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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13. 수요일

정우성


 



 


 


어떤 아줌마가 있었다. 그녀는 80년대 초입의 학번이며 명문S대를 졸업했고 가정주부의 인생을 살았으며 아이들을 이미 거의 다 키웠다. 나는 그녀를 어떤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서 육아와 자녀교육에 대해 두어 번 말을 섞은 적이 있었다. 그녀도 젊었을 때에는 데모한 적이 있으며 반정부 써클에서 청춘을 보낸 추억이 있다. 486 세대의 탐욕적인 취향과 빈약한 상상력을 체험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녀는 내게 자기 아이의 직업적인 미래에 대해서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자녀교육의 목표가 상위 1%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내가 해줄 조언은 별로 없다. 나는 오히려 아이가 잘 자랐고 공부도 매우 잘하고 있다는 것을 아줌마 관점으로 내게 넌지시 자랑하는 것처럼 느꼈다. 자랑은 건성으로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또 한 번은 내가 육아에 대한 글쓰기를 하겠노라고 말하니, 그런 이야기는 아이를 다 키운 다음에 써야 되지 않느냐는 반문. 이것은 곧 그들 세대가 심각하게 빠져 있는 "성공주의"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부모가 성공하고, 자녀가 명문대학에 가서 누가 보더라도 성공적인 가족이 돼야만 뭔가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된다는 맥락인데, 진부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다. 나는 이런 태도를 거부한다.


 



 


 


부모의 자기 성찰


 


성공주의에 입각한 자녀교육 서적은 넘쳐난다. 상위 1%에 진입하기 위해 기를 쓴 증언이나 기를 쓸 것을 권하는 이야기는 도처에 가득하다. 그런 책과 증언과 권고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이 사회의 정신은 황폐해지고 부모들의 행복한 육아는 멀어지게 마련이다. 성공주의는 지독한 전염병이며 치료조차 어려운 증상을 보인다. 이 병은 사람과 사람을 이간질하며 화평을 해친다. 이 병은 남의 인생을 지우고 그 자리에 우격다짐으로 자기 인생을 집어넣는다. 급기야 아이의 인생이 지나가는 길 곳곳에 부모의 욕망을 적은 이정표가 가득 꽂힌다. 육아는 부모의 심리적 현상이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다른 육아와 자녀교육의 목표가 있다. 일반화하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인간이 인간을 키우는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인간을 키울 것이냐부터 쉽지 않다. 왜냐하면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인간미와 인생관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가장 좋은 육아는 부모의 자기성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인 까닭에 부모가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다면 아이도 그런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커진다. 반면에 부모가 따뜻한 마음과 인상을 품고 산다면 그 맛과 멋이 아이들의 얼굴에서도 느껴질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들의 자녀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부모로서 생각의 격을 높이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닐까.


 



 


 


일종의 사회적 육아를 생각할 때


 


다행인 것은 아이가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는 다양한 변수가 있어서 설령 부모가 괴물같은 정신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아이가 꼭 그렇게 되도록 운명 지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정말 다행이다. 부모가 부족하더라도 아이는 빛나게 성장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이가 꼭 부모와 연좌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좀 더 들여다보면 볼수록 육아와 자녀교육에 관한 사회적 책무를 느끼게 한다. 사회에서의 다양한 관계를 통해서 엄혹한 가정에서 키워진 아이들도 충분히 순화될 수 있다. 반대로 아무리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더라도 집 밖에서의 인간관계에 영향을 받아 악화될 수도 있다.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보면 사회적 책무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가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든 혹은 진보적인 입장이든간에,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간에 서로 합의하고 지키고 존중할 수 있는 수준의 가치 말이다.


 


지위고하와 출신성분을 막론하고 "사람"에 대한 존중. 이것은 매우 뜻 깊은 가치며 이 정도는 합의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무 추상적이어서 교과서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실제로는 여기에 다양한 스펙트럼과 입장차이가 존재한다. 우리는 금세 "뭐, 이런 놈에까지 존중할 필요가 있겠느냐"라거나 혹은 "그건 존중이 아니에요!"라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지나치게 추상적인 개념은 우리에게 실천적 합의점을 주지 못한다.


 


일전에 우연히 읽은 책에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접했다. '인덱스어워드'라는 국제적인 디자인 전시회가 있고, 그 행사를 주체하는 단체인 '인덱스'의 CEO 키게 히비드(Kigge Hvid)라는 사람과의 인터뷰 내용이었다. 다음과 같았다(<친절한 북유럽> 370면).


 



Q. 북유럽 국가들은 사회, 환경 문제에 굉장히 민감하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A. 우리의 오랜 민주주의 그리고 복지 전통과 관계가 있다. 가장 넓은 어깨가 가장 무거운 짐을 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사회에 대한 기본 정의다. 이 가치관은 우리 유전자의 일부분이며, 어떤 일을 하든 다른 사람의 욕구를 고려하려 한다. 이것은 덴마크를 부유하고 매우 안전한 국가로 만들었다. 덧붙여 환경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왔다. 만약 매일의 일상이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하기에 급급하다면 이런 생각을 유지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가장 넓은 어깨가 가장 무거운 짐을 져야 한다' 정도의 구체성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며, 더욱 다양하고 많은 가치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힘센 사람이 더 무거운 짐을 진다는 것은 연약한 사람을 쉬게 하는 배려까지 염두에 두는 것이므로 우리의 사회적 가치로서 고려해 봄직하다. 우리 아이가 힘센 인간이 될 수도 물론 있겠으나 연약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도 있는 문제다. 힘센 사람이 연약한 사람 위로 군림하여 모멸감을 주거나 부패하여 몹쓸 짓을 하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본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어른들은 권력을 쥔 자를 비난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권력 자체는 은근히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아이들을 닦달하게 됐다.


 


하지만 우리가 저와 같이 힘센 사람의 어깨와 연약한 사람의 어깨를 함께 생각하고, 그런 가치를 합의한다면, 우리는 좀 더 여유를 갖고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은 그만큼 더 큰 짐을 지고, 경제적으로 힘겨운 인생을 사는 사람은 사회의 도움을 받는 사회라면 지나친 경쟁과 성공주의라는 병폐를 이겨낼 만하지 않을까? 먼저 부모가 구원될 것이고, 그러면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한 폭의 그림처럼 자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런 사회적 책무를 합의하고 존중하고 옹호하는 것 자체가 종의 관점에서의 “사회적 육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게 절실한 시대이다.


 



 


 


육아 자체는 어렵지 않다


 


부모의 역할, 즉 사회적 유전자를 회복하는 일에 우리가 힘을 합치면 육아와 자녀교육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경험적으로도 그렇고, 꼭 경험을 하지 않더라도 곰곰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아이들은 인간이라는 종을 유지함에 있어 최적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정말이지 신기할 정도다. 진화론적으로 생각해도 그렇고, 이것을 신의 섭리로 이해해도 그렇다. 우리는 한 번도 아빠인 적이 없고, 엄마인 적이 없다. 부모로서의 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 그렇지만 질병의 위협만 없다면, 자기 아이를 멀쩡한 한 인간으로 키우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부모가 육아에 대한 책을 한 번도 읽지 못했고, 경험도 없었으며, 누군가에게 귀동냥한 적도 없더라도, 큰 문제 없이 무럭무럭 해바라기처럼 자라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것은 부모가 잘나서 그런 게 아니다. 인간이라는 종(種)이 원래 그런 것 같다. 적절한 시점에 말을 하기 시작하고, 적절한 시점에 직립 보행을 하며, 적절한 시점에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질병의 위협만 없으면 아이들은 잘 자라기 마련이다. 아이들의 건강은 모든 조상들의 바람이었고 인류의 숙원 사업이었다.


 


예컨대 인간의 유한한 기억력은 특히 유아 시절에서 인간이라는 종을 지켜주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성인의 대부분은 유아 시절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머릿속에 없다. 기억은 증발된다. 그런데 이 시기의 부모들은 아직 경험이 부족하며 때로는 미성숙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일로 정신 없는 경우가 많다. 아이들을 일관되고 충분히 지켜줄 수 없다. 그런 탓에 아이에게 자주 실수를 하기도 하고, 아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잘못 대할 수 있고, 엉뚱한 이유로 화를 내거나, 때리거나, 위협하거나 혹은 기만할 수도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또렷이 유아의 머릿속에 기록된다면 재앙 그 자체다.


 


하지만 유아들은 인간으로 성장함에 있어 위협이 되는 수많은 정신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기제를 가지고 있다. 바로 망각이다. 성장하는 데 불필요한 기억들은 증발된다. 이것은 일종의 서툴기 그지 없는 젊은 부모들에 대한 인간 종의 차원으로서의 배려다. 이 배려가 대를 이어서 유전자에 남아 있다고 생각해 본다. 물론 치매와는 다르기 때문에 유아생활을 함에 있어 꼭 필요한 것들, 특히 맛있는 것이나 즐거운 장난감을 사주겠노라는 등의 부모의 약속은 귀신같이 기억해내곤 한다. 그렇다고 해서 어차피 장차 아이들이 잊어버릴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기억은 증발되지만 너무 강한 기억은 나쁜 흔적을 남길 수 있다. 그것은 조심하자. 다행히 부모들은 대개 자기 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까닭에 일부러 학대하지는 않는다.


 



 


 


어린 아이들에 걸맞는, 원시적인 육아법


 


내가 인간의 유한한 기억력을 말하는 까닭은,


부모가 아이들을 위해 제공하는 각종 혜택의 상당수는 부모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즉, 부모의 심리적 현상에서 비롯된다. 아이들은 정신적으로 풍요롭기보다는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종으로서의 인간"에 맞는 것 같다. 현대 보건의료 시스템과 풍성한 먹거리는 아이들을 질병으로부터 지켜준다. 이것은 틀림없이 인류의 진보다. 그렇지만 오늘날 부모와 육아에 관한 각종 인프라들은 아이들의 대뇌 속에 각종 지식과 정보를 조기에 집어넣으려고 애를 쓴다. 이것은 일종의 정신공격이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지워지는 것이라서 아이의 머릿속에 지식을 쓰기 위해서는 반복적으로 확인하고 다시 되새김질 하게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작업이야말로 부모의 심리적 현상에서 비롯된 정신공격이다. 이런 정신공격은 인간의 유전자에 적합하지 않다. 오히려 시급한 것은 아이들의 두뇌나 아니라 아이들의 '정서'다. 부모 세대의 정신공격에 아이들의 정서가 위협을 받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정서를 윤택하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저 아이를 아이답게 놓아두면 아이들은 저절로 자라게 돼 있다. 그것이 진화의 섭리인지 신의 눈부신 선물인지는 각자의 생각의 몫이겠지만,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쉽게 안정할 만반의 준비를 끝낸 상태이며, 언제든지 웃을 수 있는 해바라기 유전자를 갖고 있다. 부모가 엉뚱한 곳을 향하니 문제일 따름이다.


 



 


예컨대:


 


(1) 아이들이 지각하고 흥미로워 하는 공간은 상당히 좁기 때문에 부모가 어린 아이들의 견문을 넓히기 위해 일부러 노력할 필요가 없다. 집 근처 놀이터에 가서 아빠가 뒤에서 밀어주는 그네 타기 놀이와 자동차를 타고 먼 산이나 먼 바다에 놀러 가는 놀이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는 것 같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들이 저 멀리 피곤하게 놀다 오는 것을 부러워할 까닭이 없다. 아이들이 공간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어른들이 지각하는 공간에 대한 느낌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심지어는 어디 놀러가지 않고 방 안에서 아이와 함께 이런저런 놀이를 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충분히 즐거워할 수 있다. 동네 문방구에서 1,000원짜리 장난감을 사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즐거운 여행을 탐닉할 수 있다. 이런 아이들의 특성은 경제성으로부터 자유롭다. 놀고 즐거워하는 것과 관련하여, 만일 경제적 빈곤으로부터 아이들이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부모의 심리적 현상일 뿐이다.


 


(2) '말놀이'만으로도 아이들은 아주 먼 우주까지 여행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아이들의 언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처음 본 아이들도 몇 번 말을 섞다보면 아주 쉽게 친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있는데, 그 주된 도구가 바로 '말놀이'였다. 아이들의 언어는 원시적이어서 어른들의 언어와는 다르다. 이것을 구별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육아라고 생각한다. 어린 아이들의 언어는 원시 언어 그대로여서 정확하게 묘사하고 표현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 아이들의 언어는 시적(詩的)이다. 과장법과 비유법과 반복법으로 가득차 있다. 이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른들은 표현의 정확함을 개의치 않고 과장법과 비유법으로 아이들에게 대구(對句)하면 된다. 아빠의 키는 170cm라고 정확하게 표현할 필요가 없다. 때때로 아빠는 아파트보다 더 크다고 말하는 게 어린 아이에게는 더 적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아빠가 과장법을 쓰고 은유법이나 직유법 같은 비유법을 사용해서 말할 때 더 좋아한다.


 


이것은 거짓말이라거나 왜곡이 아니다. 아이들의 세계에서 가치는 상대적이며 모두 비유적인 크기를 갖는 것 같다. 이는 마치 아이들의 그림에서 엿볼 수 있는 과장된 형상의 세계와 같다. 원근법은 한참 나중에야 발견된다. 하지만 오늘날 예술가들은 다시 원근법의 구속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다. 이는 유아의 환상계와 맞닿아 있다고 보는 게 내 생각이며, 이는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어떤 세상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아이와의 정서적 유대감을 강하고 깊게 만들기 위해서는 부모가 원시적인 언어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른들은 어른들의 언어를 갖고 있으므로 한결같이 아이들의 언어를 흉내낼 수는 없겠지만, 잊지 않고 종종 아이처럼 말하면서 대화하면 누구나 아이들에게 매력적인 부모가 될 수 있다. 어른들의 건조한 언어는 수십 년의 오랜 사회생활을 통해서 습득한 것이지 태어나자마자 갖게 된 게 아님을 잊지 말자. 유아들의 언어로는 표정, 제스처, 과장법, 은유, 직유, 감탄사, 반복법, 리듬이 발견되는데, 이런 언어적인 특징은 시인들의 수사에서 발견되기도 하며, 대중을 선동하는 유명한 선동가의 연설에서도 발견되곤 한다. 그게 바로 인간은 원시적이고 근원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추정해 본다.


 


(3) 아이들은 환상세계에서부터 인생을 시작한다. 이것은 현실세계의 냉정함과 온갖 메시지로부터 인간이라는 종의 정신세계를 보호한다. 그러므로 부모는 유아와 대화함에 있어서 현실계와 논리계가 아닌 엉뚱하고 무엇인가 상당히 어긋나 있는 환상적인 방식으로 응하면 부모와 아이 사이에 영혼의 채널이 맞춰진다. 아이들의 환상세계를 부모가 옹호해 줄 때, 아이들의 스트레스의 대부분이 해소된다. 섣부른 리얼리즘은 아이의 특성을 무시한 부모의 과욕일 뿐이다.


 



 


이런 어린 아이들의 특성을 생각하면서 아이들을 대하면, 아이를 양육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는 종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라도 원래 육아와 자녀교육은 어렵지 않게 설계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어른들은 더 작은 노력과 관심으로도 아이들을 만족스럽게, 흥분케 할 수 있다. 그렇게 요란하고 대단하게 '기획'할 필요가 없다. 굳이 '계획'을 짤 필요도 없다. 아이들은 행복한 얼굴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육아에 있어 오히려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부모의 심리적인 현상이다. 우리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다. 이 정도 키우면 성공했고, 저 정도는 실패했다고 성적을 매겨서 그 부모를 칭찬하거나 비난할 수는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집 안에서는 아무리 훌륭하게 키웠더라도 집 밖에서 어떤 영향을 받고 일탈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쪽 집안 아이가 성장함에 있어서도 나름의 사회적 책임이 있는 셈이다. 부모가 아이를 위해서 더 나은 역할을 하려고 한다면, 자기 아이를 보챌 게 아니라, 우선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이 사회에 만연된 무책임한 성공주의에 대해 한 마디 던져 보는 일은 어떠한가. 입술 밖으로 말을 내뱉으면 그 말이 큰 용기를 준다.


 


 



 


정우성


두 아이의 아빠, 변리사, <특허전쟁> 저자, 드디어 후속편 나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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