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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먼지 없는 방

2012-07-04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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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4. 수요일

김범우


 


 


6월 28일 금속노조가 보신각에서 진행하는 집회에 참가하고, 대한문 앞까지의 도보이동 집회 중에 혼자만 먼저 자리를 빠져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벌이를 못하는 가장이라 집사람 눈치를 좀 봐줘야 한다.


 



"여보, 지금 집에 갈게"


 


이제 깃발 따윈 들고 다니진 않지만 파카한일유압 노조원들은 여전히 이런저런 집회에 참석한다. 벌써 이런 집회에 참여한 경력이 몇 년이라 주변을 둘러보면 아는 얼굴들이 좀 보인다. 사근사근한 성격이 아니라 눈이 정통으로 마주치면 목례하고 그도 아니면 그냥 못 본 척 한다.


 


오랜 시간 정형화된 집회형식은 꼭 기독교 예배형식을 닮았다. 사람들을 모으고 목적의식을 고양시키고 동류라는 집단의식 함양을 위한다는 목적이 비슷하니, 내용은 다르지만 형식은 비슷해지는 결과물을 낳은 것 같다. 진화론에서는 고래 뒷다리나 물고기 꼬리지느러미나 유사하다는 이론이 있는데...


 


노동자 집회에서 선두에 앉는 사람들은 알아보기 어렵지 않다. 정장을 입은 정치권 인사와, 깔끔한 등산복 차림에 등산화를 신고 노동조합 조끼도 깔끔한 명망 있는 노동운동가들과, 선량함과 고귀한 봉사정신을 오오라처럼 발산하며 연대정신을 발현하고자 하는 전문직군의 사람들이 있다.


 


언젠가 20년 넘게 노동운동에 매진했던 분이 허탈한 듯 혼잣말처럼 질문을 했다. "이렇게 노력하는데 왜 점점 좋아지지 않고 나빠지는 걸까요?" 평소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처연한 목소리였지만 그냥 퉁명스런 대답이 튀어나갔다.


 


"노동조합이란 게, 착하고 순수하고 열정 있는 사람들은 책임 있는 위치로 나가기 힘들고 , 능력 있는 사람들은 순수나 열정 같은 게 없는 바닥 같은데요. 딱 그 역량만큼만 노동환경이 존재하는 것 같은데요." 마음 한구석에 있던 냉소적인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런 생각을 갖게끔 만드는 정치꾼 타입의 노동운동가가 하필이면 그날 마이크를 잡았다. 열정적인 몸짓과 격양된 연설이 대한문 앞을 쩌렁쩌렁 울려도 내 마음이 울리지가 않는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 연설에 마음이 울겠지. 마음이 울린 사람들이 공명하면 큰 목소리가 나오고, 울림이 증폭되면 막혀있는 산도 언젠가는 허물어질 수 있다.


 


큰 거 한 방을 보고 인생에 매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산을 허물기 위해서는 삽자루를 드는 편이 내겐 호감도 더 가고 성향도 더 맞는 것 같다. 우공이산의 고사가 긴 시간 생명력을 이어온다는 건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같다. 조금씩 천천히 그리고 포기하지 않으면 지금은 산처럼 느껴지는 장애물들도 허물어진다.


 


집회에 참가했다가 중앙무대에 진출하기가 별따기일 것 같은 노동운동가에게 책을 한 권 받았다. 지난 주 KBS <취재파일 4321>에 방영되었던 '먼지 없는 방'이란 책이다. 안산으로 내려오는 지하철에서 읽어 내려갔다.


 



 


6시간 근무를 시행하고 있는 보리출판사에서 출판한 김성희 작가님이 그림을 그린 만화책이다. 만화책이라지만 쉽지 않고 가볍지 않다. 실존하는 다른 사람의 인생 한 부분을 담담하게 그려냈기 때문인 것 같다.


 


군산여상을 다니던 정애정 씨가 친구들과 함께 언니가 다니던 삼성전자에 취업해 일을 배우고 사람을 사귀고 삼성 사람이 되어가는 이야기가 담백하게 펼쳐진다. 반도체에 대한 설명과 작업과정을 소상하게 묘사해서 오히려 공부하는 기분이 들었다.


 


책 절반쯤 읽었을 무렵에는 함께 반 년쯤 일을 한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작업과정 묘사가 디테일 하다. 같은 반도체 공장 설비 엔지니어 황민웅 씨와 결혼한 정애정 씨는 행복한 잠시의 순간 이후 남편의 백혈병 발병 소식을 듣는다.


 


희망을 포기하지 못해서 더더욱 힘겨운 간병의 시간들, 함께 일한 동료들의 정성의 모금과 본인의 투병의지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삶의 기반이었던 삼성을 떠나서 그냥 그렇게 살아가던 중에 남편의 동료였던 사람의 전화를 받는다.


 


전화했었더란 말을 하지 말아 달라는 당부와 함께 조심스럽게 꺼낸 말은 죽은 남편의 병이 직업병일 수도 있다는 내용이 인터넷에 떠돈다는 이야기였다. 역시 삼성전자를 다니다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와 반도체 기업들의 직업병 문제를 밝혀 반도체 노동자들의 노동건강권 문제를 조명하려는 사회연대단체 반올림의 이야기를 알아낸 정애정 씨. 그녀가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에서 석연치 않았던 점에 대해 의문을 갖고, 그들을 만나면서 더 많은 암 발병 환자들을 찾아내는 이야기이다.


 


2012년 3월까지 반올림에 제보된 사망자수는 62명이다. 대한민국 산재사망자 하루 8명. 교통사고 10명, 자살자 45명, 전체 평균 하루 사망자 700명에 비하면 너무나 소수의 죽음이다. 그중에서 감히 삼성에 대항에 싸우는 사람들은 더더욱 소수이다.


 



그 소수의 사람. 정애정 씨는 왼쪽, 황상민 씨는 오른쪽.


 


어쩌면 대한민국은, 잘난 소수 엘리트들이 아니라고 짓이겨지지만 끝내 버티는 소수의 의인들 때문에 사회가 유지되고 조금씩이나마 발전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지하철에서 한 시간 가량 책을 읽고 뻣뻣해진 고개를 드니 지하철 내부를 도배하다시피한 성형외과 병원광고가 눈에 확 띈다.


 


뒤처지면 낙오하고 낙오하면 기회가 없는 사회에서 외모도 경쟁력이다 보니 양악수술광고가 지하철 내부를 도배한다. 공단역에 내려 문득 생각난 누군가에게 뜬금없는 안부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잘 지내?'라고 묻기 너무 어려운 것을.


 


 


김범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