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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5. 30. 수요일

한불로


 


 


0. 들어가며


 


야권세력과 그 지지층들은 이번 총선 결과와 최근의 통진당 사태를 보며 멘붕에 휩싸였을 것이다. 불과 수 개월 전만 해도 희망과 기대에 휩싸여 있던 야권 지지층들에게 꽃피는 4월과 5월은 좌절과 절망의 잔인한 계절이 되고 말았다. 붕괴된 멘탈은 시간이 흐르면 복구되기 마련이다. 감정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니까. 아마 앞으로 몇 개월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또다시 야권 지지층들은 마약 중독자들처럼 경로의존성에 따라, 허상이든 아니든 또다시 야권에 새로운 희망을 만들면서 누군가를 또 열성적으로 지지하게 될 것이다.


 


‘멍청한 사람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똑똑한 사람은 늘 다른 실수를 반복한다’고 누가 얘기했던가? 이제 이번 선거를 계기로 수십 년 동안 진자운동처럼 반복해온 ‘멍청한 짓’과 ‘똑똑한 짓’에 종지부를 찍고 ‘현명한 사람’으로 진화되어야 한다.


 



 


‘김용민 욕설 파동’이라든가, ‘486 - 친노들의 전횡’이라든가, 박지원의 ‘집토끼 홀대론’, 또 죽어가는 권력 반MB 정서에만 기대했던 안일한 자세 등 선거 공학적인 평가를 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 평가대로 야권이 선거 국면의 이슈에 대해서 올바로 대처해서 지금보다 10석 넘게 더 건졌다 한들, 국민들의 삶의 질과 사회가 얼마나 개선되었을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 결과와 통진당에서의 선거부정, 그리고 바닥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낸 종북주의 집단들의 실상을 계기로, ‘묻지마 야권 지지세력’들은 멘탈 붕괴를 떠나서 가치관 붕괴를 경험했으면 좋겠다. 그것에 성공한다면 이번 선거는 오히려 ‘위장된 축복’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붕괴시켜야 할 가치관은 486세대들 중 열성 지지층이라면 흔히들 갖는 통념적 인식들 전반이다. 즉, 현재 정치집단들의 성격을 [정의로운 민주화운동 세력 VS 기득권 집착의 보수세력]으로 규정하는, 즉 ‘새누리 지옥 - 야권 천국’ 같은 땟국물에 쩔은 선악의 이분법적 사고발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쌍팔년도 이분법적 가치관에 쩔어 있는 한, 야권이 무슨 짓을 하던 간에 절대악의 존재인 상대편(새누리당 세력)보다 다소나마 낫다는 인식하에, 묻지마 지지로 귀결될 뿐만 아니라, 그 대안에 대해서는 ‘현실’을 이유로 항상 ‘차악’을 선택하는 악순환의 테크를 밟을 수밖에 없다. 30년 동안 그랬으면, 이제 고마할 때도 되었다. 마이 묵었다 아이가.


 


여기 딴지에 서식하는 필자들, 특히 물뚝심송이나 춘심애비 같은 류의 필자들은 수구세력들이 쳐놓은 프레임에 대중들이 놀아난다고 떠들고 있지만, 정작 본인들 자체가 황당할 정도의 단순무식한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이른바 ‘민주진보개혁 세력’과 열성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사고 패턴이 그들이 비판하는 ‘수구 꼴통’들의 [반공 세력 - 빨갱이 세력]의 이분법적 구조와 동일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고방식은 냉전 시절 반공 사상 못지 않게 시대적으로 그 실효성이 완전히 지나가 버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와 같은 쌍팔년도의 가치관으로는 21세기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정치구조와 사회체제를 맞이할 수 없다.


 


이제는 백발 노인이 되어버린 ‘어버이연합’류와 같은 세대들에 대해서는 변화된 인식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젊은 층에 속한 우리 같은 30~50대들은 대한민국의 주축이 되는 세대들이기에 사회의 진정한 개혁을 위해서는 이들의 인식의 변화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그들의 머리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통념적 상식’ 전반에 대한 전면적인 수술은 불가피하다. 그래야 새로운 정치세력의 출현을 기대할 수 있다.


 


민주당을 비롯한 현 야권 세력 일반을 비판한다고 하여, 닳고 닳은 좌파 근본주의적 관점에 입각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정은 반대이다. 좌파 근본주의를 포함한 한국 운동권에 일반화된 인식틀 전체에 대해 기존의 좌-우파 관점도 아닌, 먹고사니즘에 매달려 있는 보통 생활인의 입장에서 비판하게 될 것이다.


 


자, 시작하자.


 


 


1. 저소득층의 새누리당 지지는 이유가 있다


 


부자감세를 비롯해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듯한 새누리당 세력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층은 영남권과 강남3구를 비롯한 중산층 이상의 계층들이다. 그런데 여론조사를 통해 보면 한편으로는, 노년층과 교육수준이 낮은 적지 않은 저소득층도 이 정당의 강력한 지지기반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로부터 현 야권 세력과 열성 지지자들은 이런 ‘계급 배반’의 투표 현상을 보며 반공이데올로기에 세뇌당한 노인 계층과 낮은 교육수준의 저소득층의 ‘무지’를 개탄하기도 한다. 마치 상식처럼 굳어 있는 이들의 통념은 너무도 자명한 듯하여, 이견의 여지가 없는 듯도 보인다. 때문에 비교적 젊은 층에서 보수여당에 투표를 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그들은 ‘무개념적 인간’으로 폄하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사태의 일면만을 바라보는 반쪽 인식일 뿐이다. 과거 개발독재 시절, 고도의 경제 성장 속에 대중들의 삶이 실제로 어떻게 개선되어 왔는지, 그 어떤 이데올로기적 선입견 없이 겸허히 있는 그대로를 파악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그 시절을 경험한 세대들의 선택을 함부로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세대와 계층을 일방적으로 ‘덜 깨어 있는 자’로 매도하는 오만한 태도는 그들로 하여금 적대감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노인세대나 저소득층이 개발 독재 시절을 그리워하거나, 그와 연관된 듯한 정치 집단을 지지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세뇌의 결과라기보다는 나름 체험적 진실 속에서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앞으로 상술하겠지만 ‘계급배반’의 행태는 오히려 이른바 ‘민주 개혁’ 정치집단들이 훨씬 더 했었다.


 


‘민주 정부’ 시절 ‘잃어버린 10년’은 서민들에게 진실이었다.


 


나의 개인적 경험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하겠다.


 


내가 고등학교를 나오고 처음 노가다를 뛰었던 게 아마도 86년경이었을 게다. 그때 아무 건설현장에 들어가서 무턱대고 ‘자리 있어요?’라고 물으면 “내일부터 작업복이랑 신발 준비해서 와!”라고 순식간에 채용될 정도로 노가다 일자리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런 경험도 기술도 없는 생초짜가 노가다 입문하면 그냥 기술자의 시다바리를 하거나, 자재 등을 나르는 잡부 일을 한다. 당시에 내가 처음 받은 일당은 8천 원이었다. 한두 달 지나니 9천 원이 되었다. 87년도에는 일당이 대략 1만2천 원 선으로 올랐고 88년도에 분당, 일산 등 신도시가 건설되는 대형 프로젝트가 가동되면서 일당은 2만 원대로 순식간에 솟구쳤다. 90년대 들어서 3만 원대가 되었고 IMF 사태 직전인 95~96년도 경에는 5만 원대가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것은 미장이라든가 목수 등의 기술자의 임금이 아니라, ‘데모도’로 불리는 가장 밑바닥 노가다 잡부 일당 얘기다. 90년대 중반부터 노가다 판에 조선족 노동자들이 등장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들은 대체로 한국인 인부들의 딱 절반의 임금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97년 IMF 사태 직후부터 1년간 노가다들에게 일자리는 갑자기 증발해버렸다. IMF 사태 후 1년간은 경제가 멈춰선 듯한 시기였다. 회사는 도산하였고 공장들이 문을 닫고 부동산 가격은 곤두박질쳤으며, 실직자는 쏟아졌고, 건설은 중단되었다. 1년 후부터 서서히 경기가 회복되면서 가장 밑바닥에 있던 그들도 다시 일거리를 조금이나마 갖게 되었지만, DJ의 국민의 정부부터 노무현 정부 시절까지 10년 동안 그들의 임금은 공구리에 묻힌 듯 거의 한푼도 오르지 않았다.


 


생각해보자. 86년도에서 95년도까지 대략 10년간 노가다들의 일당은 대략 5배~7배 정도 올랐지만, 97년~06년도까지 이른바 ‘민주정부’ 10년 동안은 거의 오르지 않았다는 사실. 하층민들에게 민주정부 10년은 그야말로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이 들어맞는다.


 


그 ‘10년’은 하층계급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95~96년도 학원에서 중딩을 잠깐 가르쳤었는데 대략 월 140~160만 원 사이로 급여를 받았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6년도에도 사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우리 누님은 제일은행에서 대략 80년대초에 입사해서 15년 가까이 근무하다가 제일은행이 외국 사모펀드에 팔리면서 짤렸다. 그 당시 받았던 임금이 월 약 300~350만 원 사이였다. 그러다 3일후 같은 은행으로부터 계약직 제안이 들어왔다. 업무는 똑같았지만 임금은 100만 원.


 


94년도 내가 지금의 우리 와이프와 데이트할 때 자주 가서 먹었던 곳이 대학로 근방의 김가네 김밥집이었다. 그때 김밥 가격이 2,000원이었다. 지하상가 분식집에서는 대략 1,000원에서 1,500원 정도였다. 그러나 김밥천국의 김밥가격은 15년 동안 1,000원으로 오히려 더 내려갔고, 김밥 가게 숫자는 당시보다 아마도 10배 이상은 늘어난 듯하다. 임대료 역시 상승하면 더 상승했지 줄어들진 않았을 테니, 그와 같은 영세 자영업자들의 삶이 얼마나 곤궁해졌을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 10년의 기간 동안 휘발유값은 3배 오르고, 경유값은 5배 뛰었으며, 부동산은 천정지부로 솟구쳤다. 사교육비와 원체부터 높았던 대학등록금 역시 두 배는 훨씬 넘어섰다. 물론 김대중, 노무현 두 ‘민주 정부’ 시기 물가상승률은 3% 전후로 안정적인 상태였다고는 하지만, 서민들의 실질 소득 감소는 ‘고난의 행군’으로밖에 달리 표현될 말이 없다.


 


그런 반면, 공직자 재산공개 때 나오는 국회의원과 고급공무원들의 재산은 매년 얼만큼 더 증가했다는 소식이 빠짐없이 들린다. 그들이 특별하게 재테크하는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빚 없이 자기 자산이 일정 규모 이상인 자들이라면, 더욱 돈을 잘 버는 구조로 이미 사회가 돌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서민들의 실질 소득이 거의 그대로인 채, 심지어 명목소득마저 곤두박질 칠 때도 국민소득이 매년 3~5% 증가했다고 한다면, 부의 쏠림이 얼마나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졌겠는가?


 



 


한편, 김대중 정부 때 도입된 비정규직, 파견근로제, 정리해고제 등은 전태일이 부활한다고 해도, 다시 한 번 분신의 분노를 터트릴 만한 정책이었다.(실제로 해고에 따른 생활고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이 수천에 이른다.) 비록 IMF의 노동유연화 요구조건 때문에 처리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IMF 사태 이전에 이미 그것은 당론으로 결정된 바 있으며, 그 대상 폭과 임금 차별에 대해서는 너무나 한심할 정도로 무관심했다.


 


그렇게 해서 같은 직장 안에서도 왼쪽 바퀴 끼우는 사람은 비정규직, 오른쪽 바퀴 끼우는 사람은 정규직이라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고, 정규직 노동자가 한 명도 없는 현대 모비스 같은 기업도 있는가 하면, 매일같이 출근하는 회사에서 아무리 오랫동안 근무해도 그 회사 직원이 아닌 그 이전까지는 상상할 수 없는 고용제가 등장했다. 그 결과 노동자는 언제든 쓰고 버리면 되는 크리넥스 티슈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만일, YS-DJ 정부 때 시행된 노동유연화 정책으로 파견근로, 계약직 등의 비정규직이 쏟아져 나오지 않고, 예전처럼 종신고용 같은 근로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지금의 임금 수준은 어땠을까? 아마 88만원 세대라든지, 월 100만 안팎에 머물러 있는 워킹 푸어들의 삶은 현저하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대기업도 아니고, 그냥 일반 점포 직원의 예를 한 번 보자.


 


영등포 공구상가에 내 친구가 거래하는 기계 부품을 도소매로 파는 한 3~4평 되는 점포가 있다. 그 점포는 70년대부터 영업을 시작했으니까 40년 가까이 될 정도로 오래된 곳이다. 그 가게의 직원은 2~3명인데 가장 고참 직원나이가 쉰이 넘었다. 지금 그분의 월급은 400만 원 정도하고, 퇴직금은 대략 1억 원 넘게 적립되어 있다. 이 정도 규모의 점포에서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급여겠지만, 대략 30년 넘게 근무하면서 매년 물가상승률에 살짝 밑돌며 조금씩 인상된 것이다. 물론 그 영등포 공구상가 일반이 그런 건 아닐지 모른다. 그 업체 사장과 직원간에 수십 년간 쌓아온 인간적 정리가 있기 때문에 싼 값의 인건비를 위해 해고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런 정도의 급여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개발시대의 방식대로 비록 적은 임금이었다 하더라도 물가상승률에 준해 인건비가 올려주었다면 그 정도 수준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의미이다.


 


몇 년 전 한국은행 수위 연봉이 8,000만 원 가까이 된다는 보도에 네티즌들이 게거품을 물었다. 사실 80년대에도 대기업에서 경비는, 그 당시 외주업체라는 것이 없었으니까 별정직 회사직원이었고 근속연수가 오래되면 그 회사 일반 직원보다 월급이 많은 경우도 흔했다. 한국은행의 그 경비는 수십 년 전 입사해서, 해고되지 않고 정년에 가까워졌을 뿐이었다.


 


그런 경우에 비추어 본다면 근무기간도 불안정하고, 100만 원 안팎의 최저임금으로 급여가 평생 고정되어 워킹푸어가 되는 외주업체 파견 노동자들이 지난 개발시대에 비해 얼마나 절망적인 현실로 몰려 있는지는 상상에 맡겨두겠다.


 



 


IMF 사태 이후 대량도산에 따른 대량 정리해고는 필연이었다고 치더라도, 그에 편승해서 정상적인 기업에서도 시류를 틈타 해고를 하지 않으면 마치 시대에 뒤쳐진 양 까닭도 없이 구조조정의 이름 하에 대량 정리해고를 해버렸고, 이에 대해 정부는 속수무책으로 방관하기만 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퇴직금을 받거나 대출을 받아 치킨집과 피자집 따위들을 창업하며 자영업자의 길을 간다. 이로써 변변한 산업이 없는 멕시코보다 더 많은 자영업자가 범람하였고, 그것은 제살 깎아먹기 경쟁으로 치닫다가 대부분 서서히 망해가며 신빈곤층에 진입하게 되었다.


 


임금 소득이 줄어든 가계에선 가계 부채가 폭증할 수밖에 없었는데, 예전 법정 이자율 24%의 제한은 철폐되어 이자율은 1금융권 카드에서조차 30%가 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2금융, 3금융권에서는 심지어 200%의 약탈적 고금리가 횡행했다. 이자율 제한을 요구하는 목소리에는 ‘시장 자율’이라는 채찍만큼 더 잔인한 정부의 답변이 준비되어 있었다. 2000년초 카드 돌려막기 끝에 신용불량자들이 대량 양산된 배경에는 바로 이처럼 너무나 무책임한 방임주의적 금융정책이 자리잡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두텁게 형성되었다는 한국의 중산층은 5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동안 신빈곤층으로 순식간에 전락하였다.


 


제임스 길리건이라는 미국의 의학자가 쓴,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라는 책은 정치와 죽음의 상관관계를 밝힌 연구 서적이다. 이 책의 저자는 지난 100년 동안의 미국내 범죄율과 자살율의 통계를 조사하다가 우연히, 특정한 시기마다 급격히 그 수치가 오르고 내리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원인을 분석한 결과 그 시기가 권력 교체기와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민주당이 집권할 때보다, 공화당이 집권할 때 자살자와 타살자가 훨씬 늘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결과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한지 다각도로 검증을 시도했고 100년간의 인구변화와 실업, 불평등, 불황 등 같은 사회,경제적 변수의 상관 관계를 보여주는 통계와 연구성과들을 토대로 검증한 결과 명백한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빈곤, 불평등, 실업자가 증가하면 그와 비례해서 자살과 살인이 증가한다. 공화당이 집권할 때 미국의 자살과 살인률은 증가하고, 민주당이 집권하면 감소한다. 107년 동안 미국 정부가 발표한 통계자료를 토대로 증명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미국 100년 역사의 통계를 통해, 진보적인 민주당이 집권하면 국민들의 살인과 자살이 감소하고 보수적인 정당이 집권하면 국민들이 더 많이 죽는다라는 아주 단순 명쾌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통계를 살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권위주의 보수정당이라던, 전두환 정권 때는 평균 자살률이 10만 명당 8.7명이었다. 노태우 집권기 5년 동안은 그보다 더 낮아져서 7.5명 정도였다. 그런데 민주정부라고 불리는 김대중 정부 시기에는 무려 15.8명으로 두 배가 넘게 솟구쳤고, 노무현 정부 5년 평균은 급기야 23.5명으로 군사 정부 시절의 3배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 들어 30명이 넘어서는 엽기적인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불과 10~20년만의 일이다.


 


어느 해에는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자살자가 더 많았고, 일가족 전원이 신변 비관하여 어린애를 안고 동반 자살 하는 것도 별로 놀라지 않은 뉴스가 된 지 오래다. IMF 사태 이래 지금까지 OECD 국가 중 최대 자살률 연속 1위 자리를 놓치지 않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여기에 20대 자살률 1위도 추가가 된다.


 


저 책 저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표다.


 


이 절망적 지표 아래 수출 확대와 소득증대를 참여정부의 성과로 자랑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생각을 갖게 만들었을까?


 


물론 절대빈곤에 허덕이던 50년대가 있었고, 개발독재시대의 60~70년대에도 달동네로 상징되는 빈곤층이 광범위하게 도시 주변에 산재해 있었다. 전태일 열사로 나타나는 노동자의 저임금과 가혹한 노동현실이 지배하던 이른바 ‘개발독재’로 명명되던 시기도 있었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박정희 신드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조중동의 왜곡보도와 세뇌 때문에?


 


‘개발독재:중산층 형성 vs 민주정부: 중산층 몰락’


 


이 대목에서 잠시 70-80시대를 돌이켜보자.


 


우리 집안은 형제가 8명이 되는 대식구였고, 60년대에 먹고살기 위해 전라도에서 이농하여 도시 변두리로 진출한 전형적인 60년대 도시빈민층이었다. 아버지는 온 가족과 서울로 올라와서 막막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막노동부터 포장마차, 고물상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시면서 생계를 근근히 이어가시다가 어머니와 함께 힘겨운 연탄가게 일을 시작하여 자식들 교육을 시키셨다.


 


70년대 초등학생시절, 76년도 이전까지는 TV를 이웃집에서 기웃대면서 보았다. 그 당시에는 비록 도심에 있더라도 세 집 걸러 TV가 있었던거 같았다. 어느날, 안방에 TV가 생기면서 정말 날뛰도록 기뻤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5~6년 후 80년대에 들어서서 칼라 TV를 갖게 되었다. 기억이 뚜렷하지 않지만, 79년도 당시 학교에서 전화번호를 적어내라고 하면 절반 이상은 집에 전화가 없었는데 80년대 들어서 우리 집에도 드디어 전화기가 놓였다.


 


부유층들만 갖고 있던 비디오를 80년대 중반에 구입하게 되었고, 급기야 90년대 초반에는 140만 원 정도 하던 386컴퓨터까지 어머니께서 마련해 주셨다.


 


비록 은행대출을 받아 샀다고는 하지만, 단칸방 전세집을 전전하던 우리 집이 50평 한옥 집을 장만한 것이 대식구를 거느리고 서울에 올라온 지 대략 20년만이었다.


 



 


형제들 중 50년대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운전기사, 은행원, 말단공무원, 시장 점포 직원 등으로 취직하였고, 그 밑에 60년대생 동생들만이 대학교육을 받았다. 우리 부모님들은 이렇게 많은 형제들을 모두 교육시켜가며 집장만까지 오롯이 육체노동만으로 일구어 오신 것이었다. 물론 그 내막에는 형제들이 일찍 취직해서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는 그런 릴레이식 생계 과정도 있었지만 말이다.


 


우리 집안 사람들이 특별하게 머리가 좋다거나, 우연찮게 횡재를 했다거나, 투기를 하거나, 또는 돈 많은 친인척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거나 하는 요행수가 전혀 없었음에도 무일푼으로 대식구를 거느리고 상경하여 육체노동으로만 근 20년만에 자식들 대학 교육까지 시키고 중산층의 생활에까지 이르는 과정은 정말 경이적인 일이었다.


 


이런 ‘성장’의 경험이 비단 우리집뿐이었을까? 식당을 하던 경식이네, 시장에서 야채장사하던 갑돌이네, 구멍가게 하던 외삼촌댁. 가구 장사 하던 병구, 공장 다니던 영식이네... 모두가 힘들게 살았다고는 하지만 지난 한 세대를 돌이켜보면 다들 어느 정도 대충 집 한칸 씩 마련하여 중산층의 반열에 오를 정도는 되었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부모 세대들에게 물어봐도 이런 체험적 진실은 금방 증명이 될 것이다.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비교적 짧은 시기 안에 두터운 중산층의 나라가 80년대에 들어 이룩되었던 것이었다.


 


장하준 교수는 이런 사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을 한다.


 



“유럽의 산업혁명 당시 경제 성장률은 1.1% 정도입니다. 산업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1인당 소득의 연평균 성장률이 0% 내지는 0.1%에 불과했어요. 그런데 한국 경제는 본격적으로 경제 개발이 시작된 1960년대 이후 1인당 소득의 연평균 성장률이 매년 6% 정도를 기록합니다.


 


1%씩 성장을 하면 국민소득이 2배가 되는 데 70년 정도 걸립니다. 그러나 성장률이 6%가 되면 12년 정도면 국민소득이 2배로 늘어납니다. 매년 6%씩 성장하는 국가의 경우에는 두 세대가 지나면 소득이 64배가 됩니다.


 


1961년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 소득이 82달러였습니다. 당시 가나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의 2배가 넘는 179달러였고, 아르헨티나 400달러였습니다. 가나의 1인당 국민소득은 지금 350달러에 불과하죠. 아르헨티나도 당시엔 우리나라의 5배였지만 지금은 3분의 2정도 밖에는 되지 않고요.


 


지금은 경제 발전이 이뤄낸 성과를 우리 모두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경제 발전이란 것은 단순히 잘 먹고, 좋은 옷 입게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병을 앓지 않고, 오래 살고, 어린 자식을 잃지 않도록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경제 발전입니다.”



 


박정희의 개발독재식 성장은 노동자와 농민을 억압한 결과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본가들 역시 마찬가지로 혹독할 정도로 통제한 결과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보자.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 직후 정주영은 박정희에게 불려가 거의 강제로 조선업을 하도록 명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돈이 없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것은 정부차원의 지급보증밖에 없었다. 박정희는 정주영에게 정부 보증을 담보로 돈을 빌려와서 조선소를 지으라고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당시 막 가발이나 의류 등을 팔아 외화벌이 하고 있던 후진국에서 첨단산업인 조선업을 하겠다고 덤벼든다는 것은 주변국의 비웃음과 냉소밖에 돌아올 것이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정주영은 미국이나 일본에 다니며 차관을 구걸하러 다녔지만 그들로부터 얻은 것은 코웃음과 경공업에 치중하라는 충고뿐이었다.


 


빈손으로 돌아온 정주영은 박정희에게 몇 년만 유보해달라고 했지만, 박정희는 건설업 박탈을 위협하면서 유럽에라도 가서 꿔오라고 닦달을 했다. 정주영은 울며 겨자먹기로 영국으로까지 날라가서 여러 곡절 끝에 차관을 얻고 그리스 선박왕으로부터 덤핑에 가까운 가격으로 26만 톤 선박을 수주를 따내어 국내에 돌아왔다. 그걸로 조선소를 지어가면서 배를 만드는 초유의 공법으로 한국 조선업을 일구어냈다.


 



 


당시엔 해외 차관을 빌려와 수출 기업에 대출을 해줬는데, 부도를 내면 금쪽같은 외화를 날려버렸다는 이유로 기업 대표는 감옥까지 가야만 했다.


 


어쨌든 그런 강압적인 노동과 자본 통제 속에서 적실한 산업정책은 경제발전의 기폭제로 작용하였다. 개발독재 시기 동안에서도 실질 임금은 꾸준히 상승했다. 또, 고도 성장시기에는 베이비 붐 세대의 진출에도 불구하고 완전 고용에 가까울 정도로 고용이 창출되었으며 특히 80년 중반 이후 3저 호황과 87년 노동자 대투쟁에 힘입어 임금 상승률은 더욱 급상승했고 실질 소득 증대로 두터운 중산층 시대를 꽃피우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 당시 범죄와의 전쟁이라든가, 인신매매가 극성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과소비를 자제하자는 캠페인이 울려퍼질 정도로 호황이라 술집이 너무 잘되었고, 수요에 비해 ‘여자’라는 공급(?)이 너무 부족했던 것이었다. 내가 당시에 스탠드바라는 술집에서도 잠시 알바를 했었는데 무교동 도심 한복판이든, 옥수동 달동네 시장통 동네든, 동두천 변두리에서든 정도의 차이는 약간 있을지 몰라도, 정말 몰려드는 술집 손님들로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정이 이렇다면, 군사 정부의 ‘경제 개발’은 숱한 유신독재, 인권 유린과 군사문화 등 여러 폐해와 부작용을 감안하더라도, 그 시대 속에 경제성장과 그 번영의 과실을 꾸준히 체험해왔던 50대 이상 기성 세대들로서는 IMF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일어난 ‘분배악화, 고용없는 성장, 고용의 질 저하’ 등 서민들의 경제적 재앙은 실로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바로 이런 점이 이인제가 대선에서 박정희 코스프레를 하고, 박근혜가 선거의 여왕이 되며, 개발시대 경제 아이콘으로 상징화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 사회-경제적 배경인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반론하기도 한다.


 


박정희의 개발독재로 인한 경제성장은 외국의 원조, 노동자 서민의 불굴의 노력과 희생의 결과이지, 그것이 어느 한 독재자의 업적으로 칭송받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진중권을 비롯한 이른바 ‘진보적’ 논객들의 논리이다.


 


맞는 말이다. 노동자 서민의 피와 땀이 경제성장의 바탕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것은 그저 아무 내용 없는 선동적 문구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 모든 나라, 특히 가난한 나라들에서 생존을 위해 피와 땀을 흘리며 노력하지 않는 서민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우리나라같이 경제성장을 하고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되었던 경우는 세계적으로 드문 경우에 속한다.


 


개도국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그 나라 국민성의 저열한 나태함 때문인가?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제3세계 국가들이 가난한 이유는 대체로 부패하고 무능한 위정자들의 정책에서 그 원인을 찾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못살게 되는 까닭에 대해서는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에서 찾고, 잘살게 되는 이유는 서민의 '피와 땀‘에서 찾게 된다면 도대체 정치라는 제도는 왜 존재하는가?


 


또, 칠레나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는 우리나라보다 더 많은 원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이 정체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진중권은 경부고속도로 하나는 박정희의 치적으로 인정한다고 하는데, 그건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박정희가 독고다이로 불도저로 밀어서 만든 도로인가? 경제 성장과 중산층의 형성이라는 사회경제적으로 중대한 변화와 발전은 노동자 서민의 ‘피와 땀’은 물론이거니와 경부고속도로 그 이상이 되는 정부의 주효한 경제 정책과 관리가 어우러진 결과이지, 단순하게 그런 비유적 표현 하나만으로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결과가 아니다.


 



 


명민한 논객조차 이런 어처구니 없는 논리를 들이밀게 되는 것은 바로 독재와 고문의 정권을 인정할 수 없는 도덕적 감수성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이나, 윤리적 가치에 중점을 두는 사람들은 그런 흠만을 보게 될 지 모르나, 보통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감안하여 종합적인 평가 속에 정치인을 판단하게 된다.


 


어떤 논자들은 다른 논리로 박정희를 비판하기도 한다. IMF 사태를 맞이하게 된 것은 결국, 재벌 위주, 부정부패, 관치경제 등 박정희식 성장 모델의 부작용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라고. 또 김대중 정부시절 양극화가 확산된 것은 신자유주의를 강권하는 금융 구제의 조건 때문에 정책 운용이 제한되어 불가피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과연 그럴까? 오늘날 무한경쟁 속의 양극화가 본격화 되는 계기가 되었던 IMF 사태를 야기한 원인과 그 본질 그리고 이에 대한 ‘민주정부’의 책임 등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본격적으로 논의해보기로 하자.


 


한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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