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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6. 02.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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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 러일전쟁4







이지치 고스케(伊地知幸介) 장군의 병력운영과 전략전술은 상식 밖의 수준이었다. 그가 공격하는 날짜를 결정하던 방식을 예로 들어볼까 한다. 그는 같은 루트, 같은 날(매달 26일), 같은 시각에 돌격을 명령했다. 마치 알람시계를 맞춰놓은 듯한 이 행동은 당연히 일본군의 피해를 가중시켰는데, 그렇게 한 이유가 가히 충격적(!)이었다.


“화약의 준비가 딱 그때 되고, 26일은 남산을 돌파한 날이라 운수가 좋고, 26은 두 홀수(13)로 쪼개지기 때문에 뤼순 요새를 쪼개버리는 날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지치 고스케는 계속 이런 식의 병력 운영을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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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냄새 때문에 싸우기가 힘들 정도였다고...



애초에 벙커와 포루로 방어한 지역을 공격하지 말고, 해군의 요청대로 203 고지로 공격을 했다면 이런 피해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지치 고스케와 노기 장군은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2차 공세에서 제3군은 프랑스 요새 축성의 달인이었던 보방(Vauban)의 공격법인 ‘두 갈래 공격로를 파 돌격진지를 구축’하는 방법을 썼고, 장교들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보루에 돌입할 경우 필요한 장교만 부대를 선두 지휘할 것’이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3,830명의 사상자만 냈을 뿐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제1보병 사단의 참모장이 203 고지에 대한 공격을 건의한다. 해군의 요청을 다 들어주는 건 아니지만, 소규모 별동대로 한 번 공격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을 했다. 이 설득에 넘어가 제1보병 사단의 별동대가 203 고지를 공격하나, 워낙 소규모였기 때문에 고지 탈취에는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공격이 러시아군에게 ‘경고’가 되어, 러시아는 203 고지의 취약점을 확인했고, 일본군이 이 고지를 노린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러시아군 사령관이었던 스텔라 중장은 그 즉시 203 고지를 보강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203 고지에 더 많은 기관총과 철조망 중포들이 배치됐다. 일본군이 ‘피를 덜 흘리고’ 여순 요새를 함락할 기회가 사라졌다.



촉박


봉천 방면에서 러시아군이 늘어나는 게 눈에 띌 정도였고,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하루하루 다가오는 상황 속에서 여순 요새를 공략하기란 요원해 보였다. 이제 일본의 운명은 여순 요새의 함락에 달려있다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그러나 날마다 새로운 시체의 산이 쌓여가고 전비(戰費) 압박에 일본 경제가 휘청대는 와중에도, 이지치 고스케는 26을 반으로 쪼개기 위한 돌격을 계속했다. 이때쯤 되니 일본군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이미 제3군의 사상자가 3만 명에 육박하는 상황이었다. 가장 현실적인 대책이라면 제3군 사령관인 노기 장군을 교체하는 것이지만, 직속상관이었던 오야마 이와오 원수는 아군의 사기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노기 장군을 유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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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mm 유탄포


거기다 도쿄만 방어를 위해 배치해 놨던 280mm 유탄포를 떼어내 제3군에 보내기까지 했다. 224Kg의 포탄을 7,850m까지 날려버릴 수 있는 이 유탄포는 군함 갑판을 목표로 제작했기 때문에 땅에 닿으면 불발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당시 의견이 분분했지만 뭐든 일단 보내야 했다. 그러나 이지치 고스케는 그 와중에도 ‘보낼 필요 없음’이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이 포가 너무 무거워 포상을 설치하는 데만 3주가 걸릴 거라는 이유 때문인데, 실제로는 9일 만에 이 포를 설치했다.


유탄포와 함께 기관총 같은 화기도 보충됐다. 러시아 군의 맥심 기관총에 대항하기 위한 결정이었는데, 문제는 일본이 ‘가난했다’라는 점이다. 2차 공세 때 48정을 추가 배치했고 3차 공세 때 80정을 추가 할당했지만, 당시 알보병(일반 보병) 생활에 익숙해 있던 일본군에게 기관총은 낯선 무기였던 터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결국 일본군은,


“보병이 기관총을 휴대하는 것은 용감하지 못한 꼴이다.”


라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이 대목을 눈여겨봐야 하는데, 일본은 러일전쟁을 통해 자신들의 군수생산능력이 전장에서의 군수물자 소모수준을 도저히 쫓아갈 수 없단 걸 알고, 자신들의 국력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이때부터 일본군은,


“물건은 아끼고, 사람의 생명은 그 다음이다.”


라는 그들만의 고유한(!?) 용병사상을 정립한다. 여러모로 러일 전쟁은 일본 국민들에게는 ‘지옥’을 만들어 준 전쟁이었다.


각설하고, 일본은 당시에 지원할 수 있는 모든 걸 제3군에 지원하려고 했다. 일본의 운명이 여순 요새에 공략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마지막 카드까지 제3군에게 건네려고 했다. 바로 일본 본토의 마지막 예비 사단인 제7, 제8사단이었다. 일본 본토에서 막 편성된 신규 사단인 제7, 제8사단은 일본의 마지막 예비 병력이었다. 만약 이걸 제3군에 보냈다가는 이마저도 털어먹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상황에서도 격론 끝에 제7사단을 여순으로 보내기로 했다.



결착


운명의 1904년 11월 26일, 제3군은 3차 공세를 시도한다. 이때 눈여겨봐야 할 것이 흰어깨 띠를 두른 ‘백거대’의 등장이었다. 제1사단에서 2개 대대, 제9, 제11사단에서 1개 대대, 제7사단에서 2개 대대를 차출해 총 6개 대대를 모아 3천 1백여 명의 특공대를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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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산허리까지는 무사히 갔으나 지뢰가 터지면서 탐조등 아래에서 ‘총알받이’ 신세가 됐다. 원래 이들의 목표는 기습이었으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으므로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연락수단이 없어서 퇴각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다. 결국 이들은 날이 밝을 때까지 산허리에서 ‘표적지’ 노릇을 해야 했다. 다음날 아침 흰 어깨띠를 맨 일본군의 시체로 산 사면이 가득찼다. 이 일로 백거대는 절반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사실상 궤멸한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작전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백거대의 궤멸 소식이 고다마 겐타로(兒玉源太郞) 장군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당시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총사령관인 오야마 이와오는 더 이상 노기의 실책을 봐줄 수 없었는지 자신의 참모장인 고다마를 보낸다. 전선의 상황을 파악한 다음, 필요하다면 지휘권을 인수해 여순을 공략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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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마 겐타로



고다마는 바로 여순으로 가는 기차 편에 몸을 실었고, 제3군 사령부에 도착하자마자 이지치 고스케를 불러세워 놓고는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몰아 세웠다. 그 동안의 작전이 수준 이하였음을 말하고 바로 노기 마레스케 장군을 만났다.


<언덕위의 구름>에서는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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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에 지휘권 정도는 평화롭게 넘겨 받아야지

(영화 '203 고지'의 한 장면)



“자네 지휘권을 며칠만 빌려주지 않겠나?”


이렇게 고다마는 지휘권을 인수했다. 그리곤 제3군 참모들을 소집해 작전 목표를 다시 설정한다.


“203 고지 점령을 최우선으로 한다!”


이후 고다마 겐타로는 모든 화포를 203 고지에 쏟아 부었고, 지휘권을 인수한지 나흘만인 1904년 12월 5일 오전 10시 30분 경, 드디어 203 고지를 점령한다. 이 때 전사자가 5,052명이었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203 고지는 여순 요새 서북면 정면 중에서 가장 훌륭한 전망을 가졌고, 뒤로는 여순항 전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요지였다. 이 고지에 오른 일본군은 즉시 여순항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극동함대의 좌표를 280mm 유탄포 부대에 통보했고, 잠시 후 280mm 유탄포들이 극동함대를 덮쳤다. 그렇게 155일을 끌었던 여순 요새 공략전은 막을 내렸다.


여담이지만, 203 고지 전투 이후 노기 마레스케 장군은 일본인들의 ‘공공의 적’이 됐다. 이 전투 하나만으로 수만 명의 병사들이 개죽음을 당했으니, 그 유가족들과 일본인들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했을까? 그러나 노기 장군의 아들 2명도 러일 전쟁 기간 동안 전사했다. 장남인 노기 가쓰스케 중위가 금주성 동문 전투에서 전사했고, 차남이었던 노기 야스스케 소위는 203 고지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러나 이런 변명으로 자신의 실책을 변명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던 노기 장군은 할복을 결심했으나 당시 메이지 천황이 이를 만류한다. 자기가 살아있는 한 노기 장군의 할복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바로 아내와 함께 자살한다.



채권이 팔리기 시작했다!


“여순의 항복은 차르 체제 항복의 서막이었다.”


- 여순 요새 함락에 대한 레닌의 평가


여순 요새의 함락과 뒤이은 봉천회전에서의 승리로 러일 전쟁의 승기는 서서히 일본 쪽으로 넘어왔다. 물론 봉천회전 단 한 번만으로 일본군은 약 7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이런 많은 사상자 수는 일본에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봉천회전 직후 야마카타 참모총장은 내각에 한통의 의견서를 제출한다.


“러시아군은 본국에 아직 강력한 병력을 유지하고 있으나, 일본군은 이미 전 병력을 사용했다.”


전쟁에 누구보다도 긍정적이던 군부가 전쟁 종결을 재촉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당시 일본은 물이 턱 밑까지 차오른 상황이었다. 엄청난 전비부담의 압박 속에서 일본 정부는 담배 전매권 등을 미국과 영국에 팔아서 전비를 마련하고 있었다. 이 당시 전쟁비용 마련을 위한 일본 정부의 사투는 203 고지 전투의 그것과 비교할 만 했다.


러일 전쟁 직전에 일본 정부가 국내산업 진흥을 위해 발행한 해외 채권이 5억 8천만 엔이었는데, 당시 금리는 연 4.5%대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나자 채권 가격이 폭락해 100파운드 짜리 채권이 75파운드에 거래됐다. 모두가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개전 이후의 전비 마련은 일본에게는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돈’이었다. 문제는 일본은 가난한 나라였다는 것이다. 열강들도 전비 마련을 위해 채권을 발행하곤 했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길만한 나라’의 국채만을 사려고 한다.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한다면 당연히 러시아가 이길 것이란 게 당시의 상식이었다. 때문에 일본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 온 사방을 뛰어다녔지만 여의치 않았다.


영국 런던으로 달려갔던 스에마쓰는 연설은 물론 신문에 기고까지 하며 일본의 입장을 영국 국민들에게 알렸으나 대다수 영국인들은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도 몰랐다. 미국의 경우는 좀 더 심했다. 당시 일본은 미국에서 1,000만 파운드의 국채 판매를 목표로 삼았다. 이는 당시 환율로 1억 엔, 1904년 일본 예산의 40%를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거액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일본국채를 인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국의 금융기관들도 러시아와 일본이 싸우면, 당연히 러시아가 이길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당시 주요 국가들의 국채 이자율이 2~3%였던 때 일본은 무려 6%의 이자율을 조건으로 내놓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러일 전쟁 승리의 1등 공신은 쓰시마 해전의 도고 헤이하치 제독도, 203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고다마 겐타로도, 봉천회전을 승리로 이끈 오야마 이와오도 아니다. 러일 전쟁은 유대인 금융자본가인 제이콥 헨리 시프(Jacob Henry Schiff)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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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기준 일본 정부의 예산은 약 2억 5천만 엔이었다. 1905년 8월까지 일본은 총 4회에 걸쳐 8,200만 파운드, 약 8억 2천만 엔의 해외국채를 발행해서 전비를 조달했다.


이 가운데 시프의 주선으로 일본 정부가 빌린 돈은 모두 2억 달러, 일본 돈으로 4억 엔이나 되는 거액이었다. 러일 전쟁 당시 일본이 쓴 전쟁비용의 40%에 달했다. 당시 시프는 단순히 일본에게 돈만 빌려준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러시아의 국채 발행을 방해했다. 유대계 자본의 대표주자인 로스차일드 가문에 편지를 써 러시아 채권의 인수를 거절해 달라고 부탁을 했고, 러시아 국채가 금융계에 풀리는 걸 막았다.


만약 시프가 없었다면,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든든한 유태인 조력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전비부담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미 일본 경제는 최악의 상황이었고, 일본 국민들의 생활은 하루하루 전쟁의 그것과 닮아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순항에서의 승리는 일본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줬다.


시장에서 일본 국채가 팔려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여순 요새가 일본의 손에 떨어지고, 극동함대가 분쇄되면서 일본에 대한 승리를 점치는 나라들이 늘어났고, 일본 국채가 팔려나갔다. 일본으로서는 숨을 내몰아 쉴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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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전투 후 일본군에서 투항하는 러시아 군



이제 세상은 일본의 승리를 점치기 시작했고, 세계열강들은 저마다의 계산기를 두드리느라 바쁘게 주판알을 튕기기 시작했다.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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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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