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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11. 월요일

너클볼러


 



 


우리는 지난 시간, 타죽은 세르베투스, 전기의자에 앉아 세상과 안녕한 윌리엄 켐러와, 로젠버그 부부의 최후의 순간을 함께 했다. 더불어 그들의 최후의 순간에 작동한 권력일 수 있는 그 무언가의 적나라한 모습도 함께 확인했다. 헌데 확인하면 뭐하나. 간 사람들은 간 사람들일 뿐이다. 이 연재에 이젠 역사가 되어버린 그들의 처형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시금석으로 삼자는 거창한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뭐. 더욱이 그때 작용한 권력과 현재의 권력 사이의 페어링 지점을 쑤시고 찾아보자는 것도 아니다. 그냥 옛날 얘기일 뿐이다. 그저 재미지게 옛날 얘길 함 해보자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얘기한다는 것, 이게 때론 존나 흥미롭다. 정확하게 존재하는 사실을 바탕으로 다양한 해석과 견해가 등장하며 갈라지기 시작하는 그 좌표의 지점이 상당히 꼴릿하기 때문이다. 파열은 곧 에너지를 의미하기도 하니깐...


 


자. 다시 한 번 과거로 떠나보자. 현실이 피로해서가 아니라, 그냥 좀 심심하니깐, 연재할 때가 되었으니깐. 부편집장이 빨리 써내라니깐... 유럽을 시작으로 북아메리카 함 찍었으니 이번엔 고려말 한반도, 우리땅으로 가자. 사실 고려가 망하고 난 뒤에나 고려말인 거지, 당시 사람들에겐 그저 고려였을 뿐이다. 사대부들에겐 ‘요승’으로 불린, 동시에 노비들에겐 ‘성인’으로 불렸던, 신돈에게나, 그를 멘토로 모시다 ‘한 칼 받으실레예’로 쿨하게 보내버린 공민왕에게나 그땐 영원할 것만 같았던 ‘고려시대’였을 뿐이다.


 


그러고보믄 '말'인데도 대책없는 지금은 도대체 뭔지 참...


 


 



 


1371년 수원, 아무리 중이었어도 한때 민중의 지지를 한껏 받은 최고권력자였던 그였다. 게다가 중이었어도 고기를 비롯한 산해진미 모두를 두루두루 맛보았던 미식가 중의 미식가였던 그다. 완벽히 숙성시킨 한우 1등급 스테이크를 내놓은 쉐프도 간간이 그에게 핀잔을 듣곤 했다. 그런 그가 유배라니, 그 개고생을 했는데, 그것도 토속음식마저 화려하지 않은 수원에 유배라니... 그저 애초 중이었던 그가 중으로 돌아왔으면 되었을 것을, 이미 모든 것을 맛본 그가 다시 사바세계의 욕망에서 자유로운 불자로 돌아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불평도 모두 사바세계에 숨 붙이고 있기에 가능했던 일. 그는 본능적으로 얼마 남지 않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1047년 8월, 고려 문종왕은 이렇게 말했더랬다.


 



‘사람의 목숨은 귀중한 것이여. 한 번 가믄 다시 돌아올 수 없당께. 사형수를 처리할 때 3번씩 거듭 보고하게 하고 있지만 그래도 억울함이 있을까 염려 되부러. 그러니 신중하게 처리하자고...’ (고려사 형법지)



 


그러니까 고려시대 사형을 처리하려면 삼복제를 거쳐야 했다. 초심, 재심, 삼심을 거쳐 확정되어야야만 사형의 집행이 가능했던 것이다.


 



손창민과 정보석. 아니 신돈과 공민왕


 


그러나 반역의 수괴로 지목된 신돈은 구체적인 물증이 없음에도, 삼복은 개뿔, 신속히 수원으로 압송되었다. 최초 수괴로 지목된 뒤 3일 후의 일이었다. 신돈은 자신의 수괴로 지목되었음을 알고는 압송되기까지의 며칠 동안 차분히 최후진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차라리 초심이 열리기 전에 자신의 주치의에게 말해 그동안 미뤄왔던 사랑니 발치건을 이유로 초심을 미뤄볼까도 생각했지만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을 스승처럼 떠받든 공민왕에 대한 믿음이 살짝 남아있었다. 자신의 생애를 정리해 줄 자유기고가를 수소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격적으로 압송이 결정되자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음을 직감했다. 더구나 귀빈 압송용 리무달구지가 아닌 전륜구동 방식의 불편한 일반 달구지라니... 밖과 안이 너무나도 다른 그 안에서 그는 떠올렸다. 고작 노비의 아들이었던 그 자신을...


 


 



 


편조라는 SCV가 있었다. 그는 경상도 창녕 화왕산에 자리잡은 커맨드센터 ‘옥천사’ 소속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믄 편조의 소유권은 옥천사에 있었다. 어머니가 옥천사 소유의 노비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인근의 영산 유지였지만 소용없었다. 부모 둘 중 하나라도 노비면 자식도 노비였다. 게다 자식의 소유권은 어미의 소유권자에게 있었다. 그렇게 편조는 옥천사의 소유였다. SCV의 역할은 뻔한 것이다. 커맨드센터의 지시에 따라 ‘굿 투 고’(Good To Go)해서 ‘좝 피니쉬’(Job Finish)하믄 그만. 일개 노비였던 어린 편조의 삶이 그러했다. 인생사 일장춘몽이라 하였던가. 노비 편조는 훗날 공민왕의 지지와 믿음으로 최고권력자의 자리에 올라 신돈辛旽이 된다. 그러나 결국 공민왕에 의해 처형당한다. 한편으론 화려하지만 참으로 싱거운 개인사. 어쨋든 그가 처형당한 뒤 커맨드센터 ‘옥천사’도 파괴된다. 파괴된 옥천사에서 보여지듯 편조에 관한 자료는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없는 자료 바탕으로 정리한 편조의 유년기는 아래와 같다.


 



‘노비 편조는 그럭저럭 청년이 되었다.’



 


고려는 백성들이 소유한 토지에 대한 조세징수권을 공무원들에게 위임했다. 부패없는 청렴한 사회를 지향했던 공무원들은 ‘조세징수권 양도에 관한 법률’이 고려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소리없는 환호를 지르고 지랄들을 했다. 곧바로 공무원들은 청렴하고, 강직하게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한다. 우선 환율을 인위적으로 올려 농사에 필요한 모든 원자재의 가격을 올린 뒤, 원자재 값이 오른데다 생산양마저 줄은 양인들의 연체가 빈번하게 발생할 수 밖에 없게 되자, 공시지가 조작을 통해 연체된 조세 대신 토지를 헐값에 상납받는 등의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자신들의 토지를 늘려갔다. 때에 따라 위장전입 등의 새로운 방법들을 시전하기도 했다. 종종 발각되는 경우 과거급제를 위한 자식사랑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둘러대도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조세의 의무를 강력하게 요청함과 동시에 자신들은 다양한 탈세방법을 연구하고 실행했다. 탈세로 인한 조세의 부담과 고통은 고대로 백성에게 전가된다. 완벽에 가까운 20:80의 시대였던 것이다.


 


이런 조까튼 현실을 청년 노비 편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이렇게 흉흉한 시대일수록 백성들의 위로 받고 싶은 기대가 극도에 달한다는 것도 감각적으로 캐치해낼줄 아는 센스있고, 총명한 청년이었다. 글을 읽지 못했지만 독경을 말하고 이해하는 데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베이시스트 빌리 시안(Billy Sheehan)도 악보를 읽지 못하지 않았던가. 청년 편조에게도 빌리 시안의 천부적인 능력과 같은 그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최고의 베이시스트가 되는 거 어렵지 않~아요.


 


외롭고 지친 시대의 백성들, 그는 원나라 유학 중에 터득한 카마수트라를 옵션으로 한 명랑 포교를 통한 민생 행보를 해나갔다.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일찍 깨우치고 정진했던 것이다. 주로 주요지역의 5일장을 타겟으로 했고, 악수와 주전부리 흡입 등의 퍼포먼스를 맘껏 뽐내기도 했다. 그렇게 백성들의 명랑법사가 되자 팬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왕실의 외척이었던 김원명이다. 편조는 자신을 따르는 김원명과 곧바로 맞팔을 맺는다. 그러던 어느 날. 김원명은 느닷없이 편조에게 ‘궁 나들이나 함 합세다’는 멘션을 날린다. 편조는 흥쾌히 ‘콜’ 한다.


 


얼마 후...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깬 공민왕은 급히 참모를 불렀다.


 



‘야. 궁 앞 편의점 가서 로또 하나 사와. 롸잇 나우. 자동으로 만 냥. 고고고. 무브. 무브. 꿈 날아갈라.’



 


순식간에 튀어가는 참모의 모습은 흡사 제로백 4초대의 포르쉐를 연상케 했다. 폭주하는 참모의 모습에 의아한 공민왕의 어머니 명덕태후가 공민왕에게 다가와 연유를 묻자 공민왕이 답하길.


 



‘맘. 어제 드림에 갑자기 어떤 킬러가 나와서 나이프로 날 막 쑤시는데, 갑자기 소림사 스킨헤드가 등장해서 날 구해줬어요. 유노.’



 


이를 들은 명덕태후는 ‘얘가 얼마나 외로우면 스킨헤드 꿈을 다 꿀까. 혹 취향이 바뀐 건가’라며 생각하지만 차마 얘기하지 못했다. 공민왕은 여전히 숨을 헐떡거리며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창 밖 멀리 누군가의 모습이 공민왕의 눈에 들어왔다.


 



‘오 마이 갓. 맘. 스킨헤드, 롸잇 히어’



 


공민왕의 눈에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김원명과 함께 나들이 온 편조였다. 드디어 왕을 만난 것이다. 외롭고 지친 왕은 편조에게 한눈에 반했다. 허나 공민왕 주변의 왕차관들은 갑자기 등장한 스킨헤드를 수위 높게 경계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편조는 지금은 때가 아님을 직감하고 평소 자신의 롤모델로 여긴 원효대사처럼 민중의 곁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한다. 민심 행보 시즌2가 시작된 것이다. 편조는 그때부터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공민왕은 늘 외로웠다. 왕좌의 게임에서 그는 어머니가 몽골공주가 아니라는 치명적인 핸디캡 때문에 조카들에게 카운터 펀치를 두 차례 후려맞았다. 결국 그의 선택은 자신을 불안해 하는 원나라의 후광을 통해 패자부활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원나라에 인질로 잡혀있던 시절, 극적으로 위왕의 딸인 노국대장공주와 정략 결혼에 성공한다. 이를 바탕으로 원의 힘을 업고 왕좌의 게임에 다시 도전한다. 화끈하게 컴백한 그는 곧바로 현충원, 아니 경령전(선왕들의 위패를 모신) 참배 후 인수위를 조직한다. 얼마 후 강화도로 위배된 13살의 충정왕이 독살되고 모든 권력은 고스란히 공민왕과 인수위에 전달된다.


 


공민왕은 왕위를 얻었지만, 원의 간섭과, 자신의 반대파에 대한 견제, 자신의 세력에 대한 불안, 조카 충정왕을 제낀 것에 대한 죄책감 등을 짊어진 채 끊임없이 권력투쟁을 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민왕의 권력투쟁에 기존의 기득권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한 개혁적 마인드가 일부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공민왕이 스카우터를 통해 재벌개혁과 소득분재, 상식적인 인재 등용 등의 개혁정책에 능통한 이색을 영입, 계약을 서두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권력투쟁, 반란, 진압, 원의 보이콧, 홍건적의 침입으로 인해 수도 개경을 잃을 뻔 하는 등 편할 날 없는 과정들이 끊임없이 공민왕을 괴롭혔다. 시도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불안과 분노, 흥분과 우울 등에 시달리면서 그의 성적 능력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스 개경 출신 후궁의 S라인을 보믄서 고추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싶다가도, 자신의 잡아먹으려는 원나라 세력과, 개경을 치고 들어왔던 홍건적의 샛누런 치아가 떠오르며 사그라들기 일쑤였다. 원기가 부족하니 시련과 격변의 시기에도 늘 곁을 지켜준 노국공주의 침소에 드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고, 왕자 생산도 기약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게다가 원과의 긴장관계가 지속되는 탓에 대원무역이 원활하지 않아 비아그라의 복용도 쉽지 않았다. 불안과 무기력, 욕구 불만 등으로 인해 그는 난폭해지기 시작한다. 지방에서 민생 행보 시즌2를 거침없이 진행하고 있던 편조는 이러한 공민왕의 사정을 전해 듣는다. 재래시장을 방문 중이던 편조는 때가 왔다는 듯 비장한 표정으로 오뎅을 한 입 베어 물고는 출사표를 던진다.


 



재래시장에서 맛보는 오뎅의 맛.


 


신돈은 공민왕과의 첫 번째 만남에서 공민왕과 주변부의 권력 관계 맛을 확실히 봤다. 그리고 공민왕 주변부의 권력들이 자신을 철저히 경계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다시 만난 공민왕은 그때보다 더욱 지쳐 있었고, 편조는 왕을 배경으로 뭔가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한 주변의 모든 정황을 고려해볼 때 이번에야말로 편조는 풀포지션에서 게임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첫 번째 만남에서 얻은 교훈을 잊지 않고 머리 속으로 되내였다.


 



‘스텝 바이 스텝’


‘한 걸음 더 천천히 간다 해도 그리 늦는 거슨 아니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공민왕은 기꺼이 편조를 맞이했다. 맑고 한가로운 거사라는 뜻의 청한거사라는 호칭을 하사하고 궁의 중심부에 위치한 외빈용 VIP 스위트룸을 내주며 편히 궁에 머무를 수 있게 했다. 편조는 서두르지 않았다. ‘슬로우, 슬로우, 퀵, 퀵’ 차분히 한 스텝씩 밟아 나갔다. 현란한 포교활동을 통해 왕의 측근을 한둘씩 자신의 사람으로 포섭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에게 포섭된 한 신도로부터 노비를 한 명 선물 받는다. 아리따운 아가씨. 편조는 그녀에게 푹 빠져 ‘얼레리 꼴레리’, 편조는 최고의 지혜를 뜻하는 반야라는 이름을 선물한다. 하지만 반야는 공민왕과도 ‘얼레리 꼴레리’. 한참 동안 무기력했던 공민왕은 반야를 통해 슈퍼 파워 업. 1364년 노국공주가 여름에, 반야가 가을에 임신을 한다. 반야의 임신사실을 모른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태교에 만전을 기했지만, 결혼 15년만에 아이를 가진 노국공주는 결국 출산 도중 숨을 거둔다. 다들 지들 권력 타령만 하는 이들 사이에 사람으로 공민왕 옆을 지켜주었던 유일한 여인. 공민왕의 허탈과 슬픔은 끝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어두웠다. 얼마가 지난 뒤 안정을 되찾은 공민왕에게 편조는 반야의 순산소식을 전했다. 노국공주의 빈자리는 민생 행보를 통해 터득한 친서민적인 편조의 설법과 반야와 왕자 모니노(牟尼奴, 석가모니를 뜻함, 훗날 우왕)가 대신했다. 서서히 정신을 차리는 공민왕, 본격적으로 권력강화를 위한 드라이브를 시작한다.


 


공민왕은 편조를 스승으로,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한) 개혁의 수장으로, 반대파 숙청의 지휘자로 임명한다. 이에 공민왕을 옆에서 지켜 봐왔던 편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을 해하지 않겠다는 각서와 친필사인, 공증을 요구했다. 혹여나 생길 지 모를 최악의 경우 들이밀 수 있는 ‘까방권’이 필요했던 것이다. 공민왕은 기분이 졸라 상했다. 머리 기른 중놈이 왕에게 각서를 요구하다니, 하지만 공민왕의 권력을 위해서는 편조가, 편조의 개혁을 위해서는 공민왕이, 서로가 서로에게 참으로 필요한 순간이었다. 공민왕은 앉은 자리에서 즉시 작성, 사인, 공증까지 논스탑으로 처리. 드디어 공민왕, 편조라는 파워 키스톤콤비가 탄생하게 된다.


 


 



 


공민왕, 편조 이 파워 키스톤콤비의 첫 번째 작품은 바로 최영을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최영이 누구냐. 밖으로는 외적을 후려패고, 안으로는 왕차관 조일신 등의 분란을 제거, 게다가 홍건적에게 개경을 빼앗기고 공민왕이 튄 상황에서, 개경탈환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도 바로 최영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는(사실 이 말은 그의 아버지 최원직의 유언이었다) 청렴의 상징이기도 했다. 군에게 그는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키스톤콤비는 그를 날려버려야 군을 장악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더불어 군에 대한 장악력을 높여놔야 쾌적하고 원할한 숙청을 진행할 수 있을 거란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최영을 계림(경주)로 보낸 뒤 편조는 이제 사바세계를 떠날 수 없음을 인정하며 이름은 돈旽으로 개명한다. 성은 신辛이요, 이름은 돈旽으로, 이렇게 편조는 사바세계의 최고권력자 신돈辛旽이 되어 갔다.


 



신돈, 공민왕. 아니 안치홍, 김선빈.


 


편조가 신돈이 되었으나 공민왕은 공민왕이었다. 그는 물러난 것이 아니라 포지션을 살짝 바꿨을 뿐이다. 신돈에게 모든 걸 맡겨 놓았지만, 모든 걸 보류할 수 있는 권력 또한 역시 공민왕에게 있었다. 그 어느 정파에도 속해 있지 않았던 신돈이 과도한 권력을 누리고 있던 권문세족들을 숙청하는 모습을, 공민왕은 지켜보고 있었다. 신돈이 날라다니는 덕분에 그에겐 좀 더 많은 여가가 주어졌다. 반야와 아들 모니노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안정감을 찾으니 왕자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워지기 시작했고, 그노무 안타까움을 해소하고자 몇 명의 왕비를 추가로 궁에 들였다. 젊고 아리따운 왕비들을 연이어 상대하기 힘들었지만, 혼자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불안하고 우울했던 날들에 비하면 ‘행복한 나날들’ 그 자체였다. 그렇게 생긴 긍정적인 마인드는 다양한 성적호기심을 부추겼다. 그 호기심은 언양 출신 쾌남 김흥경과의 연애로 이어진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신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돈은 부처 말씀은 물론이요, 욕망이라는 이름의 육체의 설법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인은 물론이요, 산해진미를 마다하지 않았다. 고기가 땡기면 고기를 쳐묵하고, 술이 당기면 술 한 잔 들이켰다. 청탁을 목적으로 몸을 상납하는 세도가의 부인들을 마다하지 않았고, 크게 문제되지 않는 청탁들은 보좌관들을 통해 민원 처리하듯 해결해주기도 했다. 의복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 늘 빈티지 핏을 고수했지만, 궁의 출입이 원활한 집무실을 따로 소유해 거처하면서 국정개혁과제를 몰두하기도 했다. 1970년대 샌프란시스코에서나 가능했던 일을 무려 600년 전에 신돈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완벽한 자유의 몸이 된 신돈은 드디어 숨겨둔 히든카드를 꺼내 든다.


 


 



 


신돈발 개혁의 핵심은 ‘전민변정도감’의 설치를 통해 토지와 노비의 변정(변별하고 옳게 결정), 기득권세력들에게 편중된 토지를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전민변정도감’의 설치 후 신돈은 스스로 결정을 주관하는 판사가 되었다. 빼앗긴 땅을 돌려주기 시작했고, 땅을 빼앗겨 양인에서 노비로 전락한 이들의 신분을 복구해주었다. 사실 노예 출신 신돈은 무엇보다 노예제 자체를 흔들고 싶었다. 그러나 노예제는 고려사회의 근간이기도 했다. 그 근간을 섣불리 건드렸다간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모든 개혁이 올 스톱 될 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노예제는 그대로 존속되었으나 변정하는 과정에서 신돈은 노비의 입장에 섰다. 일부 노비가 해방되었고, 땅을 잃었던 양민들이 제 땅을 되찾게 되었다. 왕도 짜증나고 눈치 보여 하지 못했던 일을 신돈이 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개혁이 거침없어질 수록 슬슬 신돈의 반대세력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에 신돈은 더욱 강력한 권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하지만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라 하지 않던가. 이 과정에서 신돈과 공민왕은 틀어지게 되고 만다.


 


신돈은 공민왕에게 지방자치를 감독, 관리하는 사심관제도의 부활을 요청했다. 더불어 사심관의 오야봉인 ‘5도 도사심관’이 되고자 했다. 사심관제도는 공민왕의 아버지인 충숙왕이 사심관이 지방을 과도하게 소유, 지배하는 문제가 심각해지자 폐지했던 제도였다. 신돈은 여전히 부실했던 자신이 세를 강화하기 위해 지방세력을 장악하고 싶어했고, 이를 공민왕이 모를 리 없었다. 이에 공민왕은 신돈의 요청에 반려, 또 반려했다. 그러던 중 비슷한 시기, 지방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신하 한 놈아가 신돈에게 먼저 브리핑 후 자신에게 온 것을 알고는 1년 감봉의 징계를 내린 후에 정사복귀를 선언한다. 신돈과의 예정된 균열은 그렇게 시작된다.


 


기득권세력들에겐, 왕과 나란히 앉아 자신들을 숙청하고 수시로 왕에게 ‘천도’(수도 이전)나 함 하자고 옆구리 쑤시는 신돈이 괴벨스처럼 보였다. 공민왕이 복귀를 선언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본격적으로 ‘신돈 보내기’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프로젝트는 의외로 간단명료했다. 신돈이 그의 몇몇 무리들과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정황을 꾸미는 것이었다. 몇 회에 걸쳐 쿠데타에 대한 실명제보가 왕에게 핫라인을 통해 들어갔고, 제보에 기명된 몇몇 무리들이 영장 없이 긴급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들은 일반 경찰 조사과가 아닌 대공분실로 연행되었다. 미란다 원칙이고 묵비권이고 나발이고 간에 소용없었다. 곧바로 추국부터 시작되었다. 모진 추국에 일부는 사바세계와 안녕을 고했고, 일부는 스스로를 쿠데타 세력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며칠 후 신돈마저 긴급 체포, 곧바로 수원으로 긴급 압송된다. 그렇게 신돈은 권력의 정점에서 밑바닥까지 정확히 마하 3의 속도로 곤두박질 쳤다.


 


 



 


신돈이 압송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공민왕은 신하들에게 신돈의 처리에 관련한 상소를 올리라 지시했다. 신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극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수원에서의 유배생활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읽으며 자신 또한 그렇게 화려하게 컴백하겠노라 다짐 또 다짐했다. 그리고 그에겐 공민왕의 친필사인은 물론 공증까지 마친 ‘까방권’도 있었다.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다 읽은 어느날, 왕이 보낸 사신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긴머리를 흩날리며 문 밖으로 뛰처 나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는 건 복귀용 세단형 가마가 아닌, 자신의 목을 기다리는 큰 칼이었다.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노비였던 어린 시절, 민생 행보하며 맛보았던 오뎅들, 자신의 취향에 너무나 잘 맞춰주었던 쉐프들, 그리고 몸을 나누었던 여인들, 여인들 중 더욱 또렷하게 떠오르는 반야, 그리고 왕... 공민왕...


 



고우영이 그린 신돈


 


그래도 내 덕에 땅을 되찾은 양민들, 노비에서 해방된 이들 때문에 저승길로 가는 발걸음이 그리 무겁지는 않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자신이 재건한 성균관, 자신이 학관의 자리에 앉힌 정몽주, 정도전 등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이라면 내 생애를 제대로 후대에 정직하게 전해줄 지 모른다고 생각하던 차, 이미 칼은 목에 와 닿아 있었다. 설사 시간이 있었다 하더라도, 정몽주와 정도전 모두, 신돈에 의해 쫓겨나기도 신돈의 정권에 참여하기도 했던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 의해 생을 마감하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신돈의 목은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대다수의 권문세족들과, 공민왕의 자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신돈의 목이 떨어진 1371년으로부터 정확히 21년 뒤, 고려를 대표하는 충신이자 성리학의 조종이라 일컫는 정몽주는 이방원이 고용한 킬러와 선죽교에서 마주하게 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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