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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5. 30. 수요일

정우성


 



 


아빠로서 꿈이 하나 있다. 대수롭지 않은 꿈이지만 따뜻하고 그리운 꿈이다.


 


인간의 뇌는 한계가 있어서 과거의 모든 사건들이 기억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기억은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지워진다(대부분의 기억이 지워진다는 사실은 육아와 자녀교육에 있어 정말로 중요한 정보다) . 과거는 영상의 한 장면으로 남는다. 그리고 분위기가 흔적처럼 남는다. 그 장면과 흔적이 어떤 이에게는 끔찍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따뜻한 품처럼 기억되곤 한다. 내 꿈이란 이런 거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과거를 돌이켜보는 영상 중에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조용히 책을 읽는 모습이 남기를 바란다. 그런 영상을 꿈꾼다. 아직 우리 아이들은 너무 어려서 그런 영상을 찍을 때는 아니다. 아이들이 한글을 깨치고 스스로 책을 읽을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그런 영상을 드라마처럼 각본대로 찍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도 연습할 시간이 필요하므로 꾸준히 독서하는 습관을 놓치지 않겠노라고 늘 속으로 다짐하곤 한다. 아빠도 엄마도 독서연습을 하면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보면 어느 샌가 옆자리에 앉아 자기 책을 넘기는 모습을 아이들이 보여주리라 믿는다.


 



 


독서가 늘 사람을 바르게 키워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좋은 책과 나쁜 책을 구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읽다 보면 재미있는 책과 재미없는 책, 혹은 귀가 솔깃해지는 책과 따분한 책으로 구별될 수 있겠고, 그건 어쨌든 개인의 몫이다. 책은 우리에게 생각하는 힘을 줄 뿐만 아니라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세상은 넓고 깊고 풍성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때로는 슬픔과 아픔에 가득찬 세상을 발견하곤 한다. 부작용도 있다. 중년의 나이가 되면 그 동안 살면서 체득한 다양한 경험과 지식 탓에 오히려 오만과 편견이 더해질 수 있다. 독서는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이 완고한 사람들에게 독서는 더욱 악랄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독서를 통해서 신선해지기는커녕 자기의 완고함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확보될 뿐이다. 우리는 말발과 글발을 위해서 독서하는 게 아니다.


 



 


사람마다 독서의 목적이 다르겠지만, 양서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겸손해진다. 때로는 뜨거워지기도 한다. 알지 못했고 또 그 동안 간과했던 것을 독서를 통해 깨우치면서 우리는 약간 전율하기도 하고 행복감에 젖기도 한다. 그럴 때면 도저히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어 잠시 덮어두곤 한다. 어른도 이와 같을진데 성장기에 아이들은 오죽하랴. 아이들에게 한 권의 책을 권하고 싶다. 아빠가 권하는 한 권의 책을 아이가 읽을 나이가 되기를 바란다. 아이들이 그런 나이가 되면 나는 늙은 주름을 보이며 귀밑이 평화로워질 것이다.


 



 


유아기 시절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책을 좋아한다. 어른들이 책을 싫어해서 문제이지 본디 아이들은 책을 좋아한다. 사람에게 어떤 책을 좋아하는 유전자가 있는 것은 아니다. 본디 인간이란 책을 좋아하는 법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유아는 빽빽한 활자로 가득한 책에는 관심이 없고, 책이 없어도 아이들은 잘 자라는 것을 보면 그런 유전자는 없다. 유전자로 말할 것 같으면, 오히려 소위 ‘스토리 텔링’의 유전자라든지 혹은 ‘따뜻한 분위기’에 끌리는 유전자는 있는 것 같다. 사실 유아가 책을 좋아하는 까닭은 책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엄마일 수 있고, 아빠일 수 있으며, 어린이집 선생님일 수도 있다. 책에 나와 있는 그림을 보면서 이야기를 듣는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혼자 힘으로도 책을 넘기게 된다.


 


나는 사실 책을 많이 읽어주지는 못한다(그래도 그럭저럭 100권 이상은 읽어준 것 같다).


 


나도 바쁘기 때문이요, 내가 해야 할 생활이 급한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로서의 ‘물건-책’이 아니다. 실제로 책을 읽어주지 못한 만큼, 부족한 분량은 밤에 잠자리에서 눈을 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끈질긴 질문들을 인내심 있게 답해 주곤 한다. 물론 엉터리가 대부분이다. 괜찮다. 이야기의 진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과학적’인 것은 유아 세계에서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고, 아이는 그 이야기 세계 ? 대개는 환상계 ? 속으로 쏙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만일 어른들이 자기 아이들에게 책을 많이 읽어주지 못한다면, ‘물건-책’이 아닌 ‘부모의 입 ? 책’을 권한다. 시간은 밤이고 장소는 이부자리, 이게 최적의 독서 공간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아빠다 시리즈 1~3에서 자세히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 유아책 출판계에서 일본 저작물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 같다(대단했던 것 같다). 상당수의 유아책이 일본 저작물을 번역한 것이다. 유아는 혼자의 힘으로 책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번역할 때에는 아빠와 엄마의 구술과 표정과 동작을 염두에 둬야 한다. 상당수의 번역서가 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점은 애석한 일이다. 번역서이든 창작서이든간에 유아책은 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며 소견이다. 상당수의 책은 구술에 적합하지 않다.


 


한편 개인적인 취향이자 경험이지만, 유아에게 너무 많은 정보를 주려는 책은 구술에 적당하지 않다는 점이다. 너무 많은 설명은 아이에게나 부모에게나 힘든 일이다. 그것은 초등학생 아동 이상의 연령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행인 것은 그런 유형의 책을 부모가 힘겹게 읽어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점이다. 때로는 어린이집에서, 때로는 유치원에서 또 때로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아이들이 경험하고 배우고 익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이 자주 간과되곤 한다. 나는 아이의 선생님이 아니며, 작가도 아니고, TV 프로듀서도 아니며, 아이를 가르치는 전문가도 아니다. 나는 그저 아빠일 뿐이다.


 


여기 네 권의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너무 유명한 책이어서 굳이 내가 여기에 소개할 필요도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한다고 해서 어떤 부끄러움이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용기를 내본다.


 


 


 


<달님안녕>


하야시 아키코, 1988년, 한림출판사


 



 


이 책은 정말로 눈부신 책이다.


 


내용은 10장도 안 된다. 구름과 달 사이의 관계가 내용의 전부다. 밤은 우리 아이들이 몰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책을 읽어주다 보면 구름과 달 사이에 아이가 비집고 들어감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는 반갑고 긴장하고 슬픈 감정에 젖다가도 다시 따뜻해지고 편안해진다. 아이를 위로하는 전형적인 문법을 이 책은 알려준다. 게다가 책을 읽어주는 아빠와 엄마를 끔찍이도 배려한 점에서도 이 책은 참 좋다. 대사가 단순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활자 그대로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구술에 억양이 생기고 감정이 돋아나며 표정이 만들어진다. 부모의 구술은 바람이 되고, 아이들은 그 바람에 따라 파도처럼 일렁인다. 부모의 구술이 책의 그림과 어울려질 때 얼마나 큰 효과를 내는지 이 책은 알려준다. 물론 그림도 따뜻하고 훌륭하다. 요컨대 이 책은 유아책의 고전이다. 만 1살부터 2살 사이의 유아라면 이 책을 좋아하지 않을까 싶다. 남아와 여아를 가리지 않는다. 유아의 세계에서는 모든 자연은 의인화된다.


 


 


 


<숲 속의 나뭇잎집>


소야 키요시 글. 하야시 아키코 그림, 1999년, 한림출판사



 


 


어떻게 하다 보니, 이 책의 그림도 앞서 본 <달님 안녕>을 그린 작가와 같게 됐다. 이 책도 하야시 아키코 특유의 따뜻한 분위기의 그림이 장점을 발휘한다. 하지만 <달님 안녕>과는 완전히 다르다. <달님 안녕>에서 아이들은 달님과 구름 사이에서 걱정하고 오해하고 기뻐하는 관찰자의 시점이었다. 하지만 <숲 속의 나뭇잎집>에서 자기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 소나기가 내리자 아이는 비를 피해서 나뭇잎 아래로 숨었더니 여러 가지 곤충들도 비를 피해서 아이가 숨은 곳으로 온다는 아주 단순한 내용이다. 여전히 걱정하고 약간 긴장하고 반가워하고 기뻐하는 구조는 비슷하다. 아이들에게 자기만의 공간은 정말로 중요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기만의 ‘본부’를 만들고 거기 안에서 여러 가지 장난감에 존재감을 부여하고 역할을 부여하며 즐거워 하곤 한다. 이 책은 그와 같은 심리를 잘 반영한 것 같았다. 역시 구술하기 너무 좋아서, 부모가 읽어 주다 보면 구술에 억양이 생기며 감정이 생긴다. 유아의 세계에서는 모든 자연의 중심에 유아가 있다. 이 책은 남아보다 여아가 더 좋은 것 같다. 만2-3세 유아에게 안성맞춤이 아닐까 하는 생각.


 


 


 


<재미있는 내 얼굴>


니콜라 스미, 2007년, (주)서울교육


 



 


 


이 책도 우리 아이들에게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을 주고 아이에게 스스로 읽으라고 하면 특별히 별날 것도 없는 그런 책이다. 이 책의 묘미는 구술자의 표정에 있다. 유아에게 책이란 구술자와 떼레야 뗄 수 없는 그런 의미다. 이 책은 그런 의미를 다시 한 번 내게 가르쳐주었다. 만약 아이의 시선이 이 책에만 고정되어 있다면, 어쩌면 별로 재미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을 아빠(혹은 엄마)와 함께 읽으면서 아빠의 일곱 가지 표정을 아이들은 즐기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들도 아빠의 표정을 따라한다. 마지막 페이지에 거울이 하나 있는데 그 거울을 보고 아이 스스로 자기 얼굴을 시험해 보라는 것이다. 생각만큼 효과가 있지는 않았다. 그 거울보다 더 좋은 거울이 있는데 그게 바로 아빠 또는 엄마의 얼굴인 것이다. 유아의 세계에서는 모든 자연은 표정이 있다. 만 1세~5세까지 괜찮다.


 


 


 


<유치원 선생님이 뽑은 인기동요>


총61분, 50곡 수록, CD 포함, 삼성출판사



 


 


이 책은 완전 대박이다. 이 책은 선물로 받은 것이었는데 정말로 부모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최고의 책이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배우는 유아 노래의 대부분이 여기에 수록되어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아직 한글을 모르고 또 악보를 읽을 줄 모르기 때문에 노랫말이 수록되어 있는 책은 아이들에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신기한 것은 이제 고작 만 3세가 되려고 하는 막내는 소파에 앉아서 CD를 들으면서 해당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다. 그림으로 대충 곡을 추정하는 것 같다. 아이들은 율동도 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기 아이들의 몸짓과 노래를 보고 듣는 것은 여간 행복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부모도 아이의 노래를 따라부를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이 책은 정말로 눈부시다. 사실 아이들에게 필요하다기보다는 부모들에게 필수 유아책이 아닐까 싶다. 아이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내고 있다면 이 책은 정말로 유용하다. 만일 아이를 집에서 키운다면 더더욱 유용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겠다. 유아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노랫말이 된다.

 


 


이렇게 4권의 유아책을 여기 감히 추천해 보았습니다.


그밖에도 중고서적으로 반값보다 더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한 모출판사의 전집이 있고, 지인에게 받은 책도 있고, 외국 책도 있고, 서점에서 한 권씩 구매한 책도 있습니다만, 제 개인적인 생각과 경험으로는 이 책들이 최고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참 좋은 책이 무척이나 많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책이 좋았나요? 댓글로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서로 좋은 정보를 공유해 봅시다.


 


 


정우성


두 아이의 아빠, 변리사, <특허전쟁> 저자, 드디어 후속편 나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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