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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28. 목요일

산하


 


2007년 6월 27일 진짜 반골 영원히 눕다


 


불과 5년 전의 일을 역사라고 부르기엔 좀 어색함이 따르지만, 그 삶은 한국 현대사의 굴곡이 그대로 아로새겨진 역사 그 자체라 할 만한 사람이 2007년 오늘 그 파란 많았던 삶에 종지부를 찍었기로 그 이름과 역정을 돌아보고자 한다. 이 사람의 이름은 윤한봉이다. "5.18 관련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화산처럼 폭발했던 광주항쟁이 시퍼런 신군부의 서슬과 만나 시커먼 현무암으로 식어간 이후 윤한봉은 '광주사태'의 배후 조종자로 몰려 수배됐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여러 번 감방을 들락거렸던 그는 공안당국 보기에 돌아볼 것도 없는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광주항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옥중에서 죽었고 이후 많은 사람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을 정도로 광주 관련자들에 대한 정권의 대접은 혹독했고 잔인했다. 현상금 5천만 원(이건 간첩선 신고하면 주는 금액이었다)이 걸린 가운데 잡히면 죽는다는 공포 속에서 잠수를 계속하던 그에게 밀항 제의가 왔다.


 


1981년 4월, 그는 삼미해운 소속의 3만5천톤급 레퍼드 호에 몰래 오르게 된다. 그가 머물러야 할 곳은 의무실에 딸린 화장실. 대각선으로 누울 정도의 0.5평 넓이였다. 그로부터 35일 동안을 그는 8개의 생라면과 꿀 한 통으로 버틴다. 조금이라도 적게 먹어야 적게 싸서 물 트는 소리를 막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악전고투한 끝에 그는 미국 땅에 발을 밟는다. 거기서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에드워드 케네디를 비롯한 미국인들의 도움과 특유의 뚝심으로 버텨 영주권을 획득한다. 그곳에서 그는 민족학교를 세워 재미교포 청년들과 함께하는 한편, 고국의 민주화투쟁에 나서게 된다.


 


거기까지만 해도 그의 삶은 충분히 영웅적이다. '윤한봉 선생 귀국 추진위원회'가 결성됐는데 그 고문으로는 백기완부터 고 문익환까지 재야 어르신들이 총출동하셨고, 사무국장이 고 김근태였다. 그야말로 범민주진영의 대환영을 받으며 귀국한 그의 삶은 이제 밝기만 해 보였다. 꽃다발 한 아름씩 받고 존경받는 선생님 대접 받으면서 때 되면 한 마디씩 하여 시국을 걱정하다가 지역구 하나 또는 비례대표 한 자리 차지하는 것은 그닥 어렵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윤한봉은 그런 삶을 살지 않는다. 여기서 그의 위대함이 나온다.


 


귀국한 지 3년이 갓 지났을 때 그는 5.18 관련 단체들과 충돌한다. 그가 낸 저서 <운동화와 똥가방>에서 "그들은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단투쟁을 훌륭히 해냈지만 일부는 5월항쟁을 자신들만 했던 것처럼 행세하고 항쟁의 주역이었던 시민들을 5월과 무관한 사람들로 취급했다."고 직격탄을 날려 버린 것이다. 적어도 5.18을 머리에 인 단체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흔치 않았다. 그 아픔과 통한을 짐작하기 때문이며, 스스로 희생을 치뤘거나 그 가족이 희생된 사람들인 때문이다. 하지만 침묵은 묵인(默認)을 낳고 묵인은 방종과 오류를 낳는다. 그 과정에서 불거진 문제점들을 윤한봉은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전라도 강진산으로 토종 전라도 사람이었던 그였지만 그는 이른바 저항적 지역주의에도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그 과도한 경사에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던 날, 전라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아차 처가가 그쪽이긴 한데) 내가 다 콧날이 시큰해지고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을 믿습니다." 플래카드를 들고 사람들이 김대중 대통령의 자택으로 몰려가고 금남로에서 잔치판이 벌어지던 날,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광주시민들을 탓할 일은 아니지만 냉정한 정치의식보다는 원시적 집단정서에 따라 표를 던진 결과인 것만은 분명하다...... 만화같은 몰표에 무서움마저 느꼈다."


 


그는 자조적으로 얘기했다. 광주에 자리 잡은 후 후배들이 와서 세 가지 척지지 말 '파워'에 대해 얘기했다는 것이다. "첫째 DJ 지지 세력, 둘째 통일운동 세력, 셋째 5.18 관련 단체" 이들과만 부딪치치 않으면 최고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충고였다. 그는 허허 웃고 말았다고 한다. "아따 내가 최고대접 받을라고 돌아왔능가." 그리고 그는 세 파워 모두에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물가 심어진 나무 같이 흔들리잖게. 흐트러지지 않는 올곧음으로. 그리고 그는 명예훼손 소송을 당했고 살얼음 낀 냉대를 받았으며 심지어 "미제의 프락치" 소리까지 들었다. '통일운동 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미제의 프락치"로 취직시켰던 것이다.


 



"지금의 통일 운동을 보면 통일세력과 반통일 세력의 구도로 나누고, 반통일 세력을 타도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통일을 통해 불이익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엄밀히 말해 우리가 말하는 반통일 세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반통일세력이라고 부르는 자본가나 정부가 소위 말하는 통일 운동세력의 몇 배나 더 열심히 아니 치열하게 통일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통일과 반통일 구도라는 이분법적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윤한봉의 말이다. 아마 이 말 들으면 지금도 거품 물 '당권파' 많을 것이다.


 


머리에 철이 난 이후 숨 쉬기도 어려운 폐기종으로 세상을 뜨던 그 순간까지 그는 진정한 반골로 일생을 살았다. 불의에 대한 반골, 독재에 대한 반항아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 저항한다고 나선 이들의 독선과 오만에 대해서도 반골이었고 그들이 저지르는 오류에 저항했다. 미국에 상륙한 이후 그는 세 가지의 맹세를 했다고 한다. 첫째.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않는다. 둘째. 조국의 가난한 동포들과 감옥에서 고생하는 동지들을 생각해서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셋째. 도피 생활할 때처럼 허리띠를 풀고 자지 않는다. 첫째의 맹세는 반드시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는 맹세였을 것이고 둘째 맹세는 밖으로 열린 연대였고 셋째 맹세는 스스로에 대한 긴장의 다짐이었을 것이다. 그는 귀국하기 전은 물론, 귀국한 뒤에도 그 맹세들을 지키는 삶을 살았다. 안온한 삶에 적응하지 않았고, 편안함을 구하지 않았고, 우리 사회와 민주주의를 향한 긴장을 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피곤한 삶을 이기지 못한 심장이 2007년 오늘 멈춘다. 반골 중의 반골, 진짜 반골 윤한봉은 환갑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남긴 말들을 보면 지금도 가슴 한 켠에 청송녹죽처럼 박히는 느낌을 받는다. DJ가 당선된 후 그의 인터뷰 중 일부다. "정권 바꾸고 김대중이 잡으면 그게 민주주의냐. 이거 퇴행적인 발상이다. 뺏긴 걸 다시 찾아야 한다는 논리다.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 같은 거 없다. 적개심에 눈이 멀면 앞도 뒤도 안 보인다. 다른 거 생각 못한다. 25년이 지났는데 광주는 아직도 정권 타도에 모든 걸 걸고 있다." 여기에 단어 몇 개를 바꿔 보자. 그것은 오늘의 우리에게 하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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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부장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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