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면서
개인적으로 <클로버필드>라는 영화를 참 재밌게 봤더랬다. 혹자는 무슨 괴수 영화에 괴수는 안 나오고 엉뚱하게 사람들 도망가는 장면들만 주구장창 보여주고 있느냐고, 혹은 괴수의 얼굴을 보여주는 마지막 반전(?)의 타격감이 너무 약하다고 투덜거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는 영화 깨나 아는 평론가 마냥, 팔짱을 끼고 시니컬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임마, 반전이 중요한 게 아니라 네가 반전이라고 말하는 장면까지 나아가는 그 과정을 즐겨야 하는 거야.”
말하자면 <클로버필드>의 재미는 괴수의 모습이 완전하게 노출되지 않음으로써만 성립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명불허전 낚시꾼 J.J. 에이브러험 씨께서 영화 제작 기간 내내 괴수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게 아니던가? (그가 페이스북에 관련 정보를 노출한 직원을 해고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클로버필드 10번지>가 얼마나 <클로버필드>와 관련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영화를 좋아할 뿐, 영화판이 돌아가는 꼴을 잘 알지는 못하니 말이다. 어쨌든 <클로버필드>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나라는 관객에게 깨나 먹혀들어간 것 같다. 그냥 네임 밸류만 믿고 극장으로 향했으니까(감독 이름도 안 보고 그냥 갔던 것 같다).
각설하고 본격적으로 <클로버필드 10번지>에 대한 평으로 넘어가자. <클로버필드 10번지>는 분명 어느 정도 <클로버필드>가 밀고 나갔던 전략을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예고편을 보는 관객은 주인공들이 벙커에 갇히게 된 진짜 이유로부터 철저히 배제된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관객의 흥미를 끄는 요소로, 진짜 ‘이유’는 영화 결말부가 되어서야 드러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클로버필드 10번지>가 긴장의 끈을 유지해가는 방식은 <클로버필드>의 그것보다 한 단계 더 발전되었다. <클로버필드>에서 영화 내내 하나의 흐름을 통해 전개되던 긴장감이 괴수의 ‘까꿍’ 씬에 의해 단번에 허무함으로 전락될 위험에 처했던 반면, <클로버필드 10번지>에서의 ‘까꿍’은 도대체 언제 지나갔는지도 확실히 모르게 애매한 지점에 배치되어 있다. 관객들은 괴수의 모습 자체보다 오히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수에 대응해 벌이는 세 명의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드라마에 훨씬 집중하게 된다.
단순한 줄거리, 세 명의 등장인물
<클로버필드 10번지>의 플롯은 굉장히 단순한 편이다. 배우는 세 명 밖에 안 되고, 촬영의 대부분이 작은 세트장에서 진행된다. 메시지도 생각보다 명확하다. ‘제작비 대비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 Best 10’ 순위에 소개될 또 다른 영화가 등장한 걸까? 이 목록에 포함될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클로버필드 10번지>는 적은 자원들로도 효과적으로 드라마를 풀어가고 있다.
좀 진부한 비유를 써서 표현해보자면, 영화 속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90년대 혹은 2000년대의 대한민국과 같다. 아직 이념 대립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전후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공존하는 가운데, 한쪽에서는 ‘안보’의 중요성이 강화되고(‘하워드’ 역의 존 굿맨), 다른 한쪽에서는 세상이 달라졌다며 이제는 다른 전략을 택해야 한다는 움직임(‘미셸’ 역의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중간에서 별 생각 없이 보수적 입장에 동의하다가 점차 진보적 세력 쪽으로 기우는 캐릭터(‘에밋’ 역의 존 갤러거 주니어)가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삼각 구도가 아니라 삼항 사이의 ‘동역학적인 상호작용’이다.
이 삼항을 각각 독립적인 ‘사람’으로 보면 영화 해석은 보다 간단해진다. 그리고 간단해지는 만큼 더 진부해지고 재미없어진다. 이 영화를 ‘하워드’라는 음흉한 변태성욕자와 그의 손길을 벗어나는 여주인공의 활약상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 그저 <애벌리>(Everly, 2014)류의 ‘납치범과 납치범에게서 벗어나는 여성 주인공’이라는 테마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다.
하워드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미셸을 벙커로 처음 데리고 오는 동기나 극의 후반부 에밋을 살해한 동기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하워드가 (딸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딸이 아닌) 젊은 여성과 벙커 소파에서 찍은 사진이라든지, 에밋을 쏜 후 “이제 내가 원하는 대로 너와 나 둘만 남았어.”라고 말하는 부분은 음흉한 의도를 함축하는 측면이 있다.
영화는 그의 진짜 동기를 관객의 판단에 맡기며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그의 말마따나 하워드가 ‘실수로’ 미셸을 차로 들이받았고, 그대로 놔두면 죽을 것 같아서 살리기 위해 벙커로 데리고 왔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하워드의 행위는 정당한 도덕적 행위지, 악인의 계략이 아니다. 게다가 에밋이 ‘안보에 위협이 되어서’ 살해했다는 그의 말도 어떤 면에서는 그럴싸하게 들리는 면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를 단순히 선과 악의 대립의 관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경향들 사이의 싸움 혹은 동역학적 상호작용이라는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이 ‘경향’들은 하나의 심리적 경향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뱅뱅 돌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바로 ‘불안’이다.
불안에 대응하는 세 가지 ‘경향’들
1) 하워드
하워드의 ‘경향’은 ‘미래를 통제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미래에 닥칠 불안의 형태가 불명확할 경우, 우리는 그것을 보다 가시적인 것으로 가정하고 이에 대해 적절히 대처함으로써 불안을 완화시킨다. ‘지구 종말’이라는 요소는 인간 세계에 엄청난 불안을 초래하는 개념임에 분명하지만, 그 지구 종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띠느냐는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신의 분노가 지상 세계에 불구덩이를 선사하는 모습으로 그리는가 하면, 누군가는 핵전쟁으로, 또 누군가는 좀비들의 출현으로 구성한다.
이처럼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구성하고 그려보는 것이 불안을 대처하는 첫 걸음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인 법. 일단 이처럼 불안을 야기하는 대상이 가시적인 것으로 구성되면 조금씩 준비해나가는 일만 남는다. 하워드도 자기 나름대로 미래에 벌어질 수 있는 가능한 시나리오들을 그려봤을 것이며, 그것의 일환으로 벙커를 건설했던 것이다.
하워드는 이런 면에서 꽤나 건설적이고 바람직한 인간이다. ‘비록 우리 하워드가 젊은 처녀들이나 노리는 변태성욕자 같은 면은 있지만서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에여’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가 ‘건설적’이라는 것은 불안의 요소로부터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불안을 야기하는 요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도피를 택하곤 한다. 시험 전날 갑자기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치 열반에 든 듯한 평온이 찾아오는 것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 방어기제를 좀 있어 보이는 말로 ‘부정’이라고 한다. 혹은 불안을 회피할 수도 있다. 시험공부는 하기 싫은데 그냥 티비를 보면서 놀 수는 없으니 평소에는 읽지도 않던 현대 문학을 읽는다든지, 방정리를 하는 것 따위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에 반해 하워드는 해당 불안 요소로부터 벗어나는 대신 오히려 불안의 요소를 삼키는 쪽을 택한다. 무언가를 삼키기 위해서는 삼킬 수 있게 잘게 쪼개서 나눠야 한다. 이처럼 삼킬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과정은 그 자체로 우리가 불확실한 미래를 통제 가능한 것으로 가공하고, 정돈하는 과정에 상응한다.
그렇지만 하워드의 방식이 불안에 대한 궁극적인 해법이 되지는 못한다. ‘통제’라는 것은 언제나 고착화와 폭력으로의 전환 가능성에 노출돼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잠재적인 위험을 지니고 있다. 고착화와 폭력은 각각 통제의 양극단에서 발생한다. 고착화가 통제를 ‘가하는’ 쪽에서 일어난다면, 폭력은 통제를 ‘받는 쪽’에 대해 일어난다.
고착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워드는 불안에 대응하기 위해 불안을 야기하는 대상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가설(假設. 실제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침)한다. 이렇게 ‘외부’가 형성되고, 이 외부에 대항해 내부는 더 견고해진다. <왓치맨(Watchmen)>은 인위적으로 구성된 ‘외부’ 혹은 ‘적’ 개념이 어떻게 특정 진영이나 국가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주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다크나이트(The Dark Knight)>에서 브루스 웨인이 자기 스스로 ‘악’이라는 낙인을 끌어안음으로써 스스로 ‘가시적인’ 악의 축이 되고, 반대로 또 다른 가시적인 형태의 영웅 하비 덴트를 내세우려 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를 통해서 사회의 불안이 종식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그러나 바로 정확히 그것 때문에 거짓된 영웅과 거짓된 신화와 거짓된 기원이 생긴다. ‘날조된 현실’은 어떤 면에서 우리를 불안에서 구제하고 안락함을 가져다주지만, 안락함은 전적으로 불안을 직면하는 것을 ‘연기(延期. 기한을 뒤로 늘림)’하는 데서 온다. 연기 속에서 언제나 현실과 동떨어진 관점이 생기고 고인 물이 생기는 것이다.
‘폭력’이 일어나는 양상은 어떠한가? 폭력은 언제나 통제를 받는 쪽에 대해 일어난다. 문제는 이러한 폭력이 반드시 ‘악한 의도’에 의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봤듯, 영화는 절대로 하워드가 악한 의도를 갖고 이들을 통제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외부의 위협에 대한 하워드의 불안이 나머지 인물들에게 전염될 뿐이다.
전염되는 과정에서 일종의 ‘강요된 불안’이 발생한다. 미셸이 경험하는 불안은 다만 하워드의 입을 통해서 전달된 이야기들에 근거한다. 자신이 직접 불안의 요소들을 맞닥뜨린 적도 없는 상태에서 미셸은 하워드가 가진 관점을 강요받는다. 전쟁을 치른 세대들의 불안이 전후 세대들에게 어떤 강요된 불안으로 이양되는 것과 같다. 아니면 먹고 사는 게 힘들었던 세대가 자손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강요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다. 강요 속에서 “너는 왜 부모님 말을 안 듣니?”라는 불만이 나오고, 불만 속에서 “좀 맞아야 정신 차리지?”라는 폭력이 발생한다.
2) 에밋
에밋은 하워드의 통제가 순식간에 폭력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꼭 하워드의 악한 계략이 ‘발각’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통제가 가졌던 잠재적 위협이 가시적 위협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에밋은 하워드의 방식이 갖는 ‘잠재적 위험’이 ‘실제 위험’으로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해주며, 사건의 대대적인 전환을 가져온다. ‘보호’와 ‘과잉대응’의 양날 속에서 애매하게 줄을 타던 하워드의 정책은, <다크나이트>에서의 조커의 말을 따르면, 에밋의 사소한 ‘푸시(push)’를 통해 순식간에 폭력으로 변질된다. 이전까지 하워드는 다만 총구를 주머니 뒤에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에밋의 이마 위에 총구를 겨누는 순간 하워드의 통제는 ‘안보’에서 ‘폭력’으로 전환된다.
3) 미셸
에밋이 ‘푸시’하게 만드는 인물이 미셸이다. 미셸은 계속해서 다른 정보들, 즉, 하워드의 관점을 반박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들을 제시하면서 에밋으로 하여금 (그 이전까지는 정당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하워드의 정책을 의심해보고 뒤집어보게 만든다. 말하자면 미셸은 끊임없이 외부를 탐색하는 역할이다.
미셸은 에밋의 손을 빌어 하워드의 통제가 잠재적 위험성을 갖고 있는지를 노출시키며, 하워드로부터 강요된 불안이 과잉되고 현실과 동떨어졌음을 폭로한다. 그러나 이러한 폭로를 반드시 ‘하워드의 계략을 발각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럴 경우 또다시 이 영화를 납치범과 납치 희생자 사이의 싸움으로 보게 돼 지금까지 해온 불안에 대해 이야기가 쓸모 없어진다.
그렇다면 미셸은 불안해하는 하워드를 보고 “불안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걸까? 아니다. 미셸은 결코 하워드가 상정하는 불안의 요소를 완전히 무시하고 부정하고 있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그녀는 벙커 문을 박차고 나갔을 거고, 영화는 방사성 물질에 오염돼 피 흘리는 미셸을 보여주며 약 30분 만에 막을 내렸을 것이다. 미셸은 불안을 없애려고 한다기보다는 ‘이 불안이 정당한가’를 검증하고 탐색하는 경향을 갖고있다. 불안을 가지는 것은 맞지만, 잘못된 관점의 불안, 혹은 단순히 ‘강요된 불안’은 지양하고 올바른 불안을 구축할 필요성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을 겪어본 세대는 말한다. 그렇게 북쪽에 쌀 퍼다 주고 대화를 조장해봤자 결국은 뒤통수 맞는다고, 예술하는 자식에게 결코 풍족하지 않았던 부모님은 그러다 굶어죽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헤로인 미셸은 말한다. 그래도 세상이(외부가) 변했으니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시도해 볼 필요가 있지는 않겠느냐고. 물론 또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랑 지금이랑 뒤통수 때리는 놈도 다르고 맞는 놈도 다르지 않느냐고. 굶어죽더라도 그때 굶던 거랑 지금 굶는 거랑 다르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나가면서
항간에 ‘원숭이와 사다리 실험’이라는 이미지가 떠돈 적이 있다.
<Competing For The Future>(1996)이라는 책에서 처음 소개된 실험이라는데, 내용을 요약해보면 이렇다. 실험자가 사다리 위에 바나나를 놔두고 우리 안에 5마리의 원숭이를 넣었다. 그리고 누군가 바나나를 가지러 올라가려 할 때마다 원숭이에게 찬물을 뿌렸다. 5마리 중 1번 원숭이를 새 원숭이로 교체했더니 이 원숭이가 바나나를 가지려고 사다리에 올라가려 했지만, 나머지 4마리가 그것을 저지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2번 원숭이를 교체했더니 역시나 2번이 바나나를 가지려 시도했고, 또 나머지 4마리가 이것을 저지했다. 3번, 4번, 5번을 교체할 때마다 동일한 현상이 발생했다. 결국 마지막에 이 5마리가 모두 새로운 원숭이들로 교체됐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원숭이도 사다리를 올라가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레퍼런스도 불명확한 이 실험은 실제 이뤄진 것 실험과 조금 다르다고 한다. 실제로는 교체된 원숭이가 바나나를 가지러 올라갈 때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을 보고 기존의 원숭이들이 조심스레 다시 시도하기도 했다고.
그렇다고 해도 일종의 우화로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지 않은가? 원숭이들이 저랬으니 우리도 꼭 저렇다 이런 것은 아니지만, ‘불안’을 갖고 산다는 측면에선 원숭이보다 더 나을 것도 없다. 강요된 불안에 언제나 노출될 수밖에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외부에의 탐색을 멈추지 않아야만 하는 운명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나 싶다.
+
사회적 동조가 '대물림'되는 과정까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실험이 있어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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