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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8. 금요일

김범우


 


2012년 5월 31일이 정리해고 된 지 딱 3년이 되는 날이었다. 3주년 기념인지 원고청탁을 받았다. 왜 해고 되었는지, 몇 명이 해고 되었는지, 회사의 행태와 지금까지의 진행상황을, 나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달란다. 하필이면, 3년쯤 전에 정리해고를 앞두고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마음으로 저항을 하는 것인지 바로 그 지면에, 기고요청을 받고 글을 올렸던 적이 있다.


 


요청대로 원고지 15매 정도로 정리 할 수 있을런지는 잘 모르겠다.


 


 


2005년 미국계 다국적 기업 파카자본은, 중대형 굴삭기 유압 콘트럴벨브 시장에서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한일유압을 인수한다. 재일교포인 창업주는 일본의 유압벨브 기술을 끌어들여서 한국정부의 기술개발 지원금을 받아가며 수십 년간 회사를 키웠다. 그래서 사명이 한일유압이다. 파카자본에 수백억에 지분양도를 하고 회사이름은 이제 파카한일유압이 되었다.


 



경기도 시흥에 있는, 우리 회사다.


 


파카자본이 한일유압을 인수한 이유는 이랬다. 한일유압은 국고지원을 바탕으로 오랜시간 쌓아온 기술을 갖고 있었고, 또한 파카자본은 한일유압이 확보해둔 (비교적 변화가 적은 유압콘트럴벨브시장의) 기존 영업망을 바탕으로 아시아와 세계유압시장의 교두보를 건설하기를 간절히 원하였기 때문이다. 창업주에게 현대중공업과 영국의 이튼, 미국의 파카자본이 접촉하였지만 가장 높은 가격을 베팅한 파카자본에게 회사를 팔기로 결정할 거란 이야기가 한동안 떠돌았다.


 


사주가 바뀌고 사명이 바뀌고 경영진이 교체되었다. 뒤숭숭한 분위기에서도 돈 많은 미국의 대기업이 인수하였으니 급여나 복지가 좋아지고 회사의 비젼마져 멋져지리라고 낙관적인 희망을 품는 사람들이 더 많았었다. 꿈은 사람이 꾸는 것이고 기업은 이윤을 추구한다. 사주는 수백억을 받았지만 파카한일유압은 파카하니핀 계열사들에게 인수자금을 빚진 빚쟁이가 되었다.


 


임금체계가 개편이 되고, 그리 많지도 않던 임금이 뭉텅이로 삭감되었다. 한겨울 추위에 쇳덩이를 만지느라 오그라드는 손가락을 녹여주던 난로를 치워버렸다. 추위를 호소하는 직원들에게 현명하신 공장장님은 솜바지와 내복을 착용할 것을 지시하셨다. 겨울 내내 수도는 얼어터져서 쇳가루와 기름범벅이 된 손을 보루조각에 문지르고 밥을 먹어야 했다. 부서장급 관리직 직원들도 보직이 변경되어 익숙하지 않은 업무를 보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방문객을 맞아야 하는 사무동에는 수억 원의 인테리어 공사를 단행했다.


 


그즈음에 나는 파카한일유압에 입사한다. 십여 년간 일해왔던 섬유염색계통에서 경영악화를 이유로 구조조정 바람이 불 때 서로 눈치만 보는 분위기가 싫어서 사직서를 내고 나왔다가, 경기를 타지 않는 업종이고 체계가 잡히면 좋아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 아는 동생의 소개를 받고 이력서를 작성하고 입사 면접을 봤다.


 



여기는 본사가 있는 서울시 양재동의 양재캠코타워다.


 


면접자리에서 공장장님은 회사의 현재상황과 비젼을 이야기했고 나는 성실히 일하겠다는 대답을 했다. 파카가 한일유압이 보유한 기술과 영업망을 크게 보고 인수했지만 회사의 현재 여건이 좋지는 않다, 하지만 화성시 쪽에 만평부지를 분양 받아 놓았고 현대적 설비와 시설을 갖춘 후에 공장이전을 할 생각이다, 수준이 안 되는 사람들은 교육을 해보고 안 되면 버리고 간다, 그래서 신규 인력을 많이 뽑고 이직 인원도 많은 게 현실이다, 동요하지 말고 부지런히 배우고 익히라는 말을 해주었다.


 


현장분위기는 뒤숭숭했다. 희망을 포기하고 이직하는 사람들이 한 달에 몇 명씩 나왔고 습관처럼 때려치운다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나름대로 자구책을 도모하던 사람들이 모여서 노동조합을 꾸리기로 모의를 한다. 노동조합에 대한 권유를 처음 들었을때 내 대답은, 민주노총은 피곤해서 싫고 한국노총은 더러워서 싫다, 그래도 누군가 총대 메고 한다면 방해는 안 한다는 것이었다.


 


태반이 버려질 예정이었던 사람들이 모여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출정식을 가졌다. 현장의 노동조합 가입률은 98%를 육박해서 140명 조금 넘었다. 부품조달이 안 되어 라인이 끊길 것을 우려한 현대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에서 파카자본에 압력을 넣었다. 노동조합이 인정되고 단협이 체결되었다. 임금체계가 원상회복을 넘어 좀 더 인상되었고 복지가 좋아졌다.


 


월급이 십만 원이 넘게 올랐다. 노조비라도 내줘야 할 것 같아서 노조에 가입했다. 노조설립을 막지 못한 공장장이 잘려나가고 새로 노무담당이사가 취임을 했다. 노무담당이사가 새로 취임을 한 후 신입사원들이 꾸준히 들어왔다. 한눈에 보아도 공장일 못할 것 같은 껄렁한 덩치들과 계열사 관리직 직원의 친척들이 매달 몇 명씩 입사하고 생산현장 구석 구석에 배치됐다.


 


2008년 새로 임단협이 시작되었다. 사측은 사측위원들만으로도 징계해고가 가능해지는 새로운 안과 생산직 조합원들 임금인상을 차등하는 안을 들고 나왔다. 협상이 결렬되고 노동쟁의가 시작되었다. 노동조합의 부분파업에 회사는 직장폐쇄로 대응했다. 파업에 참가한 90여 명은 천막농성을 시작했고, 관리직 사원들과 신입사원들과 생각과 형편이 바뀐 몇몇 사람들은 고객사의 납기요구를 맞춰서 회사를 살리겠다고 생산현장에 복귀했다.


 


미국본사회장님의 한국방문을 앞두고 임단협이 극적타결되고 두 달 가까이 이어진 직장폐쇄가 철회되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가 무섭게 서프라임 모기지사태라는 미국발 경제위기가 터졌다. 회사는 임금삭감과 휴업 등의 고통분담을 노동조합에 요구했다. 고용유지 확약을 요구하는 노동조합의 요구에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급작스럽게 일감이 줄어들었다. 원청사인 두산인프라코어와 현대중공업의 굴삭기 생산 대수가 줄긴 했다지만 공장가동이 멈출 정도로 일감이 뚝 끊긴 건 석연치 않았다. 노동조합과 휴업과 고용유지방안에 협의를 요구하며 회사의 휴업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은 조합원들은 식당의자에 앉아 하루 8시간 위기탈출 넘버원 같은 프로그램 녹화방송을 직원능력향상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두 달간 받아야 했다.


 



일거리가 없어 책이나 읽고... ⓒ매일노동뉴스


 


파업에 참가하지 않았던 관리직 사원들이 휴업에 동의서를 제출하고 교육관리를 나왔다. 교육태도를 체크하고 불성실을 이유로 임금삭감이 이루어졌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아주머니들에게도 교육시간 중 흡연 등의 교육장 이탈이란 명목으로 임금삭감을 해댔다. 최악의 경영악화를 이유로 113명 구조조정안이 대표이사 담화문 형식으로 공표되었다. 이미 직장폐쇄를 단행할 시점에 장안공단에 유압콘트롤 벨브 생산시설이 완공되어 생산에 들어가고 있었다.


 


조를 짜서 장안공단에서 잠복근무를 하기로했다. 외국출장을 나갔다던 대표이사가 장안공단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화물차들의 뒤를 미행해서 우리가 납품하던 원청사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였다. 특허권이 파카한일유압으로 등재되어 있는 제품들이 파카코리아화성공장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붙잡히면 현행법상 범법자로 처벌받을 각오를 하고 캠코더와 디카를 들고 장안공장으로 십수 명이 뛰어들어갔다.


 


일감이 끊겨서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다는 제품들이 그곳에서 최신식 설비를 갖추고 생산되고 있었다. 고향으로 내려가네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네 하던 개발실 연구직 직원들이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황망하게 찍어온 자료를 취합해서 언론사에 취재요청을 했다. KBS와 MBC에서 전파를 타자, 회사는 정리해고 대상자를 32명으로 축소를 하고 정리해고 날짜를 두 달 뒤로 연기했다.


 



생산 안 해서 우리 자른다더니만, 다른 공장에서 하고 있더라.


 


화성 외투자본 전용공단은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선진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여 고용창출과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조성한 곳이다. 선진기술과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그만한 특혜를 준다. 50년 토지무상임대 건축비및 설비비 지원 소득세및 법인세 감면, 고용인원에 대한 지원금 등 토종 중소기업은 결코 받아볼 수 없는 특혜를 준다.


 


기왕에 짤려나갈 것, 경기도청 앞에서 경기도지사 면담을 요구하는 천막농성을 시작한다. 당신이 유치한 선진 외국 기술자본의 실체가 사실은 이런 거라고, 어떻게 규제할 수 있는 건 규제하고, 감독해야 할 건 감독하고, 되돌릴 수 있는 건 되돌려달라고, 순진한 면담요구를 시작하였다. 가로정비용역이 들이닥쳐 천막을 철거해갔다. 그 뒤로 40여 일이 넘도록 비바람과 이슬을 맞아가며 노숙농성을 했다.


 



물리적 충돌은 이제 익숙해진다.


 


노동자들에게 도지사는 임금님만큼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는 걸 확인하고, 도청에 외국손님 오는 날엔 경찰병력이 깔려서 노동자 무리가 돌발상황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특별관리하는 메뉴얼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훗날 시흥관광호텔에 기업인들과 신년식을 하기 위해 참가한 도지사님 면담을 요청하다 9명이 연행만 되어갔다.


 


쌍용차 사태가 터지고 노무현 대통령이 죽음을 선택했다. 순서가 햇갈린다. 아무튼 세상이 뒤집어질 것 같은 큰 뉴스가 연일 매스컴을 수놓았고 파카한일유압사람들은 잊혀지고 외로워졌다. 2009년 5월 31일 예정대로 32명의 정리해고가 단행됐다. 우리의 처지와 도지사의 실정을 알리고 바로잡기 원한다는 내용의 팜플릿을 만들고 배포하고 담벼락마다 전봇대마다 부착하고 다녔다.


 


지방선거 시즌이 되자 공직후보를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선전물을 돌리던 조합원들이 연행되어 가고, 노동조합사무실과 조합원들 개인차량이 압수수색을 당했다. 폭행, 영업방해, 무단침입, 집시법 위반 등의 죄목 외에 공직선거법위반이라는 죄목이 추가되었다. 지나다 보니 주야간 맞교대를 돌던 순진한 사람들이 범죄집단이 되어있었다.


 


해고자 무리들이 전과기록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동안 파카한일유압은 조직개편을 단행한다. 관리자들 중에서도 회사가 좀 너무 한다는 생각을 갖고 조합원들에게 심하게 대할 수 없던 사람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남아있는 건 회사에 대한 충성을 어떻게든 표현해보겠다는 열정에 사로잡힌 독한놈들과, 먹고 살려면 못 본 척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못 본 척하냐는 못난 사람들만 남았다.


 


현장에 폭언과 폭행이 일상화되고 엠뷸런스와 경찰차가 오는 날이 많아졌다. 노이로제에 걸려버린 심약한 사람들은 싸움에 지쳐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하나둘씩 회사를 떠나갔다. 해고무효소송은 1년이 넘도록 지리하게 이어져만 갔다. 다행히 1심판사님이 우리의 억울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2010년 7월 22일 원고 승소 판결을 받았다.


 


뛸 듯이 기뻐서 법정에서 외마디 비명소리가 터져나오고, 그간의 고통들에 컥컥거리며 울음들을 쏟아내었지만 변한 건 없었다. 회사는 법원의 부당한 판결을 승복할 수 없어서 항소한다는 공문을 붙였다. 고법 역시 지리하게 늘어졌다. 각종집회에 참가하며 우리 이야기를 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거점투쟁 일인시위 피켓팅 따위가 무슨 효과가 있냐는 항변이 들려왔다. 생활고가 바닥을 치고 더 이상 비참해지기 전에 살 궁리라도 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그런 식으로 나왔다.


 



버텨보자, 버텨보자, 버텨보자...


 


그나마 형편과 의지가 나은 소수의 사람들이 남아서 거점을 지키고 급한 대로 생계활동들을 시작하기로 했다. 고법판결이 나오면 다시 모여서, 대법까지는 그리 길지 않을 것이므로 대출을 받아서라도 투쟁대열에 합류하기로 했다. 수 년간 제대로 된 경제활동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빈궁한 처지, 스스로 택한 면도 없지만은 않아서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기다림도 전략이다. 해고자들은 지리하게 늘어지는 소송에 지쳐가고 무뎌져갔다. 회사는 복수노조법이 시행되자 노동조합 탈퇴자들을 묶어서 기업노조를 만들었다. 단협해지 통보가 날라오고 노동법에서 정한 시한이 지나자 단협이 해지되었다. 정리해고자들의 투쟁을 도운 죄로 전 분회장과 수석분회장이 징계해고를 당해서 문 밖으로 쫒겨나왔다.


 


고법판결이 나올때까지 버텨줄 선수를 구한 느낌이다. 고법 선고를 받고 전면투쟁에 합류하기로 하고 남아있는사람들도 생계활동을 나선다. 2008년 직장폐쇄 이후로 제대로 월급을 받아본 기억이 없는 사람들이다. 전면투쟁은 바톤터치를 했지만 출근투쟁만은 계속 이어진다.


 


파카는 장안공단에 만 평의 공장부지를 새롭게 불하 받았다. 파카텐진에서 유압쎅션벨브 생산라인을 깐다는 소문이 들려오더니 중국사람들이 뻔질나게 견학을 왔다. 단가가 안 맞아서 단종되었다는 제품들이 파카텐진에서 생산된다는 이야기들이 사무직에서 일하다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을 통해 들려온다. 바이어들을 파카텐진으로 돌리는 중이라고 했다.


 


2012년 1월 13일 황병하 부장판사로부터 고법 판결이 있었다. 원고 패소, 정리해고는 정당하다는 판사의 점잖은 목소리가 현실감이 없었다. 사측관리자들은 의기양양하게 만세를 부르고 삼 년의 시간을 도둑맞은 듯한 해고자 무리들은 비맞은 개처럼 힘없이 누구를 원망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허망한 눈빛으로 걸어나온다.


 



 


우리의 투쟁이 부족하고 모자라서, 여론화 작업이 모자라서, 재판부에서 비난의 화살을 그다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서 그러한 판결이 나왔다는 결론이 회의 끝에 내려졌다. 대법판결에 긍정적인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서 총선 전후의 여론 한 자락이나마 올라타야 한다는 절박한 결론이 내려졌다.


 


32명이 대법원에 상고를 하지만 22명이 실질적인 투쟁에 결합하고 나머지는 재판결과에 따른다는 대답이었다. 조를 짜서 교대로 피켓팅을 나서고 집회에 참가한다. 회사앞마당에서 해고자들과 해고 되지 않은 조합원들과 함께 하는 출근집회가 1100일이 되도록 이어진다. 처음 8~90명이던 숫자가 이제 겨우 20명 안팎으로 줄긴 했다. 여전히 정보과형사는 아침마다 건너편 회사에서 이쪽 사람들의 동태를 살피고 보고한다.


 


총선에서 의아하긴 했지만 새누리당이 과반당을 차지했다. 억울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던 통합진보당이 13석을 차지했다. 이제 언론노조가 주장하는 언론장악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그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면, 지난 정부의 실정을 다루는 한 꼭지에서 우리 이야기들을 다뤄줄 거라는 기대가 마음 한켠에 자리했었다.


 


어느 날부터 통합진보당이 뉴스시간을 대부분 차지해버렸다. 부정선거와 책임승복문제로 연일 다툼이다. 결국 육박전이 실황중계 되었고 검찰은 당원명부를 털어갔다. 가뜩이나 힘빠지는 와중에 해고자 중 7명이 본사 관리자와 고용노동부에서 만나 소송포기각서에 서명을 해버렸다. 1500만 원 상당의 대가를 받았다고 했다. 서명을 하기 전에 고시원 달방생활과 빚을 청산하고 고향가고 싶다는 사람의 이야기 들려왔고, 서명하고 나서 울면서 미안하고 억울하다고 전화했던 사람도 있다.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린 것 같지만 욕도 원망도 할 수가 없다.


 


다른 루트로 회유와 압력이 들어왔다고도 한다. 승패도 알 수 없고 언제 끝날지 기약도 없다는 두려움에 많이 흔들릴 만하다. 조증과 울증을 오가며 소금에 절여진 배추처럼 마음이 늘어져갔다. 포레시아 해고자인 송기웅 지회장이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한다. 지노위 지고 중노위 지고 행정소송 지고 해고소송이 판판이 지고 있을 때 본인 마음도 그랬단다. 그냥 남은 사람 보고 끝까지 가보고 만약에 끝에 혼자 남으면 그때 손 털던가 뒤돌아서면 그만이라고 마음 편히 가지란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마음 편히 가지라는 가카 말씀 같은 위로인데 희한하게 위로가 된다. 뒤돌아서지도 못할 거면 어차피 방법도 없다. 회사는 이번에 중국의 경제침체를 이야기하며 일감을 줄이고 있다. 다시 휴직과 구조조정 이야기가 실체없는 안개처럼 흘러다닌다. 우리 이야기의 끝맺음이 어찌 될런지는 알 수가 없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 아직 할 수 있다.


 


자본은 완고하고 이윤 앞에 무지막지하다. 자본과, 노동부와, 검/경 법무법인 김앤장과, 사법부까지 질기고 억쎈 커넥션이 존재하는 듯하다. 그래도 사는 동안 희망을 버리기가 어렵다. 희망이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는 만큼 해보는 건 삶에 대한 예의다. 나와 내 짧은 팔 안에 다가오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예의.


 


김범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