한 상태.


이 맥락 속에서, 그 숙제가 뭐길래 왜 이리도 쉽사리 풀리지 않은 채 아직까지 숱한 비관론을 야기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2. 숙제 1: 기나긴 2D의 역사가 쌓은 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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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언급했듯, 인류의 2D 매체 역사는 원시시대 동굴 벽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굴의 벽, 딱딱한 껍질, 동물의 가죽, 파피루스, 종이, 책, 필름, 스크린, 브라운관, PDP, LCD, OLED 등 수천 년 동안 인류는 2D 매체를 발전시켜왔다.


그 수천 년간의 발전은 비단 매체의 물리적 형태뿐만이 아니다. 그 안에 들어가는 내용물에 대한 기술도 수천 년간 누적돼있다. 활자를 통해서 추상적인 컨텐츠의 기록과 전달이 가능해졌고, 회화의 발달은 지극히 사실적인 것과 지극히 추상적인 것을 모두 아우르는 노하우를 쌓아왔다. 마우스라는 입력장치를 통해 2D 화면과 상호작용이 가능해지면서 GUI(Graphic User Interface)라는 개념을 만들었고, 이 GUI 상에서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HCI(Human-Computer Interaction)라는 주제로 광범위한 연구를 진행됐다.


그 결과, 이 시대의 우리는 한정된 2D 매체 안에 무궁무진한 내용과 맥락을 담아낼 수 있다. 당장 이 글도, 분명 화면 내에서 보여지는 글자는 몇백 자 되지 않지만 우리 모두는 지금 보이는 화면 아래에 더 많은 내용이 있음을 알고 있고, 다른 링크를 누르면 또 다른 내용이 시작됨을 알고 있다. 사람들이 기껏해야 1제곱미터도 되지 않는 스크린 속에서 게임을 할 때, 머릿속에는 광활한 미지의 대륙이 펼쳐진다. 포토샵은 분명 2D 화면에서 조작되지만, 수없이 많은 레이어를 겹쳐 사용하고, 3D 엔진을 통해 가상의 입체 사물을 만들고 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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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책의 한 페이지, 한 폭의 도화지나 캔버스, TV나 PC의 모니터는 크기와 차원이 제한된 평평한 매체이지만, 우리는 이를 무한한 세계로의 창으로 인식한다. 특히나, 키보드, 마우스, 태블릿, 터치스크린, 터치패드, 조이스틱 등과 같은 입력장치 기술의 발달은 그 제한적이면서도 무한한 세계에서의 자유로운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복합적인 맥락과 경험을 토대로 한다. 예를 들어 요즘 아이들은 TV 화면을 손으로 만지면서 ‘왜 터치가 안 되냐’는 불만을 토로하곤 하지만, 90년대 사람들에게 스크린 상의 사진 크기를 손가락 두 개로 조절하라고 하면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들을 거다. 마우스의 보급이 터치패드를, 터치패드가 터치스크린을, 터치스크린이 멀티터치 스크린을 낳는다. 이전 세대가 충분한 맥락을 형성해주면, 이후 세대가 그 맥락을 계승한다.


그렇게, 충분한 시간 동안 충분히 많은 사람이 어떤 맥락에 익숙해지면, 이후에는 그 구체적 형태가 점차 추상화된다. 10년 전만 해도 화면상의 ‘버튼’들은 대부분 입체감을 지녔다. 그게 ‘누를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구분해주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실제 물리적 사물의 형태를 모사하는 스큐어모피즘(skeuomorphism)이 대세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어떤 맥락에서 어떤 위치에는 대략 어떤 기능의 버튼이 있을지에 대해 충분히 익숙해졌고, 더이상 어설프게 실제처럼 보이려고 노력할 이유가 사라졌다. 그래서 최근 디자인 트렌드는 매우 평평한(flat) 형태로 변화한다. 그냥 하얀 바탕에 네모 하나가 덜렁 있어도 우리는 그게 버튼인지, 검색창인지, 배경에 들어가는 장식인지 꽤나 정확하게 인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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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서 VR의 문제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2D 상에서의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맥락에 너무도 익숙해져 버렸다. 하지만 VR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입체감과 공간감을 느낀다. 이 현실적인 시각 매체에는 수천 년간 쌓아온 추상적 2D 표현기술은 대부분 적용 불가능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수많은 실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답은 거의 준비되어있지 않다. 그게 매우 중요하든 사소하든 어쨌든 준비가 안 돼 있다는 것.


아주 사소한 문제 중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VR 가상현실 컨텐츠 안에서 자막을 넣는다고 해보자. 이 자막은 가상현실 내의 다른 사물들에 비해 더 가까이 있어야 할까, 아니면 멀리 있어야 할까. 만약에 가까이 둔다면 사용자는 초점을 가까이 맞춰야 하므로 금세 눈이 피로해질 거고 다른 사물에 초점이 맞지 않게 될 거다. 반대로 멀리 둔다면 자막은 그보다 가까운 다른 사물에 겹쳐 보이면서 현실감을 깨트리게 될 거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막 텍스트의 거리’라는, 이전에는 전혀 고려해보지 않은 새로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 또 한가지 문제가 덧붙여진다. 지난 2D 매체의 역사에서 자막의 존재는 특별한 위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매우 널리 사용된다. 그러므로, 자막이 필요한 상태에서 자막을 대체하는 무언가에 대해서는 준비된 바가 없다. VR 컨텐츠 중에서 자막이 필요한 어떤 컨텐츠는, 반드시 자막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결국, 아주 사소한 문제이긴 하지만, 그냥 아무렇게나 할 수는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전혀 생각치 못한 부분에 대한 고민이, 필수적으로 뒤따라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고민은 누적된 역사가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직접 시도해봐야만 답을 찾을 수 있다.


자막이라는 사소한 예를 들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크리티컬한 문제가 갑작스레 등장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갑자기 등장하는 문제의 양 자체가 많다는 게 부가적인 문제가 된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이상한’ 것들이 쏟아져나온다. 그 이유는, 이러한 현실적인 매체에 대한 인간의 누적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출시된 다수의 VR 컨텐츠들은 ‘어딘가 애매하게 모자란’ 느낌을 준다. VR 영상을 봐도 화질이 저하되는 건 둘째치고라도 기존의 2D 영상에 비해 압도적으로 좋다는 느낌이 가득한 것이 아니라, 어딘가 불편하고 지루하고 어색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대다수다. VR 게임의 경우에도, 최근 PC나 모바일 게임들의 세련된 수준을 고려할 때 어딘가 허접하거나, 허접하지는 않더라도 별로 재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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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뜨뜻미지근함은 결과적으로 소위 ‘킬러 컨텐츠의 부재’로 이어진다. 킬러 컨텐츠는 그 분야에 켜켜이 쌓여있는 맥락과 역사 속에서 황금비율을 찾아낸 새로운 컨텐츠에게 붙여지는 이름이다. 예를 들어 카카오 게임 플랫폼의 킬러 컨텐츠 역할을 했던 ‘애니팡’의 경우, 분명 새로울 것 없던 형태의 게임이었고 유사한 게임이 수없이 많이 존재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에 카카오톡을 매개로 지인들과의 점수경쟁을 통해 오락실에 이름 새기던 재미를 추가했다. 하트를 주고받으면서 마치 싸이월드 일촌의 선물 같은 간접적인 친밀감 표현 장치를 차용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킬러컨텐츠는 맨땅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 이미 형성돼있던 역사와 맥락들 속에서 새로운 조합을 찾아낼 때 등장한다.


그러므로, 그 역사와 맥락이 충분히 누적되지 않은 VR에서 킬러 컨텐츠가 튀어나오는 건, 강원도 산골에서 갑작스레 서울대 수석 입학생이 나오는 것 만큼 어려운 일이다.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수많은 사교육 기관이 즐비한 대도시에 비해서 당연히 확률이 낮을 수밖에 없다.


그러한 무주공산 속에서 지금 이 시각 수많은 VR 컨텐츠 제작자들은 이후 킬러 컨텐츠가 만들어지는 바탕이 되어줄 역사와 맥락을 빠른 속도로 쌓고 있는 중이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그에 이은 또 다른 실험이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시장은 냉정하다. 게다가, 오랜 시간 동안 극도로 세련되어진 2D 매체에 흠뻑 빠져 살고 있던 소비자들이다. 그들이 그 ‘노력의 가상함’만을 가지고 아직 어딘가 애매하게 모자란 컨텐츠에 많은 돈을 지불할리는 없다.


이렇게, 2D의 역사가 쌓아둔 재산들은 오히려 이 맥락을 벗어난 VR에게 묵직한 짐을 얹어준 셈이다.




3. 숙제 2: 코앞까지 당겨버린 물리적 한계


추상적 2D냐 현실적 3D냐의 매체적 특성 말고도, 비슷한 형태의 문제가 기술적인 차원에서도 존재한다. 그것은 전편에 언급했던 스크린+렌즈+자이로 센서의 구성이 지닌 진보성이 오히려 한계점마저도 앞당겼다는 점이다. 차근차근 살펴보자.


현시대의 VR이 기존의 유사한 시도들과 현격히 구분되는 이유를 다시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1. 그럴싸한 시야각 (110도가량의 시야각)

2. 자이로 센서로 구현한 헤드트래킹 (머리의 자세를 측정하는 기술)

3. 위 두 가지를 저렴하게 구현할 수 있는 기반기술 환경

4. 초광각 카메라, 영상편집 기술, 3D 엔진 등 컨텐츠 제작환경의 보급화 및 대중화

5. 영상, 게임 등 컨텐츠를 유통할 유통망의 확보

6. 상기 1,2,4를 내재할 수 있는 스마트폰의 보급(모바일 VR의 높은 접근성)


이 중 3, 4, 5, 6번은 사실상 시대적인 배경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이전 시대에는 이 5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VR 플랫폼이 출현할 수 없었다. 1, 2번 내용을 모두 충족하는 기술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3, 4, 5, 6번이 충족이 안 되면 시장에 돌풍을 불러일으키긴 어려웠다는 얘기다.


하지만, 1, 2번 내용만 놓고 보더라도, 딱히 둘 다를 충족시킨 사례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자이로 센서라는 건 스마트폰에 쓰이기 전까지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부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똑같이 자이로 센서를 통해 헤드트래킹을 했다 해도, 과거에는 매우 비쌌거나, 아니면 체감성능이 떨어졌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1번 시야각 문제다. 생각보다 100도 전후의 시야각을 구현하는 건 어려운 문제였다. 과거에 렌즈를 활용해서 시야각과 초점거리를 조절하는 발상을 했다 하더라도, 가로 10센티미터가 넘고 세로 5센티미터가 넘는 크기의 스크린이 가벼우면서도 충분한 해상도를 가질 수 있었던 게 불과 2000년대 중반이 넘어서의 일이다. 지금의 VR도 렌즈를 통해 확대된 픽셀이 눈에 보이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되는데, 과거에 같은 아이디어를 구현했다 한들 그게 쓸만한 수준이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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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반 기술의 여건이 마련돼있지 않으면 이런 꼴이 된다. 98년도 디즈니에서 만든 VR 머신


결국 현재 VR 플랫폼의 진보성은 지금 이 시대에서만 등장할 수 있었던 셈이다. 디스플레이 기술, 센서기술, 영상기술, 3D 엔진 기술, 컨텐츠 유통 관련 인프라 등이 발전해준 덕분에, 이를 엮은 아이디어가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지만, 꿸 수 있는 기술이 있더라도 구슬이 없으면 보배를 만들 수 없지 않은가. VR이 보배가 될 수 있는건 , 여러 기반 분야의 기술들이 딱 좋은 상태의 구슬들을 만들어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현재의 VR은 이러한 기반 기술들의 거의 100%를 모두 활용한다. 각 기반기술의 가장 뛰어난 버젼들을 조합해야만 쓸만한 VR이 성립되는 게다. ‘뛰어난’ 게 아니라, ‘쓸만한’ VR이라는 게 문제의 뽀인트다. 쓸만한 걸 넘어 뛰어나 지기 위해서는, VR의 기반이 되는 모든 기술이 현재의 한계를 넘어서 더 발달해줘야만 한다.


말이 쉽지, 이 다양한 분야의 기술들이 모두 현재의 한계를 넘어 또 다른 경지에 오르는 건 졸라게 어려운 일이다. 구체적으로 얘기해보자. 흔히들 말하는 모기장 현상이 사라지려면 VR 기기의 해상도는 현재의 약 3배가 돼야한다. 아직 4k도 적용하지 못한 상태에서 8k 이상의 해상도를 구현해야 하는 것. 그냥 구현만 하는 게 아니라 가격까지 고려를 해야 하므로 몇 달 안에 뚝딱 해치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그렇게 해상도가 올라가면 연산량도 그만큼 늘어나므로 프로세서의 처리속도도 올라가야 하지만, 알려졌다시피 무어의 법칙이 깨진 지금, 8k 해상도로 90Hz 수준의 렌더링을 실시간으로 처리할 수 있는 보급형 프로세서가 언제쯤 얼마의 가격으로 출시될지 불투명하다. 게다가 동영상의 경우에도 8k 해상도를 그대로 살리려면 데이터 자체는 4배 이상 높은 해상도로 스트리밍 되어야 한다. 현재 4k 해상도 스트리밍도 버거운 인프라를 생각할 때 아직 졸라게 먼 미래의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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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알려져있는 주요 VR 제품들을 제대로 갖추려면 최소 100만 원 가량의 비용이 필요하다. 가장 저렴한 축인 소니가 VR 세트를 400불에 발표했으나 플스4와 카메라가 반드시 필요하므로 400불 이상이 더 필요하다. 총 800불로 현재 환율 기준 90만 원대 초중반. 오큘러스와 HTC는 이보다 더 비싸서, 각각 600불, 800불짜리 VR 세트와 함께 100만 원이 족히 넘어갈 제법 높은 사양의 PC도 있어야 한다. 더 저렴하게는, 스마트폰을 활용하는 모바일 VR이 있지만 역시 돈 100만 원은 하는 플래그쉽 모델만 쓸 수 있는 기어VR은 아무래도 접근성에 한계가 있고, 누구나 쓸 수 있는 저가형 VR 기기들은 퍼포먼스나 컨텐츠 면에서 대기업이 주도하는 주류 VR보다 훨씬 열악한 상태다.


이들도 분명 맘 같아서는 적은 비용으로 누구나 쉽게 VR을 즐길 수 있게 하고 싶었겠지만, 앞서 말한 대로, 현재 기술들의 거의 극한들만 모아야 그럭저럭 쓸만한 VR이 구현되므로 스펙을 낮출 수가 없었던 게다. 결국, 지금의 주류 VR 기술은, ‘돈은 알아서 바칠 테니 완벽한 걸 내놓으라’고 외치는 얼리어답터들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매달 카드고지서에 가슴 졸여야 하는 일반 대중들의 심리적 장벽도 무너뜨리지 못한다.


다양한 기반기술들의 발달을 절묘하게 묶어냄으로써, 오히려 그 기반기술에게 발목이 잡혀버린 상황. 이 상황을 타개해야 하는 것이, VR의 두 번째 숙제다.




4. 숙제 3: 이것은 정말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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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숙제는, 앞선 숙제들과 연결되는 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표현할 수 있다. 전편에서 누차 언급했듯 VR이라는 건 정말 실감 난다. 더욱이, 아직 보급화되지 않은 포지션 트래킹 기술과 모션 컨트롤 기술들을 함께 경험하면, 누구라도 그 ‘압도적인 현실감'에 잠시 넋을 잃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반드시 ‘필요성’과 연결되진 않는다.


‘필요’라는 건 목적성을 지닌다. 우리는 무언가를 ‘위해서'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편히 잠자기 위해 침대가 필요하고, 취한 기분을 위해 술을 마신다. 그렇다면 VR의 실감 나는 경험 또한 그러한 목적이 필요하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실감 나야 하는가 말이다.


1차적인 답들은 어느 정도 준비돼있는 상태다. VR로 즐기는 FPS 게임은 모니터를 바라보고 마우스와 키보드를 조작하는 것에 비해 더 재미있다고 느껴지곤 한다. 오큘러스와 HTC는 VR의 모션컨트롤 기능을 이용해서 3차원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새로운 예술창작 도구를 시연하기도 했다. 심지어 몇몇 기관에서는 VR을 통해 고소공포증 등의 심리적 문제를 치료하기도 하며, VR을 교육에 활용하기도 한다. 오락, 창작, 의학, 교육 등등이 그 준비된 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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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을 통한 우울증 상담치료 장면. 일종의 사이코드라마 형식의 치료법을 VR에 적용하여 내담자가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식이다. UCL and ICREA-University of Barcelona


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파고들어보자. 이 오락, 창작, 의학, 교육 등등의 요소에 이 ‘압도적 현실감’이 정말 필요할까. 그리고, 그 ‘압도적 현실감’은 기존의 도구들을 대체할 수 있을만큼 충분한가. 현재로써는 ‘그렇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첫째로, 인류는 앞서 논의했던 대로 오랜 시간 현실적이지 않은 매체의 한계 속에서 나름의 노하우를 누적하면서 꽤 그럴싸한 성과를 얻어왔다. 그러므로 이런 냉소적 질문이 뒤따를 수 있다. FPS 말고 다른 게임에도 압도적 현실감이 필요한가. 3차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정말 필요한가. 고소공포증 말고 다른 치료 목적으로 VR이 얼마나 기능할 수 있는가. VR이 없는 교육환경은 정말로 부족한가. 이에 대해, 현재의 VR 시장은 아직까지는 자신 있는 대답을 내놓을 수 없다.


둘째로, 현재의 VR이 보여주는 현실감은 압도적이긴 하지만 완벽할 수 없다. VR이 구현하는 감각은 ‘시각’에 국한되며, 너그럽게 봐주더라도 청각과 약간의 운동감각까지다. VR을 통해 로마의 고대 유적을 체험하더라도, 실제 그 유적지에 간 것과는 당연히 다르다. VR을 통해 복잡하고 거대한 기기의 조작법을 배운다 해도, 실제 그 기기를 조작해보는 것과는 다르다.


말하자면, 앞에는 가상현실이 아닌 ‘실제 현실’이라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있고, 뒤에서는 ‘전통적인 방식들’이라는 견고한 벽이 밀어오고 있다. VR은 그사이에 끼인 채로 앞의 벽도, 뒤의 벽도 시원하게 깨트리지 못하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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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애매한 포지션으로 인해, VR은 조금만 삐끗해도 오히려 성가신 존재가 돼버린다. 앞서 다룬 숙제 1과 결합되면서, VR 방식으로 촬영된 영상은 내가 어디를 볼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고 자칫하면 중요한 장면을 보지 못하는 문제를 만든다. 카메라의 위치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금세 지루해지고, 카메라가 움직인다면 자칫 멀미를 유발해버린다. 마찬가지로 VR로 1인칭 게임을 하면 쉽게 멀미가 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3인칭 게임을 하게 되면 어차피 나는 내가 컨트롤 하는 캐릭터를 보고 있어야 하므로 VR의 장점이 희석되면서, 차라리 그냥 모니터 보면서 플레이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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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간에는 ‘그렇다면 멀미만 해결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시각이 존재한다. 실제로 주요 VR 제조사에서도 이러한 시각을 어느 정도 수용해 멀미를 줄일 수 있는 여러 가지 부가장치를 사용한다. 예를 들면 앞서 언급한 포지션 트래킹이나 모션 컨트롤 기술을 사용해서 사용자 머리의 회전뿐만 아니라 좌우 상하 전후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가상세계에 투영시키려고 하고, 레이턴시(latency, 지연, 데이터가 전송/처리 되면서 발생하는 시간차)를 최소화하려고 갖은 노력을 한다. 시각적인 잔상이나 끊김을 줄여보고자 하드웨어를 최대한 활용해서 초당 프레임수를 90Hz이상으로 끌어올리려 노력한다. 심지어 인간의 균형 감각을 담당하는 전정기관(귀 안에 들어있는 균형 감각기관)을 직접 자극하는 기술도 연구한다.


이러한 노력은 말하자면 ‘실제 현실’에 최대한 가까워지려는 노력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멀미’라는 현상은 궁극적으로 신체의 각 기관이 느끼는 감각이 서로 아귀가 안 맞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결과적 증상이므로, 시각/청각/균형 감각을 완벽하게 조작한다고 해도 그 이외의 다른 감각들은 여전히 아귀가 안 맞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온갖 장치를 사용한다 한들, 영화 매트릭스처럼 인간의 신경계에 직접 접근하지 않는 이상 완벽하게 ‘실제 현실’과 같은 수준으로 도달할 수는 없다.


결국, 실제 현실과 전통적 방식들의 역사라는 두 개의 벽 사이에 끼어있는 채로, 그 자리에서 확고한 ‘필요성’을 증명해내는 것이, VR이 맞고 있는 3번째 숙제가 된다.




5. 그렇다면 이렇게 끝나는 건가?


여기까지 읽어주시느라 수고들 하셨다. 이쯤 되면 슬슬 비관적인 생각이 우세해지게 된다. 위의 내용대로 하면 3가지 숙제 모두 무지하게 풀기 어려워 보이고, 결국 숙제를 못 풀어서 VR이라는 퀀텀 점프는 파괴로 치닫는 것이 아닐까 하는 비관론. 결국, 이 글은 VR의 비극적 숙명에 대한 글이 될 것인가.


아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앞서 길게 논의한 3가지 숙제를 묶어서 한마디로 정리하면 ‘애매하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분명 뭔가 확연하게 다르긴 하지만 충분히 뛰어나지도 않고, 여기서 더 발전하여 충분히 뛰어나질 수 있는 여건이 부족하다는 것. 그래서 그냥 애매한 상태로 오래 남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애매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2D 매체를 기반으로 쌓인 ‘기존의 방식들’과 ‘실제 현실’의 존재를 전제한 평가다. 이 둘에 비해 애매하다는 평가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 평가 자체를 뒤집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둘의 사이라는 맥락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이다.


그러한 전례는 분명히 있다. 아이패드는 처음 나왔을 때, 노트북처럼 쓸 수도 없고 스마트폰보다는 거추장스러운 애매한 기기라는 비관적 평가를 듣기도 했지만, 그 둘의 사이가 아니라 또 다른 어떤 세계를 열어 태블릿 기기라는 새로운 분야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다른 수많은 업체에서도 태블릿기기를 만들어내고, 심지어 기존의 노트북 형태에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3D 애니메이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3D 디자인과 렌더링 기술이 발달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3D 애니메이션이 등장하는 과정에서는, 최대한 실제와 똑같이 만들려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3D 애니메이션이 자리 잡은 것은 기존의 만화와 같은 비현실적인 캐릭터들이다. 실제 사람이나 동물과 최대한 비슷한 방향의 노력은 3D 애니메이션을 떠나 판타지나 SF 같은 장르의 실사영화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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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널 판타지 영화버젼. 실사를 방불케 하려 노력했지만 망해버렸다. 

사람들은 실사를 따라 하는 가짜보다, 대놓고 가짜 같은 토이 스토리나 슈렉을 선택했다.


이러한 전례를 통해 예상해보자면, VR이 새로운 분야를 제대로 열어 재낄 수 있는 뽀인트는 ‘더욱더 실감 나게’라는 비젼을 과감히 떨쳐버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VR이 계속해서 ‘실제 현실’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마치 아이패드가 노트북과 맞짱을 떠보려고 하는 것이나, CG로 인간 배우를 대체해보겠다는 것과 같다. 실제로 아이패드가 해낸 건, 노트북을 때려눕혀 그 시장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노트북을 꺼내기엔 번거롭고 스마트폰으로는 부족한’ 그 어떤 중간지점을 키워낸 것이다. 그러한 접근이 성공하면서 반드시 태블릿을 쓰고 싶은 ‘필요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픽사나 드림웍스도 결국 기존의 2D 애니메이션적 세계관에 현실적 시각효과를 더해, 3D 애니메이션만이 구현할 수 있는 재미의 영역을 개척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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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r의 단편 Lava. 분명 비현실적이지만 디테일이 너무도 현실적인 3D 애니메이션의 고유 영역을 정립한 결과


VR이 만들어내야 하는 건 실제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완벽한 현실감이 아니라, 반대로 ‘실제 현실에선 절대 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2D 매체의 역사를 통해 누적된 적절한 상징화와 추상화를 차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예상컨데, 아마도 VR의 실질적인 돌풍을 만들어낼 역사적 킬러 컨텐츠는 ‘너무나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적당히 추상적이면서도 절묘하게 실감 나는’ 특징을 지니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시각 VR의 열풍에 동참하고 있는 수많은 기업과 사람들은 분명 이러한 방향 내에서 이 어려운 숙제를 풀어나갈 실마리를 찾으리라 기대해본다.


다음 편은 이 길고 복잡하고 형이상학적인 얘기에서 벗어나 보자. 지금 당장 우리가 누릴 수 있는 VR의 현주소는 어떤 상태이고, 얼마나 돈을 쓰면 어떤 것들을 즐길 수 있는지에 대한, 말하자면 ‘구매 가이드’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이 연재를 마무리해보겠다.



커밍 쑤운~




[지난 기사]


1 : 열풍의 배경







춘심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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