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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6.목요일

리턴오브사마리탄

 

 

 

 

누구나 예상하고 있던 대로 미국산 소에게서 광우병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동안 광우병 소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없었을 것이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연간 도축 두수가 3천4백만 마리에 이르고, 1억 마리가 넘는 소가 사육되는 미국에서 겨우(!) 4만 마리 샘플 검사를 하는 중에 광우병 소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실제로 얼마나 많은 소가 광우병에 걸려 있는 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광우병의 발병과 관련해서 유력한 가설은, 초식 동물인 소에게 소 부산물로 가공한 육식사료를 먹인 결과, 단백질 변형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고 한다. 하기사 인간에 의해 사육되지 않는 야생 상태의 소가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육식을, 더구나 동족을 먹을 리는 없을 것이다.

 

 

 

 

 

육식을 즐기는 서양에서 소에게 그런 육식성 사료, 더구나 소의 부산물을 가공해서 만든 사료를 먹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풀을 먹여서 사육하는 것보다 비용이 덜 들고 효율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먼저 그런 사료를 개발한 사람은 '소의 건강'을 위해서 그런 사료를 개발한 것이 절대로 아니다. 먹지 않고 버리는 부산물의 재활용을 통한 '원가 절감'과 그 원가절감을 통한 다른 목축업자에 대한 '경쟁력 확보'에 그 본질이 있었을 것이다. 소를 도축하기 전에 한동안 곡물 사료를 먹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소의 입맛을 돋궈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소의 육질을 맛있게 만들어 다른 목축업자의 소에 비해서 상대적인 경쟁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세상 만사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처럼 더 열악한 것, 하지만 더 경쟁력 있는 것이 더 나은것, 하지만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을 밀어내는 법이다. 소에게 먹일 그런 사료가 개발되기 전에는 소는 풀을 먹고 자랐다. 하지만 누군가가 더 '경쟁력'있는 육식성 사료를 개발하고 나서부터는 소를 키우는 목축업자라면 누구나 좋든, 싫든 그 사료를 먹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지 않을 경우 경쟁력이 없어져서 더 이상 살아 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근본 동력인 '경쟁'이라는 괴물이다.

 

 

 

 

 

 

 

 

 

 

자본주의는 '경쟁'을 통해서 수 많은 혁신과 발전을 이루어 냈다. 하지만 되돌아 보면 '경쟁'은 절대적인 가치에서 발전을 이루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상대적인 가치의 측면에서는 별로 이루어낸 것이 없다. 아니, 어쩌면 그런 경쟁이 오히려 구성원들 간의 가치 배분의 편차만 커지게 함으로써 전체 가치의 합은 줄어들게 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자본주의가 심화된 세상에 사는 우리가 그 이전 시대의 인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은 가치를 누리고 있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요 며칠 딴지에서는 '선행학습'과 관련한 찬반 논의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선행 학습' 또한 '광우병'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부모들이 자신의 자식들에게 '선행학습'을 시키는 이유는 명확하다. '상대적인' 경쟁력의 확보 때문이다.

 

 

 

 

 

어차피 인간의 뇌는 타고 나는 것이고, 평생 공부해야 할 양이 사람마다 정해져 있다고 가정한다면, 선행학습은 그저 남과의 경쟁에서 '순간적'이나마 앞서 보자는 얄팍한 작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선행학습을 시키는 순간, 다른 학부모 또한 자신의 아이들에게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선행학습을 한 이 시대의 아이들이 그 이전 시대의 아이들보다 더 경쟁력이 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 '선행학습'으로 인해 원래 그 시기에 해야 할 다른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는 것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더구나 우리 아이들이 학습해야만 하는 교과 학습이라는 것이 그저 '상대적인' 평가를 위한 수단으로써의 의미가 더 크고, 그 자체로 교육의 절대 목표가 아니라고 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지난 몇백 년 간 자본주의는 인간세상에 더 할 수 없는 혁신과 발전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더 행복해진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절대적인 가치'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가치에 의해 규정되는 면이 더 크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세상이 더 발전한다면, 경제가 더 발전하고 자본주의가 더 성숙한다면 '광우병' 따위 없어질 것이라고 본다. 사람들이 보다 더 '안전한' 육식을 추구하게 된다면 지금과 같은 광우병 발생 위험성이 있는 사료 또한 어느 순간 스스로 경쟁력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미국에서도 최고급 쇠고기는 100% 방목에 풀만 먹여서 키우지 않는가. 아직도 우리가 광우병의 발생을 두려워 하고 불안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경제적 수준이 그만큼까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한 경쟁'이 최고의 선인 것처럼 내몰고 있는 이 얄팍한 시대는 우리에게 그러한 상대적인 가치의 빈곤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쟁'은 절대로 사회 전체의 상대적인 가치의 양을 증가시키지 않는다. 더구나 그 배분마저 심하게 왜곡시킨다. 하지만 그 프레임에서 빠져 나오지도 못한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지금 우리에게 저지르고 있는 압박의 현실이다.

 

 

 

 

 

이제는 '경쟁을 통한 효율 추구'라는 원시 자본주의적 프레임에서 빠져나올 때도 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때쯤이면 광우병도 지구상에서 사라질 지도 모를 일이다.

 

 

 

 

 

리턴오브사마리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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