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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5. 24. 목요일

정우성


 



 


스트레스는 우리의 이웃이다.


현대인의 인생이 그렇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거나 그 풍요로움만을 좇는 인생은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정신없이 인상 쓰듯이 인생을 산다. 그렇게 살다 보니 스트레스는 우리 인생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됐다. 스트레스는 완전히 피할 수 없는 까닭에, 우리는 저마다의 노하우로 이 스트레스를 통제하거나 해소하면서 산다. 육아와 자녀교육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아이 때문에 스트레스가 생기기도 하고, 아이를 양육하는 방식을 둘러싸고 부부 사이에 스트레스가 생기기도 하며, 때로는 ‘도대체 내 인생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자괴감으로부터 스트레스가 생기기도 한다. 가족의 경제를 책임지는 아빠(엄마일 수도 있다)는 그 책임감의 무게 때문에 스트레스를 느끼기도 한다. 나는 심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내 스트레스의 원인을 추적하고, 그 원인을 과학적으로 진단하고 해결하려는 데 특별한 관심은 없다. 이것은 아무래도 내가 경쟁의 수레바퀴에서 완전히 벗어나 조용하고 한적하며 평화로운 삶으로 도피하지 않고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라는 심정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몫은, 내 스트레스의 원인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게 아니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스트레스를 돌봐주는 게 아닌가 싶다. 경험적으로 보자면, 원래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인데다가, 내 스트레스의 상당수는 스스로 작심한다고 해서 제대로 해소되는 게 아니었고,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저절로 위로를 받곤 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스트레스를 위로하면 나도 함께 위로를 받게 된다는,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아내를 위로하여 아내의 정신이 건강하면 그만큼 나도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며, 내가 아이들을 위로하여 아이들의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로우면 그만큼 나도 위로를 받는다는 이야기다. 물론 검증된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동맥과 정맥이 있고, 사랑은 그런 혈관을 통해 위로의 수액을 공급한다는 믿음이 있다. 그 수액은 대개 줘야만 받을 수 있는 것이어서 나는 내 대동맥과 모세혈관을 먼저 점검하는 것이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혈관은 막히고 심근경색에 걸려 쓰러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대단한 것은 아니다. 기적을 이루려 하거나 큰 실적을 쌓으려는 게 아니다. 그냥 사랑하는 사람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줄 것이냐, 바로 여기에 위로의 파이프를 놓는 것이다. 약간 육체적인 피로나 귀찮음이 요구될 뿐이다.


 


지금까지 가정을 일구어 오면서 여러 가지 못한 일도 많고 무능력을 내보인 부분도 많지만, 몇 가지 잘한 일도 있다. 세 가지 정도 되는 것 같다. 첫째는 아내와의 늦은 밤 수다이며, 둘째는 아내를 위해 새벽에 갓난아이를 돌봤던 것이고, 셋째는 아내의 저녁 마실을 보장했다는 점이다. 나도 결혼 초기에는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가장이고 밖에서 일을 하고 왔으므로 집에서는 대접과 대우를 받으면서 좀 쉴 수 있는 환경을 추구했다. 이런 생각은 어떤 확고한 신념이라기보다는 오래된 가부장적인 성장과정과 문화 속에서 익숙해진 그런 유형의 생각이었다. 몇몇의 부부싸움과 갈등을 경험하면서 배운 것은 인간의 감정과 힘듦은 꼭 합리적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아내와의 수다


 


아내의 친정은 외국에 있다. 주위에는 친구들이나 가족이 없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4인 가족의 가장이며, 이것을 “우리 가족”이라고 여긴다. 다른 친족은? 물론 그들도 가족이다. 하지만 그때 사용하는 ‘가족’이 주는 의미와 내가 가장으로서 꾸려나가는 ‘가족’이 주는 의미는 상당히 다르고, 나는 이것을 함부로 동일시 하지 않는다. 나는 내 아내의 남편이자, 친구이며, 친정엄마이고, 언니이고, 동생이며, 선생이고, 그리고 제자다. 특별한 것은 없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무거운 짐이 내 어깨 위에 올려지지만 이것도 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다.


 


일전에 아내는 자신의 꿈이 ‘전업주부’라고 말했지만 집에서 매일 혼자 있는 것은 고역이 아닐 수 없다. 하루 종일 침묵 속에 갖혀지낸다. 내가 아무리 육체적으로 힘들고 과중한 업무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해도 보람이라는 게 있고, 은근히 일을 통해서 스트레스를 풀거나 직장동료와의 대화를 통해서 스트레스를 풀곤 한다. 하지만 아내는 혼자다. 언어의 공백 속에서 사는 것이다. 사실 재미 있는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언어의 사용량과 스트레스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은 반비례한다고 생각한다. 스트레스의 상당량은 말을 통해서 풀리기 때문이다. 내가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많지 않다. 필요할 때 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직장에서 내 몫의 일을 한다. 하지만 남편의 몫과 아내의 몫을 완전히 분업한다고 해서 가족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정 큰 임무는 “아내와의 수다”라고 생각했다.


 



 


가급적 집에서 저녁을 먹기. 저녁을 먹으면서 아내와 이런저런 수다를 떨기. 정말 하찮고 사소한 이야기라도 꺼내놓기. 잔업이 남아서 일을 해야하더라도 만일 밤 8시30분 이내에 집에 도착할 수 있다면 회사에서 저녁을 먹지 않기. 고마운 줄 알고 밥을 먹기. 만일 술 약속이 있는 경우라면 적절히 취하고 돌아오기. 밤늦게 귀가한 다음에는 술자리에 있었던 이야기를 꺼내놓으면서 다시 1시간 정도 아내와 수다를 떨기. 나와 아내가 어떤 이야기를 공유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저 아내와 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는, 그렇게 해서 집에 혼자 있는 아내의 스트레스를 풀었다는 게 중요하다. 언어는 진심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의사소통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그냥 ‘말놀이’이기도 하다. 나는 집안에서의 유치한 놀이에 주목하는 편이다.


 


혼자 어린 아이를 보면서 집에 고요히 있는 일은 어쩌면 별로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있다. 사람과 부딪치는 일도 없고, 육체적으로 너무 피곤한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에 반해서 직장에서 바쁘게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면서 사람과 부딪치며 하루를 보내는 일은 정말로 피곤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떤 게 더 고역일까? 우리는 은연중에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육체성과 경제성을 중시한다. 육체적으로 더 피곤하여 고역이라든가 혹은 돈을 벌기 위해 힘을 쓰므로 고역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익숙한 생각이다. 요컨대 힘들게 일하고 퇴근하고 돌아오면 소파에 앉아 리모콘을 잡는 생각이기도 하다. 이게 꼭 틀린 생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좀 옛스러운 생각이고 근육냄새 나기도 한다. 오랜 습관을 바꾸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새벽에 일어나기


 


두 아이가 모두 갓난아기였을 적의 일이다.


모유수유인 경우에는 어쩔 수 없지만, 분유를 먹이는 경우에는 가급적 내가 일어난다(물론 내가 아예 일어나지 못할 때도 있다). 엄마의 건강은 육체적으로도 중요하다. 아이가 너무 어리면 때만 되면 배고프다고 보채기 때문에 엄마는 깊이 잘 수가 없다. 새벽에 내가 일어나서 분유를 만들고 먹이고 기저귀를 한 번 갈아주면 그 사이 엄마는 나름 숙면을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엄마한테도 좋고 아이한테도 좋다. 자고로 엄마의 스트레스는 아이에게도 좋지 못하다. 물론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다시 회사에 출근해야 한다. 육체적으로는 피곤하다. 하지만 이 피곤함은 보상받는다. 아내로부터 아이로부터 말이다. 그리고 한 아이의 아빠라는 실존적 만족감에도 깊이가 있는 법이다. 그 깊이는 꽤 따뜻해서 우리는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육체적으로 피곤하다고 짜증 낼 일이 아니다. 원래 양육은 다소 육체적인 피곤함을 불러오는 것이다. 이런 피곤함을 우리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견디면서 여기까지 왔다. 이것도 금세 지나간다.


 



 


 


엄마의 마실


 


엄마와 아이 사이의 끈을 너무 단단하게 묶어버리면 안 된다.


왜냐하면 엄마에게도 엄마의 인생이 있고, 엄마의 인간관계가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너무 어렸을 적부터 엄마와 아이 사이의 끈을 속박하듯이 단단히 묶어놓으면, 아이도 커서 자립감을 갖기 힘들어질 뿐만 아니라, 더 무서운 것은 ‘엄마도 자립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엄마가 어디 밖에 나갈라고 치면 아이들은 울고 불고 난리를 치곤 한다. 이게 반복되면 엄마는 정말 놀러갈 수도 없게 된다. 아빠는 툭하면 자유롭게 나가 놀면서 엄마는 약속은 커녕 밖에서 친구랑 노는 것은 엄두를 못내게 되는 것. 이건 불공평한 일이다. 우리는 불공평하게 살려고 결혼한 것도 아니다.


 


엄마와 아이 사이의 끈을 느슨하게 만드는 것은 은근히 쉽다. 그냥 하면 된다. 그 사이 아빠가 아이를 보면 된다. 처음에는 좀 어려울 수 있지만, 엄마가 마실 나가는 날에 아빠가 일찍 퇴근을 해서 무엇인가 이벤트를 준비해서 집에서 신나게 노는 게 중요하다. 내 경우에는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설거지나 기타 집안일을 하는 동안에 아이들이 TV를 보게 하고(좋은 TV 프로그램이 많다), 함께 씻은 다음에 집에서 술래잡기 하거나 불을 끄고 아빠 이야기쇼를 하면서 애 엄마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일찍 잔다. 때로는 밤 8시에 두 녀석을 데리고 잠을 자버린다. 나는 이 기회에 육체적인 피곤함을 해소하곤 한다. 그 결과 우리 아이들은 엄마가 혼자 놀러 나가든 아빠가 혼자 놀러 나가든 크게 게의치 않게 됐다. 졸래졸래 문까지 따라와서 웃으면서 ‘바이바이’ 하는 게 끝. 오늘 저녁은 엄마와 아빠 둘 중의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


 



 


엄마의 마실이라고 해서 특별한 게 아니다. 동네 친구랑 만나서 커피 한 잔 할 수도 있는 거고, 술 한 잔 할 수도 있는 거고, 아니면 혼자 쇼핑을 하거나 카페에서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엄마는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게 아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가 함께 키우는 것이다. 아이들은 평화롭고 따뜻하게 잘 자란다. 나는 이렇게 믿는다.


 


 


정우성


두 아이의 아빠, 변리사, <특허전쟁> 저자, 드디어 후속편 나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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