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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18. 월요일

Matti


 



 


- 신입생, 갈등과 선택 -


 


민중가요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 할 지 난감하지만 여기서는 운동하는 분들이 부르는 노래들이라고 해두죠. 민중가요는 집회 현장에서 부르기도 하고, 뒷풀이 자리에서 떼창을 하기도 하며, 때로는 혼자 밤길을 걸으며 나직이 읊조리기도 합니다. 제가 좋아하던 노래들을 나중에 따로 뽑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



 



 


제가 좋아하는 민중가요 중 하나입니다. 학창시절 늦은 밤에 귀가를 하다 가끔씩 마음이 뜨거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한 쪽에 벽을 끼고 있는 도로를 따라 이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향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 주제에서 이 노래를 소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신입생들의 갈등과 선택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시리즈의 앞 부분에서는 1년 과정에 대해 간결하게 설명을 하느라 신입생은 마치 일방적으로 세뇌를 당하는 수동적 존재처럼 묘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과 동아리에 들어가 평범하게 성장하는 신입생들을 모델로 각 시기마다의 모습들을 그려봅니다.


 


 


* 동아리의 선택


 


학생운동에 있어 동아리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전 글에서도 말씀 드렸다시피 신입생들을 키우는데 있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동아리를 통하는 것입니다. 운동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 학습, 투쟁경험 등인데 이 모든 것들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신입생의 동아리 선택 문제는 운동권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비운동권 선배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학기초에는 성향에 관계 없이 동아리 선배들은 모두 학생회 활동에 참여합니다. 그래야 신입생들과 인간적 교류를 맺고 동아리에 데려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아리 선택의 기준은 인간관계, 관심사 두 가지입니다. 인간관계의 경우 선배와 신입생의 일대일 관계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입생이 동아리에 들어가는 경우 그 동아리에 어떤 동기가 있는 지를 염두에 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대개 친한 신입생 그룹은 동아리에 같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운동권이나 비운동권 가릴 것 없이 신입생들의 그룹이 어떻게 이뤄져 있는지에 대해 본능적인 관심을 갖습니다. 그렇지만 그룹으로 들어오는 경우에도 위험부담이 있습니다. 빠져나갈 때도 그룹으로 빠져나갑니다. 동아리가 작은 규모라면 신입생이 그룹으로 들어왔다가 그룹으로 빠지면서 휘청하는 경우가 자주 생깁니다.


 


90년대 중반까지는 그래도 대학에 들어오면 사회과학 공부는 한 번쯤 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에 언뜻 운동권 비스무레한 동아리처럼 보이더라도 사회과학 동아리를 선택하는데 있어 주저하지 않는 신입생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개 운동권 동아리의 구성원 숫자가 많고 적극적이기 때문에 사회과학 동아리의 신입생 숫자가 가장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첫 번째 갈등의 순간이 생깁니다.


 


이전 글들에서 정파 갈등에 대해 언급을 한 바 있지만, 학기초에는 서로 간에 자제를 합니다. 가끔 가다 스스로의 감정에 못 이겨 과격함을 표출하는 선배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사람은 정파를 막론하고 극소수이며, 자기 정파에서는 실제로 인정을 못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컴플렉스를 신입생들에게 자기과시로 풀려고 합니다. 이런 인물들의 경우 대개 신입생 행사 이전에 선배나 동기들이 신신당부를 해서 어떻게든 통제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신입생들의 동아리 선택을 두고 정파갈등이 표출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가끔 가다 사회참여의식이 대단히 높은 새내기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1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케이스입니다. 상대 동아리 신입생에 눈독을 들이는 것은 대개 한두 달 뒤에 운동인자로 보일 때부터입니다.


 


갈등은 오히려 비운동권 선배들로부터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운동권 동아리에 들어간 신입생이라고 선배가 운동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초반에는 다양합니다. 그 중에는 운동권을 싫어하는 선배들도 있고, 순수하게 운동권 동아리에 들어가는 걸 안쓰러워 하는 선배들도 있습니다. 이 선배들이 운동권 동아리에 들어간 친분 있는 신입생들에게 몇 마디를 던지는데, 그게 신입생들 사이에서 파문으로 번져갑니다. 돌아보면 운동권 동아리를 운동권이라고 했을 뿐인데 그게 왜 갈등요소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목표와 의도가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곳에는 언제나 어긋난 부분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때 탈퇴하는 신입생들은 아무 말도 없이 나가거나 다른 이유를 대면서 나갑니다. 운동권 동아리인줄 몰랐다 하면서 나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신입생의 태도에서 이상한 느낌을 캐치하지 못하는 경우 운동권 선배들이 이걸 인지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래도 결국 밝혀집니다. 대개 남아 있던 신입생 중 비운동권 선배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들었지만 본인은 남았노라며 뿌듯해하는 발언을 하다가 모두가 알게 됩니다. 그 비운동권 선배가 동아리 고학번 선배보다 상대적으로 선배거나 동기인 경우에는 진지하게 항의를 하고, 후배인 경우에는 험악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대개 NL 동아리에는 선배들과 비슷한 성향의 신입생들이 들어옵니다. 대개 얌전하고 착한 이들이 많습니다. 당연합니다.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선배들을 본능적으로 따라갑니다. 그 중에도 이리저리 튀는 신입생이 있지만 대개 중간에 나가게 되거나, 적은 동아리에 두되 외곽으로 빠지게 됩니다. 신입생인 동기들과도 겉돌게 됩니다.


 


 


* 세미나


 


동아리의 세미나 커리는 이미 선배들이 정해 놓았습니다. 물론 어떤 책을 읽을까 정하는데 있어 신입생들의 의견이 반영되지만 결국에는 철학을 먼저 할까, 역사를 먼저 할까의 차이에 불과합니다. 선택권은 분명 신입생들에게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1년이 지나고 나서 커리 책들을 돌아보면 지난 해에 선배들이 1학년 때 읽었던 책들과 똑같습니다. 가끔 눈치 없는 신입생이 PD쪽 책들을 들고 와서 세미나를 하자고 주장할 때가 있습니다. 그 책을 왜 지금 읽으면 안 되는지를 설득하기 위해 선배들은 진땀을 뺍니다. 그래도 말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진땀을 빼는 선배들은 그 안에서 합리적인 사람들입니다. 대개는 신입생이 무언의 압력을 느끼면서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물론 다음 기회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소한 답답함과 작은 상처들이 쌓이면서 나중에 동아리를 탈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책으로 하든 학기초 세미나의 분위기는 비슷합니다. 책을 읽고 토론을 하지만 모든 결론은 정해져 있습니다. 사회에는 이런저런 모순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들의 해결은 저절로 해결되지 않고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참여가 필요한 것이고 지성인이라는 대학생이라면 그것에 대해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명제에 대해 반대할 새내기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분위기는 뒷풀이로 이어집니다.


 


동아리에서 이 '뒷풀이'는 중요합니다. 선배들이 진짜 하고 싶은 많은 이야기들이 여기서 나옵니다. 처음에는 일상적 이야기들로 시작하고, 사람 좋은 선배들이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이끌어 갑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고 밤이 깊으면 자연스레 진지한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주로 그 날의 세미나 내용들이 나오며, 신입생이 거기에 동의하는 모습이 보이면 수위가 낮은 형식의 집회를 제의하기도 합니다. 이건 목적의식이 있기도 하지만 없기도 합니다. 밤이 늦어 술자리가 깊어지면 서로간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지고, 선배든 새내기든 본인들이 정말 말하고픈 내용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아까 세미나 때는 차마 분위기를 깰 수 없어 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던 새내기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 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배의 최초 의도에서 벗어난 내용으로 대화가 전개되지는 않습니다.


 


성인이기는 하지만, 대부분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평생 정치토론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한국 대학생들 사이에서 초기의 1, 2년차의 간극은 생각보다 큽니다. 새내기들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전형적 질문들에 대한 답들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결론과 과정이 이미 정해져 있는 틀 안에서, 선배들은 새내기들을 반드시 제압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모든 술자리는 선배들의 주장에 진심으로 납득하거나 혹은 납득하는 제스쳐를 취하면서 자리가 마무리됩니다. 납득이 안 되더라도 당장 선배의 논리를 이기기란 쉽지 않고 사이가 좋았던 선배들과 서먹해지기도 싫습니다.


 


그렇지만 선배들의 역량도 한계는 있기 때문에 제압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새내기들은 미리부터 경계합니다. 쟤는 품성이 안 좋다, 현학적이고 사변적이다, 실천보다 말싸움만 즐길 타입이다라고 미리 자기합리화 기제를 마련해 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새내기의 논리가 선배들보다 합리적이라 하더라도 선배의 인정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운동하는 이들 특유의 끝없는 말 돌리기와 전형적 논리의 반복이 이어집니다. 인정하면 지는 겁니다. 이 단계쯤으로 들어가면 선배들 역시 이 친구는 어차피 운동을 하더라도 문제가 생길 만한 놈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말싸움으로 이어지며 사이가 나빠지더라도 개의치 않습니다. 이런 과정을 겪은 새내기는 결국 동아리를 나가게 됩니다.


 


세미나와 뒷풀이를 거치면서 애초에 다양하게 들어온 새내기들은 동아리 본래 분위기에 맞는 이들만 남거나 혹은 유사하게 다듬어집니다.


 


 


* 집회


 


앞 부분에서 선배들의 의도를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의도 여부와는 별개로 대학에 들어와 사회문제와 실천 여부에 대해 고민을 갖는 것은 이상할 것 없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로 넘어가는 것 역시 자연스럽습니다. 그렇기에 대학 내에 사회참여에 대한 다양한 고민과 운동들이 존재한다면 특정 정파가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경로의 제한입니다. 거대 정파들은 끝없이 희망을 독점하고 싶어합니다. 이런 그림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성찰하는 것은 운동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도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신입생이 그러기란 더욱 힘든 일입니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달리 신입생들의 집회 참여는 자발적 선택으로 시작됩니다. 선배들이 조심스레 제안을 하든, 직접 참여의사를 밝히든 선택은 자발적입니다. 세미나에서의 발언이야 분위기상 침묵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지만, 집회 참여는 강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선배들은 신입생들을 집회에 데려나가는 데 있어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 처음부터 수위가 높은 집회에 참여하게 되면 쉽게 떨어져나갈까에 대한 고민도 있지만, 성급함 때문에 인간관계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둡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수위가 낮고, 공감할 수 있는 주제의 집회로 갑니다. 수위가 낮다는 건 주제의 과격함이 아니라, 합법 집회를 의미합니다. 그래야 경찰의 진압 가능성이 적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제가 과격하면 진압 가능성도 높습니다. 신입생들의 안전은 선배들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신입생들도 선배들이 자신들을 책임지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집회에 나갈 때는 반드시 집회의 목적과 내용에 대한 교양이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 어떤 집회에 나가고, 어떤 내용으로 펼쳐지는 지에 대해 모르고 나가는 신입생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단순히 인간관계만 믿고 별 생각없이 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시리즈의 서두에서 밝혔듯 예외는 많습니다.) 물론 집회에 나갔는데 선배들도 의도치 않는 상황들이 펼쳐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호의 과격함이라던가, 집회 성격의 변질, 경찰의 갑작스런 통제로 분위기가 험해지는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이런저런 구호들 중에 어떤 부분에만 집중하고, 다른 것들은 무시하라고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리고 분위기가 험해지는 경우 신입생들에게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선택을 물어봅니다. "여기서 빠져도 되고, 같이 가도 된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마음을 편하게 해줍니다. 빠지는 선택을 할 경우네는 선배 하나가 함께 빠집니다. 집회에 계속 참여하는 경우에도 어떻게든 가장 안전한 공간을 찾습니다.


 


이는 신입생을 배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서로간의 신뢰를 위해서입니다. NL 구성원 간의 신뢰는 인간관계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주 사소한 솔직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많은 것들을 감추면서 신입생을 포섭할 것이라는 상상과는 달리 정반대의 메커니즘이 작동합니다.


 


본 집회가 끝나면 반드시 평가집회가 있습니다. 제가 집회에 참석할 때마다 참 쓸데없는 형식이라 생각했던 부분입니다. 서총련(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주최였다면, 서총련 평가집회, 서부총련(서울서부지구총학생회연합), 학교 단위 집회로 연달아 이어집니다. 구성은 간단합니다. 각 단위의 의장들이 평가발언을 하고, 단위 학생회 회장 중 한 명이 평가발언을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반드시 들어가는 게 '새내기 발언'입니다. 그날 처음 집회에 나온 신입생들 중 몇몇이 선발되어 앞으로 나가 집회 참여 소감과 앞으로의 결의를 발표합니다. 이들이 앞에 설 때는 보통 '잘 생겼다, 예쁘다'와 같은 추임새들이 함께 합니다. 교회에서 예배 마지막 순서로 그날 처음 나온 신도들을 소개하는 시간과 같은 기능을 합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이 평가집회라는 걸 굉장히 싫어합니다. 집회라는 건 누군가에게 우리의 주장을 알리는 것이고 그 목표는 이미 본 집회로 끝이 난 것인데, 우리끼리 따로 모여 집회를 또 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고 시간낭비처럼 보입니다. 무엇보다 진이 빠집니다. 물론 결속을 다지고 새로운 구성원들을 받아들이는 기능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 위해 최소한 한두 시간을 더 소비한다는 건 굉장히 비효율적입니다. 대학 시절 내내 고민했던 게 학생운동과 학생회활동의 효율화입니다. 그래야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할 수 있고, 지속이 가능하니까요.


 


이게 끝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뒷풀이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뒷풀이가 진짜 평가입니다. 여기서 선후배들 간에 진지한 이야기가 오갑니다. 신입생들은 여기서 집회 참여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습니다. 많은 내용들이 나옵니다. 신기함, 어색함, 거부감, 공포, 분노, 의문점 등 많은 것들이 나옵니다. 물론 선배들이 함께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이에 대한 답들은 이미 정해져 있지만 방식은 부드럽습니다. 그렇지만 그 답들의 내용이 모두 의도하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선배들이 해줄 수 있고, 알고 있는 내용이 딱 그만큼이기 때문이고, 그게 신념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과정들은 이후 한총련 출범식, 범민족 대회 등 굵직한 집회뿐만 아니라 소소한 집회들에서도 반복적으로 이뤄집니다. 수위는 점차 높아지는데 이때에도 반드시 사전에 정보를 알려줘서 신입생들이 자발적 선택을 통해 집회에 나오도록 합니다. 물론 이때마다 주저하는 신입생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선배들이 자신들의 경험, 엄혹한 정세, 청년학생의 의무 등을 거론하며 한 단계 위로 뛰어오를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결코 강압적이지는 않으며, 선배들의 바람과는 다른 선택이 이뤄지더라도 분위기가 서먹해지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물론 이것은 '노력'입니다. 실제로는 한 단계씩 점프에 실패할 때마다 동지적 의식이 옅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으며 20대 초반의 학생들에게 능수능란한 처세술을 기대하기란 어렵습니다. 90년대 학생운동이란 자전거를 타는 것과 비슷합니다. 일정 단계에서 계속 머무르기란 쉽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속도를 높이며 과정들을 극복해나가야 합니다.


 


처음 집회에 나가는 것은 어쩌면 그다지 큰 결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선배들에게 아무리 이야기를 들었어도, 머리 속에서 그리는 것은 무지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모르면 용감해집니다. 그렇지만 하나하나 알아갈수록, 경찰과 학생이 폭력적으로 맞붙는 집회를 참여할 수록 마음 속에 두려움은 커져갑니다. 집회에 나갈 때마다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남학생들의 경우 사수대에 서게 됩니다. 전경들과의 첫 대치에서 생기는 심리상태는 평생 지워지지 않습니다. 분노와 공포심뿐만 아니라, 왜 이 자리에 나왔는가라는 후회심도 겹쳐집니다. 저 역시 대한극장 앞에서 처음 앞에 나섰을 때의 기분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 고립의 시작


 


90년대 학생운동가들의 내면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고립'입니다. (물론 이건 제 개인적 생각입니다.) 여기에서 내적 고통과 많은 외적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90년대 학생운동에 더 이상 사회적 영광은 없습니다.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학우들의 경외감이나 부채의식 역시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동안 학교 내에서 형성하고 있던 헤게모니 역시 급격히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전국적 집회를 하면 여전히 예전만큼의 학생들이 모이기는 하지만, 그 학생들 하나하나가 단위에서 가지고 있는 파급력은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사회문제에 눈을 뜨고, 집회에 나가고, 운동의 길로 한 발자국씩 들어갈수록 이 '고립'의 의미는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학기초에 형성되었던 많은 인간관계들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친했던 선배들과도 어색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동기들의 눈빛도 뭔가 복잡미묘하게 바뀝니다. 어느샌가 그 신입생은 '운동권'으로 규정되고 그에 따라 관계들이 재구성됩니다. 물론 어느 누구도 의도를 가지고 관계를 비틀지는 않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달라진 것도 없습니다. 누가 욕을 하는 것도 아니며, 대놓고 수군거리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운동을 선택한 신입생만이 느낄 수 있는 '고립'입니다.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


 


물론 여전히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운동하는 선배들이나 동기들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와도 진솔한 대화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각성 단계에 있는 신입생들이 많이 저지르는 잘못 중에 하나가 '설교'입니다. 왜 자신에게는 명확히 보이는 것들이 남들에게는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안락에만 신경 쓰는 학우들이 한심해보이고, 때로는 분노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선배들이 운동 초기 단계에 진입한 신입생들에게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입니다. 그렇지만 대개의 경우 소소한 사고들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런 사고와 미묘한 관계들이 쌓이다보면 어느 샌가 주위에는 운동권만 남게 됩니다. 학우들과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깁니다. 이 벽 때문에 운동 초반에 들어선 신입생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이탈을 합니다. 그리고 이 '고립'의 느낌 때문에 이탈한 신입생들은 대개 운동 쪽에 다시는 눈을 두지 않고, 운동 선배들과도 서먹해집니다.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예전처럼 '왕따' 비슷한 감정들을 느낄까봐 두려워서입니다.


 


집회와 고립의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방법은 정해져 있습니다. 신념과 동지애입니다. 신념이 없다면 마음 속 깊숙이에 있는 두려움들을 떨쳐 낼 수 없으며, 동지들이 없다면 위로를 받을 공간이 없습니다. 이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고구조의 화석화입니다. 주변의 상황 변화에 대해,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고립을 탈출하는 게 아니라, 신념을 가지고 돌파를 하려고 듭니다. 조직의 힘이라는 게 있기에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돌파가 가능합니다. 그런 제한된 승리의 경험들은 조직의 결정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품게 합니다. 사회 변화의 관건은 주체의 역량과 의지라는 생각에 확신이 생깁니다.


 


90년대 학생운동가들에게 이 고립의 문제는 곧 미래에 대한 불안입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어도 쉽지 않을 판에 지금의 고립이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가능한 불안감은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문구를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결국 그들은 연대를 구하여 고립에서 빠져나오기보다 폐쇄된 구조에서 고립의 심화를 자초합니다.


 


운동가의 성장은 깨달음이 쌓이면서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고뇌와 두려움을 억누르며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운동가들도 인간입니다. 자신들을 바라보는 싸늘한 시선들을 모르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잘못을 했을 때 쏟아지는 비난들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 고통 구조는 중고등학교에서의 '왕따'와 유사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을 누르고 이겨내지 않으면 운동가의 길을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와중에 자신들의 사고체계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주체사상으로의 진입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됩니다. 스스로 고민하고 성찰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계속)


 


 


Mat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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