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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0년 차 초등교사다. 직장인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 역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긴장→ 적응→ 분노→ 분노에 적응→ 무기력 → 무기력에 적응 → 잠재적 분노의 간헐적 폭발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여기까지 왔다. 본인의 직장이 백 프로 마음에 들고, 매일 출근길을 꽃구름 밟듯 걷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나 역시 그동안의 직장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

 

학교가 온갖 조롱과 개혁 요구의 대상이 되는 요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학교는 너무나 폐쇄적이고, 터무니없이 많은 권력과 필요 이상의 엄숙함을 가지고 있다. 언론이나 일부 교사들이 교권추락이니 뭐니 하는 말을 떠들 때마다, 가르치는 행위가 가지는 특수한 의무와 책임은 생각지도 않고 권리만 요구하는 염치없음에 일개 평교사인 나는 언제나 한없이 부끄러웠다.

 

어쩌자는 건가? 예전처럼 학부모들에게 맘껏 뒷돈이나 받아 챙기고, 학생들 위에 군림하면서 욕이든 매질이든 분 풀릴 때까지 할 수 있으면 만족할 텐가?

 

그런 교권, 당신들이나 가지시라. 나는 필요 없다.



이상한 선생 질량보존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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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옆에는 왜 이상한 사람이 많을까?>(산드라 뤼프케스, 모니카 비트블룸 저, 동양북스)라는 책에는 ‘이상한 사람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말이 소개된다. 이는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도 일정한 비율의 이상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뜻이다. 저자들은 이상한 사람들을 해치우기 위해 자기 자신의 심리적 문제를 직면하고 이상한 사람들의 심리를 간파해야 한다고 말하며 그에 맞는 대응 전략을 제시한다.

 

‘이상한 사람 질량 보존의 법칙’.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경험한 성인들은 대부분 직감적으로 공감할 것이다. 교사 생활을 시작한 지 10년이 된 나 역시 그 동안 이상한 사람들을 꽤 만나왔다. 예를 들어 교직 생활 초창기에 만났던 교감 중 한 명은 화를 잘 내고 감정 기복이 대단히 심했다. 그날 결재를 맡을 일이 있는 교사들은 교무실에 들르기 전에 교무실무사에게 메시지를 보내 ‘오늘 교감 선생님 기분이 어떠신지?’라고 물을 정도였다. 몇 년 동안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던 동료 교사 한 명은 뭐든지 아는 체를 하고, 쉼 없이 자기 이야기만을 하고, 모든 것에 참견하는 것으로 악명이 대단히 높았다. 피해망상이 심해 거짓말을 일삼는 교사도 있었고, 주구장창 남의 험담만 하고 다니는 교사도 있었다.

 

이상한 사람의 분류 기준은 사실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이상하게 보자고 들면 한없이 이상한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몇 년 전 함께 근무했던 어떤 교사는 학교에서의 평판은 ‘꼼꼼하고, 학급운영을 잘하는 교사’로 꽤 좋은 편이었다. 우연찮게 나와 학생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작년에 졸업한 본인 반 학생들이 너무나 그립다는 이야기를 하길래 정이 많은 사람인가보다 라고 생각이 들려는 찰나에 이런 말을 하는 거다.



“지금 우리 반 애들도 좋긴 한데 작년 애들 같지가 않아요. 얘네들은 선생님 말을 약간 흘려듣는 경향들이 있어. 나한테 잘 보이려고 하지도 않고. 작년 애들은 내가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했는데...”



그날 이후로 그 교사는 학교에서의 일반적인 평판과는 무관하게 내게는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이상한 사람의 예나 분류 기준은 개인마다 그리고 조직의 문화마다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명백한 사실은, (자신의 기준에 기반해) 이상한 사람은 어디에다 있고, 대체적으로 일정한 비율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내 주위 사람들 중 열 명 중 한 명은 꽤 이상한 사람이다 싶다면, 당신이 어딜 가든 그 비슷한 비율로 이상한 사람들이 눈에 띌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 법칙은 교직 사회에도 적용된다. 어느 직장이나 조직과 마찬가지로 교사들 중에도 일정한 비율로 ‘이상한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비극은 일정 비율의 이상한 사람들이 ‘교사’라는 것, 그리고 학생들은 이들 앞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일정 기간 동안 포로가 된다는 데서 발생한다.

 

세계 어느 곳이나 그렇겠지만, 유교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는 한국에서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일단 믿고 가야 할 사람, 선생님의 지시와 말은 일단 따르고 가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이는 이상한 교사들 앞에 놓인 불운한 학생들의 상황을 악화시킨다. 되바라진 애라는 꾸짖음을 다수의 어른들에게 들을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는 교사의 ‘이상함’을 감지하더라도 학생들이 대항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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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특유의 폐쇄적인 문화 또한 한몫한다. 일반적으로 교사들은 자신의 교실 문을 굳게 잠그고 여간해서는 공개하지 않는다(1년에 겨우 두어 번 있는 공개 수업 때마다 얼마나 난리법석들을 떨어대는지). 나 또한 교직 10년 차가 되었는데도 다른 교사들이 학생들과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 세세히 알지 못한다. 닫힌 교실문 안에서, 다른 교사들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거다.

 

수직적이고 억압적인 교사와 학생의 관계, 남의 교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폐쇄적인 학교 문화는 이상한 사람(이상한 교사)들의 횡포에서 학생들을 구해내는데 엄청난 방해요인이다.



내가 만난 이상한 교사

 

이상한 교사들과 함께 있어야 하는 학생들의 심정을 알아내기 위해 내 기억을 소환하기로 한다. 교사로서의 능력, 인격, 시대 사회적 배경 따위의 기준은 배제하고 정말 명백하게 ‘이상한 사람인가?’라는 기준에만 초점을 맞췄다.

 

중학교 1학년 때 가정 교과 선생님. 사십 대 후반 정도의 중년 여성이셨다. 보통 체격에 긴 치마를 즐겨 입으셨던 것 같고, 약간 사각형의 두상과 넓은 이마를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첫 수업 시간이었다. “날 왜 쳐다보는 거야? 어? 내 머리 쳐다보는 거지?” 무슨 영문인지 선생님은 잔뜩 화가 나 있었고, 두 번째 줄에 앉아있던 한 친구는 머리를 푹 숙인 채 아니라며 연신 고개만 흔들고 있었다. 맥락이 전혀 파악이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모두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쉬는 시간이 됐다. 얼굴이 벌개진 그 친구는 자기는 그냥 선생님을 바라봤을 뿐인데 느닷없이 선생님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고 했다. 옆에 있던 한 애가 말하길 (다른 반에서 듣기로) 그 선생님은 머리카락 숱이 적은 것이 극도로 콤플렉스여서 누가 자기를 쳐다보면 자기 머리를 쳐다보는 걸로 생각하고 불같이 화를 낸다는 거다. 옆으로 머리카락을 넘긴 것도 이마에 휑한 부분을 가리기 위함이고, 옆머리는 부분 가발이래나 뭐래나.

 

‘뭐지? 시트콤인가?’ 나는 어안이 벙벙한 기분이었으나 약간 재미있다는 기분이 들었었다. 하지만 막상 다시 가정시간이 되니 그 상황이 마냥 웃기지만은 않았다. 선생님이 들어오시자 나는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들었던 대로 선생님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는데 선생님은 “선생님이 들어왔는데 왜 아는 척도 안 하고 있어? 공부 안 할 거야?”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눈을 도대체 어디에 두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최대한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서도, 지나치게 고개를 숙여 선생님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선생님이 설명을 할 때는 선생님의 어깨나 뒤편의 칠판을 황망히 바라보며 선생님을 ‘보면서도 보지 않는 듯한’ 눈의 각도와 표정을 연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교과서를 읽어보자고 하면 눈동자의 방황을 멈추고 고개를 푹 숙일 수 있어 너무나 좋았다. 선생님이 판서라도 해서 뒷통수를 보이면 세상의 모든 짐이 내려앉는 듯한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 선생님은 가끔 굉장히 엉뚱한 농담을 하곤 했었는데, 우리가 너무 크게 웃으면 “나 비웃는 거야?” 하면서 화를 벌컥 내셨고, 안 웃으면 “이래가지고 무슨 수업을 하겠어?”라고 역시 화를 내셨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에도 적당히 미소를 보이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야 했다.


가정 선생님의 병적인 히스테리에 몹시 지친 어느 날 우리 반 학생들이 담임 선생님에게 너무 힘들다고 토로를 했다. 비교적 젊고, 학생들 말에 귀를 기울여주던 축에 속하던 담임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었다. 



“그 선생님 원래 이상해. 선생님들도 다 그러셔. 그냥 참아 얘들아.”


 

당시에는 담임 선생님의 한 마디가 어떤 면에서는 위로가 되기도 했었다. ‘아, 내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 그 사람이 이상한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묘한 안도감과 쾌감 같은 걸 느꼈던 거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그냥 참으라고 말했던 담임 선생님의 조언이 과연 그 상황에서 최선이었던 걸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 분은 동료 교사들에게도 명백하게 ‘이상한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 심지어 그 동료 교사들이 학생들 앞에서조차 심정을 숨길 수 없을 만큼 이상한 사람이었다. 이제 30대인 내가 지금 생각해도 그 분은 병적인 노이로제 환자였던 거다. 그런 교사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백 명의 학생들에게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그냥 참아’ 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이었을까?


지금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면 인사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대던 선생님들은 많았지만 그 정도로 히스테리가 심한 경우는 이성적으로 대항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머릿속으로 어떻게 반항을 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제대로 반항 한 번 못하고 책으로 머리나 얻어맞으며 망신을 당하거나, 튀겨대는 침 세례와 함께 윽박지름이나 실컷 당할 거라는 것만이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담임 선생님을 비롯한 학교의 다른 선생님들이 우리를 도와주거나, 우리를 대신해 싸워줄 거라는 기대 또한 전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일 년간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듯, 바라보지 않는 묘한 기술만을 습득한 채 가정 시간을 보냈다.


그 분은 명백히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때나 지금이나 그 분에 대해서는 분노보다는 이상한 형태의 피곤함과 민망함이 더 짙게 남아있다. 아마 그건 그때 내가 14살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상황을 희화화할 수 있었고, 가정 시간이 일주일에 한 번 있었으며, 같은 반 친구들과 불안함과 짜증스런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상한 선생님이 우리에게 휘둘렀던 히스테리 가득한 행위들이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만약 그렇게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분이 초등학교 교사였다면, 그래서 스무 명 남짓한 어린 학생들이 꼼짝없이 하루 종일 그 분과 함께 있어야 했다면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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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만 밝히는 '이상한 교사'가 '교사'로 거듭나는 과정을 다룬 영화 <선생 김봉두>

실은 김봉두도 어릴 적 가난 때문에 선생님에게 차별받았던 경험으로 인해 이상한 교사가 된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을 퍼뜨리는 것 같아 다소 미안하지만, 한국에 있는 초등학교 어딘가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모든 교사들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이상한 사람들이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며 교직 사회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걸 말하고 있는 거다. 그 불가피성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런 말을 늘어놓는 것은 다시 말하지만, 그 피해를 다수의 어린 학생들이 짊어지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 이상한 선생님들 생각을 하면 숨이 막힌다. 동료 교사들과 대화를 나누다 ‘만약 이 선생님이 내 아이의 담임이 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아이를 전학시키겠어!’ 라고 생각했던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전혀 검증된 바 없는, 아주 조심스러운 주장을 하고자 한다.


다른 조직보다 교사 사회에서 이상한 사람들이 더 자주 나타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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