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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10. 화요일

사회부장 산하


 


 


언제였던가 건설교통부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이라는 걸 내놓은 적이 있다. 이른바 드라이브하기 좋고 풍광이 괜찮은 길을 총망라했다는 곳인데 경부고속도로 가운데에도 그렇게 ‘아름다운 길’이 있다. 설명인즉슨 “터널과 교각을 설치하여 자연파괴를 최소화함으로서 친환경 도로건설의 표본이 되었으며 수려한 주변경관과 구조물의 아름다운 조화미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구간으로 경부고속도로 상·하행선을 오가는 여행자들이 즐겨찾는 명소”라는 것인데... 금강1교에서 4교까지의 구간,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충북 옥천 쪽에 위치한 길이다.


 


지금에야 ‘수려한 주변경관’과 ‘친환경 도로건설의 표본’으로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길’로 소개되지만 1970년 경부고속도로 완공 직전 이 코스는 흡사 지옥으로 향하는 길처럼 끔찍하고 괴로운 길이었다. ‘친환경 도로 건설’이란 산을 깎아내는 대신 터널이나 다리로 길을 이었다는 뜻이었다. 실컷 파들어가다가 흙이 무너지는 경우도 흔했고 강 위에 설치한 가교가 떠내려가기 일쑤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금강 휴게소 남쪽 25킬로미터 지점의 당재터널 공사는 최악 가운데 으뜸이었다. 이 지역의 지반은 토사로 된 퇴적층이었는데 발파 작업을 할 때마다 토사가 산사태처럼 쏟아졌다. 이 시지포스의 도로같은 작업 끝에 사람의 목숨도 여럿 날아갔다.


 



 


사람 목숨과 공사비를 한정없이 삼키는 괴물처럼 버티고 선 이 ‘터널’ 앞에서 노동자들은 엉뚱한 집착에 빠져들었다. 이 모든 것은 터널 입구에 버티고 선 거대한 느티나무의 신령이 노한 탓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편안히 잘 살고 있던 땅을 파헤치고 산을 뭉개니 신령님이 분개하지 않을 리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던 중 느티나무를 베어내야 하는 날이 왔는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어느 나무라고 그 허리에 톱을 들이대겠는가. 결국 나선 것은 군인이었다. 아니 군인이 왜? 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공사현장에는 군 공병대가 대거 투입돼 있었다. ‘싸우면서 건설하는 보람에 사는’ 것은 예비군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궁화 두 개의 서슬이 느티나무 신령과 맞섰다. 국군 중령은 휘하 병력에 명령을 내리고 노동자들을 다그쳐 느티나무 제거 작전을 개시한 것이다. 당연히 나무는 힘없이 쓰러졌고 신령도 별 수 없다 싶었는데 다음날 중령은 교통 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실려간다. 이에 많은 작업자들이 일손을 팽개치고 현장을 떠나기도 했다. 이 터널 구간에서만 낙반 사고가 13번이 난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개통식은 1970년 7월 7일로 아예 못이 박혀 있었다. 한때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소장을 체포하려 했던 왕년의 1군 사령관 이한림이 당시 건설부 장관이었는데, 그는 펄펄 뛰며 공사 현장을 채근했다.


 



“당신들 분명히 각오해. 일정 변경은 절대 있을 수가 없어. 정주영 회장도 가능하다고 해서 잡았는데 단 하루라도 개통식 날짜가 늦어지면 각하 모시고 하늘에서 헬기로 준공식을 할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는 줄 알지? 너희 회사 문 닫아야 돼!”


 


정주영 회장이 가능하다고 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저 육군 사단장 기세로 “며칠까지 완수할 수 있나?”라고 물어서 예 예 했던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 날짜는 군령(軍令)처럼 시퍼런 살기를 번득이며 현장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정주영 회장도 눈에 불을 켜고 아예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하지만 발파만 하면 와르르 태산이 무너지는 데엔 도리가 없었다.


 


이때 나온 아이디어가 조강 시멘트였다. 일반 시멘트로 콘크리트를 쳐 봐야 마르기도 전에 무너지니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고 생산량도 적은 조강 시멘트를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마르기만을 기다리는 1주일의 시간을 12시간으로 줄일 수 있었다. 정주영은 단양의 시멘트 공장의 생산 라인을 통째로 바꾸는 초강수를 써서 조강 시멘트를 생산했고 그걸 그야말로 ‘갖다바름’으로서 공사를 완공할 수 있었다. 그나마 이것은 무용담에 속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증언에 이르면 이게 무용담인지 허튼 소리인지가 조금 분간이 가지 않는 정도에 이른다. 


 



"공사 시작 10개월만에 수원까지 뚫어 12월21일 개통식이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朱源장관이 朴대통령에게 연말까지는 오산까지 개통하겠다고 보고했다. 오산 인터체인지 공사가 50% 밖에 진행이 안 돼있는 상태인데, 朱장관이 일종의 충성발언을 한 것이었다. 큰일났다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밤새워가며 포장작업을 하는데 땅이 얼어 도저히 작업이 안 됐다. 그래서 볏짚을 깐 뒤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질러도 보고, 대형 버너 수십 개를 트럭 꽁무니에 매단 뒤 끌고 다녀도 보고 했는데, 그렇게 해서 녹을 리가 있나. 할 수 없이 그냥 포장을 했다. 개통식이 열리기 3시간 전에야 가까스로 차선 도색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부고속도로는 3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완성된다. 그리고 1970년 7월 7일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 테이프를 끊는다. 그리고 최대의 난공사 지역이었던 금강휴게소 인근에는 경부고속도로에서 죽어간 77명의 노동자를 기리는 위령탑이 세워진다. 그런데 여기에 또 어떤 이는 이런 얘기를 한다. “실제 사망자는 77명이 훨씬 넘는다..... 숱하게 죽었다. 한 구간이 약 10㎞이다. 하루에 1000명 넘게 투입됐다. 지금은 제대로 된 장비가 있지만 그때는 거의 다 사람 손으로 했다. 사망자는 770명일 수도 있고 890명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왜 77명인가. 7월 7일(준공식 일자)에 맞춘 것이다.” 반정부 인사의 말이 아니라 고속도로 건설사무소에 파견된 육군 및 건설부 출신 공사 감독관들의 모임인 ‘77회’ 총무를 지냈던 이성규 씨의 말이다. (2010년 2월 주간경향 연간기획 중)


 


희생자 수로 집계된 77명은 공무 중 사망하거나 그 신분이 명확한 사람들에 한해서였던 것이다. “7월 7일에 맞춰 77명으로 추려졌다.”는 말에 반대하는 이들 역시 “사망자 수를 헤아리는 건 살수대첩에서 죽은 수나라 군사 수를 헤아리는 것처럼 의미가 없다.”는 표현을 한다. 그만큼 건설이라는 대사 앞에서, 조국 근대화라는 이름 앞에서 사람의 값이란 터무니없고 하잘 것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목숨을 걸고 일했기에 우리의 오늘이 있지 않느냐는 얘기를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 공사에 자신의 굵은 땀방울과 피같은 열정을 바친 이들의 자긍심은 존중받아 마땅하며, 심지어 그들에게 그런 동기를 부여하고 어떻게든 “하면 된다.”고 다그치던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쉽도 인정해 줄 부분이 있다고까지 여긴다. 도처에서 무너지고 망가졌지만 어쨌건 뭔가를 세워야 무너지든 망가지든 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백 번을 양보하고 천 번을 양보해도 그건 40년 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 즈음 있을 수 있었던 짐승같은 활력이었고,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독기였고, 졸속으로 이루어진 고속(高速)이었다는 뜻이다. 하물며 21세기에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나라를 뒤덮는다면 이야말로 해외토픽에나 등장할 시대착오의 대표적인 예가 아닐는지.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가 완성됐다. 위령탑에는 77명만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머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얼마나 죽었는지는 굳이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다. 그 시대는 그런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발전하면 장땡인 시대였다.


 


 


사회부장 산하