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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5. 21. 월요일

Matti


 



이 글은 엠엘비파크 불펜에 올려져 있는 시리즈입니다. 몇 년 전부터 불펜을 눈팅만 하다가 2년 전에 가입을 했습니다. 그동안 주로 진보진영 내의 문제점들에 대해 글을 써왔습니다. 그 중 NL에 대한 글을 많이 썼던 것은 제가 그들을 특별하게 증오해서도 아니고 제 청춘의 후회 때문도 아닙니다. 단순하게 그들이 진보진영의 다수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급격하게 변하는 내부의 정세를 보면서 놀랍기도 합니다. 전 글을 쓰면서도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냥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심정으로 내부고발 비슷한 글들을 제가 애정을 가진 그 곳에 올렸을 뿐입니다. 


 


저는 대단한 운동 경력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학교 단위에서 운동한 평범한 대중활동가였습니다. 어떤 이들이 보기에는 대중활동가라는 평가도 과분할 수 있습니다. 정태인이 예전 인터뷰에서 자신을 '돌 던지는 사람'으로 규정한 적이 있습니다. 그와 동기였던 유시민과의 추억을 회고하면서 나온 말인데, 유시민은 '택 짜는 사람', 자신은 '돌 던지는 사람'이었다는 거죠. 저 역시도 지도부가 아닌 '돌 던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지금까지 썼던 글이나 이 글이나 예전에 운동을 하셨던 분들이 보시기에 수준이 낮아보일 수 있습니다. 세밀하게 들어가면 틀린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글을 올리는 게 부끄럽기도 합니다만 이런 글들도 누군가는 한 번쯤 올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담담한 글을 하나 올립니다.


 


제목은 거창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 주사파. 단어부터 무시무시합니다. 이미 체제경쟁이 끝난 마당에 어떻게 주사파가 있을 수 있는가. NL은 무엇이고 주사파는 무엇인가. 그 둘은 다른 것인가. 주사파는 제거할 수 없는가. 비주사 NL은 또 무엇이며, 합리적 주사는 또 무엇인가. NL과 주사파는 다르다는데 NL은 왜 주사파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가.


 


여기에 대한 질문들을 던지면 보통 엔하위키 등의 링크나 운동권의 복잡한 계보들이 댓글로 달립니다. 적절한 대답이기는 하지만 짧은 댓글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계보 이런 것들을 떠나 90년대 대학시절로 돌아가 당시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이 글은 주사파에 대한 악마, 광신도라는 규정을 넘어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글입니다. 80년대 엄혹한 시절 음지의 대학생들이 그랬듯, 90년대 역시도 마찬가지의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타인을 위해 살아갔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시민은 항소이유서에서 평범한 청년이 어떻게 폭력 과격 학생의 대명사가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저도 이 글에서 90년대 평범한 대학생들이 어떻게 주사파가 되고 '신념의 강자'가 되고 운동에 자신의 삶을 바칠 수 있는지에 대해 담담하게 기술해보고자 합니다. 에필로그까지 이어지는 이 글을 다 읽고 나신 뒤에는 '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라는 제목이 폭로가 아닌 다른 무엇임을 이해하시리라 생각하며 글을 시작합니다.



 




 


먼저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말씀드립니다.


 



1. 편의를 위해 현재형으로 서술합니다.


 


2. 경제성을 위해 단정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3. 이 글의 내용은 전형적인 사례를 예시로 든 것이며 예외는 많습니다.


    큰 틀에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 PD와 관련해 비하의 소지로 보일 수 있는 부분이 조금씩 나오는데


    PD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NL에서 바라본 모습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 재생산 -


 


학생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운동인자의 재생산입니다. 선배들은 학년마다 맡은 역할이 있고, 결국에는 졸업을 하게 되기 때문에 후배가 들어오지 않으면 그 단위에서의 운동은 끝이 납니다. 그래서 신입생 사업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나쁘게 바라보면 소위 '순진한 후배들 꼬시는' 선배들이 되는 건데 그렇게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방식이 좀 음습하기는 하지만 정권의 탄압이 여전하던 시대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글을 읽으시면 아시겠지만, 순진하게 세뇌되서 포섭되는 신입생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기로들이 있습니다. 운동을 정리한다고 어딘가로 납치해 폭력을 가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운동을 정리하는 순간 잃는 것들이 있습니다만 그건 성인으로서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몫입니다. 그걸 염두에 두시고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90년대 들어 학생운동은 학생회 사업으로 매몰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학생회 1년 스케쥴은 신입생 사업이 알파이자 오메가가 됩니다. 이걸 PD 일각에서는 달력식 투쟁이라고 비판합니다. 학생회 본관을 점거하며 농성을 하다가도, 철거촌에서 용역들과 싸우다가도 정해진 날짜가 되면 썰물 빠지듯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 신입생 OT


 


이때 선배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입니다. 각 조마다 골고루 배치됩니다. 그리고 OT가 하루씩 끝날 때마다 모여 신입생들의 성향을 총화합니다. (NL들은 '총화'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데 정보의 교환, 정리, 상담 등을 통틀어 '총화'라고 합니다.) 그리고 OT가 끝나면 날을 잡아서 제대로 총화를 다시 합니다. 여기서 논의되는 것들은 신입생들에 대한 모든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정치적 성향, 대중성, 취미, 그룹 등 정말 모든 것이죠.


 



 


예를 들면 같은 단위 내에 상대정파인 PD가 있는 경우 PD멤버들이 친한 신입생은 누구인지도 유심히 관찰해 정보를 공유합니다. 그래서 그 신입생과 친분이 있는 NL멤버가 그 신입생을 맡는 형식입니다.


 


그 정보들을 토대로 개강 이전까지 사전작업을 합니다. 일단 진보적 정치성향을 보이는 친구들과 대중성이 뛰어나 보이는 친구들에게는 따로 연락을 해서 만납니다. 그리고 선배들이 각자 유별나게 친해진 후배들을 또 따로 만납니다. 스스로 정치성향을 보이는 친구에게는 가능하다면 직접적으로 학생운동 제의를 하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조심스럽게 접근합니다. 그 외의 신입생들과는 별 거 없습니다. 그냥 만나서 놀고 친분관계를 쌓습니다.


 


 


학기초


 


두 가지 핵심 사업이 있습니다. 하나는 동아리 가입, 다른 하나는 학자투(학원자주화투쟁)입니다.


 


재생산의 핵심 고리 중 하나가 동아리 가입입니다. NL이든 PD든 각자가 장악하고 있는 동아리들이 있습니다. 신입생들에게 각자 자신의 동아리에 들어오도록 권유를 합니다. 과동아리의 경우에는 주로 사회과학 동아리이고, 중앙동아리의 경우에는 풍물패, 교지, 신문사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뜬금없는 내용의 동아리들이 운동권인 경우도 많습니다.


 


일단 동아리로 묶여 있어야 신입생들과 인간적 관계를 맺기가 용이하며, 체계적인 학습을 시키기도 쉽습니다. 그리고 대개 이 동아리 후배들 중에 NL운동권이 나오게 됩니다.


 


학자투도 굉장히 중요한 사업입니다. (PD들은 교육투쟁이라고 합니다.) 등록금 투쟁이 대표적입니다. 등록금 문제는 학우들의 피부에 와닿는 부분이기 때문에 신입생들을 설득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선전전과 집회에 나가게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입생들 대부분이 나갑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남는 이들 중에 운동인자들이 발견됩니다. 대개 동아리 소속이거나, 선배들이 각자 공을 들여 인간관계를 형성한 이들입니다.


 


이때의 선전 내용은 이러합니다. "등록금 문제는 국가의 세금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국방비가 너무 많다. 특히 주한미군 지원비 비율이 높다. 대학생들 등록금 줄 돈은 없으면서 주한미군에게 줄 돈은 있단 말인가. 이건 불합리하다." 물론 이런 내용이 등록금투쟁의 전부는 아니지만 반드시 들어가는 내용입니다. 대부분의 합리적 주장들 속에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적절하게 섞여 들어갑니다.


 



 


 


* 정파의 결정


 


학생운동에 정파는 많습니다. PD만 정파가 많은 게 아니라 NL도 따지고 들어가면 정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신입생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최초에 만나는 선배 그룹, 혹은 동아리, 소속 학교가 정파 결정의 모든 것을 좌우합니다.


 


저희 학교의 모 단과대는 학부제를 실시했는데 재미있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학부제를 실시하는 학번부터는 NL은 모두 김씨, 학생연대(PD계열, 훗날 전학협)는 모두 이씨 이런 식입니다. 학부제가 되면서 이름 순서대로 반을 잘라버린 다음에 각 과별로 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씨가 모인 반은 NL이, 이씨가 모인 반은 PD가 선배가 됩니다. 가끔 같은 박씨인데도 누구는 NL, 누구는 PD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중간에 잘려서 그렇습니다.


 


우습기는 합니다. 김씨에게는 민족해방의 피가 흐르고, 이씨에게는 노동해방의 피가 흐르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만큼 신입생들에게 선배가 누구인가는 절대적입니다. 그렇지만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이 주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파 간에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저는 다행히도 신입생 시절 PD계열의 좋은 선배들과도 교류하게 되어 최소한의 균형은 잡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결국 NL을 선택하면서부터는 싸늘한 취급을 받다가 결국 관계가 소원해졌습니다.


 


 


* 5.18


 


학원자주화투쟁은 4월말이 되면 흐지부지 됩니다. 장기적 투쟁이 되면서 동력이 떨어지는 것도 있지만 일단 PD에서 5.1 메이데이(노동절)에 총집중을 하면서 이완이 되기 시작합니다. 4.30 청년학생투쟁대회와 5.1 메이데이는 PD에게 가장 중요한 사업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도 이 사업을 통해 신입생들을 포섭합니다. 이때 신입생들을 두고 정파 간에 신경전이 벌어집니다. 메이데이에 참석할 정도의 신입생이라면 어느 정도의 정치의식이 생긴 경우인데, 메이데이 행사를 권유하는 PD 선배들에게는 명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입생들이 NL 선배들에게 메이데이 참석에 대해 물어보면 어떻게든 PD 쪽으로는 참석하지 않도록 설득을 합니다.


 


당연히 NL들은 PD가 중심이 되는 메이데이 투쟁을 고의적으로 방기합니다. 통일운동 사업이 아니기도 하지만, 어차피 PD들이 주도권을 잡는 판에 쪽수를 보태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메이데이 당일에만 참석하고 그것도 집결지는 PD들과 다른 곳으로 잡습니다. 그리고 노동절임에도 불구하고 통일 구호를 외치고 통일 노래를 부릅니다. 어느 해에는 저희 학교 NL 중에 4.30대회에 저 혼자 참석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위 동료들이 제 행동에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5.18이 다가오면서 NL들도 이완이 됩니다. 5.18은 NL, PD 모두에게 중요한 사업이지만 방점이 다릅니다. PD는 주로 '광주꼬뮌' 같은 단어를 쓰며 민중들의 자발적 항거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지만 NL은 미국 문제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 때부터가 본격적으로 신입생들에게 반미와 관련한 문제의식을 던져주는 시기입니다. 일반인이라면 광주항쟁은 분노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사안이며 90년대는 지금보다 더했고, 80년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미국이 전두환의 광주학살을 묵인하고 방조했다는 주장이 곁들어집니다. '광주학살 진짜 주범, 미국놈들 몰아내자'라는 구호가 등장합니다.


 


 


* 커리(커리큘럼)


 


사회과학 동아리 이야기를 잠깐 해보겠습니다. PD는 공부를 많이 하지만 NL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90년대 들어서고 시간이 흐를수록 NL이나 PD나 학습량이 줄면서 다 함께 무식해집니다. 그래도 PD가 더 똑똑하기는 합니다.) 읽어야 할 책도 적고, 문화 전반이 감성적입니다. 그리고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정치의식이 높고 자기 주장이 강한 신입생을 NL에서는 경계합니다. 똑똑하다고 생각하기보다 품성이 좋지 않고, 쓸데없는 의문을 많이 가진다고 평가합니다. 그런 신입생은 선배들이 주의 깊게 관리합니다. 애초부터 권위주의 문화에 순응하는 사람을 높게 평가해주기 때문에 주로 그런 사람들이 남고, 톡톡 튀는 신입생들은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결국 운동을 정리하거나 PD로 전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언뜻 보면 NL은 사람이 좋고, PD는 싸가지가 없어 보입니다. NL의 특징인 집단주의에 걸맞는 이들만 남게 되는 이유입니다.


 


학기 초에 읽는 커리 주제는 주로 철학, 역사인데 얇고 가벼운 책들을 읽힙니다. 철학의 경우 '철학에세이'나 '철학의 기초이론 (PD들이 읽는 두꺼운 책이 아니라 백산서당에서 나온 얇은 책이 있습니다)', 역사의 경우 유시민이 쓴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이야기' 등을 봅니다. 이 책들을 보면서 사회모순에 대해 기본적인 시각을 갖게 됩니다.


 


시작은 아주 건전합니다. 고등학생 시절까지는 보지 못했던 사회문제들을 깨닫는 시간들입니다. 이때 따로 권유되는 책들이 '껍데기를 벗고서' 시리즈입니다. 이 책에는 사회문제의 사례들이 신입생 수준에 맞게끔 편집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멈추면 그냥 건전한 민주시민 정도가 됩니다.


 



 


이게 끝나면 박세길이 쓴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로 역사 공부를 하고, '한국경제의 뿌리와 열매'로 경제 공부를 합니다. 박세길의 이 책들은 NL입문서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까지 공부했던 사회문제들의 원인이 대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답을 찾는 단계입니다. 물론 책은 재미가 있습니다. 반미와 통일로 모든 것을 관통해버립니다. 이 땅 악의 근원은 미국이고, 통일만이 사회 근본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오히려 그래서 세계관이 더 명확해지고 선과 악의 구분이 확실해집니다. 대개 어느 정도 사회에 대한 분노를 가진 상태에서 이 책을 읽기 때문에 순식간에 반미와 통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닌데 문제는 이 때부터 여기에만 매몰되게 됩니다.


 


네. 신입생은 이 정도만 읽어도 이후에 NL-주사파로 성장하는 데 무리가 없습니다. 다른 책 읽고 와서 의문을 제기하면 역시 요주의 대상이 됩니다. PD들이 읽는 '학생운동논쟁사' 이런 거 읽지 않고, 권장하지도 않습니다. 대동단결하기도 바쁜 마당에 분열의 역사를 읽어 무엇하나라고 이야기하지만, 논쟁사를 읽게 되면 골치 아픈 의문들을 품기 때문입니다. 선배들은 신입생들이 커리 외에 무슨 책들을 읽는지 늘 관심을 둡니다. 한 PD 선배가 제게 논쟁사를 읽어보라고 했는데, 그걸 옆에서 보던 NL 선배가 바로 태클을 걸었던 적도 있습니다. '운동이란 실천이 중요한 건데 그런 식의 계보를 훑는 것은 오히려 혼란만 생길 뿐이다.' 어린 제게는 꽤나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 읽었습니다.


 


 


* 한총련 출범식


 


5.18의 기세를 이어 한총련 출범식으로 갑니다. 앞에서 기술하지 않았지만 3월에는 총학생회 출범식이 있습니다. NL들이 총학을 잡은 경우 총학을 중심으로 모든 사업이 돌아갑니다. 총학생회 출범식, 학자투, 5.18 등 모든 사업마다 자봉단(자원봉사단)이 꾸려지고 신입생들을 결합시킵니다. 그때마다 당연히 신입생들의 수준에 맞는 교양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 과정들을 통해 신입생들은 다른 과, 다른 단과대의 선배들과 크로스가 되고, 총학생회 간부들과도 만나게 됩니다. 이런 과정들은 신입생들에게 꽤나 자극이 되고, 평범한 학우들과는 다른 경험을 한다는 기분을 갖게 합니다.


 



 


한총련 출범식의 경우 자봉단이 아닌 참가단이 꾸려집니다. 마찬가지로 이 과정에서도 교양이 이루어지고 과 차원을 넘는 교류가 이뤄집니다. 교양 내용은 한총련이라는 조직의 정당성과 당위성, 노선 등입니다. 반미와 통일이 주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때까지 남아있는 신입생들의 경우 자신의 선배들이 학생운동가들인 것도 알게 되고, 거부감도 사라진 상태가 됩니다. 학생운동에 투신할 생각은 없더라도 적어도 대학생이라면 이런 것들을 경험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박3일 간의 한총련 출범식은 신입생들에게 꽤 큰 경험이 됩니다. 출범식이 벌어지는 동안 그 대학이 있는 도시의 아스팔트를 밟고 다니며 집회를 하게 되고, 경찰이 칠 지도 모른다는 아슬할 긴장감도 함께 느낍니다. 어느 해에는 평화적으로 치뤄지지만, 어느 해에는 탄압이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면 96년 전북대에서 이뤄진 출범식은 도지사까지 참석하며 축제처럼 이뤄졌지만, 97년 한양대에서 이뤄진 출범식은 유혈사태를 빚었습니다.


 


어쨌든 이런 과정을 통해 2박3일을 보내고 마지막 날 밤 출범식이 이루어집니다. 이 때의 모습들은 꽤 장관입니다. 한총련의 문화역량이 총집결되는 판이고 준비도와 무대 수준도 높습니다. 피를 끓게 만드는 시간들이 수 시간 이어진 후 클라이막스로 한총련 의장이 극적 과정을 통해 무대 위로 오르게 됩니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장엄한 장면들입니다. 이게 그 말 많은 의장님 '옹립식'입니다. 한총련 의장을 꼬마수령님이라고 비꼬는 이유가 괜한 게 아닙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신입생들을 비롯한 참가단 전체가 의장님을 중심으로 하나 되는 감성을 공유하게 됩니다.비유를 들기에 꺼림칙하지만, 독일인들이 나치의 집회에서 느꼈던 감정과 유사합니다.


 


이때까지의 과정을 통해 신입생들 중에 운동인자들이 가려지는 일단의 과정이 끝납니다.


 


 


* 어떤 이들을 선호하는가


 


대학 시절 NL의 필독서 하나를 소개합니다. 홍치산이라는 시인이 지은 '바보과대표'라는 시집입니다. NL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누구나 아시는 '자주민보'라는 사이트가 있습니다. 거기 기자 중 이창기라는 사람이 있는데 부정적 의미로 꽤 유명합니다. 얼마 전 북한공작원과 접촉한 혐의로 구속이 되었는데, 바로 그 이창기가 홍치산입니다. 시집의 대표적인 시는 동제목인 '바보과대표'인데 뒷 편에서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똑똑한 운동가의 모습으로 학우를 가르치려들지 말고 바보처럼 헌신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집을 왜 소개하냐면 그 시의 내용에 걸맞는 대중운동가 양성이 NL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에 걸맞는 스타일의 신입생을 뽑습니다. 톡톡 튀는 후배들은 어떻게든 두드려서 똑같이 만듭니다. 그래서 NL은 집단주의가 강하고 내부비판의 문화가 없습니다. 개신교와의 비교가 잦은 게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NL은 자의식이 강하고 정치적 관심이 많은 신입생들은 오히려 경계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친구들은 대중사업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학우들 앞에서 똑똑한 척 하고 가르치려 들면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NL의 강점입니다.


 


그렇지만 운동권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 친구들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버린다면 PD가 반드시 주워갑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안고 가려고 노력을 합니다. 마치 요미우리가 1군에서 쓰지도 않을 인재를 다른 팀이 주워갈까봐 연봉 많이 주며 2군에 잡아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마냥 그런 신입생을 2군에 두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1군에서 핵심인자로 쓰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런 신입생들은 학기초부터 중앙으로 보내버립니다. 학자투 선봉대, 총학생회 출범식 자봉단, 5.18 망월동 참배단, 한총련 출범식 참가단 등 주로 상층 조직에서 머물게 하며 경험을 쌓게 합니다. 그리고 수위가 높은 집회에도 처음부터 데려갑니다. 이런 친구들의 경우 대개 인정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선민의식까지 가지며 열정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래서 가끔씩 사고가 납니다. 과단위로 돌아와 동기들을 가르치려 들거나 심지어는 선배들에도 훈계를 늘어놓는 일이 생깁니다. 이게 컨트롤이 되면 핵심인자로 성장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생깁니다. 후자의 경우 다른 곳으로 정파를 옮기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친구들의 경우 PD에서도 버티지 못하고 2학년 정도 때 운동을 정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PD 역시도 대중사업을 해야 하는데 이 친구들이 용납이 안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친구들이 정파를 옮기는 것은 신념 때문이 아닙니다. 정치판으로 치면 국회의원 배지를 달기 위해 당적으로 옮기는 성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노파심에 덧붙이지만 이런 친구들만 NL에서 PD로 옮기는 게 아닙니다. NL의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면서 학생운동의 대안으로서 PD로 옮기는 제대로 된 경우가 더 많습니다.)


 


 


* 농활


 


6월에 기말고사가 끝나면 7월초 농활(농민학생연대활동, PD는 농촌현장활동)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농활은 한총련과 전농의 연대로 이루어지는 사업입니다. 농활은 대학생활의 꽃이라고 불리기 때문에 비운동권 학우들의 참여도가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배들은 한총련 출범식까지 걸러진 신입생들 말고 다른 신입생들을 다시 한 번 찾아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농활에서도 물론 교양을 합니다. 기본적으로 정부의 농업정책 비판이 중심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민족농업사수' 등 민족주의 내용이 슬로건으로 걸립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식량자급률이 20% 중반대에 머물지만, 북한은 100%에 가깝다는 주장이 깨알처럼 들어갑니다. 좀 못 먹어도 100% 자급자족의 농업이 낫지 않겠는가라는 거죠.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만, NL 주장의 방점은 후자에 찍혀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한총련 사업 중 가장 알차고 건전하게 이뤄지는 게 농활입니다.


 



 


서로 노동하고 부대끼며 9박10일 동안 함께 지낸다는 것은 엄청난 경험입니다. 농활에 참석하지 않으면 그동안 친했던 사람들이라 할 지라도 거리감이 느껴질 정도가 됩니다. 그렇기에 한총련 사업임에도 PD들 역시 눈물을 머금고 참석을 합니다. 자신들도 후배를 키워야 하니까요.


 


NL들도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견제를 합니다. 농활의 중심은 겉으로 보기에 농활대장이지만, 실세는 작업반장입니다. 작업반장이 조를 짜서 일거리를 배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괜찮은 신입생들은 주로 자신들이 있는 조로 배치를 하고, 어차피 운동권이 되지 않을 후배들은 PD 선배들이 있는 조로 밀어넣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골고루 조에 배치를 시키지만, PD들은 자기들끼리 묶어버립니다. 그리고 PD들 조에는 내공이 강한 NL 고학번을 배치합니다. PD들이 혹시나 뻘짓을 하지 않을까 통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PD들이 학생회를 잡고 농활을 가는 경우에도 PD들 역시 NL들을 똑같이 다룹니다. (그리고 PD들은 자신들이 총학을 잡으면 농활을 가지 않고 환활(환경현장활동)을 갑니다. 물론 환활도 긍정적 측면이 있습니다만 이런 배경도 없지는 않습니다.)


 


이 농활을 통해 NL 선배들과 인간적, 정치적으로 굳건하게 결합된 신입생들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멤버 그대로 대망의 8.15 범민족대회로 나아가게 됩니다.


 


 


* 8.15 범민족대회 (통일대축전)


 


8.15 범민족대회. 통일대축전이라고도 하고 줄여서 통축이라고 합니다. 96년 연대사태가 바로 이 대회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황선도 북측에서 열리는 범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무단방북을 했습니다. TV에서 전대협, 한총련 학생들이 당국의 허가 없이 방북했다는 뉴스를 보신 적이 있으실 텐데, 그게 다 이 범민족대회 때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북측에서도 같은 날 범민족대회가 열립니다. 민간교류라고 주장하지만, 백 번 양보해 우리야 민간이라고 하더라도, 범민련 북측본부가 과연 민간이겠습니까.


 


어쨌든 이 범민족대회가 NL들 1년 사업의 총집중판입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가을 이후 총학생회선거부터 이때까지의 모든 일정들은 이 범민족대회를 위해 지나왔다고 생각해도 될 정도입니다. 범민족대회는 우리사회의 학생, 노동자, 농민, 재야에 있는 모든 통일운동세력(NL)들이 총집결하는 대회입니다. 이 대회를 주관하는 단체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범민련 남측본부입니다. 지금 북한에 가 있는 노수희가 범민련 부의장입니다. 통일운동세력이라고 해서 모두 단일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범민족대회와 관련해서도 통일운동세력들 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해에는 따로 8.15 통일운동행사가 치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 저희는 분열세력이라고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NL이라고 언제나 한 편은 아닙니다.


 


이 사업은 7월 농활이 끝난 직후부터 일정이 시작됩니다.


 


먼저 통일선봉대(이하 통선대) 인원이 선발됩니다. 각 학교에서 모인 통선대는 8월초부터 전국을 돌며 투쟁을 하다 범대회 일정에 맞춰 집회장소로 합류를 하게 됩니다. 대략 오백에서 천 명 정도가 모입니다. 십여 일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고 전국을 돌기 때문에 꽤 큰 결심을 요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통선대는 NL에서 상징성이 큽니다. 어디 가서도 통선대 출신이라고 하면 인정해줍니다.


 


신입생 중에 이미 상당수준 정치적 결의가 높아진 이들에게 제의가 들어갑니다. 대개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중앙에서 활동하는 신입생'이 합류합니다. 그렇지만 꽤 고된 일정이기 때문에 신입생이 결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평소에 말빨이 서던 선배들도 통선대 참가는 쉽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가끔씩 정말 뜬금없는 친구가 통선대에 합류하기도 합니다. 선배들이 별 생각 없이 제안을 했는데 덜컥 수락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런 친구들이 나중에 대중간부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튼 이런 친구들의 경우 반드시 선배 하나가 함께 참여합니다. 전자의 신입생과는 달리 중앙에 아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반드시 다른 단과대의 선배가 책임을 지고 챙겨주게 합니다. NL은 자신들과 함께 하는 경우 목숨을 걸고 책임져 줍니다. 이때 받는 감동 역시 경험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통선대에 참여한 신입생들이라면 어느 정도 자신의 활동에 대해 알고 있거나 짐작을 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연방제 통일, 반미, 북한 바로알기 등의 교양들이 과감하게 이뤄집니다. 그리고 전국을 돌며 십여 일 동안 온갖 현장에서 온갖 경험들을 하고 투쟁을 하면서 단련됩니다. 스스로도 강한 신념과 경험을 갖게 되지만, 갔다 온 뒤 선배들의 대우도 달라집니다. 통선대를 다녀온 신입생들은 거의 열에 아홉은 이후 NL의 핵심적 운동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범민족대회 행사 중에는, 전국을 돌다 행사장으로 들어오는 통일선봉대를 맞는 시간이 있습니다. '통일선봉대 찬가'라는 노래가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이때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통일선봉대 찬가'를 부르며 이들을 환영하는데 들어가는 통선대나 맞는 사람들이나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물론 통일선봉대만 핵심은 아닙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의 역할이 사실 더욱 중요합니다. 통일선봉대에 참가하는 학우들은 어차피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자봉단이나 참가단이 꾸려지고 이 때부터 본격적인 교양들이 이뤄집니다. 통일선봉대에서의 교양 수준보다는 낮지만 큰 틀에서 대동소이한 내용들입니다. 최초 등록금 투쟁에서부터 시작된 각각의 사업에서의 교양들은 그 수준들이 점점 높아집니다.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 남게 됩니다.


 


이 범민족대회까지의 일정이 끝나고, 그때까지 남은 신입생들은 연방제 통일, 반미의 기본적인 틀에는 동의하거나 혹은 거부감은 없는 수준까지 이르릅니다. NL 선배들에 대한 인간적인 신뢰감은 흔들리지 않는 정도까지 높아지는 상태가 됩니다.


 


 


* 이탈하는 신입생들


 


이런 과정을 통해 2학기 개강으로 들어갑니다. 그동안의 과정들 속에서 여러 신입생들이 대오에서 이탈을 하지만, 한 편으로는 농활, 범대회 등을 통해 새로운 신입생들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NL들이 잘하는 게 이 이탈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리입니다. 함께 운동의 길로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호적 세력으로 남아 있게 노력합니다. 우호적 세력이라는 게 별 게 아닙니다. 이 선배와는 생각이 다른 것 같지만 그래도 사람은 좋구나, 열심히 사는구나 정도의 생각을 가지면 됩니다. 그리고 이게 NL의 강점입니다. 이들은 나중 선거 기간이 되면 힘이 됩니다. 본인이 표를 던져줄 뿐 아니라 주변 친구들에게 한 마디라도 해주기 때문입니다.


 


 


* 11월 학생회 선거


 


가을에는 별 다른 사업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학생회 사업은 꾸준히 있어야 하기 때문에 가을농활을 2박3일 정도로 갑니다. 9월에 축제가 있는 캠퍼스라면 거기에 집중합니다. 특별한 정치사업의 성격은 아니지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10월말이나 11월에 학생회 선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NL, PD 가릴 것 없이 모든 역량들이 선거에 집중됩니다. 그래서 가을에는 신입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피튀기는 경쟁이 펼쳐집니다.


 


선거가 중요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학생회를 잡아야 모든 게 편해지기 때문입니다. 정치로 치면 여당이 야당보다 편한 이유와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일단 학생회를 잡으면 그 해의 모든 행사에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슬로건으로 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정치행사에 학생회비를 쓸 수 있습니다. 총학의 경우 리베이트 등을 통해 따로 자금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세간의 소문과는 달리 운동권 총학생회장이 개인적으로 착복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주로 조직의 빚을 갚거나 다른 어떤 곳에 지원을 해주거나 하는 식으로 사용됩니다. 물론 아주 잘못된 관행입니다.


 


무엇보다 신입생 사업을 하기가 편합니다. 신입생들의 경우 학생회가 있는데 또다른 성향의 선배들이 있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어 합니다. 학생회에서 참여하는 집회가 있는데, 거기에 가지 않고 다른 곳에 가는 것 역시 이상해 보입니다. 그래서 NL들은 자신들이 총학생회를 잡으면 '학생회로 대동단결'을 주장하지만, 자신들이 떨어지면 '조국통일위원회'라는 조직을 따로 만들어 총학을 비토합니다. 물론 PD들도 자신들이 떨어지면 따로 조직을 만듭니다. 다만 NL은 '조국통일위원회'라는 통일된 명칭을 쓰지만 PD들은 그때그때마다 제각각입니다.


 


한총련이라는 조직의 존재 자체가 주는 영향력도 대단합니다. PD들이 한총련은 주사파들이 장악했다고 이야기해봤자 씨도 안 먹힙니다. NL의 논리는 간단합니다. '한총련은 학우들의 민주적 선거로 뽑힌 총학생회 및 단과대 학생회의 연합체인데, 그렇다면 그들에게 표를 던진 학우들이 모두 주사파란 말이냐.'라는 식입니다. 그에 덧붙여 '그래도 운동한다는 인간들이 어떻게 동지의 등에 칼을 꼽는단 말인가. 저들이 수구작당들과 다른 게 뭐가 있단 말인가'라는 말을 던져주면 게임 끝입니다. 그동안 이와 같은 논리가 잘 먹혔습니다.


 


일단 범민족대회까지 따라온 신입생들 + 동아리 신입생들 + 개인적으로 친분을 가져온 신입생들은 대부분 선거에 투입됩니다. 선거는 총학생회-단과대학생회-과학생회가 동시에 치뤄집니다. 선배들은 나름의 판단을 가지고 신입생들을 총학, 단과대, 과학생회 선거로 배치를 합니다. 정치적 수준, 대중성 등이 판단기준이 됩니다. NL 노선에 거의 동의하는 경우에는 총학생회 선거로 보내 중앙 차원의 경험을 쌓게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선배들이 직접 단과대, 과학생회 선거 기간 동안 데리고 다닙니다.


 


선거라는 건 마력이 대단합니다. 선거를 치루고 나면 정치적 수준과는 관계 없이, 본인은 이제 어느 진영에 속해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선거 기간에는 필연적으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그런 과정을 통해 '너희'와 '우리'를 구분 짓게 됩니다. 이건 굉장히 감정적인 영역입니다. 선본이 다른 경우에는 아무리 친했던 사이라도 선거과정을 거치면서 인간관계가 미묘하게 뒤틀어집니다. 그리고 그 틀어진 관계는 복구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NL이나 PD나 선거 때가 되면 신입생 확보를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부끄러운 짓들이 벌어집니다. 이 과정을 통해 신입생들은 단련이 되기도 하지만, 많은 상처를 안고 떠나기도 하는 게 학생회 선거입니다. 대다수의 학생운동 출신들에게 학생회선거는 트라우마로 남게 됩니다.


 



 


선거 기간에 들어가면 상대 선본에 예상치 못한 신입생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럼 그 신입생들이 마지막 공략 대상입니다. 상대방이 공들여 키워온 신입생들을 데려오는 겁니다. 물론 바로 제의하는 건 아니고, 인간적 관계를 형성한 후 만약 자신들이 학생회를 잡으면 집행부 자리를 제의하는 형식으로 데려옵니다. 정치적 입장이 다르더라도 학생회는 함께 해보자는 명분 있는 제의를 거절하기란 쉽지 않고, 상대측 선배도 말리기가 난감합니다. 속만 터집니다. 그러니 선거는 이기고 봐야 합니다.


 


그래도 그건 신사적인 행위입니다. 때로는 못 먹는 감 찔러나보자는 심정으로 돌직구를 던지기도 합니다. "너랑 같이 하는 선배들 주사파인 거 아니?", "너랑 같이 하는 선배들 과에서 평판이 별로인데 너도 이제 그쪽이랑 같이 하는 거야?" 이렇게 해서 넘어오면 고맙고, 안 넘어와도 그만입니다. 이런 식으로 상대 선본에 의도적으로 편지풍파를 일으킵니다. 물론 다수의 운동가들은 페어플레이를 펼치고자 하지만 통제 안 되는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고, 일단 사단이 벌어지고 나면 어쨌든 같은 편을 감싸줍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선거 때만 벌어지는 건 아닙니다. 등록금 투쟁 때부터 계속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선배들은 자신들이 관리하는 신입생들을 다른 정파 선배들이 낚아채는 일이 없도록 상당한 신경을 씁니다. 저도 신입생 시절 PD 선배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동아리 선배들에게 '우리가 주사파인가요?'라고 돌직구를 던졌다가 뒤집어진 적이 있습니다.


 


선거가 끝나고 나면 1년 사업이 마무리가 됩니다. 그러면서 이런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NL 성향의 신입생들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겨울방학 동안 NL 성향을 넘어 본격적인 단련과정에 들어가게 됩니다.


 


*


 


글을 쓰다 보니 제목을 너무 거창하게 지은 것 같아 후회가 됩니다. 이 글은 90년대 평범한 대학생들이 어떻게 투사가 되고 나아가 주사파까지 되는지, 그리고 NL 내부의 문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90년대 후반 이전의 일들을 전형적 사례로 재구성했기 때문에 실제 현실에서는 무수한 예외가 있을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밝힙니다. 그리고 십수 년을 훌쩍 뛰어넘은 이전의 기억들이기 때문에 소소한 사실관계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만 큰 틀에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솔직히 이론이나 책 제목들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이 글이 어떤 분들에게는 그저 모르는 세계에 대한 흥미진진한 후일담으로 소비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진보진영에 타격을 가하기 위한 이들에게 좋은 먹이거리를 던져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미미한 글에 그런 영향력이 있을 리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하나, 그리고 어떻게 글을 쓰던, 텍스트가 던져지는 순간 해석은 읽는 분들의 몫이라는 생각이 둘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불필요해 보이는 회고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애초 예상보다 글이 길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냥 최초에 구상한 대로 내용을 이어가겠습니다.


 




 


쉬어가는 이야기


 


 


* 학생회 선거 이후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상처를 던져준 학생회 선거가 끝이 났습니다. 선거가 끝나면 패한 측은 요즘 말로 멘붕 상태가 됩니다. 과학생회 선거의 경우 주로 2학년이 나가게 되는데, 패한 후보가 남자인 경우 2학기가 끝나면 바로 군대에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거가 끝날 당시에야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지만, 돌아보면 다들 '그때 내가 떨어지기를 잘 했구나'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선거에 승리했더라면 인생이 아주 달라졌을 확률이 크기 때문입니다. 과학생회장에 당선되면 이후 최소 2, 3년 동안은 군대에 가지 못합니다. 일단 3학년 운동가가 되면 맡는 역할도 커지고 행여나 차기 단과대 학생회장이라도 나가게 된다면 빼도박도 못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건 후일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고, 닥치게 되면 마음가짐은 아주 달라집니다.


 


총학에서의 패배가 주는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 총학생회를 잡고 있었던 측에서 패하는 경우 비참함은 더욱 큽니다. 총학생회실은 폐허로 변하고, 술병과 담배꽁초, 중국집 그릇들이 무질서하게 널려집니다. 차기 총학으로의 순조로운 이월이 되지 않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기존 총학 간부들의 정신적 충격도 주된 원인입니다.


 


NL이 총학 및 단위 학생회 선거에서 이긴 것을 가정하겠습니다. 일단 총학을 잡고 나면 다음 해 1년 스케쥴이 바로 나옵니다. 겨울방학 스케쥴도 빡빡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이 단계에서 총학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과학생회입니다. 선배들은 신입생들에게 이런저런 직책을 제안하며 학생회 체계를 잡아갑니다. 학생회 정파가 교체되는 경우 이월 과정에서 늘 이런저런 잡음이 생깁니다. 주로 돈 문제입니다. 제가 대학 시절 늘 한심하게 생각했던 게 바로 이 돈 문제입니다.


 



 


돈 문제가 일어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부정이 개입되었다기보다 그냥 평소에 회계 정리를 안 해서 그렇습니다. 1년치를 한 번에 하려니 제대로 될 리도 없고, 영수증이 남아 있을 리도 없습니다. 온갖 가라 영수증들이 판을 칩니다. 그래도 이런 경우에는 대충 맞춰보면 금액이 얼추 맞습니다. 그렇기에 정파가 다르더라도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줍니다. 문제는 두 번째입니다.


 


어떻게 맞춰봐도 금액이 크게 비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로 학내에서 학생회를 적게 잡고 있는 정파의 경우에 생기는 일입니다. NL, PD 가릴 것 없습니다. 학생회 숫자가 적어도 사업 규모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각 학생회에 과부하가 걸립니다. 어쨌든 학생회를 잡고 있는 단위에서 그 금액을 부담하게 됩니다. 그래서 금액이 비는 경우가 나옵니다. 대의를 위한 조치며 사적인 부정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의식은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대개 전대 학생회장이 비는 금액을 책임 지고 메꿔주는 식으로 약속을 하고 넘어갑니다. 물론 이 금액이 메꿔지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없던 돈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가끔 노가다나 과외를 뛰어서 메꿔주는 개인들도 있고, 1년이 지나 총학을 잡은 다음에 조직에서 갚아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파들 간에 어지간히 감정이 상해 있지 않거나, 굳이 싸워야 할 정세가 아닌 경우 그 정도로 넘어가 줍니다. 자신들도 언젠가 당할 수 있는 문제니까요. 물론 아주 잘못된 관행입니다.


 


현재 상식선에서 이해되지 않는 통진당 내부의 사건들은 이러한 문화적 경험들이 조금씩 쌓이고 도덕적 해이로 굳어지며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어찌 보면 흥미로운 후일담에 불과한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그런 소소한 일들을 설명하기 위해서죠.


 


 


* 달력식 투쟁


 


1년 스케쥴이 끝난 마당에 엉뚱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학생운동은 학생회 사업에 매몰되어 있고, 학생회 사업은 매년 똑같은 사업들로 반복됩니다. 그런데 그 스케쥴은 학생운동가들이 의도적으로 만든 시스템이 아닙니다. 80년대 중반 학원자유화 조치 이후 수 년 간의 사업들이 반복되면서 가장 효율적이고 적절한 시스템으로 정착이 된 것입니다. 90년대 들어서는 학생운동이 점차 쇠퇴기에 접어들지만, 역설적으로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 시스템은 한층 정교해지게 됩니다. 한총련 조직 역시 상당히 체계적인 조직으로 규모가 커져갑니다. 그런 관료화가 결국 90년대 후반 한총련을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을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몰고 가게 됩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바로 달력식 투쟁입니다. 노동탄압, 빈민촌 등의 사회문제는 달력에 맞춰 터지지 않습니다. 기간도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학생운동은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가장 강력한 동원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회모순의 현장마다 학생운동 세력은 5분 대기조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전 글에서 언급했듯 학생운동=학생회라는 공식이 성립되면서 스케쥴에 따른 제약을 받게 됩니다. 노동현장으로 가서 낮에는 목 터져라 외치며 투쟁을 하다가도 밤이 되면 학교로 돌아와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대중사업을 벌려야 했고, 축제날이라도 되면 현장을 이탈해 장터를 해야 했습니다. 등록금 투쟁이 처음에는 총장실이라도 때려부술 듯이 전개되다가도 5월이 되면 흐지부지 되는 것도 메이데이와 5.18 등의 사업 스케쥴 때문인 게 큽니다.


 



 


어느 순간부터 학생운동가들은 학생회 관료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무게에 짓눌려 갑니다. 신입생으로서 학생운동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은 분명 사회문제에 대한 각성과 분노 때문인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학생회 사업을 열심히 하는 쪽으로 매몰됩니다. 그래서 반미, 통일 등의 간단하지만 거대한 구호만 읊조리게 되는 것이 자기합리화 기제로 작동하게 됩니다. 마치 사회 낮은 자들에 대한 사역보다 전도와 교회사업에만 치중하는 일부 교회의 모습과 매치됩니다. 아쉽고 씁쓸한 기억입니다.


 


(계속)


 


Ma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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