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1.


몇 년 동안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던 질문 중 하나는 ‘학교에는 왜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 많을까?’였다. 정말 그랬다. 멀쩡해 보이는 교사들도 단 몇 분만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차원으로는 도저히 포용할 수 없을 만큼 삐뚤어진 관점 말이다. 교사의 자격을 떠나 일반 성인의 기준으로도 납득이 안가는 사회적, 도덕적 관점을 가진 교사들이 나타나 나를 종종 충격에 빠뜨렸다. 그 충격의 끝은 저들이 이상한 게 아니면 내가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내가 유별난 것일 수 있다. 국가수준성취도평가(일제고사) 당시 학생들의 지적 능력 향상과는 거리가 먼 마구잡이식 문제풀이에 매진하는 교사들을 보며 ‘이건 무슨 짓거리인가’ 생각했던 것도, 학생들에게는 지각하지 말 것을 그렇게 강조하면서 본인들은 협의실에 모여 실컷 수다 떨다가 종이 울리고 난 후에야 어슬렁어슬렁 교실로 걸어가는(학생들에게는 “누가 나와 있어!”라고 버럭거리며) 교사들을 보며 참 염치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내가 유별나서 그런 것일 수 있다.


어느 날은 모 교장이 교사들로부터 봉투를 많이 챙기고, 걸핏하면 공사를 벌여 시공사로부터 뒷돈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떤 교사가 “그 교장 선생님, 돈 문제가 많아서 그렇지 괜찮은 사람이었어. 아주 인자하시고.”라고 하길래 순간 버럭, 무슨 개소리냐고 받아치다가 싸해진 분위기를 애써 무마하며 내가 사회성이 부족한가 싶기도 했었다.


동료 중엔 이런 교사도 있었다. “선생님, 내가 좋은 여행 팁 하나 줄게요. 공짜로 비싼 여행 캐리어 얻는 법. 비행기 탈 때 아예 처음부터 부서진 캐리어를 갖고 타세요. 그리고 내릴 때 항공사에 이게 운반되다 파손됐다고 컴플레인을 걸어버리면 거기서 군말 없이 다른 걸로 바꿔줘요. 나중에 공짜 캐리어 생기면 나한테 밥 한번 사요. 호호호”


개인적으로는 나름 건전한 가치관을 확립했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었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적지 않은 비율의 사람들이 나와 몹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 충격을 받은 나는 ‘베스트셀러라도 시간의 검증을 받지 않았다면 읽지 않겠다’는 어디서 배운지 모를 버릇을 버리고 그길로 서점에 달려가 당시 막 출간된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사서 분노의 힘으로 이틀 만에 독파해버렸다(꽤 어렵더라). 어쩌면 저들이 아니라 내가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책을 읽고, 고민하고, 가능한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끝에 결론을 내렸다. 도덕성과 인격, 사고능력이 이상한 사람이 다른 집단에 비해 교사 집단에 더 많이 분포한다고. 이 주장은 대단히 주관적이고, 내가 속한 집단을 매도하여 비하한다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많은 몹시 위험한 주장이다. 하지만 나는 경험을 토대로 결론을 내렸고, 의심을 시작했다. 이 은밀한 생각을 증명해내고 싶어졌다.


우선 선천적으로 어떤 특성을 가진 사람들만 교사가 될 리는 없으니 그 가능성은 제외했다. 정서적 성향은 아주 거칠지만 대략적인 통일성을 찾을 수 있었다. 대체로 위험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크게 성공하겠다는 야망을 품은 사람은 교사를 하고 싶어 할 가능성이 낮다. 넉넉하진 않지만 고정적인 수입, 비교적 여유 있는 휴가를 즐기며 안정된 삶을 꾸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교직을 찾는다. 그렇다면 안정성을 추구하는 욕구가 큰 사람들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 걸까? 혹은 교사들이 처한 직업 환경의 특수성이 이상한 사람이 되게끔 하는 걸까? 등 여러 고민을 하다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교실 안에서 교사는 강력하고 집중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4.jpg


 

2.

 

이안 로버트슨은 그의 저서 <Winner Effect : 승자의 뇌>에서 권력 사용의 기회가 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밝혔다. 권력을 가지게 된 인간의 몸에서는 테스토스테론과 도파민의 분비가 촉진된다. 이는 사람을 긍정적, 도전적이게 하고 인지능력과 자신감을 높여준다. 즉 권력이 사람을 더 똑똑하고, 공격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권력을 행사하여 성취, 승리감을 느끼는 사람의 뇌에서 벌어지는 신경 화학작용은 자신의 삶과 환경에 대한 통제감을 갖게 해 삶에 대한 행복감, 만족감을 높이고 스트레스로부터 사람을 보호한다. 권력의 긍정적 영향이다.

 

그러나 권력이 뇌에 늘 긍정적인 영향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의 뇌 속에서는 그 만큼 많은 도파민이 발생하는데, 다량의 도파민과 테스토스테론은 사람의 공감능력을 약화시킨다. 목표 달성에 매진하고, 실패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 특성이 지나치게 강화되면 사람은 최종 목표에만 집중하게 돼 터널처럼 좁은 시야를 갖게 된다.

 

권력 사용의 기회에 계속해서 노출된 사람은 자기애가 커지면서 오만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모든 상황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게 된다. 평소 우리가 ‘사회에서 힘 좀 쓴다는 사람들은 다들 왜 저러지?’라고 느끼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승리와 권력에는 중독성이 있어서 사람의 뇌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9781250001672.jpg

 

내가 은밀히 품고 있던 생각이 어쩌면 이 이론과 연결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권력’하면 떠오르는 건 교사가 아니라, 대통령, 정치가, CEO, 고위 군인 등이다. 이 책에서도 다양한 데이터와 예화를 들어 장기간 권력이 집중된 CEO나 정치인의 폭주, 그로 인한 기업과 사회의 비극에 무게를 두고 있다.

 

책에 따르면 권력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P 파워는 개인적 목적을 위한 권력으로, 이기는 것과 자신이 우두머리라는 데서 오는 쾌감을 추구하는 파워다. 반면 S 파워는 보다 나은 집단을 위한 파워다. 이는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집중하는 권력이다.


교사라면 대부분 전자보다 후자의 권력, S 파워를 행사하려 한다. 하지만 교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교사가 가질 수 있는 권력은 기회와 맥락을 타고 끊임없이 증식될 수 있으며, 한국 특유의 수직적인 유교 문화와 폐쇄성으로 인해 교사가 권력을 P 파워로 사용한다 하더라도 쉽사리 제재하기 힘든 환경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3.

 

처음 담임을 맡았던 해 나는 교실에서 자주 "얼음!"을 외치곤 했다. 학생들의 소란스러움을 제지하기 위해 만든 규칙이다. 내가 "얼음!"이라고 외치면 학생들은 모두 급속냉동이 되어 모든 활동을 멈추고, "땡"이라고 외칠 때까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어야 했다. 물론 맹세코 학생들을 괴롭히려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이는 흩어져있는 학생들의 주의를 모아 중요사항을 전달하거나, 다른 활동으로 흐름을 전환할 때 아주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학생들은 걷다가, 말을 하다가, 연필을 줍다가 급속냉동이 된다는 설정에 재미있어하며, 얼음 중에는 웃음을 참다가, 내가 땡! 외치면 푸하하 하고 폭소를 터트렸다. 나는 ‘어어~○○의 네 번째 발가락이 꼼지락거리는 게 보여~’라는 둥의 너스레를 떨며 학생들을 웃기곤 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내가 던지는 단어 하나에 스무 명 넘는 학생들이 일시에 동작을 멈추고 순식간에 교실은 조용해진다. 리모콘으로 TV의 정지 화면을 눌렀을 때나 벌어질 법한 일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마치 꿈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 아닌가? 교사가 아니라면 일생에서 쉽게 누리지 못하는 상황 혹은 '기회'다.


내가 이런 완벽한 통제 권력을 행사하며 ‘무의식적으로나마’ 쾌감을 느꼈을까? 글쎄, 아니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이 일화는 교사의 권력이 어떤 식으로 행사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매우 단편적인 예에 불과하다. 교사가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은 관계와 맥락을 타고 흐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말과 글로 온전히 설명해내기 어렵다. 이 미묘함을 잡아내기 위해 내 경험을 단순하게 세 단계로 나누어 봤다.

 

첫 번째 단계, 교사가 된 직후 나는 교실 안에서 내가 가지는 막강한 영향력에 매우 놀랐고 둘째, 도취되었고 셋째, 과거의 나를 돌이켜보며 경악했다.

 

첫 번째, 놀라움 단계에서는 설렘과 약간의 흥분이 동반된다. 교사가 된 첫해에 내가 내뱉는 말 한마디에 학생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몹시 신기했다. 나의 의견과 생각 그리고 학급운영 방침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에 놀라움, 고마움 그리고 안도감을 느꼈던 것이 생생히 기억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 한 켠은 조잡하게 만들어진 규칙이나 벌칙(숙제 안 해오면 한 발로만 3분 서 있기, 친구에게 욕하면 하루 종일 말 못하기 등)을 고학년 학생들이 한마디 이견 없이 받아들이는 것에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규칙에 반대합니다! 왜 이딴 규칙이 있어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대응할 논리들을 이중, 삼중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학생들은 강력한 규칙에 빠르게 순응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러한 규칙들이 가져다주는 평화를 즐기는 듯 느껴졌다. 규칙은 공정하고 일관되게 담임인 나를 포함한 모든 학생에게 적용되었고, 학생들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논리적으로 잘잘못을 따지고 결론을 내는 것도 많은 경우 내 몫이었다.

 

학생들이 점점 나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우리 반은 거의 모든 날에 걸쳐 ‘모든’ 학생들이 숙제를 하고, ‘모두가’ 정시에 도착하고, ‘모두’가 정돈된 책상에서 공부를 하는 모범적인 학급이 되었다. 우리 반의 평화로움, 모범적인 학습 태도는 학부모들에게 매우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렇게 나는 도취 단계로 도입했다. 우리 반은 훌륭한 반이었다. 철학이 확실하고, 유머와 카리스마를 갖춘 담임교사 덕분에 학생들은 ‘모두’ 만족스럽게 학교생활을 해나갔으며 나의 학생들은 자주 내게 애정과 존경을 표했다. 훌륭한 교사인 내가 가르치는 반에서 폭력적이거나, 거짓말을 하는 학생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한 남학생이 연이어 학교에 5분씩 늦게 등교하는 일이 벌어졌다. 현우(가명)는 학교에 오자마자 내게 추궁을 당하고, 본인 때문에 그날의 모둠 점수에서 만점을 획득하지 못한 탓으로 모둠원으로부터 차가운 눈빛, 가시 돋친 말을 받아야 했다.


물론 완벽하고 평화로운 우리 반에서 친구에게 드러내놓고 공격적인 말을 할 수 없었지만, 학생들 간에 오고가는 무언의 몸짓과 한숨이 그 아이에게 더 큰 압박이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알고 있었지만, 방관했다. 그 아이 하나 때문에 우리 반을 완벽하고 모범적으로 만드는 모둠 점수제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심리적 압박을 느끼긴 하겠지만 그 덕분에 자신에게 더 바람직한 생활습관을 형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후에도 현우는 몇 주간, 매일 아침 단 몇 분씩 꼬박꼬박 지각을 했고 나와 그 아이, 그리고 모둠의 학생들은 아침마다 얼굴을 붉혔다. 몇 주간의 실랑이 끝에 말이 유독 적었던 현우는 늘 8시 30분 이전에 오는 학생이 되었다. 자기 모둠 점수를 깎아 먹는 폭탄 같은 존재였던 그 아이의 변화된 모습에 다른 학생들은 박수를 쳐주었고, 칭찬을 쏟아냈다. 역시 나는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5년 내내 지각을 하던 아이를, 그 누구도 바꾸지 못했던 그 아이의 버릇을 한 달 만에 바꿔버릴 뿐 아니라 학생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이끌 수 있도록 만드는 선생님인 것이다. 나는 못할 것이 없었다.

 

3단계로 진입에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경험이 쌓여서인지, 담임에서 교과 전담 교사가 되면서 한발 물러서 학생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서인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문득,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던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우가 늦을 때마다 나는 ‘훌륭한 선생님’답게 절대 소리 지르지 않고, 늘 차분하게 이유부터 물었지만, 돌이켜보니 당시의 나는 들어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었다. 입으로는 아이에게 이유를 묻고 있었지만 내 머릿속은 이미 ‘겨우 5분을 매일 늦는다는 건 의지의 문제야. 넌 변명의 여지가 없어’라고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걸 아이가 못 느꼈을까? 이미 답이 정해진 걸 아는 상황에서 현우가 내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말은 않아도 같은 모둠 학생들이 현우에게 싸늘한 눈초리를 보낸 다는 걸 느끼고 있었지만 ‘저런 무언의 몸짓까지 내가 제어할 수는 없다’, ‘저러다 보면 저 아이의 나쁜 버릇도 고쳐지겠지’라고 애써 무시해버리던 내 행동은 그렇게도 혐오한다 외치던 전체주의, 성과주의와 다름없지 않았던가? 더 이상 지각을 하지 않는 현우를 칭찬하는 학생들을 보며 그것도 내 공 인양 흐뭇했지만, 현우는 친구들에게 칭찬을 받는 자신이 자랑스러웠을까? 점수나 깎아 먹는 폭탄이 아닌, 훌륭한 우리 팀에 걸맞은 온전한 ‘부속품’으로 인정되는 것이 현우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을까?

 

조금 느리거나, 덤벙대는 학생을 모둠 안에서 폭탄으로 만들어버리는 제도는 얼마나 폭력적인가. 때리거나, 욕하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과연 폭력적이지 않은 교사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걸까?


Detachment.jpg

 

대단한 환골탈태도, 각성도 아니었다. 운이 좋아서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이런저런 글을 쓰다가 3단계에 돌입하여 경험을 반추할 수 있을 뿐이었다. 반대로 이전의 내가 포악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었기에 그런 생각과 행동을 했던 것 또한 결코 아니다. 그저 교실 안에서 교사 누구에게나 주어진 권력을 사용했을 뿐이었다.



4.


 

처음엔 모든 교사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마땅히 사용되어야 할 권력과 권위를 사용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이에 대해 늘 경계하고 자신을 돌아보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권력에 취하는 것 역시 믿어 의심치 않을 수순일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학생 개인들이 처한 다양한 상황과 그들의 마음을 보살피기보다는 좋은 학급 만들기라는 목표에만 마음이 쏠리게 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성공과 승리의 징후가 나타나면 권력에 대한 도취 현상은 가속화된다. 내 경우, 우리 반 학생들의 학업성적이 올랐고, 학생들의 행동이 변화됐고, 학부모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교사로서의 자부심, 나의 상황 대처 능력이나 판단 능력에 대한 확신이 나를 더욱 유능하고 책임감 있는 교사로 만들었던 반면 ‘모든’ 학생들이 행복하고, ‘모든’ 학생들이 긍정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완벽한 학급에 대한 환상은 일부 학생들을 몰이해와 공감의 결여로 옭아맸을 것이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교사들 중에 정말 이상한 사람이 많을까? 내 주관적인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상하다’의 기준은 다양한 것이고, 내가 겪어본 교사들의 숫자가 유의미한 통계를 내기엔 턱없이 적다는 지적도 일리가 있다. 각자의 경험과 직감만 오가는 논쟁에 그칠까 두렵기도 하다.

 

‘왜 학교에는 이상한 교사가 많은가’라는 이 문제의식을 다시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교사의 직업 환경이 그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 가능성을 높이는가?’이다.

 

전 직원이 있는 자리에서 특정인의 실수를 거침없이 질타하고 서류철을 집어 던지던 교감 선생님은 분명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는 수십 년간의 교직 생활 속에서 학생들을 향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마구 휘둘러왔을 것이고(물론 촌지도 엄청나게 받았을 것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공감능력을 처참하게 상실했을 것이다. 집이나 학교에서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고 주위 사람들을 아이 다루듯 하는 교사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경우도 보았다. 이들이 이렇게 변하게 된 이유는 교실에서 행하던 권력에 도취되어 주변 모든 것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졌기 때문이 아닐까?

 

교사에게 어떤 형태의 권력이, 얼마만큼 주어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교사가 교사로서 학생에게 발휘하는 정당한 영향력은 어떤 형태이고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끊임없이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우리 사회에서도 교권에 대한 논쟁은 걸핏하면 발생하지만, 언제나 학생에게 체벌을 하느냐, 마느냐 수준의 피상적인 형태에만 머물러 있다.

 

교사가 가져야 할 건전한 형태의 권위에 대한 사회적 합의뿐만 아니라 교실에서 교사가 행사하는 권력이 교사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 영향이 학생들에게 어떤 형태로 회귀하는지 또한 우리가 논의해 볼 만한 문제다.



3.jpg 

 




*편집자 주: 끝으로 글쓴이가 2008년경 개인 블로그에 썼던, 경험과 고민이 뚝뚝 묻어나는 글을 원문 그대로 붙이며 마치겠습니다.



 

제목: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잖아?


" 김○○는 지지 않아."


학교의 연장자들이 가끔 하는 말이다. 보통 아버지, 어머니뻘 되는 분들은 허허 웃으면서 재미있다는 듯 이 말을 할 때가 많지만, 나와 같은 세대의 교사들이 할 때도 있다. 그들 역시 웃으면서 하는 말이나, 나는 미약하게나마 거기서 일종의 가시, 공격 같은 것을 읽는다. 그들이 하는 말의 어딘가에서 고분고분 순종하는 모습을 기대하는 심리, 연장자로서 권위를 잃는 것에 대한 불안 등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또 사실 나는 저말 자체가 참 듣기 싫다. 지지 않는다? 내가 싸워서 졌어야 한다는 말인가? 사실 나는 싸우고 싶지조차 않다. 싸운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울 정도로 학교 문화는 정말 후질대로 후졌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딱히 더 시니컬해지거나, 사나워진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교대에 입학하면서부터 주위 환경에 불만이 대단히 많은 까칠한 인물이 되어갔고, 사회인이 되면서부터는 거의 반동분자 수준으로 거친 인물이 되었다. 밥 잘먹고, 사람 잘 사귀고, 운동 열심히 하고, 학생들과도 잘 지내는 내가! 내가 왜!

 

욕 권하는 문화를 한바닥의 글로 완전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가깝게는 이런 일이 있었다. 어제 교무 회의 시간에 교감선생님이 지난 주의 학교평가를 무사히 치룬 교사들의 노력을 치하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평가위원들이 우리 학교에 매우 좋은 인상을 가지고 돌아갔다. 우리 학교가 역시 부촌에 위치해 있기 때문인지 화분들이 아주 멋지다고 하더라. 저기 동부 쪽 학교는 무슨 분유통 같은 걸 화분으로 삼아 식물을 키우고 있던데, 우리 학교는 학부모들 협조가 아주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 보다 라고 말하며 돌아갔다. "


나는 한동안 이 말을 어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정신을 교무실의 공중 어딘가에 두둥실 띄운 채 있었다. 수고했다, 자랑스럽다...는 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수신자인 나로서는 참을 수 없이 짜증스럽고 혐오스러운 기분만이 파도가 되어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의 과시가 당연시 되는 한국의 사회풍토는 차치하고라도, 만약 의무교육인 초등교육의 환경이 이토록 불평등하다면 그게 자랑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분유통으로 화분을 만든 학교의 사정이야 내가 알 수 없지만 (사실 아주 교육적이고, 근사한 발상일 수도 있다), 이건 교사라면 누구나 고민해야 할 기본적인 사안 아닌가?


또, 평가랍시고 학부모들에게 협조를 빙자한 반협박 (자녀의 교육과는 거의 무관한 문제이고, 그다지 명분이 없는 부탁임에도 심리적 역학 관계를 고려했을 때 거절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협박이라 본다) 으로 받아낸 화분들로 학교를 꾸민 것 역시 자랑할 만한 일은 절대 아니지 않은가.

 

학교평가 후 회식 때는 이런 말도 들었다. 학교 평가 위원들에게 제출할 교직원 설문조사에 우리 학교의 어떤 교사가 특정 항목(전부도 아니다, 단 하나의 항목이다) 을 5점 만점에 2점을 주었다는 것, 평가 전에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도 2점을 준 그 눈치 없는 교사가 누구인지 교감선생님이 이미 예측하고 화를 내었다는 것, 그리고 그 교사의 설문지는 수정액으로 수정과정을 다소 거쳤다는 것.


공문서 조작이라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일인데 아니나 다를까 공식적인 회식 자리에서 교감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렇게까지 한 교사가 있어 참으로 곤란했노라 라는 비난 섞인 말을 거침없이 하고 있었다. 2점을 준 교사가 사실 나는 아니었으나, 암암리에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을 그 교사를 위해 나는 조금이나마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단순한 설문조사일 뿐인데 저렇게 까지 말하는 건 좀 심하지 않느냐, 교사 만족도가 지나치게 획일적인 것도 평가위원들이 보기에 좀 웃기지 않겠냐는 의견을 몹시 온건하게(!) 피력했지만, 웬걸- 상식적으로 동의하겠거니 했던 사람들에게조차 세차게 정을 맞고 말았다.


네가 아직 신규라서 모른다는 둥, 교감 선생님이 저렇게까지 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둥. 그래, 나는 모난 돌이로구나. 2점 준 교사야, 당신도 모난 돌이로구나~

 

학교의 문화가 얼마나 싸구려이며, 많은 교사들이 얼마나 후진 지성과 감성의 소유자들인지 말하는 것이 어찌 보면 참 제 얼굴에 침 뱉기 같다. 또 이 끝없는 분노에 지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다가, 또 그러다보면 문득 이런 내가 이상한 인물이 아닌가? 상식을 모르는 건 혹여 내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그 끝에 드는 생각이란 결국 이런 것이다.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잖아?


팔팔 뛰는 분노 때문에 비록 이십대에 고혈압, 심근경색, 유체이탈을 경험할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영혼을 팔 수야 없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몸바쳐 마음바쳐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버리지 않고, 내 자리에서나마 정신 놓고 있지 않을 것. 


내 영혼을 파는 순간 34명의 영혼도 동시에 팔려나간 다는 걸 잊지 말 것. 더 이상 물러날 데도 없는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끝)

 






지난 기사


10년 차 초등교사가 푸는 교육계 미스터리






편집부 주


이 글은 독자투고에서 납치되었습니다.

딴지일보는 삼진아웃 제도의 유구한 전통을 이어온 바,

독자투고 및 자유게시판(그외 딴지스 커뮤니티)에 쓴 필자의 글이

3번 마빡에 올라가면 필진으로 자동 등록됩니다.







독자투고 SickAlien


편집: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