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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국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부소가 이세황제가 되어 진시황이 쥐어짰던 천하의 숨통을 트이게 한다. 진시황이 부소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은 부소의 정치철학을 승인했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법가는 천하를 통일하고 억누르기에만 유용하다는 사실과 이제 천하의 백성들이 국가의 배려를 받을 필요가 있음을 인정했다.


진시황은 죽음을 받아들이자 비로소 중원 천하를 자신의 손아귀에서 놓아주었다. 어차피 자신은 죽는다. 그렇다면 세상에 정의의 문제가 남는다. 자신이 싫어하는 부소가 정의였다. 인간성과는 별개로 진시황의 총명함은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그의 시신과 유서는 이사, 조고, 호해의 손에 있었다.


우리는 이 세 명의 인물을 조금은 깊이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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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좌승상 이사. 원래 초나라의 하급관리였던 그는 조국을 버리고 성공을 위해 진나라에 왔다. 이유는 하나, 부강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출세지상주의를 알려주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일하던 관청의 변소에 있는 쥐들은 사람이 나타나면 숨기 바빴다. 그러나 곳간의 쥐는 사람이나 개를 겁내지 않았다. 이사는 이 경험을 통해 사람도 쥐와 같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거기서 거기다. 크게 다를 바 없는 개인들이 환경에 따라 다른 결과를 얻는다. 그는 천하의 ‘곳간’에 해당하는 진나라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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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궁. 중국에서 제대로 복원했다고 얘기는 하는데 글쎄...

 

이사는 훗날 진시황이 되는 진왕 영정에게 천하통일을 안겨주고 권력을 얻는다. 두 사람의 관계는 거시적으로 보면 일종의 거래였다. 이사는 진나라 내부의 기득권을 물리치고 자신이 기득권이 되는 데 성공했다. 인간에게 꼭 애국심이 있을 필요는 없다. 이기주의자도 얼마든지 합리적인 판단을 제시할 수 있다. 그도 최후의 선을 넘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을 너무 사랑했다. 이렇게 퉁치고 넘어갈 인물은 아니지만, 그의 이야기를 푸는 것은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할 때나 적합하다.

 

환관 조고는 사디스트 기질이 다분한 인간이었다. 그는 감옥 관리의 전문가였다. 냉혹한 만큼 정확한 일처리는 진시황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황제를 만족시키며 고속 승진하여 최측근 환관이 되었다.

 

조고는 태어나면서 거세를 당한 남자였다. 부모에게 팔렸을 수도 있고 궁 안에서 불법적으로 태어났을 수도 있다. 고아였을 수도 있다. 그는 궁에서 자랐다. 보통의 사람들은 부모형제와 함께 가정에서 자란다. 환관이 되더라도 가족과 함께 사는 시간을 뒤로하고 거세 시술을 받는다. 조고는 가족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궁은 기이하고 엄격한 곳이다. 진시황 이후 진나라의 궁은 더욱 그랬다. 이곳에서 혼자 살아남은 인간이다. 타고난 인간성에 문제가 없더라도 이기적이고 비정한 사람으로 자라는 일은 이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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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고


조고가 조나라의 왕족 출신이라는 일설도 있다. 그의 성씨인 趙는 곧 조나라의 국명이자 왕실 성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혈통은 중요하지 않다. 태어난 직후 거세당한 그에게 조국이라고 해봐야 자신을 빼앗기거나 방치한 집단에 불과하다. 그가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성욕을 박탈당한 채 성장하고 늙은 그에게 타인을 통제하는 일은 욕망의 배출구였다. 그는 충직한 환관이었지만 엄밀히 말해 진시황을 사랑한 적은 없다. 황제가 소유하고 그에게도 나누어주는 권력 그 자체에 집착했다. 엄혹한 법률로 통치되는 진나라에서 법률은 권력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조고는 방대한 진나라 법률 전체를 완벽히 암기했다.

 

억지로 한 공부라면, 한 번쯤 전체암기에 성공할 수는 있다. 그러나 조고의 입에서는 언제나 필요한 구절이 막힘없이 터져 나왔다. 성공 후에도 끝없이 되뇌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그가 법률, 더 나아가 권력의 성애자(性愛者)였음을 보여준다. 그런 조고가 죄인들을 다루는 방식이 어땠을지 상상이 된다.

 

호해는 조고의 수제자였다. 그는 통치술에는 별 재능이 없었다. 진시황은 둘째 아들에게 조고를 과외선생으로 붙여주었다. 무능한 호해는 죄수들을 관리, 고문, 처형하는 일을 학습하는 데에는 뛰어난 성취를 보였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한다. 호해는 사디스트였다.

 

 

 2.

 

호해가 사디스트였기 때문에 진시황이 아들 중 그를 가장 사랑했다는 설명이 다소 불공정한 점을 인정한다. 동서를 통틀어 아버지와 장자의 사이가 다정한 봉건사회 지배계급은 드물다. 영토와 인구를 물려받는 장자는 통치술을 배운다. 필연적으로 자신만의 통치철학이 생긴다. 아무리 부자지간이라도 두 사람의 통치철학이 동일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지배가문의 수장은 장자를 자신의 관할 밖으로 보내 관리, 통치. 지휘(군사의 경우)능력을 경험시키곤 한다. 그러다 보니 가족으로서의 관계는 소원해지게 된다. 역사에는 군주가 갈등하고 시험할 필요가 없는 차남이나 삼남을 개인적으로 더 사랑하는 경우가 많이 발견된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해의 기질이 부황과 궁합이 잘 맞은 편이라고 믿는다. 진시황의 아들은 20여 명이다. 함양의 황궁은 넓고, 아방궁은 더 넓다. 왕자들은 아버지와 물리적 거리를 유지한 채 흩어져 자랐다. 또한 진시황은 가족들에게 살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둘째라서 여행을 함께할 정도로 친밀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한 여행이 천하의 향방을 갈랐다. 조고는 황제의 직인이 찍힌 유서를 개봉했다. 2세로 지목된 부소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제국의 법률이 완화되면 살아있는 법률전서인 그의 입지는 축소될 것이다. 그러나 기회가 눈앞에 있다. 마침 호해가 그와 동행중이었다.

 

세 사람은 진시황의 시신을 쥐고 있었다. 그들은 황제가 순행 도중에 서거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로 결정했다. 호해는 몰라도, 적어도 이사와 조고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은 민심이 폭발 직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후계자가 장례를 주관할 때까지 제국의 권좌는 공석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반란을 걱정해야 한다.

 

조고는 진시황의 온량거에 평소와 마찬가지로 끼니때마다 식사를 진상했다. 행렬은 평소처럼 군사들의 호위와 행인들의 큰절을 받으며 함양을 향했다. 조고는 앞으로 닥쳐올 현실을 받아들이는 대신 도박을 걸기로 했다.

 

조고는 먼저 자신의 법률 과외제자인 호해를 유혹했다.

 

“친서를 조작해 장남 부소를 제거하고 옥좌를 차지하시라.”

 

호해도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마다할 인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도 권력을 사랑했다. 진시황은 죽음 직전에 떨리는 손으로 유서를 작성했다. 아버지의 필체를 모를 리 없는 부소도 속기 좋은 조건이었다.



 3.

 

조고는 욕망에 불이 붙은 호해를 달랬다.

 

“이사를 끌어들여야 합니다.”

 

권력의 무게추는 등극 전의 호해와 조고보다는 정치의 정점에 있는 이사에게 보다 쏠려 있었다.

 

“이사 없이 거사는 불가능합니다.”

 

이사는 천하의 대세는 신하들(조고와 자신)이 감히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조고는 협박조로 설득했다.

 

“천하통일에 당신보다 더 많은 공을 세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몽염 형제(몽염과 몽의)가 아닙니까? 그리고 부소 공자께서 몽염과 당신 중에 누구를 더 사랑하시겠습니까?”

 

조고의 제안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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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염

 

부소는 몽염과 함께 있다. 이사가 보기에 자기가 아닌 몽염이 부소의 사람이다. 부소는 진시황의 면전에서 유가를 두둔했다. 그가 이세황제가 되면 법가가 낳은 하드코어 돌연변이인 이사가 실각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법가철학이 망가지지 않을 수 있는 최소조건은 공정함이다. 타인에게 철저했던 이사는 단 하나,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라면 공정함이라는 법원칙을 어겼다. 이미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 법가의 원칙주의를 고수하는 한비자를 죽인 적이 있었다. 한 번 타락한 사람에게 두 번째는 어렵지 않다.

 

이사는 조고의 강권에 마지못해 따르는 모양새로 반란에 가담했다. 이사와 조고는 시황제의 시신이 뉘인 온량거에 들어가 거짓 조서를 쓴 후 나왔다. 시황제가 써서 내린 것처럼 꾸며진 조서의 내용은 당연히 후계자 건이었다.

 

“호해를 태자로 세운다.”

 

시황제는 정식으로 태자를 세운 적이 없었다. 태자를 임명한다는 것은 곧 자신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죽음 직전에야 부소를 지목했다. 함양에 도착하기 전에 부소와 몽염을 처리해야 했다.

 

 

 4.

 

조작된 친서가 대규모 공사 현장에 도착했다. 내용은 이러했다.

 

“부소와 몽염은 공사 현장에서 많은 물자와 인명을 소모해가면서도 임무를 끝마치지 못했다. 부소는 근신을 하면서도 반성하지 않았고 몽염은 공자를 올바로 가르쳐야 하면서도 그러지 않았다. 죽음으로 갚아야 할 죄가 아닌가?”


부소는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부황에게 직언을 하다가 이곳으로 쫓겨 왔다. 부소는 공사 현장의 비참함을 눈으로 확인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여러 차례 적당히 좀 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올렸다. 부소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몽염은 본능적인 이질감을 느꼈다.

 

‘뭔가 잘못됐다.’

 

시황제가 자신과 부소를 죽인다고? 이상하다. 첫째, 몽염은 시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적이 없다. 거스르기는커녕, 몽씨 가문은 진나라의 천하통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집안이었다. 둘째, 몽염은 30만의 군대를 통솔하는 중이었다. 주도면밀한 성격의 황제가 굳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면, 함양에 불러서 위험요소 없이 처리할 것이다.

 

친서가 진짜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위조되었다고 주장할 근거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몽염은 부소를 설득한다.

 

“아직 태자를 정하지 않은 황제께서 갑자기, 그것도 순행 중에 태자를 세울 리가 없습니다.”

 

몽염의 말은 꽤나 길게 기록되어 있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음모라는 것이다. 하지만 부소는 편지의 내용을 진짜라고 믿었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아버지의 속을 뒤집어놓은 적이 몇 번인가? 시황제는 맏아들인 자신에게도 얼마든지 잔혹해질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런 확신은 공사 현장의 참혹한 모습을 목격한 후 더 공고해졌다.

 

진시황이 죽으라고 하면 죽어야 한다. 부소는 몽염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결했다.

 

아버지에게 간언을 한 것, 그리고 죽으라는 명령을 실행에 옮긴 것 때문에 부소는 효자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부소는 아버지를 그다지 존경하지 않았다. 효자가 못 된다는 건 아니지만, 그의 자살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판단의 결과다.

 

몽염은 낙동강 오리알에 근접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는 30만 대군과 자신의 군사적 능력으로 어떻게든 저항해보려고 했다. 꼭 군사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몽염군(軍)’의 존재는 그 자체로 대단한 무게감을 자랑한다. 그러나 부소 없이는 명분도 없다. 부소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살한 이상 몽염의 반항은 곧 반란이다.

 

편지를 배달한 사자는 현지의 관리, 즉 몽염의 부하를 시켜 몽염을 구금했다. 진시황의 친서가 가지는 권위는 부소의 자살로 완성되었다. 이사는 자신의 측근을 군사 감독관으로 파견해 30만 대군의 동요를 억눌렀다.

 

기원전 210년 여름. 3인방의 쿠데타가 성공했다.

 

 

 5.

 

경쟁자 부소의 죽음을 전달받은 호해는 몽염을 살려주고 싶어 했다.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몽씨 가문은 제국의 황실에 충성을 바쳐왔다. 감정적으로야 미안할 수 있다. 그러나 이기적 차원에서 생각해보자. 몽염을 구속한 시점에서 이미 그는 3인방의 적이다. 그가 풀려나면, 30만 대군을 다시 지휘하기까지 걸림돌은 이사가 급파한 군사감독관 하나뿐이다. 심복 몇 명만 움직여도 암살하는 건 일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호해의 판단력이 수준 이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고는 호해에게 판단력을 심어줄 필요를 못 느꼈다. 그의 미래를 위해서는 호해가 계속 멍청한 편이 좋았다. 그는 호해의 관심을 몽염에서 그의 동생 몽의로 돌렸다. 마침 몽의는 산에 올라 시황제의 불로불사를 빌고 함양에 돌아온 참이었다.

 

“사실 시황제께서는 오래 전에 똑똑한 아드님을 태자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똑똑한 아들이란 곧 호해였다.

 

“그런데 몽의가 반대해서 미루고 미루다가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 말에 호해는 몽의를 체포하는 데 동의했다. 그렇다면 동생을 구출하기 위해 군대를 움직일 가능성이 높은 몽염도 석방하면 안 된다. 이렇게 몽염 석방 건은 거꾸로 몽의 구속으로 마무리된다. 호해, 이놈은 답이 없다.

 

진시황의 행렬이 아직 함양에 도착하기 전, 날이 갑자기 무더워졌다. 황제의 시신은 썩어 들어가 악취를 내뿜었다. 냄새를 가리기 위해 온량거의 앞뒤로 말린 생선을 가득 실은 수레를 배치했다. 행렬은 함양으로 통하는 곧은길로 진입한 후 고속으로 내달렸다.

 

함양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진시황의 사망이 발표되었고 호해는 태자가 되었다. 호혜는 후계자의 자격으로 장례를 주관했다. 감옥에서 이 소식을 들은 몽염. 바보가 아닌 한 쿠데타를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끝났다. 21살의 호해가 황제에 올랐다.

 

이제 남은 것은 호해를 사이에 둔 이사와 조고의 권력투쟁이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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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세 호해


진이세(진나라 2세 황제) 호해는 사자를 보내 몽의와 몽염에게 죽음을 명했다. 몽의는 거부했고, 사자는 그를 처형해버렸다. 몽염 역시 거부했다. 그는 사자에게 자신은 충신이며, 정치나 똑바로 하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 저항하면 죽이면 그만이지만, 몽염은 존경받는 대장군이었다. 사자는 그에게 공손히 말했다.

 

“저는 조정의 명을 받고 온 사자입니다. 장군의 말씀을 황제께 전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장군의 죽음은 예정되어 있습니다.”

 

동생 몽의보다는 형 몽염의 명망이 높았던 걸까? 사자는 몽염이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길 바랐다. 사자의 뜻을 알아차린 몽염은 사약을 마시면서 두 가지 한탄을 남겼다.

 

첫째, 30만 대군의 힘을 운운한다. 얼핏 보면 “가만있지 않고 싶지만 그래도 참는다.”는 뉘앙스다. 쿠데타 정부를 뒤엎을 수 있지만 돌아가신 진시황과 진나라를 사랑하기에 어쩔 수 없이 죽는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몽염이 감옥에 갇힌 이후부터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의 후회는 갇히기 전을 향한다. 진시황의 부고를 알린 사자를 죽이거나 감금한 후, 부소를 강제로라도 모시고 3인방보다 먼저 함양에 입성해야 했다는 말이다.

 

 

 6.5.

 

(이야기 진행에 방해받고 싶지 않으면 이 챕터는 그냥 넘어가도 좋다.)

 

두 번째가 특기할 만하다.

 

“내가 죽는 것은 만리장성 공사를 하면서 산의 지맥을 많이 끊었기 때문이구나.”

 

이런 사고방식은 아직도 한국과 일본에는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다. 일제가 한반도의 산맥에 심은 쇠말뚝이 한 예다. 하지만 중국은 자연에 경외감을 느끼는 인류 보편의 습관을 오래 전에 졸업했다.

 

흔히 서양문명을 가리켜 자연을 정복하는 성향을 가졌다고 하고, 동양문명은 자연친화적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헛소리라고 단언하겠다. 중국은 수나라 시대에 진시황이 시작한 운하사업을 완성한다. 남송시대에 이르러 중국 남부의 광대한 늪지와 정글을 뒤집어 농토로 개간했다. 외려 당시 유럽은 언덕조차 신성하게 여겼다. 중국의 역사야말로 인간이 자연을 정복해온 역사다.

 

중국 고대신화에서 황제가 치우를 물리친 이야기는 인공적인 농경 문명이 자연 친화적인 수렵 문명을 제압한 사건의 은유다. 태산과 같은 특정한 산을 신성하게 여긴 것은 하늘과 가까워 제사를 지내기 좋기 때문이다. 즉 신성한 도구로 여겼지 산 자체를 숭배하지 않았다. 중국에는 음식으로 금기시되는 동식물이 없다. 무협지에 황금잉어 따위가 영물로 나오긴 하지만 귀한 식재료의 차원에서다.

 

중국인의 자연정복은 자연을 축소시켜 생활공간에 가두는 취미로까지 발전한다. 화분, 어항, 분재, 정원은 중국의 발명품이다. 현재 유럽의 정원은 르네상스 시기 전해진 중국 정원의 영향을 받았다. 프랑스식 정원에 자연미가 없는 것은 중국식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 지금도 중국의 아파트단지는 정방형을 기본으로 하며, 규칙적으로 도열한 건물이 기하학적인 정원을 안으로 가둔 형태가 흔하다.

 

유라시아 대륙 어딘가쯤에 있을 막연한 선을 기준으로 동서양을 가른 후 서양문명은 물질적이고 동양문명은 정신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체로 정체불명의 자기계발서적이나 강연을 파는 사기 철학꾼들이다. 본격적인 학자들은 중화 문명을 인류 물질문명의 대표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몽염의 한탄은 그래서 이채롭다. 만리장성은 지금 보면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을 법한 사물이다. 몽염의 시대에 아직 중원의 인간은 그런 규모로 자연을 파괴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남긴 말은 인류 보편적인 자연숭배사상이 중국에서 어떻게 사라져 갔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자료다. 숱한 적군을 죽인 대장군이 죄책감을 느낄 정도면, 당시 중국인들이 진시황의 자연파괴(?)를 얼마나 섬뜩하게 여겼을지 상상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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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몽염의 죽음은 진 제국 본토 백성들에게 충격적이었다. 부소의 죽음은 더 나아가 천하의 백성들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다. 오죽했으면 초나라 마지막 명장 항연과 마찬가지로 부소 역시 살아서 황제 등극을 노리고 있다는 전설이 퍼져나갔을까. 그러나 전설은 믿는 사람만 믿는다. 희망의 불꽃이 완전히 꺼지자 지금까지의 인내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중원 천하에 불온한 감정이 퍼져나갔다. 불온한 ‘움직임’은 아직 없었다. 항우는 강력한 무공과 카리스마를 지닌 성인이 되었다. 항연은 옛 초나라의 심장부인 회계군을 뒤엎는 쿠데타 준비 완료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반면 유방은 아무 생각 없는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망탕산의 수려한 경치를 감상하며 패현의 친구들이 보내준 술에 젖어 살았다. 백여 명의 부하들이 떠받들어주는 데다 부인 여치도 오간다. 무척 지낼 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호해만 하겠는가.

 

호해는 자신의 취향대로 하렘을 구축하기에 앞서 아버지의 여자들부터 정리했다. 원칙적인 서열상 황제의 어머니뻘인 그녀들의 운명은 좋지 않았다. 2세 황제의 형제자매를 낳은 후궁들은 자식들과 함께 살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 여자들은 모두 진시황을 묻을 때 순장 당했다. 중원에서 순장 문화는 졸업 단계에 있었다. 호해의 행동은 당시에도 야만적이라고 비난받았다.

 

한편으로는 민중에게 인기를 얻을만 한 정책도 실시했다. 이세황제는 전국에 대 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아방궁 축조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었다. 21살의 호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권위는 죽은 아버지였다. 그는 진시황릉 공사를 강행했다. 천장에는 보석으로 별자리의 운행을 새겼고 바닥에는 천하를 그대로 재현했다. 강과 바다는 물 대신 썩거나 마르지 않는 수은으로 채웠다.

 

부장품이란 기본적으로 저승생활을 위한 도구다. 진시황은 도구 수준을 넘어 자신이 저승에서 지배할 천하와 함께 묻혔다. 함께 묻힌 보물의 질과 양은 인류역사를 통틀어 압도적이다. 아직까지도 여산 일대의 흙에서는 기준치를 아득히 초과하는 수은이 검출된다.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침입자를 향해 자동 발사되는 쇠뇌를 곳곳에 설치했다. 그리고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밖에서 문을 잠가 완전히 밀봉했다. 쇠뇌를 설치한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은 산 채로 갇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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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릉 발굴사업은 아직 초창기에 불과하다. 최근, 급하게 매장되어 널브러져 있다시피 한 황족들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화려한 부장품들이 출토되었지만 시신의 두개골과 목 등에는 처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호해가 죽여 아버지와 함께 순장한 형제들이다. 아버지만 한 카리스마가 없었던 그는 형제들과 경쟁하는 대신 경쟁자들을 죽여 버렸다.

 

특히 장려(將閭)와 그의 두 형제들의 죽음이 비장미를 자아낸다. 장려 삼형제는 궁 안에 갇혀 있다가 죽음을 통보받았다. 집행관에게 ‘우리의 잘못이 무엇이냐’고 따져 물었지만, 집행관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이것뿐이었다.

 

“저는 폐하의 명을 전달할 뿐입니다.”

 

장려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세 번 소리쳤다,

 

“하늘이여, 나는 죄가 없도다!”

 

장려 삼형제는 일제히 칼을 뽑아 목을 찔러 자살했다.

 

호해의 불안증은 이제 백성을 향했다. 천하의 인간들에게 권위를 세울 차례였다. 호해는 아버지를 모방해 온량거를 타고 동쪽을 순행했고, 아방궁 공사를 재개했다. 법률은 더욱 가혹해져서 보다 많은 죄수들을 노동력으로 끌어모았다. 백성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호해는 군사들 뒤에 숨기로 했다.

 

5만 명의 병사들이 수도 함양에 추가 배치되었다. 고대의 도시는 지금에 비해 단출하다. 5만 명의 병력은 함양의 식량을 고갈시켰다. 강제로 징발된 장정들이 이들이 먹을 식량을 함양으로 운송했다. 여기에 치졸하고도 가혹한 규칙이 내걸렸다. 자기 식량은 자기가 따로 지참해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장정들은 다른 것도 아니고 식량을 굶어 죽어가면서 옮겼다.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한 호해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다. 이사는 조고와의 권력투쟁에서 밀렸다. 조고가 이세황제의 생활비서라면 이사는 내각의 수장이다. 호해에겐 정치를 수행할만 한 성실함과 지성이 없었다. 3인방 중에서 제국을 관리할 능력과 책임감을 겸비한 사람은 이사였다. 황제가 정치를 하지 않으니 정치인인 이사가 운신할 폭이 줄어들었다. 제국은 멸망을 향해 치달았다.

 

 

 8.

 

진 이세황제 원년 7월, 현재의 안휘성 남기현. 당시 사람들이 ‘대택향(大澤鄕)’이라고 부르던 곳. ‘큰 늪지 마을’이라는 말뜻에서 알 수 있듯 고인 물이 많으면서도 주민이 거주하는 곳이 대택향이었다.

 

대택향에 일군의 부대가 멈춰 섰다. 인원은 900여 명. 이들의 목적지는 현재의 베이징 외곽인 어양(漁陽)이었다. 변방을 수비하기 위한 인원이었다. 어양을 지키고 있는 수비군의 일부와 임무 교대하기 이동하는 수졸(戍卒 국경/병방을 지키는 병사)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군복도 무기도 없었다. 제국의 명령에 의해 강제로 징발된 백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빈민이었다. 자기 땅을 가지지 못한 소작농이나 농노(머슴)들이었다.

 

진나라 본토 출신 장교와 그의 부하들이 완전무장한 상태로 900여 명의 행렬을 감시하고 있었다. ‘막장’이라는 말밖엔 할 수가 없다. 아무리 억지로 끌려온 인원이 있어도, 부대란 것은 기본적으로 운명공동체여야 한다. 감시자와 감시당하는 사람이 나뉘어 있다는 것은 진나라가 어디까지 망가졌는지 보여준다. 백성을 인력 자산으로 취급하되, 믿지도 않겠다는 뜻이다. 진시황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적어도 유방 행렬은 감시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이동했다.

 

진나라 장교는 900여 명 중 동료들을 이끌 인솔자들을 뽑았다. 인솔과 감시마저도 분리되어 있었다는 뜻. 장교는 쓸만해 보이는 사람을 골라 여러 명의 둔장(屯長)을 선발했다. 현재 한국의 건설 현장에서 흔히 쓰이는 ‘십장(什長)’은 열 사람을, 둔장은 50명을 통솔하는 직책을 말한다. 둔장 중에 하남 성 출신인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라는 사내가 있었다.

 

진승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 남의 집에서 머슴 노릇을 해야 했다. 남다른 카리스마와 영민함을 지닌 진승에게 경제적 계급은 그의 한계이자,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이었다. 야심이 넘치는 기질을 타고난 탓에 언젠가는 대단한 인물이 될 거라고 소리치고 다녔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소뿐이었다.

 

“머슴살이나 하는 주제에...”

 

먹고 사는 일에 몸이 닳아본 사람들은 안다. 현실이 얼마나 꿈을 조롱하는지. 진승은 가난에서 벗어나기는커녕 변방을 지키는 수졸이 되어 기약 없이 건강과 젊음만 잃게 생겼다.

 

오광은 진승만 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없는 매력이 있었다. 인심이 넉넉한 그는 악조건 속에서도 부하들을 다정하게 챙겼다. 진승이 함부로 거역하기 어려운 인솔자라면 오광은 어머니 같은 남자였다. 힘든 행군의 와중에 두 사람은 친한 사이가 되었다. 어느새 둔장들도 그들의 말을 따르게 되었다. 둘은 자연스레 900여 명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게 문제였다.

 

이전 편에 썼지만, 진나라의 법률에서 징발된 인원이 기일 내에 도착하지 못하면 책임자들은 처형당한다. 나머지 인원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

 

 

 9.

 

행렬은 장맛비에 발이 묶여버렸다. 그러잖아도 물이 많은 대택향이다. 물이 불어나자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진승은 오광에게 속뜻을 말했다.

 

“가서 죽으나, 저항하나 죽으나 죽는 것은 같소. 이왕 죽을 거면 나라를 한 번 세워 보고 죽읍시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천하가 진나라의 가혹한 통치에 신음한 지 오래되었소. 이세황제가 부소를 죽이지 않았소? 부소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가 죽지 않았기를 바라고 있소이다. 또한 초나라 최후의 명장 항연이 아직 살아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소문도 있소. 우리가 부소와 항연의 이름을 이용한다면 천하 곳곳에서 호응해줄 것이오.”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는다. 진나라와 왕자와 초나라의 마지막 명장이 왜 손을 잡는단 말인가? 하지만 두 인물은 백성들의 억울함과 희망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백성들에겐 진나라에도 초나라에도 충성할 이유가 없다. ‘지금의 체제’가 문제였던 것이다. 일단 거사를 성공시켜야 하는 두 사람에게 논리적 정합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오광은 동의했다. 그는 점쟁이(인근 마을의 점쟁이였는지, 900여 명 중에 점쟁이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를 불러 성공 가능성을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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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면 큰 공을 세우시겠지만, 자세한 건 귀신에게 물어봐야겠는데요.”

 

하나 마나 한 말이다. 성공한다면야 당연히 대단한 인물이 될 것이다. 중요한 건 성공할지 말지가 아닌가? 여기서 진승과 오광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얻는다. 귀신이 있건 없건, 무슨 생각을 하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실행력이다. 둘은 귀신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을 이용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그물로 물고기를 잡아 인근의 시장에 내다 팔고는, 부하들에게 바로 그 시장에서 물고기를 사 오게 했다. 이런 자유로운 활동이 이상하게 생각될 순 있지만 행군 시간은 길다. 유방이 친구들에게 지원금을 받아 길을 떠난 일에서 알 수 있듯 징집 행렬이라 할지라도 물건을 사고파는 소정의 상업 활동이 가능했다.

 

사람들이 물고기를 삶아 먹자 뱃속에서 흰 비단 천이 나왔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진승왕(陳勝王) - 진승이 왕이 된다.'

 

기이한 일에 사람들은 진승을 다시 보게 된다. 물론 비단 천에 글씨를 서 물고기의 뱃속에 넣은 것은 진승과 오광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진나라 본토 병사와 징집병의 식단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본토 병사는 보급, 징집병은 자체 해결.) 오광은 사람들이 모두 잠에 든 밤, 몰래 여우의 울음소리 톤을 흉내네 소리쳤다.

 

“대흥초, 진승왕(大興楚, 陳勝王) - 초나라여 크게 일어날지어다, 진승이 왕이 되리라.”

 

다음 날 아침. 진승과 오광은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난밤에 들었던 이상한 목소리를 이야기하며 진승을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10.

 

진승과 오광은 900여 명의 동료를 설득이 아닌 속임수의 대상으로 삼았다. 행렬이 아직 비에 갇혀 있을 때 거사에 성공하려면 두 사람도 급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진승과 오광의 프로파간다 능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남은 것은 거사였다.

 

대하기 어려운 진승보다는 부하들에게 사랑받는 오광이 나서기로 했다. 900여 명의 감시를 책임지는 장교는 두 명이었다. 오광은 일부러 진나라 장교 하나가 술에 취해 있을 때 옆에서 소리친다.

 

“글러 먹었다. 그냥 도망가 버리자!”

 

빈손으로 올라가 임무 실패를 보고하고 처형당하라고?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장교는 말채찍으로 오광을 두들겨 팼다. 다정한 오광이 학대당하는 장면에 징집된 사내들은 이를 갈았다. 오광은 채찍질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장교는 검을 뽑았다.

 

진나라의 검은 길다. 뽑고 나서 상대를 베기 위해 자세를 고쳐 잡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때였다. 반죽음 상태로 보이던 오광이 벌떡 일어나 검을 빼앗고는, 그대로 장교를 죽여 버렸다. 진승이 득달같이 오광에게 검을 넘겨받고는 남은 한 명의 책임 장교를 베어 죽였다. 900명의 환호와 흥분 속에 남은 진나라 병사들이 휩쓸리듯 살해당했다.

 

진승은 높은 곳에 올라가 준비해둔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들은 큰 비를 만나 다 같이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는 때를 놓쳤다. 기일을 어기면 참수형에 처해지는 것이 진나라의 법이다. 운이 좋아 참수형을 면한다 할지라도, 변방을 지키다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열 명 중 여섯, 일곱은 된다. 설사 죽지 않는다 치자. 장부로 태어나 구차하게 연명해서야 되겠는가? 죽을 때 죽더라도 후세에 이름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이어 동아시아 역사에 두고두고 회자될 명문장을 일갈한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부하들이 함성으로 호응했다.

 

“삼가 명을 따르겠습니다!”

 

진승과 오광은 상의를 헤쳐 오른쪽 어개를 드러냈다. 고대 중국에는 어려운 일에 도전하거나 집단행동을 결행할 때 어깨를 드러내는 습관이 있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것은 평민들의 관습이었다. 귀족들은 왼쪽 어깨를 드러낸다.

 

인간에게는 힘을 과시할 때 상체를 드러내는 본능이 있다. 씨름과 같은 유술(柔術) 대부분은 상의를 탈의한 채 대결한다. 취객들은 싸움이 붙으면 겉옷부터 벗는다. 인간뿐이 아니다. 수컷 고릴라와 침팬지는 싸우기 전에 몸을 곧추세워 어깨너비와 상체의 근육을 과시한다.

 

진승과 오광을 둘러싼 남자들이 일제히 오른쪽 어깨를 드러냈다.

 

반란(反亂)!

 

제국을 해체시키고 초한쟁패를 불러올 <진승, 오광의 난>이 일어났다. 그냥 반란이 아니었다. 진승, 오광의 난은 무산계급이 일으킨 본격적인 민중봉기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대택향기의(大澤鄉起義 대택향에서 큰 뜻을 일으키다)로 높여 부른다.

 

 

 11.

 

공산혁명이 완수된 후 형성된 중국의 유물론적 역사관은 진승의 연설이 가지는 한계를 이렇게 지적한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이 왕후장상이 되겠다는 것 아닌가?”


대택향기의는 계급을 해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들의 계급상승을 위해 일으킨 사건이다. 따라서 계급혁명과는 거리가 있다는 이야기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때는 2200년 전이다. 진승과 오광에게 이천 년에 걸친 인류사상 발전사의 선행학습을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대적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 세속적인 야심과 결부되었다고 해서 역사적 의미를 깔아뭉갤 수는 없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개념만으로도 충분히 혁명적이다. 어차피 유방과 항우도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싸웠다.

 

그래서 대택향기의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아쉽게 입맛을 다시면서도 ‘중국’이라는 시스템에 대항해 일어난 최초의 농민봉기라는 점에서 결국은 위대하게 평가한다. 더 나아가 진승과 오광은 마오쩌둥에 의해 완성된 인민해방 투쟁사의 시조로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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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택향기의를 표현한 현재 중국의 역사화들.

공산주의 프로파간다 포스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심지어 깃발이 붉은색이다.

 

(여기서 잠깐, 지금의 중국은 형식적으로만 공산국가지 철저한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학자들만큼은 공산주의자다. 천민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사회문제에 날을 세우는 양심적 지식인은 대체로 마오이스트다. 물론 이때의 마오는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을 벌이기 이전의, 판단력을 잃지 않은 마오쩌둥이다.)

 

 

 12.

 

진승은 나라 이름을 대초(大楚)로 지음으로서 반진(反秦)의 기치를 노골적으로 내걸었다. 진승은 장군, 오광은 도위(都尉 벼슬 이름이지만 여기서는 장군의 부관이나 2인자 정도의 뜻)가 되었다. 반란군은 살해한 두 진나라 장교의 머리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본격적인 군사행동에 돌입했다.

 

진승군(軍)은 먼저 대택향의 관아를 습격해 무기를 챙겼다. 진나라의 법률에 시달려온 대택향의 사내들은 고민할 것도 없이 진승의 부하들이 되었다. 대택향을 무혈 접수한 진승과 오광은 항연과 부소가 살아있으며, 반란군을 조직했다는 선전을 퍼뜨렸다. 그러면서 군대를 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나라의 백성으로 신음하다 죽느니, 싸우다 죽자!>

 

참을 만큼 참은 백성들이 난에 호응했다. 주민들은 현지에 부임한 진나라 관리들을 죽이고 진승과 오광의 군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진승은 다섯 개의 고을을 행군하는 속도로 함락했다. 말이 함락이지 ‘흡수’로 봐야 한다. 현재의 안휘성과 하남성 일대를 휩쓴 그는 마침내 진성(陳城 현재의 하남성 유양)을 포위했다. 이때 진승의 병력은 이미 보병 수만, 전차 600~700승, 기마병 1천이었다.

 

진성은 멸망 전의 초나라가 수도로 삼았을 정도로 큰 도시였다. 나라 이름을 대초로 정한 이상 반드시 ‘수복’해야 한다. 진성의 태수는 태수대로 요충지인 진성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그는 요동치는 민심을 감내할 만큼 강인한 사람이 못됐다. 태수는 잽싸게 도망가 버렸다. 군승(郡丞 태수의 보좌관)만 외롭게 남아 성의 망루를 지켰다.

 

지휘관이 성 전체를 관할하지 못하고 망루에서 분투했다는 사실은, 이미 성내의 백성들이 진나라인인 그를 버렸음을 알려준다. 오래 버틸 리가 없다. 군승은 상관 대신 책임을 다하다 충성스러운 진나라 사내로 죽었다.

 

진승이 진성을 접수했다. 그전까지는 도적떼의 두목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어엿한 반란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중원 천하의 시선이 일제히 진승에게 쏠렸다. 가난한 머슴이 제국의 공권력을 유린한 것이다. 멸망한 6국의 왕족과 귀족부터 백성들까지, 제국의 힘에 억눌려 있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 따지고 보면 진승과 오광은 임계점을 넘은 제국의 마지막 물 한 방울이었다.

 

난세가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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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관련한 마빡 스케줄 때문에 기사를 한 주 쉬었다. 해서 2편 분량을 썼다. 총선 결과를 통해 다시 한 번 입증된 바, 작금은 예측불가능성의 시대다. 그래서인가. <[교양]안물어봐도 알려주는 남얘기>는 [아부나이 니홍고]를 진행하는 마사오의 끈질긴 출연요청을 허용하고 말았다. 모든 교양은 남 얘기다. 우리는 마사오의 부끄러움에조차 귀를 기울이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가 이번 주 6회 <꼰대란 무엇일까?>편이다.

 

안알남과 같은 고품격 인문학 방송이 하필이면 [아부나이 니홍고]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실망할 분들도 있으리라 본다. 하지만 혼돈에는 혼돈으로 맞서야 하는 법. 우려는 그의 난입에 맞서 스튜디오를 정결히 지켜낸 우리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안물어봐도 알려주는 남얘기>


팟빵: http://bit.ly/1UmcWhZ

아이튠즈: http://apple.co/1UIilQ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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