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2. 5. 22. 화요일

춘심애비


 



 



 


필자는 얼마 전 제주도에서 배낚시를 하게 됐다. 열댓 명의 일행들이 배에 탔고, 연안에 배를 세워두고 낚시를 하면 선장님이 즉석에서 회를 쳐주는 시스템. 그 때 사용한 낚싯대는 길이가 한 1~1.5m 정도 되고, 낚시줄에는 약 5~10cm 간격으로 낚싯바늘 6개가 달려있었다.


 


그러다 필자는 문득 호기심이 발동됐다. 필자가 낚시 매니아는 전혀 아니지만, 지금까지 얼음낚시, 민물 대낚시는 해봤는데 낚시대의 길이나 바늘을 다는 방법, 사용하는 미끼가 천차만별이었다. 게다가 영화에서 보던 플라이 낚시는 아예 접근 방식 자체가 존나 다르고, 루어 낚시라는, 생물도 아닌 걸 미끼로 쓰는 낚시도 들어본 적이 있다.


 


질문은 이렇게 시작됐다.


 


낚싯대는 왜 이리도 다른가.


 


 


 


1. 그냥 생각해 보는 낚싯대의 역사


 


필자가 낚싯대의 역사에 대한 논문이나 세계적으로 저명한 낚시잡지를 찾아보는 건 존나 귀찮기도 하고, 필자가 원하는 내용까지 나와있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봤다.낚싯대의 변천사.


 


우선, 태초의 낚시는 어떤 형태였을까? 인류 최초의 낚시 말이다. 그 추측을 위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원시적인 낚시를 생각해보자.


 


개구리 낚시.


 


동네마다 다르겠지만, 필자가 어릴 때 시골에서는 이렇게 했다.


 


동네 개천가에는 늘 있는 강아지풀을 하나 꺾는다.


 


그리고는, 잎사귀를 모두 제거하고, 끄트머리의 열매(?) 부분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낸다.


 


저러면 얼핏, 송충이 류의 벌레처럼 보인다. 저걸 개구리 많은 구역에서 톡톡톡 쳐주면 개구리가 벌레인 줄 알고 냅다 졸라 뛰어든다. 그때 낚아채면 성공.


 


그러니까, 아마도 태초의 낚시는 이와 비슷했을 거다. 가늘고 긴 섬유질 끝에, 목표 동물의 먹이와 비슷하게 생긴 걸 달고, 그걸로 그 목표 동물을 유인해서 물게 만드는 것. 편의상, 수천 년 전에 '첨바'라는 사람과 '왐바'라는 사람이 낚시 경쟁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첨바는 처음에, 강아지풀처럼 애초에 생겨먹은 게 그렇게 생겨먹은 식물을 도구로 썼다. 왐바는 맨손으로 개구리나 생선 하나 잡으려다 보니 엎어지고 자빠지고 난리를 치고 있는데, 첨바는 쉬크하게 뒷짐지고 서서 강아지풀을 톡톡톡 해주기만 하는데도 더 많은 개구리 혹은 생선을 잡았다.


 


왐바는 이걸 보고 부러웠을 테고 일단 따라해봤겠다. 그러다가, 강아지풀은 그리 긴 식물이 아니므로 허리를 숙여야 해서 불편하길래 좀 더 긴 섬유질을 얻기 위해 동물의 힘줄이나 질긴 나무의 섬유질 등을 이용해서 태초의 '낚싯줄'을 만들었다. 그 끝에 강아지풀 열매를 묶거나 혹은 아예 대놓고 작은 벌레를 묶어봤다. 생선이나 개구리가 그 벌레를 실제로 잘 먹기 때문에 더 잘 잡힐 거라고 예상한다. 그렇게 태초의 '미끼'가 만들어진다.


 


낚싯줄과 미끼의 조합으로, 왐바가 더 많은 생선과 개구리를 잡는다. 그리고 허리가 안 아프니 더 오래 낚시를 하게 된다. 시샘이 난 첨바는 미끼를 문 생선이나 개구리가 낌새를 차리고 바로 튀는 모습을 발견한다. 생각해 보니 생선뼈나 나뭇가지 등 아주 날카롭고 가늘은 뭔가가 입에 걸리면, 생선의 도주를 방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냈다. 그래서 태초의 '낚싯바늘'을 만들어낸다. 결과는 역시 대성공.


둘의 경쟁은 둘이 잡을 수 있는 생선의 양이나 크기를 늘려나간다. 처음에는 동네 개천의 개구리만 잡던 애들이 이제는 제법 손바닥만한 생선도 잡을 수 있고 말이다.


 


그러던 첨바, 왐바는 존나 큰 월척을 잡다가 낚시줄을 당기기가 졸라 빡세고 고통스럽다는 걸 깨닫고, 낚싯줄의 손잡이 역할을 할 뭔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 때 첨바는 나무가지에 묶었고, 왐바는 돌멩이에 묶는다. 그러다보면 첨바는 나무가지가 부러지는 사태를 경험하고서는 좀 더 강한 막대기가 필요했을 거다. 그리고 왐바는, 돌멩이로 낚시를 하면 낚시줄이 멀리 못 가서 생선들이 내 근처로 오기를 기다려야 하므로, 기다란 막대기가 더 유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거다.



 


가상으로 풀어봤지만, 그냥 상식적으로, 대략 이러한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갑자기 외계인이 내려와서 '이것이 낚시라는 것이다' 이랬을 리도 없고, 어떤 천재가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대나무 낚싯대, 면으로 뽑은 낚싯줄, 돌을 갈아 만든 낚시바늘을 뚝딱 만들어냈을 리도 없다.


 


위의 가상 상황에서, 첨바와 왐바는 같은 동네 사람이라는 전제를 했었다.


 


그러면 동네가 다르면 어떨까.


 


어떤 동네는 주변에 작은 강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 강의 수심은 얕고, 손바닥보다 작은 물고기 밖에 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낚싯대가 아주 강할 필요는 없었을 거다. 오히려 적당한 길이에 들고 다니기 편한 낚싯대가 유리했을 거다.


 


반면 어떤 동네는 존나 넓고 깊은 강이 있고, 물고기도 존나 크다. 그 동네의 낚싯대는 아마도 더 길고 존나 강해야했을 거다. 약한 낚싯대는 물고기의 힘을 못 이겨 부러졌을 테니 말이다. 어떤이는 대나무를 써보고 어떤 이는 소의 다리뼈를 쓰기도 했을텐데, 그러다 소의 다리뼈로 낚시를 하던 놈은 손이 너무 아파서 물고기를 건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거고, 대나무가 더 널리 쓰였을 거다. 그렇게 그 동네는 '강한 것보다는 질기고 유연한 것이 더 좋은 낚싯대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거다.


 


이렇게, 그 동네의 환경이나 생선들의 특징에 따라, 필요한 낚싯대의 형태는 달라졌겠다.


 


그렇기 때문에


 



 


존나 상관없어 보이는 모양의 이 두 가지 도구가 둘 다 '낚싯대'가 된다.


반대로 말하면, 낚싯대라는 것은 이렇게 전혀 다른 모양으로도 변화하게 된다.


 


정리해보자.


 



낚싯대의 형태는,  인간의 상상력만큼 다양한 형태가 시도되나, 그 중 그 지역 환경적 특징에 따라 가장 고기가 잘 잡히는 형태가 사용되며, 이것이 수없이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모든 낚싯대는 그 시점에 그 지역환경에서 가장 고기를 잘 잡을 수 있는 형태를 지니게 된다.



 


가만 이거 씨바 많이 보던 거다.


 



생물의 형태는, 유전자 조합의 경우의 수만큼 다양한 형태가 발생하나, 그 중 지역 환경적 특징에 따라 생존할 수 있는 형태의 개체만 생존하며, 이것이 수없이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모든 개체는 그 시점에 그 지역환경에서 생존에 가장 유리한 형태를 지니게 된다.



 


진화론의 핵심 원리와 존나게 유사하다.


 


 


 


2. 도구의 진화


 



 


진화라는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유는, 존나 당연하게도 살아남는 생물만 살아남기 때문이다. 말장난 같지만 사실이 그렇다. 일찍 죽은 개체의 유전자 특성은 그 개체가 죽는 순간 그대로 사라진다. 살아남는 개체가 번식을 하면서, 그 개체의 유전자 특성이 유지된다. 그러다 환경요인이 존나 갑자기 변화해서, 그때까지 살아있는 개체들의 유전자 특성이 적절치 못하면, 다 뒤진다. 우린 이걸 '멸종'이라고 부른다. 공룡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불편한 도구는 굳이 쓰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손톱을 깎을 때 칼이나 가위를 썼지만, 이제는 손톱깎이를 쓴다. 손톱깎이를 살 돈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면 다른 도구에 비해 월등히 편리한 이 손톱깎기라는 도구만 사용된다. 도구는 스스로 번식하지는 않고 유전자도 없지만, 인간의 상상력과 제조기술이 결합하면서 생물의 진화와 아주 비슷한 조건을 갖게 된 것이다.


 


위 사진의 식칼을 보자. 생긴 게 존나 다르다. 아마도 위쪽 칼은 수산업 종사자가 생선을 다듬는데 쓸거고, 아래쪽 칼은 일반 가정에서 다용도로 쓸거다. 칼을 쓸 때 필요한 힘, 강도, 잘라야 할 재료의 특징 등에 따라 칼날의 크기와 모양이 달라진다. 마치 수많은 종류의 '새'가 있듯, 그만큼이나 많은 종류의 '칼'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칼' 사이에도 공통점이 있다. 칼날부위에는 경도와 강도가 높은 금속이 사용된다. 최근에는 플라스틱이나 세라믹을 쓰기도 하지만 그것들도 경도와 강도가 높은 건 마찬가지. 반면, 굳이 손잡이 부분은 강도와 경도가 높을 필요가 없고, 손에 잘 잡히면서 미끄러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보통 플라스틱이나 나무처럼 무른 재질이 쓰인다. 예외도 있지만 대체로 그렇다.


 


이건 마치, 다수의 생물들이 생식방법이라던가, 소화 방식, 호흡 방식이 대체로 유사한 것과 비교할 수 있겠다. 물론 예외는 있지만, 새는 유성생식, 체내수정, 난생이라는 사실을 공유한다. 즉, 주변환경의 차이와 별 상관 없이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요소들도 존재한다는 얘기다. 마치 생전 처음 보는 모양의 새라도, 보는 순간 새라는 걸 알 수 있듯, 생전 처음보는 칼이라도, 그게 칼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정리하자면, 길고 긴 시간동안 생물들이 진화하는 것과 매우 흡사한 원리로


 


도구들도 진화한다. 그 원리의 유사성이 꽤나 높기 때문에 진화의 형태도 상당히 흡사하다.


 


가만, 그런데 말이다.


 


과연 칼, 낚싯대, 망치, 이런 거만 진화할까?


 


권력집단은 <언론>을 권력유지의 <도구>로 사용한다.


기업은 <마케팅>을 매출 신장의 <도구>로 사용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들의 정치참여는 <직접투표>라는 <도구>를 통해 이뤄진다.


 


이런 <무형의 도구>도 진화하지 않을까?


 


 


 


3. 진화하는 무형의 도구, 그리고 정치전략


 


이런 가정을 해볼 수 있다.


 


진화의 근본적 원리가 <유전자 조합의 다양성>과 <적자생존>이다. 즉 <다양성>과 <적자생존>이 적용되는 세계에는 진화가 발생할 수 있다. 모든 도구는 <상상력을 통한 다양성>과 <적자생존>이 적용되므로 진화가 발생할 수 있다. <언론장악>이나 <정경유착> 같은 무형의 도구도 <다양성>과 <적자생존>에 적용되므로, 역시 진화가 발생할 수 있다.


 


이는 3단논법으로 증명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전략'이라던가 '기술' 같은 무형의 개념도 진화와 유사한 형태로 발전할 수 있을 거라는 얘기다.


 



마치 1:1 대전게임의 커멘드 처럼 말이다. 공략집 같은 정보가 전혀 없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트리트파이터2를 맞딱드린 상황을 떠올려보자. 상상가능한 모든 커멘드 조합을 다 해볼거다. 조이스틱 돌리고 버튼 바꿔가며 누르고, 수십 수백 가지 조합을 다 해보면, 어떻게 하면 장풍이 나가고, 어떻게 하면 잡기를 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파악이 끝나면 다른 쓸모없는 조합들은 다 버리고 기술이 나가는 커멘드만을 사용한다.


 


즉, <다양성>과 <적자생존>이 조합됨으로써, 우리는 가일을 선택해놓고 아도겐 커멘드를 더 이상 넣지 않게 되며, 라데꾸 커멘드를 넣을 수 있게 되는 거다. 그리고 더 많은 게임 경험을 통해, 얍삽이도 깨닫게 되고 말이다. 공략집이나 인터넷이 없더라도, 누가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한 돈만 있으면, 철권에서 12단 콤보를 할 수 있게 되는 거다. 먹히는 기술만 사용하고, 안 먹히는 기술은 버리는 매커니즘, 즉, <진화>와 유사한 메커니즘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무형의 개념, 기술, 전략 등도 수많은 시도 가운데서의 적자생존을 통해 <진화>와 유사한 발전을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기술, 전략 등 무형의 도구도 선택과 폐기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그 시점에서는 그 환경에 가장 적합한 형태를 지니게 된다.


 



(출처 : 별장통신)


 


이와 같은 전제로, 전두환 같은 놈이 권력을 잡은 상황을 생각해보자. 누가 봐도 존나 말이 안 되는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각종 상상력을 동원했을 거고, 그는 이런 생각을 했겠다.


 



'뉴스 많이들 보잖아? 내가 잘한 거만 뉴스에 내보내.'



 


그래서 우리는 땡전뉴스를 존나 봐야만 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실제로 티비 뉴스라는 것이 지니는 기능성에 힘입어, 다수의 대중들이 그의 권력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데에 긍정적 역할을 한다. 그래서 땡전뉴스는 계속된다.


 


그러다가 환경이 변화한다. 더이상 그런 조또 말도 안 되는 거짓부렁으로 자신의 권력만 추구하는 리더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발생한다. 그러면 땡전뉴스 전략은 폐기된다. 새로운 환경에 맞지 않으니까. 반대로 '보통사람'이라는, 독재자의 절친이 친구 빽으로 대통령 후보에 나서면서 입에 담는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전략이 선택되고, 그 전략은 성공한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에게 '경제', '경기' 등의 키워드가 먹힌다는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기도 한다. 그러면 대통령후보가 '보통사람'이면 큰일난다고 생각할 거다. 자기가 손만 대면 경기가 존나 살아나는 정도가 아니라 펄펄 뛰고 날아다닐꺼라는 뻥을 치는 게 더 유리하다는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리고 그 전략은 성공한다. 보통사람 전략은 폐기되고, 경기부양 구라 전략이 생존하는 거다.  


 



 


이 구라로 대통령이 된 가카는, 현재 환경에 맞지 않게 땡'이'뉴스도 해보고 라디오방송도 해보지만 존나게 욕을 먹는다. 환경에 맞지 않는 도구였던 셈이다. 하지만, 측근을 방송사 고위층에 낑궈넣는 전략은 성공한다. 그 도구는 환경에 맞았기 때문에 계속 사용된다.


 


일단 상징적인 몇 가지 정치전략의 변화만 슬쩍 둘러봤다.


 


물론, 훨씬 다양한 방면에서, 훨씬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이러한 정치 전략들은 성공과 실패, 생존과 폐기를 반복하면서 진화해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정치전략은 그 전략을 사용하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그 시점, 그 환경에 가장 적합한 형태를 지닌다.


 


잠깐, 진짜?


진짜 가장 적합한가?


그렇다면 야권의 전략도 야권에 가장 적합해야 하는 거 아닌가?


씨바 지금 이게 가장 적합하다고?


4.11 총선에서 야권의 전략이 가장 적합했다고?


 


 


 


4. 진화의 또다른 변인. <가치>


 



 


생태계의 진화에 있어서, 어떤 생물의 형태가 그 환경에 적합지 못한 시점이 있다면, 그건 환경이 갑자기 변화한 것에 그 생물의 형태변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해서일 거다. 위에서 말했듯 공룡의 멸종도 그렇고, 갑자기 더워지는 바람에 죽어가는 동물들도 있고, 갑자기 공기가 존나 더러워지는 바람에 죽어가는 동물들도 있고 말이다.


 


생태계의 기본 원리인 <유전자의 조합 다양성>과 <적자 생존>은, 이미 주어진 것이므로 더 이상의 변인이 없다. 돌연변이도 유전자 조합 다양성의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이 만드는 도구는 다르다. 변인이 있다. <인간의 마음> 혹은 <인간의 의도>가 그 변인이다.


 


어떤 할머니들은 아직도 손톱을 가위로 깎는다. 손톱깎이가 분명 더 편한데도 말이다. 그건 그 할머니에게는 그 가위가 더 친숙하기 때문이다. 손톱깎이는 낯선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측면이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즉, 친숙함이라는 가치는 그 할머니에게 있어 진화의 흐름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그 이외의 도덕적, 윤리적, 사상적, 미학적 등등의 가치 또한 마찬가지다. 수백만 원 하는 이태리 수제 하이힐보다 한 20만 원 하는 나이키 운동화가 발에는 훨씬 더 편하다. 하지만 미학적 가치, 소비적 가치로 인해 하이힐은 하이힐대로 진화하고 운동화는 운동화대로 진화한다. 배낭이나 크로스백보다 훨씬 불편한 토트백을, 사람들은 들고 다닌다. 전통문화라는 가치를 위해 존나게 불편한 방법으로 종이나 옷감을 만들기도 한다.


 


예전 조!족 기사에서 말한 적 있듯, 이러한 <가치>라는 것은 인간을 다른 생물들과 구분짓게 해주고, 인간의 <문명>이란 걸 만들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가치>로 인해 다소간 도구의 진화의 방향을 거스르도라도 그건 나쁜 게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인간다움을 드러낸다. 물론, 잘못된 <가치>는 올바른 방향으로의 진화를 가로막아 모두에게 해를 끼치기도 한다. 그리고 올바른 <가치>는, 도구의 진화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방지하기도 한다.


 


<가치>로 인해 도구의 진화를 인위적으로 막는 예들은 많다. 인류는 어떤 무기의 살상력이 매우 클 경우, 그 무기 개발에 제한을 두도록 합의한다. 그 무기가 점점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향으로 형태를 갖추지 못하도록 말이다. (이게 군수산업체들의 로비 결과라는 설도 당연히 있다. 그러므로 옳고 그른 판단은 하지 않겠다.) 그리고 종교적 가치로 인해 많은 국가에서는 유전자 복제 연구를 금지시킨다.


 


그러므로, 이<가치>라는 것이 어떠한가, 또는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의 진화 속도나 방향은 차이를 지닌다.


 


바로 이런 이유로, 야권 내 세력들의 <정치적 전략>이라는 도구는, 정치적관점에서는 가장 적합한 형태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보수진영에서는 친인척 성추행을 해도 모른 척 하는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내부의 비판이 외부에서의 비판보다 더 날카롭다. 나꼼수 1년 간, 수많은 칭찬과 함께 얼마나 많은 비판을 받아왔던가.


 


즉, <가장 적합하면서도, 가치를 저해하지 않는 형태>의 도구를 만들어야 하므로, 가치란걸 무시하고 만든 최상의 도구에 비해 적합성이 떨어질 수 있다. 즉, <가장 적합한 형태가 아닐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인간적이기 때문에, 비인간적인 세력과 싸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조건이다.


만약 진정한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었다면, 이런 조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거다.


인간성과 비인간성의 싸움이기 때문에, 이런 조건이 주어져있는 것이고, 우린 이것을 염두한 채 싸워야 한다.


 


 


 


5. 야권 진영의 도구들


 





 


그 <가치>를 위해 다소 더디게 걸어온 발걸음. 더디다고 해서 무조건 성능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마치, 힘들게 맷돌로 갈아낸 콩국이, 전기믹서로 갈아낸 콩국보다 비싸고 몸에 좋고 맛있는 것처럼.


이와 같이 야권 내 성공사례로 볼 수 있는 도구들을 보자.


 


노무현은, 그의 정치인생을, 원칙과 소신으로 일관했다. 바보소리 들어가면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대통령이 됐다. 그의 우직한 정치적 전략은 성공했고, 유시민 등 많은 사람들이 그의 도구를 계승하려 한다. 그의 삶의 궤적에서는 그 도구가 가장 적합했고, 실제로 성공을 거둔 셈이다.


 


박원순의 궤적에서는, 올바른 가치관과 그 실현을 위한 날카로운 능력이 필요했다. 대기업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도덕적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 말이 쉽지 그거 존나 어렵다는 거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거다. 조중동에서 존나 씹어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박원순에게서 찾아낸 건 <대기업의 후원을 받았었다는 사실>뿐이지 않은가. 아무리 찾아봐도 더러운 구석이 없었다는 거고, 그건 그만큼, 박원순이 생존과 가치 실현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해, 완벽에 가까운 현실적 능력을 길렀다는 얘기겠다. 그래서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칭찬 받는 시장이다.


 


김진숙 지도는 <인간> 그 자체로 접근한다. 인간 본연의 맨몸으로, 부산물에 불과한 권력에 맞서는 상징성을 보여준다. 이 접근은 보는 이들의 인간성을 자극한다. 이 사회에서 항상 억압당하는 사람들에 편에 서왔던 세력들의 도구 중 가장 원초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진화한 정치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정리하면 이렇다. 노무현은 <가치>를 지키기 위해 기득권층의 도구 진화방향과 정확히 정반대 방향을 향하는 도구를 사용했다. 반면 박원순은 <가치>를 지키면서도 성능면에서 기득권층의 도구를 압도하도록 자신의 도구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김진숙은 <가치>의 원천인 <인간>의 핵심으로 접근하여 그 자체로 가장 아름다운 도구를 보여준 셈이다.


 


이 사례들은, 현실적으로도 야권의 주요 세력들 중 3개 세력을 대표하기도 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바, 혹은 대중들이 그 세력들에게 기대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럼 나머지 세력들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전통 민주당 세력. 그들이 사용해온 도구는 이런 식이었다. 자신들의 사리사욕에도 도움이 되면서, 존나 욕을 쳐먹지는 않을 수도 있을 만한 쉴드를 동시에 갖추는 것. FTA 폐기를 외쳐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을 때는 막 나서다가, 막상 나서야 할 때는 이런저런 핑계로 빠지고, 나꼼수에 업혀야 할 때는 존나 업히다가, 안 될 거 같음 빠지고.


 


이러다 조때겠으니까 노땅 둘이 손을 잡고, 손을 잡는 순간 이미 예상가능한 모든 비판에 대한 답변을 준비한 후, 그 시나리오대로 답변하며 물타기 하고.


 


또 다른 세력 하나 있다.


 



 


유시민에게 존나 헤드락거는 이 세력은, 그 자신들의 <가치>만이 옳다는 믿음을 근본으로 한다. 소비에트 파시즘과 북한 독재를 긍정하는 사상을 그 근본에 깔았던 이 세력은 그 사상이 잘못됐고, 환경에 부합하지 않아서 폐기됐는데도 불구하고, 그 폐기된 도구가 (혹은 그중 일부가) 아직도 옳다고 믿어버리는 집단이다.


 


그러니까 이 세력은 가위로 손톱을 깎는 게 <옳다>고 믿는 거랑 비슷하다. 그래서 가위로 손톱을 깎다 보면 피도 나고, 손가락을 자르게 되기도 하고, 그러다 파상풍으로 죽기도 하고 쌩 난리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옳아 씨바> 이거 하나로 밀고 나가려 한다. 이미 폐기된 도구를 굳이 다시 살려야만 한다는 믿음 때문에.


 


그러기 위해, 그들은 <강제력>을 사용한다. 진화의 흐름과 역방향으로 가기 위해 다른 모두를 멈춰세우고 자신의 방향으로 돌리기 위한 <물리적 힘>을 쓴다. 손톱 깎는 가위를 팔려면 강매나 사기 밖에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강매와 사기를 계속해왔다. 그러다 걸렸다. 딱 걸렸다.


 


 


 


6. 성공과 실패의 차이. 그리고 진화


 



 


전통 민주당 세력과, 구 당권파(혹은 NL, 혹은 경기동부 등등) 세력의 공통점은


 


<내가 살아야, 우리 가치를 살릴 수 있다>는 태도이다.


 


여기서 사퇴하면 우리 가치는 끝난다. 여기서 당권을 못 잡으면 우리의 가치는 사라질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자신의 생존>을 <가치의 유지>와 등가로 치환하고,


 


살아남기 위한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그런데 말이다, 이 태도는 모순이거나 오만하다. 내가 살아야 지킬 수 있는 가치라는 얘기는, 내가 없으면 사라질 가치를 얘기이다. 그 얘기는 둘 중 하나다. 다른사람들은 별로 시덥잖게 생각하는 가치이거나, 혹은 가치 자체는 중요하고 고귀한데, 사람들이 아직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거나.


 


사람들이 시덥잖게 생각하는 가치라면, 그냥 없어지면 된다. 굳이 지가 살아남아서 그걸 지킬 필요가 없다. 지킬 필요가 없는 걸 지키기 위해 살아남는다면 그건 모순이다. 혹시 후자라 해도, 그와 같은 이유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건 너무 오만하다. 그 태도에는 '오직 나만이 이 가치를 살릴 수 있어'라는 생각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졸라 오만해서 재수없다. 시바.


 


반면 앞서 밝힌 노무현, 박원순, 김진숙 성공사례의 공통점은


 


<우리 가치를 살릴 수 있다면, 내가 죽어도 좋다>는 태도이다.


 


여기서 내 사욕을 부리면 다 죽는다. 여기서 포기하면 다 죽는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욕먹고, 쳐맞고,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해야할 일을 한다.


 


(박원순이 뭘 포기했냐고 물어볼 사람들에게 미리 대답한다. 당신같으면 수백억 벌어놓은 상황에서 그걸 수천억으로 만들고 싶겠냐, 아니면 수백억 벌었으니까 이제 평생 깎아먹으면서 살고 싶겠냐. 변호사 이후의 삶은 분명 자기 희생에 가깝다.)


 


자 정리해보자.


 


모든 생물은 진화한다. 그리고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도구도, 생물의 진화와 거의 유사한 메커니즘으로 진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도구는, 그 시점에 그 환경에서 가장 적합한 형태를 지닌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고, 그래서 <가치>라는 것을 염두한다. 그 <가치>에 따라서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는, 실용적 측면에서 다소 적합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치라는 게 없는 비인간적인 부류>와의 경쟁에서 우리는 다소 불리함을 필연적으로 지니게 된다.


 


그 불리함 속에서, <내가 살아서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 <내가 죽더라도 가치를 지키겠다>는 세력이 있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말이다,


 


우리는 이 세력들 각각을 <나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필요한 정치적 도구>라고 보면


 


가차없이, 쓸데없는 건 버리고, 유용한 것만 선택할 필요가 있다. 모든 개체가 그러한 행위를 반복해야 이 세계의 도구들이 진화할 수 있다. 첨바는 첨바대로, 왐바는 왐바대로 지들 입장에서 유용한 것만 취하고, 쓸모없는 건 버려야지 그 동네의 낚싯대는 진화할 수 있는거다. 강아지풀에서, 대나무와 낚시바늘로 말이다.


 


가차없이 버리자. 본인이 지켜야할 가치는 지키되, 그 가치에도 맞지 않고 쓸모도 없다면, 그건 버리자.


 


그리고 쓸모 있는 세력만, 혹은 내 가치와 일치하는 세력만 고르자. 각자가, 그렇게 하면 된다.


 


이렇게 선택과 폐기, 그리고 선택된 것 안에서의 다른 상상력을 통한 새로운 시도,


 


이것이 무한반복되면 그 도구는 진화하게 된다.


 


여기서 필자는 <내가 죽더라도 가치를 지키는> 세력을 선택하기를 권한다.


 


그들이 더 인간적이고, 실제로 성공적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살아야 가치를 지킬 수 있다>는 세력은, 그냥 무시해버리길 권한다.


 


걔들은, 씨바 재수없다.


 


요즘처럼 뭐가 뭔지 헷갈리는 시기일 수록,


 


이 기본적인 원리를 상기해야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도구에 대한 선택과 폐기를 반복하고, 선택한 도구에 더 많은 상상력을 부여하고,


 


그 과정에서 가치에 맞지 않는 것들은 배제하고,


 


이모든 과정을 무한히 반복하면 모든것은 진화한다.


 


이번 글은 다소 용두사미스럽게


 


끝.


 


춘심애비


트위터 : @miiru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