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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5. 16. 수요일

정우성


 



 


<지금 행복한 부모가 늙어서도 행복하다>


 


육아와 자녀교육에 있어 전문가의 조언과 주장은 때때로 위험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큰 장애물이라고 생각한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심리학을 배경으로 하며, 인지과학이라든지 임상적인 통계자료를 제시하면서 과학적 근거를 이야기한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할 것까지야 없다. 그렇지만 전문가의 시야는 너무 좁아서 갑갑할 정도다. 분야를 막론하고 전문가들의 불치의 직업병은 과장 가득한 수사와 심각한 표정이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큰일 날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전문적인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다 보면 때로 큰 걱정에 휩싸이고 위협감을 느끼곤 한다. 그러다 보면 정상적인 판단을 그르치는 경우가 생긴다. 조직의 수장은 좀 더 넓고 멀리 바라보려고 하는데, 옆에 있는 전문가라는 참모가 자기 시선만을 계속 조언하다 보면 수장의 시선도 같이 좁아지기 마련이다. 전문가는 자기 전문 분야에서 통용되는 그럴싸한 데이터와 논문과 지식이나 경험에 기댄다. 전문적이면 전문적일수록 시야가 좁아지기도 한다.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경향이 생긴다. 육아와 자녀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전문가의 좁은 시야야말로 극복해야할 대상이 되곤 한다. 


 


 


그들에게는 ‘소심함’이라는 무기도 있다. 그들의 주장 대부분은 ‘필연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실험에 근거한 ‘통계적 근거’나 ‘확률’을 말할 뿐이며, 그런 데이터 뒤로 숨는다. 하지만 세상에는 ‘변수’가 많다. 인생은 일차방정식이 아니다. 확률변수도 한 개만 있는 게 아니라 매우 많은 확률변수가 엉켜있는 게 바로 우리의 세상사, 그리고  인생사다. 그 중에서 한두 개의 변수를 끄집어내서 과장해서 말하는 게 전문가의 병적인 직분. 자기 손에 있는 몇 가닥의 이야기를, 매우 당연한 이야기조차 실험 결과를 제시해야만 안심하는 것이다. 그 비좁은 실험결과를 이용해서 뻥을 치기도 한다.


 


 


괜찮아요, 즐기세요.


 


육아와 자녀교육은 너무 중요해서 전문가에게 맡겨놓을 수가 없다. 오히려 전문가보다 일반인의 통찰과 성찰이 더 중요한 시점이다. 우리 모두가 당사자다. 우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괜찮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우선 즐기세요.”



 


 


물론 이런 낙관적인 자세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특히 아이가 병들고 죽어가는 상황에서는 저처럼 한가하게 있을 수는 없다. 지독한 경쟁과 성공지상주의로 인해 아이들이 병들고 죽어가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서는 무엇인가 시급한 대책이 필요하다. 또한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부모의 언사와 행동이 날마다 지속되는 상황이라면 이 또한 시급히 상담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런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지독한 경쟁과 성공지상주의는 우리의 상황을 예외적인 한계 상황으로 내몰고 있지만), 사소한 육아기법까지 일일이 챙길 필요는 없다. 전문가들의 조언을 모두 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또 그게 가능하지도 않다.


 


맞벌이를 하는 가정이 있고 그렇지 않은 가정이 있다. 어떤 가정은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또 어떤 가정은 심각하게 가난하다. 어떤 가정은 자녀의 학습능력이 뛰어나도 또 어떤 가정은 그렇지 못할 수가 있다. 어떤 가정의 부모는 지식수준이 높지만 그렇지 않은 가정이 있다. 어떤 가정의 부모는 비교적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지만 어떤 가정의 부모는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피치 못하게 적을 수가 있고 심지어 주말 부부 혹은 기러기 부모일 수도 있다. 어떤 가정의 부모는 비교적 사이가 좋고 어떤 가정의 부모는 사이가 매우 안 좋거나 혹은 이혼할 수도 있다. 어떤 가정은 독실한 종교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또 어떤 가정은 종교적 가치를 부인하며 살 수도 있다. 어떤 가정은 경제적 성공을 중시하는 반면에 또 어떤 가정은 명예와 도덕적 가치를 중시할 수도 있다. 육아와 자녀교육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렇게 다양한 가족 환경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녀교육에 대한 일반론을 확립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저마다 다른 가족 환경에 맞춰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알맞은 행동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 때로는 육아와 자녀교육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가 중요하곤 하지만, 또 때로는 그런 가치보다 효율이 더 중요한 경우도 있다. 어쨌든 간에 대부분의 부모는 자기 자식을 사랑한다. 그게 우리의 가장 믿을 만한 안심거리다.


 


 


아이는 인간이다.


 


나는 시종일관 아이는 한 명의 ‘인간’으로 대우해줘야 한다고 믿는다.


이성적인 판단이나 도덕적인 행위에 있어서 미성숙하다고 할지라도, 아이도 다양하게 생각하며, 옳고 그름을 따지기도 하며, 판단하며, 욕망하고,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아파하고 슬퍼하며 분노한다. 아이는 연약하고 위험을 감지하는 게 늦기 때문에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이들을 보호해주는 거야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한 명의 인간임을 부인할 어떤 근거도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아이들은 어른들이 잊어버린 환상의 세계를 보존하고 있으며, 순수한 마음이라는 게 있다.


 


 


사실 아이가 한 인간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해서 특별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주 이런 사실을 잊곤 한다. 당신은 아이의 부족함을 잘 안다. 아이니까 부족하다. 반대로 아이도 당신의 부족함을 눈치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까먹는다. 부모의 연기력이 좋아서 설령 아이가 눈치채지 못한다손 치더라도 나중에 발각될 수밖에 없다. 늦으면 늦을 수록 아이는 배신감과 상실감을 경험하기 때문에 굳이 연기를 할 필요가 없다. 아이가 뭔가 부족하고 불만족하다고 해서 자기 아이를 사랑할 수 없노라고 느끼는 부모는 없다. 아이와 부모 사이에 무척이나 두꺼운 영적인 끈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이 또한 부모가 부족하고 불만족하다고 해서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쌍방이 그렇다. 이것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아주 많은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부모의 부족과 불만족을 감추려 들면 부모 자신도 피곤할 뿐만 아니라, 부모를 사랑하는 아이의 마음을 표현할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기도 해서 위험하기까지 하다. 사랑은 표현되지 않으면 옅어진다. 사랑을 표현하면서 아이를 한 인간으로 믿어주면 육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즐겁고 쉬워진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란다.


 


 


부모의 일관되지 못한 태도


 


전문가들은 아이를 대하는 부모의 일관되지 못한 태도를 지적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일관된 태도로 대할 것을 주문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부모 개인이 자기 자신의 행동과 태도를 성찰할 때 참고할 만하다.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인데다가 지키기는 몹시 어려운 그런 류의 조언이다. 이런 지적과 주문은 이를 테면 마치 미성숙한 어린 아이에게 태도의 일관성을 요구하는 주문과 크게 차이가 없다. 아이나 부모나 모두 정신적으로 미성숙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나이도 있고 배운 게 있어서 다소 유리하긴 하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태양이 동에서 떠서 석양을 만들며 서쪽으로 저문다는 무척이나 당연한 이야기를 근엄하게 하는 것과 같다. 성인이 되는 것은 미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딱 그 정도의 인간이며, 틈틈이 성찰하면서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아이든 어른이든 이쪽이나 저쪽이나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이제 중년이 된 나도 그저 나이만 먹었을 뿐 언제나 부족하고 빈틈이 많으며 모르는 것도 많다. 나이를 먹으면서 더 겸손해진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많다는 현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대개 이렇다. 어떤 경우에는 생각이 짧아서 엉뚱하고 잘못된 행동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지식과 경험이 부족해서 실수하곤 한다. 또 때로는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일을 그르치곤 한다. 우리 인간은 탐욕의 결정체이기도 하고 부족함을 말할 것 같으면 늙어죽을 때까지 배우다가 가는 그런 인생이다. 우리는 그냥 그런 인간들일 뿐이므로 일관된 가치관을 갖고 살기 어렵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기조차 힘이 드는 법이다. 일관성을 가지고 사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에게 일관된 태도를 보이는 것조차 겁나게 어려운 과제다. 영원한 과제다. 입시에서 전국 수석을 하고 서울대를 졸업해서 사법시험을 합격한 어느 유명 정치인이 마치 무슨 약품을 먹은 것처럼 최근 갈짓자 언행을 하며 국민들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만큼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이란 지식과 명예만으로도 되는 게 아니다.


 


일관성


 


우리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부모다. 아이들은 부모를 바라보고 흉내내고 배운다. 하지만 우리 솔직해지자. 우리는 부족한 인간이고, 연약한 존재이며, 어떤 부당하고 몹쓸 바람이 불면 쉽게 꺾일 수도 있는 약한 나뭇가지들이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완벽할 수 없으며 그런 경지는 가당치도 않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가식적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그런 것이 없어도 우리는 훌륭한 부모가 될 수 있고, 아름다운 연인이 될 수 있다. 완벽하고 일관되기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족하기 때문에 서로를 채워가며 사랑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안심이 찾아온다.


 


그러므로 나는 아이를 대하는 부모의 태도가 일관되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말로 괜찮다. 부모도 때로 무식하기도 하고, 세상의 변화에 뒤떨어질 수도 있고, 무엇보다 감정의 변화라는 게 있다. 부모도 욕망하며 기뻐하며 한탄한다. 단지 아이보다 힘도 세고 권세도 있다는 점을 악용하여 아이를 억압하는 것만 조심하면 된다. 아이를 한 인간으로 대우하고 인정한다면, 그리고 부모를 향한 아이의 항변을 잘 귀기울여 준다면, 정말로 괜찮다. 아이들에게 “감정의 배설구”와 “위로의 기회”만 자주 주어진다면 정말로 괜찮다. 감정의 배설구와 위로의 기회에 대해서는 이미 <나는아빠다 1~4, 14>에서 여러번 이야기했던 것 같다.


 


아이들은 평화주의자라서 금방 잊어준다. 금세 눈감아 준다. 인간의 정신을 송두리째 흔드는 게 아니라면 과거는 잘 기억되지 않는다. 일 년 365일을 꼼꼼이 기억하고 기록하면서 아이들이 자라는 게 아니다. 관용은 언제나 여기 있다. 이 얼마나 다행이며 큰 위안인가.


 


 


“지금 행복한 부모가 늙어서도 행복합니다”


 


김규항씨가 열심을 다하고 있는 <고래교육연구소>는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 중에서 첫 번째로 “지금 행복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행복합니다”라는 약속을 권한다. 눈부신 문장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아이의 미래를 염려하면서 무슨 편집증에 걸린 것처럼 아이의 오늘을 망치고 있다. 가끔 있는 일이라면 괜찮지만 우리는 몇 년이고 십 년이고 계속 그렇게 아이의 오늘을 망치는 것이다. 이건 정말 화가 나는 일이다. 우리는 공장에서 쏘시지를 포장하는 컨베이어처럼 열심히 그리고 묵묵히 아이들을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것보다 더 시급한 것으로, “지금 행복한 부모가 늙어서도 행복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다. 오늘날 우리 부모들은 오른쪽의 교육방법이든 왼쪽의 교육방법이든 아이의 양육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열정을 바치고 있다. 이것은 정말 가여운 일이다. 우리는 아빠가 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게 아니다. 엄마가 되기 위해 늙어가는 것도 아니다. 우리 부모는 부모의 인생이라는 게 있다. 전문가의 조언과 유행에 따르자면 아이의 인생(미래의 '가정'된 인생)을 위해서 정말로 챙길 게 많다. 통설에 따라 여러가지 뒷바라지 하자면 부모 중 한 명은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 소수설의 길을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반발의 대가는 부모의 시간이다. 그리고 맞벌이다, 사업이다, 무슨무슨 해야할 일이다, 등으로 남들만큼 아이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면 다른 가정과 비교하면서 죄책감과 자책감에 빠지곤 한다. 이게 한두 해가 아니다. 무려 20년이 넘도록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서른 살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20년을 양육을 위해 봉사하면 나이 오십이 넘는다. 그 나이가 돼서 무엇인가 새로 시작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그런 미래의 현실을 여기서 굳이 불러오지 않더라도, 20년은 너무나 긴 시간이다. 20년 동안 아이와 씨름을 해야 한다. 기왕에 한두 해 하는 게 아니라 십 년, 이십 년이라면 무엇보다 “부모가 행복한 양육”이 되었으면 한다. “이게 다 아이를 위한 거야”라는 최면술이 아니라, 진심으로 부모 자신이 행복한 양육 말이다. 사랑하는 아이가 성장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길.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양육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을 표현하고 사랑을 받는 양육을 권한다. 사랑을 주고 받을 때 사람은 행복한 법이니까. 이 긴 세월을 근심하고 조바심 내고 경련을 일으키며 아이를 양육할 필요는 없다. 부모나 아이나 피차 피곤한 일이다.


 


부모의 인생을 살아야하기 때문에 노후대비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건 완전히 개인의 몫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육아를 하는 것이라면, ‘기분 좋게’, ‘즐겁게’, ‘감정의 골 없이’ 양육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누군들 사랑하는 사람을 핍박하는 것을 즐거워하랴.


지나친 경쟁 속으로 아이들의 등을 미는 것은 죄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와 부모 사이의 관계에 긴장을 초래한다. 긴장이 많아지면 부모도 자녀가 성장하기까지 그 20년간의 세월을 속앓이하며 보내야 한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인생을 낭비하지 말자. 사랑을 표현하고 사랑을 받고, 가식을 버리고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노후대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피치 못하게 아이가 비린내 나는 경쟁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더라도,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의 스트레스를 풀어줄 수 있을까 생각하고, 그러다 보면 우리는 위로를 주고 위로를 받는다.


 


 


부부싸움


 


전문가들은 아이들 앞에서 부부싸움을 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또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이것도 지나치게 신경쓸 대목은 아니다. 만약 아이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어떤 정신적 데미지가 있는 경우라면 부부싸움을 아이 앞에서 해서는 안되겠지만, 그건 아이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그저 정신적인 괴로움이 있는 한 인간에 대한 예의일 따름이다. 늘상 부부싸움을 하면 아이들도 진저리치겠지만, 모든 부부가 항상 그러는 것은 아니다. 부부싸움은 일종의 감정의 배설이라서 매우 건강한 측면도 있다. 그걸 괜히 꾹 참고 아이들 앞에 드러내지 않으려는 행위는 부모에게 행복한 육아는 아니며, 가식적인 태도다.


 


 


괜찮다. 부부싸움을 하면 아이들은 부모를 관찰한다. 유아단계만 넘어가도 아이들은 누가 더 잘못했는지 판단하기까지 한다. 그보다 더 크면 ‘그만 싸우라’고 개입하고, 좀 더 크면 그만 싸우라며 ‘짜증’내고, 그보다 더 크면 ‘무관심’해진다. 부부싸움의 내용과 부부사이의 신뢰관계가 중요한 것이지 부부싸움 자체는 아주 심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부부싸움을 관찰하면서 부모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 매우 중요한 정보를 아이들은 취득한다. 별로 근거 없어 보이고 일관성도 없어 보이는 부모의 싸움을 보면서 부모도 여러가지로 부족하며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기회가 된다. 부모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은 부모와 아이 사이의 끈을 더 강하게 묶어 줄 수 있다.  또한 그렇게 싸웠다가 다시 아무 일 없었던 듯이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보면서 다툼과 화해의 사회성을 익힐 수도 있다. 무엇보다 부모도 인간이고, 인간은 감정을 적절하게 배설해야만 건강해진다. 부부 관계에서도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건강한 일이다. 감정을 속이지는 말자. 오해 때문에 나만의 가이드를 여기 써 본다.


 



(1) 정말 찰떡 궁합이라서 싸움이라는 것 상상할 수 없다면 더 좋겠지.


(2) 폭력과 욕설은 금물.


(3) 싸우다 보면 언성은 올라갈 수도 있는 법이지.


(4) 부부싸움을 했다손 치더라도 그건 부부 사이의 문제니까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면 반칙이지.



 


 


부모의 감정 표현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짜증날 때가 있고 감정이 폭발할 수도 있다. 화를 내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지만, 굳이 반대할 것까지는 없다고 하더라도 너무 귀히 들을 필요도 없다. 아이만 감정이 있는 게 아니고 어른들도 감정이 있는 법이며,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모년 모월 모일에 감정이 폭발했다고 해서, 아이의 머릿속에 “모년 모월 모일, 엄마는 별 시덥잖은 걸로 겁나게 짜증냈으며 인간적으로 모욕감을 느꼈음.”이라고 기록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아이를 감정적으로 위협하는 것이야말로 너무나 위험한 양육이지만, 그렇지 않고


 



(1) 가끔 감정표현이 격해지곤 함,


(2) 평상시에는 아이들을 안아주고 따뜻한 감정표현을 많이 했음,


(3) 화를 내고 짜증을 유발한 아이의 언행이 분명히 있음


(4)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아이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음



 


등의 나름 그럴싸한 요건을 만족하는 거라면 괜찮다. 정말이다. 그 정도는 아이들이 다 받아줄 수 있을만큼 아이들은 너그럽다.


 


부부 사이에서도 감정과 기호의 메시지를 전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아이한테도 마찬가지다. 오늘 내가 아이에게 화를 냈다고 해서 우리 아이가 오늘 바로 망가지고 깊은 상처를 입는 것이 아니다. 평소 사랑받는 아이는 그런 것 쯤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고 이해해 줄 수 있으므로 괜찮다. 부모가 정한 규칙이나 가르침을 정면으로 어겼다거나, 부모와의 약속을 저버렸을 때 화를 내는 것이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물론 사람의 성정마다, 아이의 나이마다 다르다). 그것마저 봉쇄해버리면 부모의 감정배출을 막는 것이어서 ‘부모의 행복한 육아’는 정말로 어려워진다.


 


‘난 정말 화가 났어.’, ‘엄마는 그것을 정말 싫어해.’, ‘아빠도 너무 싫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아이에게 강요하는 게 아니다. 부모의 감정과 기호를 아이도 알 필요가 있다. 아이도 감정을 파악하고 존중과 예의를 아는 인간이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도 아이의 감정을 지나치게 억눌러서도 안 된다. 서로서로 감정을 주고 받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바람직하다. 감정이란 일방적이지만 않으면 괜찮다. 물론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부드럽고 온화하게 말하면서 아이들을 잘 양육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태도가 자기 자신한테도 스트레스를 초래하지 않는다면, 그런 부모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부모가 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런 이상理想은 이상異常한 것이다. 요컨대 너무 훌륭해서 정상적이지 않은 것 말이다. 그런 부모의 모습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정상적인 육아법은 ‘그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아이에게 부모의 메시지를 좀 더 확실히 전해줄 수 있다는 점을 외면하지 말자. 어떤 전문가는 그런 행위의 폭력적인 모습이나 부작용을 지적한다. 내가 오늘 저녁에 라면에 찬밥을 말아먹었다고 해서 그것이 미치는 내 수명에 미치는 효과는 무시할 만하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수명이 연장될 수도 있는 거다. 수명은 인스턴트 라면과 찬밥만을 변수로 삼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전문가는 인스턴트 라면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을 지적한다.


 


 


체벌과 유사체벌


 


체벌은 아이의 신체에 아픔을 가한다. 직접적으로 체벌하지는 않지만 방에 혼자 있게 한다든지 정신공격을 하는 것을 유사체벌이라고 표현해 보자. 어떤 전문가들은 체벌뿐만 아니라 유사체벌까지 모두 금하는 태도를 취한다. 동의한다. 체벌이나 유사체벌은 아이들을 힘의 권세로 ‘순응’시키는 데 목적이 있으므로 정신건강상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다. 아이를 한 인간으로 대우한다면 우리는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가치관의 문제이겠지만,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가장 안 좋은 행위가 바로 폭력이다. 인권과 인격을 생각하면 우리는 언제나 폭력과 싸워야 하며, 아이가 한 명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주목한다면 체벌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부모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아이들이 무시하거나 반발했을 때, 그것에 대응하는 모든 부모의 태도를 규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체벌을 피하려니 정신공격을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어려움을 고고한척 외면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문제는 체벌과 유사체벌로 인해 자주 혹은 가끔 발생한 인권침해의 사태를 어떻게 치유하고 해결할 것인가, 이에 대한 조언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아이의 마음에 똥을 싸놓고 그것을 치우지 않는 것은 정말로 무책임하고 인간적으로 너무 한 일이다. 그러므로 체벌과 유사체벌 이후에 부모가 아이에게 미안함 마음을 표현하고 또 변함 없는 사랑과 위로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이 문제의 진정하고 현실적인 논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 평소 아이와 부모 사이의 심리적 끈을 따뜻하고 두껍게 만들 필요가 있다. 즉 체벌과 유사체벌이 아이들의 마음 속에 계속 남아서 ‘경험’되지 못하도록 부모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선 체벌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그런 상황까지 간 다음에는 아이에게 위로와 사랑이 더욱 전달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부모의 칭찬


 


어떤 전문가는 함부로 아이를 칭찬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칭찬도 적절하게 해서 아이가 부모의 과도한 칭찬으로 오염되지 않도록 유의하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좀 웃기는 이야기다. 부모가 사랑하는 아이를 칭찬할 때에는 정말로 기쁘고 즐겁고 사랑스러워서 칭찬하는 경우가 많다. 이건 정말 순수한 감정의 표현이다. 이 감정의 표현을 계산하면서 혹은 머뭇거리면서 할 이유가 없다. 사랑의 언어 표현의 기본은 “과장법”이다. 그리고 “비유법”이다. 이것을 사랑의 언어 표현에서 빼버리면 빈껍데기 언어만 남는다. 언어의 유희는 단순한 수사법이 아니라 감정 그 자체이다. 너무 즐겁고 기쁜 나머지 과장법과 비유법을 써서 애정을 표현했다고 해서, 칭찬을 했다고 해서 잘못될 리가 없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아이를 칭찬할 때에는 마음껏 과장법과 비유법을 써서 이야기해도 된다.


좀 더 과장하고 좀 더 비유적으로 표현을 포장함으로써 더 재미있는 표현을 구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오히려 괜찮다. 칭찬은 부모가 마음껏 할 수 있는 유머의 영역이다. 부모는 여기서 장미꽃을 들고 춤을 춰도 된다. 섣부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부모의 수사적인 표현과 실제 현실과는 다르다는 정도는 아이도 대개 알기 때문이다. 그건 아이의 몫이고 칭찬을 하는 부모가 굳이 그것까지 염려할 필요는 없다. 우선 내가 기분이 좋아서, 그리고 상대방도 기분이 좋아지라고 칭찬하는 것이지, 평가의 객관적이고 냉철한 지표를 염두에 두며 아이를 호평하는 게 아니다.


 


이런 건 칭찬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칭찬에 부모의 기대를 함부로 섞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칭찬은 일종의 아주 작은 파티인데, 미래를 향한 부모의 기대는 그 파티를 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칭찬이 스트레스를 줘서는 안 된다. 예컨대 극심한 경쟁에서의 성적의 지표에 대해서는 가끔 조심해야 할 때가 있다. 여기에는 즐거움만 있는 게 아니라 안스러움과 걱정도 있기 때문이다. 안스러움과 걱정이 끼면 언어의 유희는 함부로 날개를 달지 못한다.


 


<나는아빠다15>는 결국 부모가 행복한 육아를 위해서 “부모 자신의 감정의 배설”을 권하는 이야기가 됐다. 그렇다고 해서 무책임하고 무제한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적어도 세 가지가 전제돼야 할 것 같다. 첫째는 아이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이요, 둘째는 아이도 한 인간으로서 부모의 흠을 눈감아 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요, 마지막으로 공평의 관점으로 아이의 감정이 배설될 수 있도록 평소 아이를 공감하고 위로를 해줘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지금까지 세 번째를 주로 말해왔다.


 


정우성


두 아이의 아빠, 변리사, <특허전쟁> 저자, 곧 후속편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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