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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5. 15. 화요일

아외로워


 


딴지일보도 엄연한 기업이니만큼 회의라는 것을 한다. 하루는 회의를 하다가, 통진당의 최근 사태에 대해 수뇌부에서 무슨 말인가 해야 하지 않겠냐 이야기가 오갔다. 나는 물론 당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멍하게 있는데 갑자기 너부리 편집장님이 나한테 '니가 한 번 써봐라' 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저... 저는 이거 잘 모르는데요'



 


라고 했더니. 다시 말씀하시길,


 



'그러니까 니가 써야지'



 




 



 


나는 이른바 88만원 세대다(물론 딴지 월급이 88만 원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나의 청소년기는 IMF와 함께 시작됐다. 고등학교 때 교육부 장관은 이해찬이었고, 단군 이래 가장 공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군대를 다녀오니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졌고, 졸업을 앞두고는 가카께서 제위에 오르셨다.


 


아! 돌이켜보니 내 세대의 인생은 참으로 험난했다. 무슨 엄청난 나쁜놈(전두환이라거나)이 있어서 그 놈이 날 잡아다 고문을 하고, 동지들이 힘을 합쳐 타도를 하고 뭐 그런 험난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사는 것이 험난했다.


 


 


취업을 위한, 이른바 '스펙' 인플레이션은 하루하루 심해져서 물가 상승률을 뛰어넘은지 오래. 내가 학벌가지고 왈가왈부 하는 거 진짜 싫어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해를 돕기 위해 한 번만 학벌 타령 해보겠다. 연대 법대 나온 내 친구가 피눈물 흘려가며 가까스로 은행 취업 성공, 직장에 가보니 대리급 직장 선배들은 거의 상고 출신들이였댄다. 대학 때 '너처럼 살면 나중에 서울역에서 살게 될 거야' 소리 들었던 나도 토익이 900 가까이는 나온다. 내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죽지 않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기 때문에 한거다.


 


우리나라의 '스펙 인플레이션' 과 비슷한 사례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마르크화나 짐바브웨 달러 정도에서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 세대 젊은이들에게 '요즘 젊은이들' 타령 하려는 아저씨들, 장담컨데 당신들은 적어도 먹고 살고 취업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그들보다 백 배는 편한 삶을 살아왔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먹고 살고, 때 되면 결혼도 하고, 결혼해서 안정 되면 집도 사고 차도 사자는 지극히 모범생스러운 꿈을 꾸는 것인데, 그게 그렇게 힘들다. 이런 세대에게 사회문제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기대하기 어렵다. 나 역시 별로 심도 있는 이해는 없다. 고 3끝나고 곧바로 대학 도서관으로 들어간 인생이다. 생각해보면 학생운동을 붕괴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의 삶을 빠듯하게 만들면 되는 거였다.


 


NL, PD가 뭔지 안 지도 얼마 안 됐다. NL은 내셔널리그라고 생각하고, PD라면 조PD를 떠올리는 것이 바로 우리 세대다. 뭐, 잘 아는 친구들도 있겠으나, 대학 졸업하고 딴지일보 들어오는 사람의 스탠다드가 이 정도니까 대충 감은 잡힐 거라 생각한다.


 


 


 



내가 딴지일보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 같다. 어딘가 덜 떨어지고 한심스럽긴 하지만 그런 덜 떨어짐은 정치권에서 늘상 보아오던 거 아닌가. 통진당에 다른 점이 있다면 어딘가 어설프고 아마추어 느낌이 많이 난다는 것뿐이다.


 


물론 충격적인 부분도 있다. 이른바 주사파(나는 1주일에 4일만 수업 듣는 대학생을 말하는 걸로 알았다)가 정말로 이 대명천지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흔히들 말하는 NL이며 '종북세력' 이라는 식의 전개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것에 대한 진위여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그런 세력이 있다는 주장이 홍콩할매귀신같은 도시괴담인 줄로만 알았다.


 


이제는 이번에 부산진갑에서 낙선한 김영춘 후보가 인터뷰때 NL 싫어하는 티를 팍팍 냈던 것도 이해가 되고[관련기사보기] 예비군 훈련 가면 동대장들이 종북 빨갱이 어쩌고 했던 것도 이해가 간다. 그들이 그토록 걱정했던 세력, 혹은 그들이 걱정했던 것과 비슷한 세력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로 난 이번 사태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도시괴담의 실재를 확인하는 충격. 이거 나에게는 전에도 한 번 있었다.


 


내 고향은 전주다. 전주라는 곳이 외지인들이 오는 도시가 아니고 있는 사람들이 떠나는 도시이기 때문에 거기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원래 전라도 사람들이다. 전라도 사람들만 있으니 거기에만 살면 외지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른다. 요즘이야 디씨 같은데서 전라도를 하도 까니까 다 알겠지만 나 땐 몰랐다.


 


 


난 그래서 타지역 사람들이 전라도 사람을 그렇게 혐오하는 줄 몰랐다. 우리 동네 어른들의 지역주의, 지역주의도 그냥 지역주의가 아니고 피해의식과 패배주의에 절어있는 지역주의가 난 그냥 짜증나고 신물나고 그랬드랬다.


 


그런데 막상 상경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전라도 친구는 믿지 말아라' 라거나, '전라도 남자만은 안 된다' 라는 교육을 받고 자란 친구들 무척 많았다. 그리고 적지 않은 수가 자신이 받은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고향동네 어른들이 가진 타지역에 대한 경계, 피해의식 같은 것이 이해가 됐다.


 


통진당 사태가 나에게 준 충격도 본질적으로 '전라도포비아' 를 처음 알았을 때와 다르지 않다. 요즘 세상에 저런 정치세력이 진짜 존재하는구나. 아! 그랬구나. 그런 세력이 진짜로 존재했구나. 우와 정말 세상일은 모르는 거라더니.


 


까지다. 그 이외에는 딱히 마음에 뙇 와닿지 않는다.


 


요 근래, 딴지일보를 비롯하여 '어른들'이 있는 곳이라면 진보가 망했네 흥했네, 지지고 볶고 죽이네 살리네 하는 극단적인 이야기가 오간다. 그들의 분노가 나에게까지 전해진다. 그 분노의 기저에는 배신감이 느껴진다. 이런 분노가 나에게 크게 와닿지 않는 것은 아마도 나에게는 모두가 함께 했던 뜨거운 투쟁의 기억이 없기 때문일 수 있다.


 


 



 


이번 사태에 멘붕을 겪거나 대근심을 짊어진 분들에게 한 마디 드리고 싶다. 이 사건이 이 나라를 이끌어갈 젊은 역군들에게는 별로 관심을 끌 만한 사건이 아니라는 거다.


 


여기에 대한 반론도 물론 생각해보지 않은 바 아니다. 소위 진보들의 통합 정당이 출범했다. 진보신당 류의 몇몇 끼지 못한 진보들도 있지만 어쨌든 이름부터 '통합' 인 진보정당이고 따라서 진보진영 전체를 대표할 수도 있다. 이런 정당이 이런 난장판을 연출하고 있으니 진영 전체의 근간을 흔드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명색이 원내 제3정당인데 정당 내 선거부정이 일어났다면 큰일인 것은 맞다.


 


근데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자. 만약에 자유선진당에서 공천 비리 사건이 일어나고, 자유선진당 당권파와 비당권파가 몸싸움을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그 사건을 관심 깊게 바라볼까? 아마 아무 관심도 없지 않을까?


 


 


통진당 사태가 의외로 큰 이슈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은 것은 조선일보를 보고서였다. 물론 조중동은 이번 사건을 신나게 보도하고 있다. 평소에도 어떻게든 까지 못해 몸이 달아있는데 지들끼리 헛발질을 해주시니 얼마나 신나겠는가. 그들로서는 아름다운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이번 사태를 보도하는 보수 언론의 프레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사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결코 "강종헌이가 남파간첩이다!" 라고 단정적으로 보도하지 않는다. 그냥 일부 독자들이 "저저 통진당 놈들 다 간첩섀키들" 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인 거다.


 


그런데 여기서 함정은 이 사건을 보고 "진보는 곧 좌빨" 이라고 생각할 사람들은 이미 진보가 좌빨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이라는 거다. 즉, 그들에게는 이미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상한 떡밥이다.


 


조중동 역시 이번 사건이 자기 진영에 속한 사람들에게 별로 흥미롭지도, 중요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요 며칠간 조선일보나 종편을 비롯한 보수 언론들은 통진당 사태와 여수 엑스포를 거의 병치시켜서 보도했다. 게다가 조선일보는 무척 쌩뚱맞게 운전중 DMB사용에 대한 이슈몰이를 하는 중이다. 이런 것을 버무려야 겨우 좀 써먹을 만한 떡밥이 되는 거다.


 


 


즉, 보수언론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거봐, 내가 그랬지? 진보 뭐 어쩌고 하는 애들 다 빨갱이라니까. 더 알아 볼 필요도 없어. 괜히 머리만 아프거든. 이런 건 어때? 여수에서 이런 것도 하고 국격 완전 돋지? 그리고 운전할때 DMB 보면 안 된다는 것도 가르쳐주고 유익하잖아?"



 


진보진영 지지자들을 살펴보자. 이번 총선에서 정진후 같은 말종이 공천받는 것을 보고도 "대의" 를 위해 통진당을 찍은 사람들 말이다. 이 사람들이 통진당이 지금 삽질한다고 다음 총선에서 새누리당 찍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즉 문제는 진보, 보수 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 사건으로 흔들릴 사람들은 그 사이에 있는 부동층들이다. 지역으로 따지면 충청/강원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번 통진당 사태도 따지고 보면 흔하디 흔한 정치사건이고, 이렇게 흔들리는 민심은 다음 선거까지 야권과 진보진영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만회할 수 있다.


 



물론 내가 이 사태에 관심이 없는 것이 자랑은 아니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면 그건 민주시민이 아닌데다, 통합진보당 사태는 현 정치의 가장 중요한 이슈니까. 그래서 관심을 가져보려고 해도 나같이 태생이 비정치적인 아이에게는 너무 어렵다. 도대체 어떻게 돼가는 거냐고 물어볼 때마다 듣게되는 NL과 PD간의 반목의 역사 같은 거 솔직히 지루하다. 이 사태를 보고 흥분하는 어른들이 보여주는 모종의 비장함과 사명감 역시 와닿지 않는다.


 


원래부터 통합진보당에 뜨거운 감정이 없던 나에게 이번 사건은 아래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민주화 운동 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사람들 모이는 곳에는 어디에나 있는 꼴통들이 그 사람들 중에도 있었고,


그 사람들중 일부는 시간이 흘러 뉴라이트가 됐고, 일부는 통합진보당 당권파가 됐다.


당권파 사람들은 민주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꼴통짓을 했고,


통합진보당이 통합된 전국규모 정당이 되면서 그 꼴통짓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됐다.



 


당권파의 반박. 그냥 다 헛소리 같다. 당권파를 실드치는 가장 주요한 논리는 '그들이 좋은 일 한다고 고생을 얼마나 했는데 좀 봐주자' 라는 건데, 그렇게 치면 젊은 시절 안 해본 거 없이 세상에서 가장 다양한 고생을 하신 가카는 뭘 얼마든지 해드셔도 그냥 둬야 한다는 건가.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됐다는 멋진 수사를 쓰기도 하는데, 괴물과 싸웠던 전력이 그들 스스로가 괴물이라는 사실을 합리화시키지는 않는다.


 



사건의 양상이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언젠가는 터졌어야 했던 일이다. 다행인 것은 저쪽 사람들은 예저녁에 진보를 싸잡아서 빨갱이 간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다. 덕분에 저 사람들 한테는 이번 통진당의 깽판이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맘 편히 먹자.



 


어찌보면 다행이지 않은가. 조중동에게 진보는 곧 빨갱이였는데, 이제는 진보중에도 빨갱이가 있고, 빨갱이 아닌 사람이 있다는 프레임이, 아주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있지 않은가. 물론 가장 다행인 것은 세상 사람들이 애초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겠지만.


 


아외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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