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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6. 05. 금요일

홍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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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이정국
주연: 박지수, 김영건, 이경영, 김수경, 이상철, 김혜연, 박건희, 박종철, 박철민, 박대영, 권오현, 이원혜
음악: 강인구
촬영: 유용옥, 김수경
18세 관람가 / Color / 92분

 
'최초의 5.18 영화' 와 '국풍'의 병맛을 기억하며...


(써봐야 몇 분이나 찾아보실까 싶어 전체적인 줄거리를 설명하는 방향으로 끼적였습니다)


1980년 5.18이 일어났고, 그 다음해 문화 축제라 불리는 ‘국풍 81’이 개최됐다. 5.18항쟁의 무게감과 다음해에 바로 벌어진 국가적인 축제를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5.18을 다룬 극영화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부활의 노래>로, 박신양과 최진실이 주연했던 <편지>를 감독한 이정국 감독의 데뷔작이다.


1990년에 제작을 완료하고 극장개봉을 한 <부활의 노래>는 최초로 극장에서 정식 공개된 5.18 영화다. 나도 그렇고 세상의 말도 그렇지만, 흔히 ‘5.18을 전면적으로 다룬 최초의 작품’이라고 하면 장선우 감독의 1996년작 <꽃잎>을 거론한다. 그걸 믿고 살다 보니, <꽃잎>이 제작되던 시기 이전, 그러니까 노태우와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5.18을 다룬 작품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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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5.18 영화의 시작은 무조건 <꽃잎>이라고 생각했었다.


<꽃잎> 이전에 만들어진 5.18 관련 작품들은 <부활의 노래>를 제외하고는 모두 16mm 필름으로 만들어졌으며, 독립영화의 형태로, 정식 극장 개봉을 하지 못한 채로 관객들과 만났다. (걸신 강헌 선생이 한 때 속해 있었던) 영화제작소 장산곶매 에서 만든 <오! 꿈의 나라>, 김태영 감독의 장편 <황무지>, 전두환 정권 말기에 나온 중편 <칸트 씨의 발표회> 등이 그렇다. 다들 그 시대에 목숨을 걸며 만들었던 작품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꽃잎>이 ‘최초로 5.18을 전면적으로 다룬 작품’이라는 말은 확실히 여러 부분에서 와전이 된 말이다. <꽃잎>은 5.18이 어떤 식으로 진행됐는지 보다는, 메이저 영화사를 통해서 항쟁 중에 있었던 금남로에서의 학살을 ‘실제 장소에서 전면적으로 재현’하는 것에 더 관심을 뒀기 때문이다. 이런 방면으로 보자면 최초가 맞긴 맞겠다. 5.18 자체가 원체 규모가 큰 소재니까, 대규모 자본을 동반해서 제작한 <꽃잎>만이 그나마 재현할 여유가 있었으니 말이다. 사전심의가 여전히 존재 했던 시대였지만, 아무래도 권력자보다는 국민의 눈치를 보던 시기인지라 작품은 크게 참견을 받지 않고 최종본을 만들어냈다. (이정현의 헤어 누드 정도만 모자이크 처리 됐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에 반해 <부활의 노래>의 심의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암만 ‘보통 사람’을 운운해도, 노태우 정부 시기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제작진들은 사전 탄압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매일 악몽을 꾸면서 작품을 제작했다. (주로 자신이 사는 집에 군인들이 군홧발로 쳐들어와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악몽을 꿨다고 한다) 이들이 그나마 제작을 포기하지 않은 건 같은 해에 개봉했던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 덕분이었다고 한다. 빨치산의 전투 활동을 소재로 한 작품도 거의 온전한 상태로 개봉했는데, 우리 작품도 통과할 수 있겠지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활의 노래> 제작진은 공연윤리위원회에다 1시간 40분 분량의 버전으로 심의를 신청한다. 그러나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는 아래의 말과 함께 심의 결과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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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운동의 아픔을 마무리해가고 있는 현 시점에 있어서 이 작품의 공개는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을 뿐만 아니라, 작품내용상 고증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결함이 있고 이같은 결함은 국민과 정부, 국민과 군 사이를 해치는 내용으로 일관케 했으며 비록 광주운동을 주제와 소재로 했다고 하나 운동의 당위성은 묘사하지 못함으로써 민중에 대한 무장봉기를 무조건 정당시하는 데만 그쳤음.


문장과 문장 사이에 마침표를 찍어 쉬게 해 줄 생각도 안 한다. 공윤은 공청회, 횃불시위, 도청에서의 전투 장면 등을 포함하여 5.18과 연관된 총 25분 13초의 분량을 삭제하라고 통보했다. 여기서 자칫 잘못 했으면 <부활의 노래>는 사지절단 된 수준인 1시간 15분 버전으로 공개 됐을 것이다. 신문 기사와 몇몇 사진 자료의 확대로만 시대의 변화를 설명하며, 5.18 당시의 이야기를 중반부에 잠깐 보여주는 정도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공윤이 요구한 장면들을 삭제하면 이 작품은 남는 게 없었다.


작품의 이야기는 1978년 광주의 한 대학생들로부터 시작된다. 주인공 철기(김영건 분)는 야학을 통해 공부하는 학생이다. 그는 야학 선배 태일(이경영 분)과 민숙(김수경 분), 봉준(이상철 분), 현실(박지수 분) 등과 함께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사회의 모순을 알리려고 한다. 태일과 민숙은 사랑에 빠지고, 철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 후 대학에서 총학생 회장이 된다. 그는 대중집회를 주도할 정도의 실력과 명망을 쌓아 가는데, 광주에 어두운 구름이 몰려온다. 철기는 이 격변 속에서 도피생활을 시작한다. 이 바람에 계엄군에 맞서 도청을 사수하려는 현실, 민숙, 봉준, 태일과 헤어지고, 철기는 이들 모두와 영영 이별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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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노래>의 초반부만 보면 5.18 이야기가 대체 언제쯤 나올까 싶다. 초반부는 70년대 말을 배경으로, 당시 운동권으로 활약했던 사람들의 삶을 꽤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대학생들의 일상적이고 명랑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그 디테일 한 묘사에 대한 상징 중 하나로 국악적 요소를 집어넣은 것이다. 태일이 이끄는 야학 일원들이, 혼란한 시대 속에서도 활기를 잃지 않으려 날을 잡아 시골로 놀러가는 시퀀스(편집자 주- 특정 상황의 시작과 끝. 몇 개의 신이 한 시퀀스를 이룸)가 있다. 그들은 막걸리를 마시며 놀다가 국악인인 냥 북을 꺼내고 판소리를 하면서 풍악을 울린다. 


아시는 분들은 아실 게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기에는 문화에 대한 삼엄한 검열이 이뤄졌었다. 포크와 록은 저항의 음악으로 분류되어 끊임없이 정권의 견제를 받았고, 특히 록 음악은 아예 70년대 중반에 대마초 파동이라는 큰 피바람에 휩쓸리며 한동안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반발작용일까? 훗날 ‘자국의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사랑하자’는 식의 이유를 둘러대며 군사정권 안에서 국악이 다시 부흥기를 맞이한다.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악은 무대가 없어 듣고 싶어도 듣기 힘든 장르였다. 이는 박정희 정부의 치적 중 하나로 평가 받는 새마을 운동의 어두운 면모 중 하나이기도 하다. 미신타파를 명분 삼아서 전통 문화를 탄압했기 때문이다. 국악이라는 장르 자체의 인기가 떨어진 이유도 있지만,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당시 소리꾼들은 관객이 있는 무대를 아예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월간지인 <뿌리깊은 나무> 의 편집장인 한창기가 브리태니커 한국지사에다 ‘판소리 감상회’ 무대를 마련하는 선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니면 황병기가 끊임없이 창작 국악을 연구하며 발표하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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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의 전통문화 탄압은 박찬경 감독이 2014년에 만든

다큐멘터리 <만신>에서 무속을 통해 묘사된 적이 있다.

 
처음은 명맥을 잇는 정도였지만 어느새 국악은 트로트, 클래식과 더불어 한국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음악 장르가 되었다. 다 대마초 파동 이후 벌어진 일이다. ‘사회·과학서클’이 강제로 해체를 당하고, 포크와 록이 사라진 당시의 땅 위에서 운동권 학생들은 마당놀이와 국악이 가진 ‘참여’ 형식으로부터 투쟁, 혹은 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봤다. 그들은 국악을 자신들의 음악으로 삼고, 사회와 과학 서클이 부재했던 것에 대한 대체재를 고안해 낸다. 그것이 바로 ‘문화패’였다.


학생들은 이 문화패에서 탈춤, 사물놀이, 소리 등을 배우고 연주하며 사회·과학서클이 할 일을 대신한다. 암만 문화에 대해 검열했다고 할지언정 완전히 말살할 수는 없다. 게다가 시위·집회에 비하면 ‘순수 문화 활동’처럼 보인다. 때문에 마구잡이로 단속할 수 없었다. 작품은 초반 30여 분 정도에 이 상황을 응축한다. 그래서 학생운동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관해 많은 설명과 성의를 더하고, 아예 작품 전체의 스코어를 국악으로 작곡해 놓기까지 한다. 관객은 그렇게 학생들의 평화로운 모습과 그들이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모습을 이해하게 된다. 시간 순서대로 전개되기 때문에 이렇게 1980년의 그 날로 넘어가겠거니 싶기도 하고.


그러나 작품은 1980년을 생략하고, 바로 1981년으로 넘어간다. 1981년은 ‘국풍 81’과 광주가 고향인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학생 김태훈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해다. 그러나 그의 자살 소식은 다음날 신문에서 전두환 정부의 ‘국풍 81’ 행사 소식에 묻혀버린다.


국악은 전두환 정부에 들어서면서 다시금 대중적인 대접을 받는다. 거기에 큰 공헌을 한 것이 당시 전두환 정권의 비서관이었던 허문도가 기획한 행사 ‘국풍 81’이었다. 박정희 정부 시절 탄압받았던 전통 문화는 ‘국풍 81’에서의 공연을 통해 다시 대중적인 문화로 부활했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그런 1981년을 어떻게 살고 있을까? 열심히 야학 활동을 하던 현실과 봉준은 각각 다방 레지와 깡소주 마시는 폐인이 되었고, 철기는 여전히 도망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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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5월 27일.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함락됐던 날에 맞춰, 서울대학교에서 학생들이 단체로 전두환 퇴진 시위를 벌였다. 그 때 학교 도서관 6층 창문 밖에서 한 청년이 큰 소리로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항거의 의미로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바로 김태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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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언론은 다음날, 그의 투신보다 전두환 정부의 ‘새 역사를 창조하는 것은 청년의 열과 의지의 힘이다’,
‘민족문화 계승한다’라는 사상이 담긴 ‘문화 축제, 국풍 81’의 개막식을 다루는데 훨씬 혼을 쏟았다. 
광주에서 청년들을 다 죽여 놓고, 저런 말을 내건 행사를 만든 것이다. 


‘국풍 81’은 5월 28일에 개최되어 6월 1일에 끝났으며, <부활의 노래>는 1990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모든 상황을 포괄적으로 다뤄보려 했던 것 같다.


아마 당시 시사회로, 혹은 극장에서 정식으로 <부활의 노래>를 감상했을 관객들, 그 중에서도 특히 유족들은 당황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나오리라 생각했던 ‘그 일’이 나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부활의 노래>는 ‘그 일’보다 먼저 살아남은 사람들의 죄책감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5.18은 1981년의 시점에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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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노래>가 제작될 당시, 정권 교체의 바람을 타며 TV에서 5.18의 진실을 다룬 다큐멘터리들을 몇 편 방영했었다. 이미 TV 다큐멘터리들이 자료 사진과 실제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 제 역할을 다 하고 있으니, 이 작품까지 진실을 파헤치는 동일한 흐름을 따라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지 이 작품은 본래의 사건보다 그 ‘변두리’에 더 시선을 주고 있다. <부활의 노래>는 세상을 좀 더 좋게 바꿔보고자 했던 ‘운동권 학생들’을 향한 관심 말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운동권을 ‘우리와 다르다’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그들 역시 세금을 내는 시민이며, 이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를 나타내고자 <부활의 노래>는 5.18의 마지막 날 전남도청 현장에서 살아남은 현실과 봉준, 도망친 철기가 각기 느끼고 있을 트라우마를 먼저 보여준다. 흔히 ‘변두리’로 여기며 간과하는 것이 생존자들의 트라우마다. 실제로 5.18의 생존자들 중 상당수가 예나 지금이나 그 때의 기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활의 노래>는 영화다운 표현법으로 이를 표현한다.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로 꽤 인상적이었던 시퀀스가 하나 있다.


5.18 이후, 철기를 끊임없이 찾고 있던 현실은 우연히 그가 수배를 피해 구로공단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뒤따라간다. 두 사람은 마침내 만났고, 중화요리 집에 앉아 어색하게 궁금했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 때 철기의 뒤쪽에서 몇 명의 아이들이 아케이드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현실에게 철기가 태일이는 어찌 되었는지 물어본다. 그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면서 아케이드 게임의 총기 효과음이 소음처럼 커져간다. 관객은 곧 그 소음이 광주 시민들을 향한 계엄군의 총탄을 은유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아, 지금 시작하려 하는구나. 여기서부터 <부활의 노래>는 5.18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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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의 뒤에 아케이드 게임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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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노래>는 계엄군인 공수부대가 골목을 뒤지며 사람들을 잡아가는 모습, 시민군의 형성과정, 마지막 날 도청에서 계엄군과 시민군이 전투를 벌이는 이야기를 함축해서 5.18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딱히 여기에 대한 묘사가 새롭거나 참신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영화답고 강렬하다’고는 할 수 있겠다. 1981년에서 1980년으로 다시 넘어가기 전에 보여준 사운드 몽타주는 이장호 감독이 1983년에 <바보선언>에서 앞서 시도한 적이 있다. 도청전투 부분으로 넘어갈 때, 앞에서 아이를 구하려다가 총을 맞아 죽는 민숙의 모습과 현실의 눈동자를 교차시키는 모습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감독의 <전함 포템킨>의 느낌도 살짝 나며, 태일이 총탄 세례를 받고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묘사는 샘 페킨파 감독의 작품들이 떠오를 정도로 잔혹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감독이 영향을 받았을 법한 거장들의 미학을 성실하게 배웠다는 노력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비록 20분 남짓이지만 굳이 여러 가지 한계들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5.18에 대한 묘사는 덕분에 꽤 인상적이다. ‘영화’로써 먼저 다가가기 때문에 ‘운동권적 계몽 색채’가 먼저일 거라 생각한 관객들의 거부감을 줄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부활의 노래>는 5.18의 이야기를 ‘위로’하기 위해 다루지 않는다. 시대적으로도, 작품의 배경으로도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활의 노래>가 제작되던 시점은 5공 청문회가 별다른 소득 없이 어설프게 열리다 끝났던 시기였다. 김영삼이 3당 합당 후 대통령이 되어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사형과 무기징역 선고를 내리기까지는 거기서부터 몇 년이 지나야 했다. 5.18을 추모하는 묘역이 새롭게 조성되기도 전이었다. 90년대 초까지도 여전히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행위가 죄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던가. 이런 당대 현실에 대한 반영이었을지 모르겠다.


<부활의 노래> 속에서 5.18에 대해 회상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철기는 잡혀간다. 봉준은 더더욱 폐인이 되어가고, 현실만 혼자 남는다. 위기다! 이들은 지쳤다. 지친 이들이 다시 일어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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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위기를 맞는 와중에도 애틋한 사랑을 나눈다. 이런 스타일의 작품에서 섹스 신의 등장은 어설프면서도 참 이색적이다. 섹스 신의 정서적인 연출 때문인데, 당시 민주화를 위해 싸운 사람들일수록 자신들이 소수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서로에게 더 의지하는 것처럼 연출해 놓았다. 소수이고,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들과 비슷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만들어져 의지가 계승되는 걸 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부활의 노래>의 후반부는 굉장히 ‘격정적’이다. 최선을 다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일어서겠다는 듯, 극복하려는 의지를 꺾지 않겠다는 듯. 국악 스코어는 더 크게 울려 퍼지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 5.18의 희생자들을 위해 조성된 묘역에서 벌어지는 영혼결혼식, 교도소 감방에서 홀로 단식을 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는 철기의 모습이 쉴 새 없이 교차된다.


국악은 80년대 들어서 대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전통 문화들 중 하나였지만, 대다수 사람들의 눈에는 곧 5~6공의 전유물처럼 보였다. 허문도는 ‘국풍 81’을 통해 국악을 비롯한 여러 전통 문화들을 부활시키는 과정에서, 어떻게든 여기에 대학생들을 집어넣으려 애를 썼다. 나중에 그 이유가 담긴 문건이 하나 공개되는데, 문건에는 전두환 정부가 '학원 문제를 국풍으로 유도해서 축제 속에 매몰시키려 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물론 국풍은 81년에 한 번 개최되고 끝나버리고 말았지만, 5공은 잊을만하면 국악과 전통 문화를 이용해 정권의 정당성 확립을 위하려는 듯 행사를 개최했다.


당시 정권은 국악을 이용해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한 현실을 합리화하려고 했다. 영화 같은 경우엔 현실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게 만드는 도구로 봤다. <부활의 노래>는 이에 맞서듯이 국악과 극적 이야기가 폭발하는 교차편집 시퀀스를 만들어 넣었다. 그 어느 것도 독재자를 위한 전유물은 없다. 모든 것은 시민의 손에서 나왔으며 당신들을 위한 것임을 관객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부활의 노래>는 여기서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념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을 가진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꾸준히 봐 왔기 때문이다. 아마 당시의 관객들은 신념을 가지고도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제일 궁금해 하지 않았을까 싶다. 5.18 묘역에 가서 참배하는 행위조차도 신념이 필요했던 시대였지만, 작품은 이를 유려하게 설명해내지 못한다. 사실 만드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기본 마음가짐과도 같았을 텐데 이걸 설명해야 하나 싶었겠지. 때문에 이 교차편집 시퀀스가 감정적으로 크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부활의 노래>는 관객에게 이 메시지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신념이 아니라 그건 권리라고. 이것은 그저 가만히 있는다고 오지 않으니 더 몸부림치라는 거다. 보복을 두려워할 게 아니라 음악도, 영화도 모두 우리를 위한 것이고, 어떤 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전유물이 아니다. 세상이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했던 5.18의 커다란 파도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듯 <부활의 노래>는 압도적인 삶과 죽음의 교차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적인 부분에서의 삶과 죽음일 뿐, 정신만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새로운 생명의 출산을 통해 말미에 강조한다. 죽지 않고 살아가며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닿을 때까지 그 날을 노래하리라고 말이다. ‘35mm 필름으로 찍힌 첫 5.18 영화’는 그랬다. 설사 백지 수표가 유혹해도 태워버릴 만큼의 뜨거운 결기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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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기 덕일까? <부활의 노래>는 비교적 무사히 관객과 만날 수 있었다. 이정국 감독은 공윤의 경고를 들었지만, 자르라던 25분 분량을 거의 다 남겨놓은 채 1시간 32분 버전으로 다시 심의를 넣는다. 이 버전은 감독의 말에 따르면 ‘심의보다는 작품을 위해서’ 몇 개의 인서트 쇼트를 재촬영하고, 부분적으로 재편집을 했다고 한다. 사실 공윤은 전면적인 재촬영을 요구했었다. 그러나 <부활의 노래>를 만든 영화사 측에는 그럴 돈조차 없었다. 이미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고 또 빌린 끝에 그나마 이런 형태의 결과물을 완성했기 때문에.
 
재촬영을 요구할거면 돈이라도 대주든가! 그것도 아니면서. 감독과 제작진, 출연진 모두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최초로 심의를 신청한지 3개월을 넘기고 나서야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조건으로 거의 원본 그대로 개봉과 수출 가능 판정을 받았다. 처음엔 거짓말인 줄 알았다던 감독도 필름이 온전한 상태로 되어 있는 것을 직접 보고 안심했다고 한다. <부활의 노래>는 딱 1분 정도만 잘려나간 채 (태일이 머리에 총을 맞고 죽는 순간이 잘려나갔다고 한다. 2~3분 더 잘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1991년에 개봉했다. 훗날 잘려나간 1분 분량까지 복원되어 1993년에 재상영되기도 했다.


비록 그 때나 지금이나 <부활의 노래>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작품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억한다. 5월의 광주 역시 끊임없이 기억해야 한다.



P.S:


1) <부활의 노래>를 어떻게 하면 볼 수 있나 싶었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네이버 영화의 다운로드 서비스로 볼 수 있었다. 이 작품도 볼 수 있구나 싶어 좀 놀라웠다. 비록 화면 비율이 1.33:1이긴 하지만 화질도 깨끗한 편이다.
 

2) 본문의 ‘영혼결혼식’이라는 단어를 보고 이상함을 느꼈을 분들이 계실 것이다. 맞다. <부활의 노래>는 사실 세 명의 열사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영혼결혼식을 올리는 사람은 윤상원, 박기순이다. 윤상원은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학생으로,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계엄군에 의해 살해됐다. (계엄군은 화염방사기를 쏴서 그의 시신마저 불태워 버렸다.) 


박기순은 광주 최초의 노동 운동가로, 1978년 성탄절의 다음날 새벽 광천동의 자취방에서 연탄중독으로 2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광주 노동운동의 대모로 불렸으며, 두 사람은 실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전남대 총학생회장인 박관현이 있다. 윤상원과 막역한 친구 사이였으며, 5.18 직전까지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반독재투쟁을 주도하다가 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와 동시에 보안사에서 재야인사들을 체포하자 광주광역시를 빠져나가 여수로 도피했다. 1982년에 체포된 후 보안사에서 고문당하고 옥중에서 50일간 단식하며 시위 투쟁을 벌이다 절명했다.


<부활의 노래>에 등장하는 ‘야학’은 이 세 인물이 활동했던 ‘들불 야학’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3) 이 때 영화에 참여한 사람들 중 몇 명이 충무로에 남아있는지는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 일단 주연배우 몇 명은 여전히 크든, 작든 활동 중이다. <부활의 노래>를 찍을 때 스물아홉이었던 이경영은 현재 가장 왕성하게 배우 활동 중이다. 이정국 감독은 꾸준히 영화는 제작하고 있으나 이 작품 이후로 제작한 <두 여자 이야기>와 <편지>만큼의 전성기를 회복하지는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들이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그들은 노태우 정권 시절, 5.18과 관련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커리어에 닥쳐 올 불이익까지 감수하고 영화를 만들었다. 분명 시간이 지나면 영화를 찍을 당시보다는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했을 것이다. 한 때는 정말 나아지는 듯 했는데, 영화를 만들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풍경이 재현되고 있다.


4) <부활의 노래>에 관련된 요즘 신문 기사들을 보면, 전부 다 공윤의 검열로 1시간 15분 버전으로 개봉됐다고 적어놓고 있다. 위에서도 적었지만, <부활의 노래>는 봉 당시에도 1시간 30여분대의 버전으로 상영됐으니 사실이 아니다. (<부활의 노래>에 관련된 일화들은 영화 논문집인 <영화언어 : 1989년 봄에서 1995년 봄까지 II>에서 감독이 직접 쓴 글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솔직히 이런 말을 하기엔 좀 그렇지만, 기자라면 더 잘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하다못해 네이X의 뉴스 라이브러리만 조금 찾아봐도 감독의 의도에 가까운 판본으로 정식개봉 했음을 알 수 있는데 말이다.








홍준호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