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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26. 화요일

파리특파원 나나

 

 

 

 

한류라는 단어의 바람이 거세다.

 

 

 

 

 

일본과 동남아시아를 넘나들던 이 단어는 이제 유럽에까지 상륙, K-Pop으로 대변되는 적지 않은 아이돌 그룹들은 이미 유럽의 중심인 빠리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마치고 돌아갔다. 1990년대 후반부터 J-Pop을 위시로 아시아 문화에 관심이 많던 소수에게 어필했던 문화가 유튜브라는 매체의 출현과 한류컨텐츠의 결합으로 그 규모가 커져 대륙의 반대편에 있는 유럽에까지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K-Pop 공연의 경우, 공연을 주최한 기획사에서 한국의 언론사들까지 한꺼번에 대동하고 오는 탓에 한국에 보도되는 것보다 현장에서 느끼는 열기는 미적지근하다. 아직까지는 소수의 매니아들에게 어필하는 ‘그들만의 잔치'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한류가 순수 예술에도 불어오고 있다고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열광의 규모는 당연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미약하지만, 그 배후에는 코스닥에 상장한 거대 기획사도, 미디어의 거센 바람잡이도 없다. 그저 순수하고 오롯하게 작품이 가진 힘에 매료된 소수의 관객들과 지지자들이 있을 뿐이다.

 

 

 

 

 

프랑스 아르덴 지역 연극제 ‘동에서 불어온 바람’이 지난 4월 성황리에 끝났다. 일본, 대만, 한국등 아시아 연극들을 초대한 이 축제에 다국적 극단 ‘열여섯 개의 꿈’의 <어미> (오태석 작)이 초청되었다. 프랑스 여배우 엘리자베스 모로의 열연과 재불연출가 신미란의 세련되고도 군더더기 없는 연출은, 국경을 뛰어넘는 모성을 무대 위로 불러내어 프랑스 관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겼다.

 

 

 

 

 

 

 

 

 

 

아르덴 축제의 성공적인 공연 이후, 빠리의 한국 문화원에서 만난 오태석의 다른 연극들 역시 번역을 거쳐 한국어가 아닌 불어로 공연되었다. 비록 몇몇 장면의 발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텍스트가 가진 힘과 반짝이는 영감과 통렬하게 쏟아지는 진한 감정의 파토스들은 여전했다. 그리고 이런 뛰어난 작업의 뒤에는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으로 무장하고 프랑스 연극학교에서 내공을 쌓은 신인 연출가, 신미란과 다국적 극단 ‘열여섯개의 꿈'이 있었다.

 

 

 

 

 


 

 

 

 

 

 

 

극단 '사람나무'에서부터 현재의 '열여섯개의 꿈'까지, 한국의 모티브를 고집해 온 연출가 신미란이 자신을 말한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지만 연극을 하게 된 건 우연과도 같아요. 저는 사실 굉장히 비사회적인 성격이에요. 제 안에는 거대한 세계가 있는데 그때의 저는 너무 어려서 누구와도 소통할 줄 몰랐었죠.

 

 

 

 

 

우연히 전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연극제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어요. 불어 원어 연극을 하게 되었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가 외부 연출을 모셔왔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혼자서 연출 역할을 다 하고 있었어요. 연극을 한 편 올린다는 건 하나의 소우주를 만드는 작업과도 같아요. 무척이나 힘들고 고되지만 보람도 큰 그런 작업이에요. 그 작업을 통해 제가 연극을 처음 발견했고, 제가 유럽여행 첫 세대거든요. 배낭여행을 왔다가 아비뇽 연극제에 갔고,

 

 

 

 

 

그곳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어요.

 

 

 

 

 

 

 

주연 엘리자베스 모로.

 

 

 

 

 

이곳에서 큰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저는 아직 신인에 불과하고 성공적으로 <어미> 공연을 마칠 수 있었던건 좋은 여배우(엘리자베스 모로)를 만난 것과, 오태석 선생님의 텍스트 덕분이에요. 남들은 어째서 <어미>처럼 오래되고 한스러운 이야기를 하냐고도 해요. 한국문화를 알리겠다는 기치 아래 후원을 받거나 거창한 기획의도를 가지고 와서 어떤 프로젝트로 쓰기에도 힘들다고요.

 

 

 

 

 

하지만 제 내부에는 아주 오랫동안 이 작품을 하고 싶다는 어떤 갈망이 있었어요. 돌이켜 보면, 한참 전에 제가 프랑스에 와서 잠깐 프랑스 TV 일을 할 때가 있었어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작업인데 제주도 해녀들을 소재로 하는 일에 참여를 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해녀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는데 해녀들의 물질하는 그 가쁜 숨소리가 참 오랫동안 제 귓가에 남아있었어요. <어미>의 텍스트에 실재적인 형체가 부여된 것은 그때의 경험 탓이 커요.

 

 

 

 

 

 

 

 

 

 

<어미> 텍스트를 가지고 아주 많은 여배우들과 미팅을 가졌고 오디션을 봤어요. 저같은 신인 연출가로서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요. 한결 같이 이 역할을 하고 싶어했어요. 배우로서도 이런 텍스트를 한다는 것, 이런 역할을 맡는다는 건 욕심나는 일이니까요. 오태석 선생님이 브레히트에 버금가는 천재라는 걸, 동시대를 사는 우리는 모르고 있는 걸지도 몰라요. 아니 그 천재를 푸대접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제가 뛰어나서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친건 아니에요. 우선 오태석 선생님의 텍스트가 훌륭했고요. 한국에서 오랜 경험을 쌓고 이곳에 바로 온, 아들 역할을 맡은 배우 최우성이 빛나는 연기로 무대를 채워줬어요. 이 텍스트를 가지고 어떻게 무대를 빚어내야 할 지, 저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어요. 최우성이 혼자서 동선을 그려내어서 무대 위에서 움직이고, 대사가 없는 대신 구음을 통해 감정을 전달했고요. 소리를 따로 배운 것도 아닌데, 그 소리에 진심어린 감정을 실어 보냈고 그게 관객들에게는 충분히 어필했죠. 어설픈 불어로 대사는 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깊고 진하게 관객들에게 전달 되었을 거에요. 그리고 무대 위의 공간을 효율적으로 움직이면서, 존재만으로도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연기를 해냈어요. 배우로서 본능적으로 어떻게 해야 그 인물이 될 수 있고 작품 전체에 녹아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건 연출이 제가 가르치거나 디렉션을 준다고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저로서는 복을 받은 기분이에요.

 

 

 

 

 

 

 

최우성

 

 

 

 

 

재작년부터 늘 <어미>를 공연할 때마다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연출을 했어요. 그만큼 후회도 없었고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으니 끝나고 나면 제가 다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신기하게도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다, 라고 생각했을 때마다 다시 기회가 생겼고 이번 공연도 그렇게 제작자를 만나 새로운 기회를 잡게 된 거에요. 결국 오태석 선생님을 모셔올 수 있었고, 빠리에서는 극장을 잡지 못했지만 선생님 앞에서 불어로 진행되는 공연을 보여드릴 수 있었으니 그 의의는 충분했다고 생각해요.

 

 

 

 

 

선생님께서 공연이 끝나고 나서, 아이를 하나 낳은 셈이다, 애 많이 썼다고 하는데 저는 그 말씀이 제가 이 작품을 위해 쏟아부은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국적 극단인 <열여섯 개의 꿈>은, 별 뜻이 있어서는 아니고 열여섯이라는 나이가 주는 성장의 과도기에 있는 느낌과 불어 발음의 싱그러움 때문에 골랐어요. 늘 그렇게 젊고 성장해가는 극단이고 싶어서요.

 

 

 

 

 

앞으로 기회가 닿는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의 훌륭한 텍스트들을 선별해 소개하고, 연극을 통해 프랑스와 한국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어요. 한국은 제가 태어나서 자란 고국이자 지금의 제가 있도록 한 토양이고, 프랑스는 제가 연극에 매혹되어 처음부터, 연출을 배운 나라니까요. 지금은 연극의 시대가 아니고, 미디어와 영화의 인기가 연극을 앞질렀다고도 하지만, 저는 제가 본 몇편의 연극과 그 장면들이 여전히 제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어요.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든 제 인생을 좀 더 아름답게 해줬고요. 그건 소포클레스의 원형극장 시절부터 스마트폰으로 전세계에서 같은 동영상을 보는 지금까지, 연극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요.

 

 

 

 

 

무대에는 빛이 내려오고, 암전이 되기 전까지 우리의 삶의 일부가 지나가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삶의 일부를 잠시 동안 공유하면서 감동을 받는 거구요.

 

 

 

 

 

 

 

 

 

 

오태석을 모르는 사람들도, <어미>의 배경인 바닷가 마을과 한국에 대해 어떠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연극을 보다 보면 어느덧 그에 동화되어 눈시울을 붉히더라고요. 너무 구구절절하게 신파스러운 장면을 연출하지 않으려고 했고, 사람의 목소리와 가장 비슷한 첼로를 등장시켜 음악효과를 주고, 거기에 구음을 사용했어요. 세련되고도 힘이 있고, 균형잡힌 연출을 하고 싶었거든요.

 

 

 

 

 

이번 공연을 통해 만난 관객들의 반응은 저도 기대 이상으로 놀라운 것이었답니다. 다음 프로젝트를 위해 애쓸 수 있는 좋은 자양분이 되었어요. 한국에 오태석 선생님과 같은 거목이 있어서, 그리고 그 분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어서, 참 행복하고 충만한 나날이었습니다. 모든 고된 기억을 다 잊어버릴 만큼요.

 

 

 

 

 

내년에는 한 해 동안 <어미>로 프랑스의 곳곳을 순회할 듯 싶은데, 그때마다 이번 같은 감정을 느낄지는 모르겠습니다.

 

 

 

 

 

 

 

 

 

 

빠리특파원 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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